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탄생기념비에서 그의 일본제국 이념 정초활동을 다시 보다!
11월 14일, 3박 4일 간의 짧은 일본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아침. 쿠마모또(熊本)의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1844~1895)의 탄생 기념비가 있는 곳을 가보기로 하고 호텔을 일치감치 체크아웃 하고 나왔다. 기념비가 있다는 곳은 마침 내가 머문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이수였다.
목적지 부근에 거의 다 와서 이곳 동네 노인 몇 명에게 이노우에 코와시 기념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다들 이노우에 코와시라는 사람 자체를 모른다고 했다. 한 사람은 쓰레기를 버리는 걸로 봐선 이 동네 주민이고 나이도 7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노인인데 이노우에 코와시를 모른다니 조금 의아했다. 에도(江戶) 막부 말기 쿠마모또의 이 동네(熊本城下坪井町, 현 熊本市 中央区 坪井) 출신으로 지금 이곳의 히쯔유우깡(必由館) 고등학교(당시는 必由堂으로 불린 藩校時習館이었슴)를 나와서 일본정부의 장관급 각료를 지낸 인물을 모른다니 의외였다. 아마도 이노우에 코와시가 이곳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비교적 젊은 나이인 52세로 이곳이 아닌 타지인 카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군(三浦郡田越村, 현쟁의 즈시 逗子시)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이노우에 코와시는 옛날 이곳 히고(肥後)번 번사의 아들로 태어나 쿠마모또번(熊本藩, 당시는 肥後国)의 大臣官僚 藩士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제2차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내각에서 제7대 문부대신(文部大臣)을 지냈고, 쿠로다 키요따까(黑田淸隆, 1840~1900) 내각과 제1차 야마까따 아리또모(山縣有朋, 1838~1922) 내각에선 제2대 法制局 장관을 지낸 중량급 인물이었다.
잰 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어서 도착해보니 쿠마모또 시립 히쯔유우깡 고등학교 교정 안 한 구석에 보고자 한 기념비가 서 있었다. 현장에서 보니 그가 태어나 살았던 집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당시의 우물만 용도폐기된 채 남아 있고 그 옆에 세운지 오래돼 보이는 석조 기념비가 몸에 이끼를 보듬은 채 세워져 있었을 뿐이다.
아뭏든 이노우에 코와시는 일본 근대사에서 일본인들로선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제122대 천황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国憲法)의 기초자로 성안 작업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천황가의 황실전범(皇室典範), 교육칙어와 군인칙유 제정의 기초작업에도 참여한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그는 메이지 천황이 수여한 자작(正三位勲一等 子爵)에 봉해졌던 것도 이 평가를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어떤 역사인물이든 누가 무엇을 했다고 결과만 밝히고 말면 그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무엇에 대한 소개와 그것의 영향 및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그래서 이노우에 코와시가 남긴 것들의 내용과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가 역사에 남긴 흔적은 크게 대일본제국헌법, 천황가의 황실전범, 교육칙어와 군인칙유의 기초작업에 참여한 사실이다. 시간적 선후 관계로는 군인칙유(1882년 1월 4일),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2월 11일), 황실전범(1889년 2월 11일), 교육칙어(1890년 10월 30일) 순으로 만들어졌다. 소개는 제정 순서대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군인칙유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로이겠다. 하지만 대일본제국헌법과 천황가의 황실전범이 공히 근대 일본제국과 천황의 일체화라는 이념에 부합되는 가장 높은 상위의 것이었고, 나머지 교육칙어와 군인칙유는 내용이나 발포 취지 면에서 그것에 부차되는 종개념이어서 여기선 대일본제국헌법, 황실전범, 교육칙어, 군인칙유 순으로 거론하겠다
헌법이 뭔가? 그 기능이 뭔가? 한 마디로 일국의 최상위 법이다. 국체와 정체를 나타내고 규정하는 국가의 보이지 않는 뼈대가 아닌가! 이노우에 코와시가 대일본제국헌법 제정의 기초작업에 관여했다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근대 일본의 국체와 정체의 토대를 구축한 막중한 일에 일조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19세기 말 일본 천황가의 황실전범과 교육칙어에다 군인칙유까지 작성하거나 기초한 인물이라면 직접적으로는 일본제국의 사상적 초석을 놓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일제의 대만, 조선, 중국 침략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친 자라고 볼 수 있다.
