蘆溝橋 初探 : 예술적 가치와 전략적 중요성
오후, 겨울해가 설핏할 무렵 나는 이방인의 행색으로 북경 남서쪽에 위치한 노구교(蘆溝橋)에 당도했다. 책이나 문헌에서만 누누히 봐오던 노구교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노구교! 한 눈에 봐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세계에서 가장 좋기로 유일무이한 다리”라고 극찬할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과 허풍이 세긴 했지만 세계여행 기행문 ‘동방견문록’으로 아시아가 유럽에 소개되는 계기를 만든 여행전문가 다운 안목 있는 평가다.
노구교는 永定河라는 강에 서쪽의 房山, 王佐鎭에서 동쪽의 宛平城 입구로 통하는 길목에 가로 놓여 있는 다리다. 완평성은 북평으로 들어가는 서남쪽 읍성이다. 다리의 길이는 266.5m, 폭은 9.3m이다. 다리 위에서 보니 양측 난간마다 돌로 새긴 사자상의 조각들이 서 있다. 이 사자상은 모두 501좌나 된다. 석상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이가 수를 헤아려도 헤아려도 다 셀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서쪽 입구에서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서 양쪽 교각의 난간 위에 앉아 있는 사자상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걸었다. 500개가 넘는 사자상들이지만 모양이 다 제각각이다.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하나 같이 서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듯 그 자체가 독립된 예술품으로 보인다.
조각된 석상들의 사자 모양이 실물을 쏙 빼 닮았고 사자 모양도 다양하다. 어떤 사자는 한 마리만 단독으로 새겨져 있지만 새끼사자를 품고 있는 것도 있다. 또 세 마리가 같이 새겨진 사자상도 있다. 과거 이 다리 얘기를 들어본 유럽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교”라고 불렀지만, 이쯤 되면 “사자교”라고 불러도 흠 될 게 없을 것으로 보인다.
노구교의 동서 양쪽 입구에도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있다. 동쪽 입구에 위치한 蘆溝曉月도 그 중 하나다. 건륭(乾隆, 1711~1799) 황제가 이곳 새벽달의 아름다움을 예찬해 썼다는 '노구효월'은 꽤나 이름이 나서 “燕京八景”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옛날 시인묵객들이 남긴 시들 중에 한 수를 골라봤다.
過蘆溝橋/宋荦(1634~1713)
蘆溝橋畔雪霜多
今日冲寒又一過
不道鄕心南去急
只疑波浪似黃河
노구교를 건너가면서/송락
노구교 강변에 눈과 서리가 많이 내렸네
오늘 최고로 추운 추위가 또 한 차례 지나가니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가고픈 마음이 급해지는데
굽이치는 永定河의 물결이 황하처럼 격하구나.
직업적인 시인묵객은 아니지만 떠오르는 감회가 남달라서 나도 한 수 읊지 않을 수 없다.
踏蘆溝橋
期久竟至蘆溝橋
遇戰禍姿態如故
欄上幾百獅沈慮
迎客寒風似砲雷
노구교를 밟다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노구교에 와서 보니
戰禍에도 의연한 자태 변함이 없구나
난간의 수백 마리 사자들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객을 맞는 세찬 바람이 옛 전쟁의 포성으로 들리네
그런데 나는 갈 길이 먼 길손이라 마냥 시흥에 젖어 있을 순 없다. 노구교의 예술적, 미적 가치를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다리의 곡선, 사자조각상의 정교함 그리고 영정하 주변과 어우러진 풍광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내가 원래 이곳을 찾은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이 다리가 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됐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1937년 7월 7일 당시 일본군은 왜 이 다리를 군사적 목적으로 삼아 도발을 일으켰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찾아봐야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노구교에 얽힌 역사 이야기로 들어간다. 이어서 노구교의 전략적 가치를 살펴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구가 증가되고 교통수단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 날 노구교의 전략적인 가치가 옛날처럼 높은 게 아닌 지금의 중국 상황에서가 아니라 과거 일본의 침략시기에 해당되는 얘기다.
노구교는 금나라 大定 29년(1189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금나라 明昌 3년(1192년)에 완성된 다리였다. 3년 걸려 준공된 것이다. 이곳 일대를 지도로 확인해가면서 노구교가 왜 이 위치에 조영됐는지 성걸게라도 사회 경제사적 배경 그리고 중일전쟁시 이 다리가 지닌 군사적, 전략적 가치를 가늠해보기로 했다.
