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일본연구 선구자 시볼트를 만나다!
나가사끼(長崎)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뭐니뭐니 해도 원폭투하기념관과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였다. 이곳은 모두 일본 근대사를 관통하는 지역이자 주제들이다. 원폭투하와 하시마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고, 하시마는 일제시기 조선인 강제 징용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수년 전 영화 군함도를 본 바 있어 더욱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가사끼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하시마를 가기 위해서 관광안내소에 표를 알아보러 갔다. 그런데 그 다음날 비가 내릴 예보가 있어 모든 배편이 출항할 수 없다고 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목적지인 원폭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됐다. 원폭기념관에 관한 감상과 소견은 별도의 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원폭기념관을 다 보고 밖으로 나오니 거리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 나가사끼는 “비의 도시”라는 소릴 들은 바 있다. 돌연 머릿속에 “나가사끼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 라는 일본 유행가 가사가 떠올랐다. 처연함을 느끼게 하는 겨울 보슬비속을 걸어 전차를 타고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에도(江戶)시대에 일본에 살면서 많은 삶의 족적을 남긴 시볼트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시볼트 기념관'(シーボルト記念館)이었다. 시볼트 기념관은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차로 몇 정거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데지마는 17세기 일본으로 진출한 네덜란드의 무역 상관이 있던 조그마한 섬이다. 시볼트는 데지마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지금부터 그 역사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시볼트는 누군가? 일본인들 중에도 그를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서양 근대사나 독도의 역사에 밝은 이에게도 시볼트라면 지난 세기 50년대 초엽 샌프란시스코 조약 전후 일본에 유리하게 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오늘날 독도의 일본영유 주장에 근거가 되도록 한 내용이 있음)이 체결되도록 힘을 쓴 윌리엄 시볼트가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시볼트는 그 미국인 시볼트가 아니다. 19세기 독일 국적의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다. 미국인 시볼트는 일본인 아내를 둔 미국의 친일파 외교관(주일 미국대사 지냄)이자 정치인이었지만 독일인 시볼트는 의사이자 식물학자, 민속학자, 박물학자였다. 후자는 세시풍속과 일본인들의 심성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서양사회에 소개한 인물이다. 가히 문화인류학자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는 에도시대 후기인 1828년 그가 국방상의 이유로 일본 국외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大日本沿海輿地全図”(伊能図) 등을 반출하려다 발각되어 국외 추방 처분을 받은 것으로 일본사의 한 켠에도 기록돼 있다. 일본 근대사에선 이를 “시볼트 사건”이라 부른다. 시볼트에게 지도를 선물한 막부의 書物奉行 겸 天文方筆頭 다까하시 카게야스(高橋景保, 1785~1829)를 비롯한 다수의 관계자, 蘭學者(에도 시대 네덜란드학을 연구한 일본의 학자)가 막부에 의해 처벌됨에 따라 이 사건은 만사의 옥에 앞서는 난학자 탄압 사건이 된 바 있다. 에도 막부에서 이 시기 난학자들을 탄압한 곡절이 단순한 게 아니어서 글이 더 이상 산만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선 설명을 생략한다.







유럽에서 온 젊은 의사가 병원과 학교를 차렸다고 하니 순식간에 입소문이 퍼졌다. 학교는 "나루따끼쥬꾸"(鳴滝塾)로 불렸다. 원래 호기심이 많기로는 여타 민족들보다 평균적으로 높았던 일본인들이었다. 소문을 듣고 호기심 많고 배우기 좋아하는 의사와 지식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시볼트는 그들에게 서양의학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연과학도 가르쳤다. 그 중엔 제자가 된 이들도 있었는데 대략 50명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이또우 겐보꾸(伊東玄朴, 1801~1871), 니노미야 케이사꾸(二宮敬作, 1804~1862, 시볼트의 딸을 양육), 타까노 쵸우에이(高野長英, 1804~1850) 등이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훗날 시볼트가 일본을 떠나고 난 뒤에 의사, 난학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난학의 꽃을 피우는 핵심 인물이 됐다. 일본 근대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또우 겐보꾸는 시볼트에게서 배운 서양의술로 에도 막부의 쇼군 부인 주치의가 됐고, 막부의 이국선 추방령을 비판하며 개국을 주장한 이유로 탄압을 받아 죽은 타까노는 멀리 토우호꾸(東北) 지방의 센다이(仙臺)에서 부친의 반대를 뿌리치고 시볼트의 문하로 유학을 왔던 인물이다. 니노미야는 시볼트의 딸을 양육하기도 했다.
시볼트가 의술 외에 독일어와 다른 네덜란드어와 여타 유럽의 과학지식을 일본인 제자들에게 가리치고 자신이 일본의 다양한 분야의 풍물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력과 그가 받은 교육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오늘날 독일 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의 뷜츠부르크(Würzburg)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그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를 비롯하여 많은 대학교수를 배출한 의학계의 명문이었다. 1796년 2월 17일 태어난 그도 집안의 전통을 이어 받듯이 뷜츠부르크 대학에 입학했고 외과, 산부인과, 내과 과정을 이수하고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인근 마을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런데 시볼트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 겉으론 의사이자 학자로 보였지만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그에게 일본사정을 자세하게 알아오라는 명을 내린 이는 네덜란드의 동인도총독이었다. 마침 시볼트 자신도 원래 처음 발을 디딘 이국 일본을 알고 싶고 연구해보고 싶었던 차였다. 적임자가 선발된 것이다. 그는 동인도회사의 일로 일본 각지를 출장을 다니면서 일본 상업에 국한되지 않고 풍물, 문물, 문화, 종교, 정치 등등 폭넓게 일본의 사정을 탐색하면서 연구하였다. 그가 수집하고 연구하고 섭렵한 분야와 양은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광대했다.
1825년 그는 데지마에 식물원을 만들고 일본을 떠날 때까지 1,400종 이상의 식물을 재배하였고, 그 이듬해 1826년까지 수집한 박물 표본 6상자를 유럽 최초의 민족학 박물관이 되는 라이든 박물관(암스테르담 남쪽 위치)의 에 보내기도 했다. 시볼트가 일본의 식물에 관심 영역을 넘어 연구하는 수준이 됐는데 그가 일본의 茶 종자를 네덜란의 동인도 회사의 본부가 있던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 보내 재배토록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식물이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된 것으로는 최초였다.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사진기와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에 시볼트는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해내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했을까? 이곳 기념관에서 의문이 풀렸다.
자신이 혼자 힘으로 하기에 벅차서 시볼트는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쳐 준다는 명분으로 학생마다 과제를 주어 일을 하게 했다. 예컨대 ‘일본의 막부에 대해’, ‘일본의 수산업에 대해’, ‘일본의 식물에 대해’ 등등의 과제들을 각기 다른 제자들에게 부여하여 일본어로 정리한 후 그 내용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제출하도록 시켰다. 요즘 말로 하면 시볼트는 의사로 가장한 산업 스파이였던 셈이다.