1889년 2월 11일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은 통일 독일 제국을 이룩한 비스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 1815~1898) 시대의 프로이센 헌법이 토대가 됐다.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 중 최초의 헌법이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으로 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로 민주공화제 국가를 세운 중화민국의 헌법 보다 무려 20년 이상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노우에 코와시는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관여하게 됐을까? 그는 법학 전공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또 판검사, 변호사로 법조계에 종사한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요즘의 한국으로 치면 법제처 같은 정부기관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그 시기 일본엔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국제법 같은 건 존재했지만 국내법은 도입된지 오래지 않은 초기 단계여서 여러 가지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1854년 미국과의 미일화친조약의 체결로 개항(일본사에선 “개국”이라고도 함)한 이래 서양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맺은 일본이었기에 만국공법을 서양 열강에 정의롭게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인식이 있었을 뿐이다. 막부 말기 이웃 사가(佐賀)번의 영명하고 걸출한 지사 에또우 신뻬이(江藤新平, 1834~1874)가 서구의 변호사 변론 제도를 받아들여 시행한지 그다지 얼마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지천명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노우에 코와시가 헌법 제정 작업의 실무자로 발탁된 까닭은 우선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서구법의 도입과 시행이 절실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다 그런 차에 이노우에의 해외 파견 경험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해외 경험은 예컨대 1871년 사법성에 출사하던 중 5년간 유럽에 체류한 것이라든가 그리고 잠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메이지유신 3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오오꾸보 토시미찌(大久保利通, 1830~1878)를 따라 청나라에 파견돼 임무를 수행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이노우에 코와시의 이력이 결합돼 그는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발탁된다. 당시 이또우는 코와시보다 겨우 3세가 많았을 뿐이었지만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신정부에선 지분과 발언권이 상당한 유력자였다. 코와시가 나이가 비슷한 소장파의 이또우 히로부미도 법에 대해선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또우 히로부미는 일본의 독일학회 회원으로서 메이지 정부에 고용된 독일인 고문 로우스러(Karl Friedrich Hermann Roesler, 1834~1894) 등의 법률적 조언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 시기 독일식 헌법을 제정할 것을 강하게 밀어붙인 게 이또우 히로부미였다. 그는 구미에 파견된 이와꾸라 토모미(岩倉具視, 1825~18833)의 구미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1873년 우리에게 철혈 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를 만난 적이 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이또우에게 “국제 관계의 기본은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말해준 바 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은 같은 당대 진화론의 창시자 다아윈(Charles R. Darwin/1809-1892)의 학설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한 영국의 생물학자 스펜스(Herbert Spencer, 1820-1903),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 등 생물 진화론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 열강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진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약육강식 사상은 같은 시기 중국에도 이입돼 들어와 식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다. 이 사상이 이또우 히로부미에게 헌법제정이나 그 뒤 아시아 침략의 획책과정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학술적으로 규명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1882년 이또우는 또 오스트리아 법학자로서 군주주의를 이상으로 생각한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1815~1890)에게서도 법을 배웠다.
유럽에서 국제정치와 헌법 개념을 익히고 그 필요성을 인식한 이또우 히로부미가 중심이 돼 1887년부터 대일본제국헌법의 초안 작성을 개시했다. 물론 메이지 천황의 재가와 지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노우에 코와시는 이또우의 명을 받았다. 추밀원의 기관장으로서 헌법 제정회의의 사회를 맡게 된 그는 신설된 참사원 의관이 돼 젊은 관료 이또우 미요지(伊東巳代治, 1857~1934)와 카네꼬 켄따로우(金子堅太郎, 1853~1942) 등과 함께 메이지 천황이 내린 국회개설의 칙유를 기초하기도 하고 프러시아 헌법을 참고한 대일본제국헌법의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기초, 감고(勘考), 수정, 퇴고를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총 2년이 걸려 메이지 22년, 즉 1889년 2월 초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됐다. 공포 전 추밀원의 회의에 천황이 임석한 자리에서 심의를 거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반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은 '흠정헌법'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안고 있었다. 청말 중국의 개명 지식인으로 중국도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입헌군주제를 본받아 입헌군주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부러워한 헌법이었다.