북경은 3,000년 전부터 古蓟城이 들어선 이래 도시가 형성된 바 있고, 특히 5개 왕조(요, 금, 원, 명, 청)의 京師, 즉 수도가 된 바 있는 유서 깊은 고도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1153년 금나라 完顔亮이 정식으로 북경을 수도(中都)로 정한 후 노구교의 중요성이 더해졌다.
그 이전 과거에는 부교 혹은 목교로서 800년 간이나 기능을 했었지만 수도와 서남쪽을 이동하는 사람과 물동량을 감당하기엔 이 교량으로선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금나라 통치자는 이곳에 반영구적인 다리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金史』, 「河渠志」)
즉 노구교가 생기기 전에는 석교가 아니라 부교나 나무다리로 북경과 하북성의 서남쪽 房山, 保定, 石家庄을 잇는 남서쪽 관문의 한 곳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구교를 지나지 않으면 보정과 석가장뿐만 아니라 그 아래 지방인 하남성의 주요 도시인 鄭州, 나아가 더 아래 호북성의 武漢 등으로도 갈 수 없다.
물론, 이 다리를 그치지 않고 북쪽의 昌平이나 남쪽의 大興 혹은 그 以東의 廊坊으로 우회해서 돌아가면 서남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빠른 시간에 이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노구교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노구교는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교통과 인적, 물적 이동의 주요 교통로인 셈이다.
노구교가 교통의 요지라는 것은 이미 元代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蒲道源(1260~1336)이 지은 雅集亭이라는 시에 나오는 “蘆溝石橋天下雄, 正當京師往來沖”이라는 대목이다. “노구 돌다리는 천하에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데, 경사를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다네”라는 뜻이다. 이 시 외에 다른 시에도 이러한 개념은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260여m의 노구교가 놓여 있는 영정하의 강폭을 보니 어림잡아 300m는 족히 넘어 보인다. 지금은 겨울이라 물이 다 빠져 있지만 여름이면 물이 넘쳐 수심이 제법 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소개한 한시에서 노구교의 물결이 제법 거세서 황하 같다고 한 비유는 물이 찰 때는 이 강의 수심이 얕지 않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한 1937년 7월 7일은 그야말로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 당시 비가 내렸는지 혹은 강의 수심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아 봐야 되겠지만 만약 화북을 장악한 일본군이 화중지역으로 군사력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상, 서남쪽 관문인 영정하를 건너야 하는 것이 과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영정하에는 노구교 외에 강의 북쪽으로 대략 1km 남짓한 지점에 북평과 武漢을 잇는 平漢鐵路의 기차가 다니는 철교가 있다. 따라서 당시 노구교는 북평과 서남쪽 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었다. 지금도 그 철도는 통행이 되고 있다. 이번에 직접 확인된 바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일지를 뒤져 봐야 되겠지만, 北平(지금의 북경의 당시 명칭임, 수도가 남경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북평은 북경이 아니었고, 북경으로 개명된 것은 1949년)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이쪽을 지나고자 하면 이 두 다리 외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이 기차를 수중에 넣어 둔 상황이 아니라면 결국 철교 보다는 노구교를 통해 군용차로 병력과 전투장비를 수송 이동시킬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구교의 폭이 9m가 넘는 만큼 차량이 왕복 2차선 도로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중국국민당군 제21군단의 전투력에다 일본군 수송차량의 제원, 수송병과 유류공급 등등의 수송력을 종합하면 대략 1시간에 병력 이동이 얼마가 될지는 쉽게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동시에 간접적으로 일본군의 전투력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기 전에 다음 행선지로 가야 한다. 단번에 배부를 수 있겠나만 이 정도로라도 일단 실마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한 셈이니 이곳을 찾아온 일차적 목적은 이뤘다. 이제 북으로 발길을 돌린다. 언제 또 다시 찾을지는 기약할 순 없지만 노구교여 이쯤해서 이별을 고한다.
2019. 12. 10. 15:43
北京 蘆溝橋에서 초고
12. 11. 09:41
北京 望京에서 가필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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