그런데 1829년 9월 15일, 시볼트에게 막부의 추방령(國禁)이 전해졌다. 그는 폭포와 이네의 미래를 고려하여(滝といねの将来を案じて) 재산을 남겨놓고 코우료우 사이(高良齋)와 니노미야 케이사꾸(二宮敬作, 1804~1862) 등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문도들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그해 12월 30일 이른 아침 그를 태운 네덜란드 여객선은 엄중한 경계 속을 벗어나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로 향했다. 슬프게도 쓰라린 이별의 날이었다. 그 후 옥사한 타카하시 카게야스를 비롯해 그간 시볼트에게 협력한 많은 조력자들까지도 막부에 잡혀 처형됐다. 일본의 근대화 도정에 빛의 산실이 되면서 많은 영재를 길러낸 나루따끼(鳴滝) 숙사가 이렇게 해서 해체되었던 것이다.
그뒤 시볼트는 자신이 그리워한 일본에 다시 발을 디뎠다. 1859년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를 거쳐 나가사끼에 도착한 그는 혼렌지(本蓮寺)의 이찌죠우잉(一乘院)에서 기거했다.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이듬해 그는 막부로부터 일본체류를 허락 받고 나루따끼(鳴滝)로 이사를 갔다. 1861년 그는 막부의 초청을 받고 에도에 가서 막부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고문직에서 해고되고나서 이번엔 요꼬하마(橫浜)로 갔다. 66세가 되던 1862년 시볼트는 나가사끼로 돌아왔다가 다시 바타비아를 경유해서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로 돌아갔다. 이곳 기념관에는 그가 독일로 돌아간 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 소개된 자료들로만 봐도 그는 일본을 유럽에 소개한 선각자였다. 시볼트가 독일이나 유럽을 일본에 소개한 것보다는 일본을 유럽에 소개한 것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것이 근대 일본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대 서구의 일본학(Japanology) 선구자라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다만 그의 일본 소개가 유럽에서 일본학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계통적으로 조곤조곤 따져볼 일이다. 또 그가 일본 체류 기간 중에 막부 등 최고 권력자들에게 소개한 유럽의 문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는지도 따져보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가 시볼트 기념관에서 시볼트 관련 사실들 그리고 에도시대 일본의 사정 외에 거둔 망외의 수확도 있다. 카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 1786~1860)가 그린 연날리기(Kite flying)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겨울이면 일제 때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던 풍경이다. 일본어로는 연날리기를 하타아게(凧揚げ)라고 한다. 이곳 기념관의 설명에 의하면, 나가사끼에선 봄에 행하는 전통적인 행사였다고 하는데 통상 아이들이 야산에서 연을 날리면서 연줄에 유리가루를 입혀서 다른 아이의 연줄을 끊는 놀이를 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나도 어릴 적 겨울에 바람이 부는 날에 연을 날리면서 연줄 끊어먹기 놀이를 하고 자랐다. 그래서 내겐 특별히 친숙함을 느낀다.

아뭏든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의 일본 체류 그리고 그와 일본과의 관계를 깊이 들어가지 않고 기념관에서 본 자료만으로 바깥에서 개괄적으로 스케치해봤다.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식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이제 그에 관한 것들은 여기서 내려놓고 지금부터는 다음 행선지에 집중할 것이다. 이번 여행의 최대 하이라이트가 될 큐우슈우 최남단 도시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가고시마(鹿児島)다. 가고시마여 내가 가고 있으니 어디 가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라!
2024. 12. 29. 11:27
우또(宇土)발 가고시마행 신깐센 열차 안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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