흠정헌법은 국민이 민주공화제 헌법을 제정한 미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독일제국의 헌법처럼 군주가 국민에게 부여한 입헌군주제가 중심이 된 법률체제였다. 따라서 대일본제국헌법은 독일제국헌법과 내용에서 유사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국가주권은 국민이 아닌 천황에게 있으며, 천황은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과 함께 의회의 협조를 받으면서 입법권도 가진다고 규정돼 있었다. 국민에게는 납세, 징병 등의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중의원과 참의원 등 양원제 의회를 개설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는 프로이센 국왕이 황제로서 재상의 임명권이나 군의 최고 지휘권을 가짐과 동시에 양원제의 의회를 개설하고 권리와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한 것과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였다.
그러나 대일본제국헌법은 일제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종식됐다. 제국주의 시대의 구헌법을 대신할 새로운 헌법이 1947년 5월에 공포됐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일본국헌법(일명 “평화헌법”)이었다. 법 제정의 주체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신 헌법은 구 제국헌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천황의 존속은 법으로 보장했지만 구 제국헌법의 흠정적 성격은 완전히 탈색되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폭 반영됐다.
참고로 신 일본국헌법은 제정되고나서 지금까지 약 80년이 지나면서 단 한 번도 개정된 바 없다. 전후 일본과 마찬가지로 연합국의 점령기에 제정된 '독일연방공화국기본법(Grundgesetz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 지금까지 60회 이상의 개정이 이루어진 것에 반해서 완전 개정 제로다. 헌법 제9조와 자위대를 둘러싼 논란이 국민적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일본국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이전 대한민국헌법 제정 과정에서 참고가 된 바 있는데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대한민국 헌법이 독일 헌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도 초기 한국의 법학자들이 일본의 신헌법을 참조한 게 많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이노우에 코와시 얘기로 되돌아와서 논의의 흐름을 이어가자. 그는 이번에는 정부의 중추기관인 추밀원의 고문관이 돼 천황가의 황실전범, 교육칙어를 기초했다. 이 두 가지 일에도 코와시가 관여하게 된 것은 그가 이미 군인칙유를 작성한 데에 이어 입헌군주제의 대일본제국헌법을 기초한 경험이 인정된 것이리라.
황실전범은 천황과 황족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엔 황위의 순위, 황족의 범위, 혼인, 敬稱, 황실 회의 등에 관해 세밀하게 규정돼 있다. 이노우에 코와시가 황실전범 제정에 어느 정도 관여했으며,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회고록 같은 자료를 보지 않는 한 자세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어쨌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황실전범도 헌법과 함께 최고의 법규로 같이 제정됐다. 이때 이른바 '황실 자율의 원칙'이 확립돼 천황은 일반 법률에 제한을 받지 않는 초법적인 존재가 됐다. “아라히또카미(現人神)”, 즉 사람의 몸으로 신이 된 것이다.
구 황실전범도 패전을 계기로 내용상 변화가 있었다. 올해 2024년의 현행 황실전범은 일본국헌법에 따라 일반법률로서 1947년에 공포된 것이다. 1949년 6월 천황과 황족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총리부 설치법에 의해 총리부의 外局으로서 궁내청이 발족됐고, 궁내청 장관이 수장이었다.
이노우에 코와시가 관여한 교육칙어에 대해서도 논급할 게 적지 않다. 우선, 교육칙어란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고 그 이듬해 1890년 10월 메이지 천황이 근대 일본교육의 기본 방침과 국민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전에 이노우에 코와시가 같은 동향인이었던 이곳 구마모또번 번사 출신의 유학자인 모또다 나가자네(元田永孚, 1818~1891)와 공동으로 작성한 것을 천황이 서명하고 말씀을 한 형식을 밟은 것이다.
