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가 약관에 스승에게 배운 것 : 의리의 정신과 과단성
젊은 시절, 누구나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다. 어떤 이에게는 그 가르침이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마는 바람이 되고 마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좌우명이나 육화된 삶의 자세가 된다. 백범 김구 선생은 후자에 해당된다. 그가 젊은 시절 배운 가르침은 하나하나 올올이 혼백에 맺혀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남다른 예지, 비상한 용기와 결단으로 나타났다. 오늘 그 중 한 부분을 소개한다.
백범은 20세가 되기 전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전통학문을 공부했었다. 그리고 임진년 과거(慶科)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당시 낙방 전후 그는 조정 관리들이 과거와 관련해 매관매직하는 타락상을 보고선 더 이상 서당공부는 하지 않기로 단념하고 좋은 사람(好人)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좋은 사람이란 한 마디로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는 시민이 아닌가?
아래 사진속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백범은 얼굴 보다 신체, 신체 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서양사회에서 자주 시민의식의 구비요건으로 거론되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sound body, sound mind)과 통한다. 이러한 관념은 요즘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지니는데, 하물며 100년도 더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백범이 대단히 생각을 깊이 했다는 소리다.
전통학문을 단념했다고 해서 백범이 신학문을 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길로 백범은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麻衣相書)로 관상학을 공부했다. 이 때 걸신들린 듯이 탐독한 것이 지가서(地家書),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무술, 병법서였다.
이 시기 그가 배운 것은 굳이 비교하자면 文보다는 武에 약간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가 이때 이러한 것들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중에 임시정부의 다른 문약한 선비형의 지도자들처럼 탁상공론만 하다가 세월을 보냈을 수도 있다. 대일 무력항쟁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비상한 용기와 뱃심이 필요했음은 물론, 무력적 지략과 담략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백범은 이승만처럼 제도권의 신식 교육을 받아 신학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동학전투에 가담했다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진사의 배려로 그 댁에서 살게 됐다. 당시 김구는 동학에 가담해서 탐관오리를 공격했고, 안 진사는 탐관오리는 아니었지만 진사라는 입장 상 그들을 진압해야 했던 관계였다. 백범 나이 불과 약관의 20세 때였다.
안 진사는 김구가 나이는 어렸지만 그릇이 비범한 점을 익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공격하지 않고 어려움에 빠지면 서로 돕겠다고 약조한 신사협정을 맺었고 그날부로 김구는 안 진사 댁에서 유숙까지 하게 됐다. 안중근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낳은 부친답게 인물이 인물을 알아 봤던 것이다. 안 진사의 배려로 김구는 부모님도 모시고 와서 같이 살았다.
안태훈 집에서의 유숙 시절, 백범은 우연한 기회에 안 진사의 소개로 한 선비를 만나 큰 가르침을 받았다. 인생에서 유교의 선비일지라도 아무에게서나, 또 신학문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는 정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의리(義理)의 정신과 과단성이었다. 스승은 고능선이었다. 김구는 스승에게 의리가 무엇인지를 배운 사실을 훗날 백범일지에다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 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口傳心授(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하시던 훈육(訓炙)의 덕일 것이다.”
김구는 고능선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서 올바름과 그릇됨을 분별하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유학의 의리정신을 제대로 배웠다.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은 일방적인 전수가 아니라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이 처한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놓고 밤새워 토론할 때, 고능선은 나라가 망하는데 신성하게 망하는 것(백성들의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백성과 신하가 모두 적에게 아부하다가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이 있다며, 기왕 망할 나라라도 망하지 않게 힘써 보는 것이 백성 된 자의 의무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김구의 사상과 실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구는 과단성을 배운 사실에 대해서도 백범일지에 적어 놓았다. “고 선생은 항상 무슨 일이나 밝게 보고 잘 판단해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모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일은 기이한 일이 아니라)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水丈夫兒,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는 구절을 힘 있게 설명했다.”
백범이 걸은 비범한 74년의 인생역정을 볼 때, 그 시절 고능선 스승으로부터 배운 이러한 가르침은 훗날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펼치거나 광복 후 반탁운동과 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을 주도하게 되는 정신으로 응결됐다. 약관에 배운 스승의 가르침대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가 왜 ‘한인애국단’을 창설(1931년)해 이봉창과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를 창출해냈으며, 또 1948년 4월 그가 왜 이승만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담판을 하고 열변을 토하게 됐는지 心底의 동기를 알게 해준다.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고, 실패하더라도 북한 측과 끝까지 통합정부 관련 대화를 시도해보고 나서 수립해야 명분이 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일제에게 망할 때 망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이라는 ‘義’를 가지고 끝까지 투쟁을 해야 했던 백성된 자의 의무를 다한 것이고, 김일성이 자신의 방북을 정치선전용으로 이용하더라도 민족의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민족의 ‘義’를 붙잡고 끝까지 해봐야 할 노력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오늘 오전,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내 전시내용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미쳤다. 백범기념관을 방문한 국립 대만대학 사회과학대학 교수 일행 9명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서였다. 우리 일행이 지난 9월말~10월 두 차례 대만을 방문했을 때 환영해준 그들에 대한 답례로 김구재단 이사장이 만든 자리였다. 그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소략하나마 백범의 삶과 사상에 대해 소개한 뜻깊은 시간이었다.
2018. 12. 11. 15:16
백범기념관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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