교육칙어의 정확한 명칭은 “교육에 관한 칙어”(教育に関する勅語)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원래 칙어란 고대 중국에서 아시아 한자 문화권으로 전파된 역사 용어인데 왕이든, 황제이든 군주가 직접 이르는 말씀이나 그것을 적은 포고문을 가리킨다. 즉 천황이 직접 내린 교육의 방침, 원칙이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천황의 말이 곧 교육의 원칙과 법이 된 것이다. 교육칙어의 골자는 군주에게 충절을 맹세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유교적 도덕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제정 반포의 목적은 축제일이나 명절, 학교의 식전 등에서 구성원들에게 일제히 낭독하게 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고 유교의 충군 개념으로 사상적 통일을 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육칙어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헌법 및 법률에 바탕을 둔 법치주의와 유교의 윤리적 덕목이 결합된 것으로 해석된다. 전자의 법치주의는 서구의 민주주의 이념과 결합시킨 것이고, 후자의 유교의 윤리적 덕목에 속하는 것으로는 여러 가지 항목이 있었다. “군민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형제는 사이좋게 지내며, 부부는 서로 협조하고, 친구는 서로 믿고, 남에게는 상냥하고, 자신에게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누구에게나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학문을 닦고, 업무를 익히며, 지능을 기르고, 덕성과 능력을 갈고 닦으며, 나아가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며 세상 일에 힘쓰라” 등이다.
위 내용을 보면 교육칙어는 핵심사상이 유교의 삼강오륜(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에 바탕을 둔 일본적 변용임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다. 이런 평단에 불만이 있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중국 前漢시대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176?~104)가 공맹의 학설에 기초해 제창한 三綱五常說의 일본적 변용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역시 불만일 것이다.
암튼, 본질적으로는 천황의 신민으로서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것이다. 즉 군주와 신하 사이, 아버지와 자식 사이,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강령을 의미하고, 모두 인간관계와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서 지켜야 할 역할과 윤리적 의무 등을 강조한 내용이다. 바꿔 말하면,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절대 군주로 자리매김한 상태에서 모든 일본인은 천황 아래에서 일본 전래의 和의 정신의 실천, 즉 사람 마다 제각기 지켜야 할 기본적 사회 윤리로 나라의 화평을 도모한다는 의도가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한 구절 한 구절이 금과옥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일본인들은 타민족에 대한 침략을 서슴치 않았다. 상층부의 권력자들이야 권력의 속성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인들도 거기에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면서 동원된 것을 보면 정말 이율배반적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장을 통해서 자세하게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교육칙어는 일제가 패전함에 따라 수명을 다하게 됐다. 맥아더사령부(GHQ)의 미 군정하에서 군국주의적 요소가 청산되던 추세에 즈음해 1948년 6월 19일 중의원의 '교육칙어 등 배제에 관한 결의' 및 참의원의 '교육칙어 등의 실효 확인에 관한 결의'가 각각 가결됨에 따라 폐지된 것이다.
1882년 1월에 제정된 군인칙유는 이노우에 코와시의 단독 작품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집단 사유의 고안(考案)물이었다. 군인칙유의 정확한 명칭은 '육해군 군인에게 하사하는 칙유, 군인훈계의 칙유'(陸海軍軍人に賜はりたる勅諭, 軍人訓誡ノ勅諭)이었다. 칙유도 칙어와 마찬가지로 군주가 이르는 말이나 그걸 적은 문서를 말한다. 훈계의 하사는 메이지 천황이 한 것이다. 동기와 취지는 세이난(西南)전쟁(1877년 2월 15일~9월 24일), 자유민권운동(1874년부터 시작된 정치 및 사회 운동인데 메이지 정부에 의회 개설, 지세 감면, 서구 열강과 체결된 불평등 조약의 개정,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했고 1890년 제국의회가 개설된 뒤에도 계속됨) 등의 혼란한 사회정세 탓에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신 정부군의 군부 내에 확산되던 동요를 억제하고 군의 정신적 지주를 확립하려는 의도였다. 충절, 예의, 무용, 신의, 검소를 군인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삼은 5개조로 구성된 총 2700자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주요 내용은 후술하겠다.
그런데 이 군인칙유의 최초 기초자는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였고, 맨 처음 저본이 된 것은 1878년 10월 육군대신 야마가따 아리또모(山縣有朋, 1838~1922)가 전 육군 장병들에게 인쇄 배포한 '軍人訓誡'였다고 한다. 참고로 니시 아마네는 영어의 philosophy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최초로 “철학”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철학자였다. 니시 아마네가 야마가따의 지시를 받아 야마가따의 군인훈계 저본을 가지고 다시금 기초했고, 이걸 또 다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후꾸찌 겐이찌로우(福地源一郎, 1841~1906), 이노우에 코와시와 야마가따가 퇴고하고 수정했다고 한다.
이 참에 군인칙유의 주요 내용을 일별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어서 몇 가지 소개한다. 군인칙유는 크게 前文과 後文으로 구성돼 있다. 전문은 천황과 군인의 종속관계 및 군인에 대한 천황 명령의 절대성을 언명해 놓았다. 예컨대 전자에 관해선 “짐은 너희들 군인의 대원수가 될 것이다”(朕は汝ら軍人の大元帥なるぞ)라고 천황의 통수권 유지를 분명히 한 점이다. 후자와 관련해선 “하급자가 상관의 명령을 받는 것”은 곧 천황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라고 돼 있다.
이어서 군인들에게 충절, 예의, 무용, 신의, 검소의 5개조 덕목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성심으로 준수 실행할 것을 명령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천황 자신의 기쁨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 모두가 이것을 축하할 것이라고 했다. 5개조 중 충절, 예의, 무용의 덕목은 에도(江戶)시대 무사도의 덕목이었던 주자학의 오륜과 오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취지로는 군인이 지켜야 할 덕목과 군인의 정치 불관여를 규정한 것이 주목되는데,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타께바시사건(竹橋事件, 1878년 8월 23일 토우쿄우 皇居의 타께바시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제국 육군의 근위병 부대가 일으킨 무장 반란사건),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을 감안해 '충절' 항에서 “정론에 흔들리지 말고 정치에 구애받지 말고”라며 군인의 정치 불관여를 명령하고, 군인(현역병과 직업군인)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군인의 정치 불관여를 명령한 것으로 돼 있지만, 현실에선 알다시피 1930년대 군국주의 파시즘이 성하던 시대에 이르면 정당 정치의 종국을 가져다준 여러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 테러, 5·15 사건(1932년 5월 15일 정당과 재벌을 무너뜨리고 군부 중심의 정부를 만들려고 한 일단의 해군 장교들이 수상 등 정치인들을 살해한 군부의 쿠데타), 2·26(1936년 2월 26일 육군 청년장교들이 국가개조와 천황의 직접 통치를 주장하면서 무장 반란을 일으킨 군부의 하극상 사건) 등이 발발한 바도 있어 군인칙유와 군의 정치개입은 따로 논 별개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성의 천황이 내린 '칙유'라는 점에서 제국 육군에선 장병들이 전문 암송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 반면 해군에서는 칙유의 정신만 기억하면 된다는 기류가 있었다. 또한 해군과 육군의 일부는 군인칙유를 정부나 의회에 대한 자신의 독립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규정하려는 의지도 존재했던 점도 기억하면 좋겠다.
군인칙어 역시 1948년 6월 19일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교육칙어 등 배제에 관한 결의' 및 참의원의 '교육칙어 등의 실효 확인에 관한 결의'가 각각 가결될 때 같이 폐지됐다. 이때만 해도 미 군정의 압력을 받아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가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긴 내용을 일단락 짓기 위해 잠정적인 것이지만 결론을 내려 보자. 대일본제국헌법, 천황가의 황실전범, 교육칙어와 군인칙유는 모두 19세기 말 일본이 전면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로 이행해간 일제의 정신적, 정치사상적, 제도적 근간이 된 법률 혹은 제도들이다. 네 항목은 공히 서로 내적 연계성과 일체성을 지닌 근대 일본의 역사, 사상과 정치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사상적 개념들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이노우에 코와시는 이 네 가지 주요 사상적 이념의 정초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었다. 내가 이렇게 학술논문이 아니어서 소략하긴 하지만 길게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인 것이다.
끝으로 한 마디! 이곳 현장에서 이노우에 코와시의 기념비석에 새겨진 글의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井上毅先生誕生地碑라는 글자 외에 비석 아랫 부분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의 풍화나 마모가 심해 독해가 어려운 상태여서 아쉽지만 단념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구일본헌법과 천황가의 황실전범 및 교육칙어와 군인칙유의 제정에 이노우에 코와시가 수행한 그의 역할이나 공헌과 영향에 관해서,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법적, 사상적 함의에 관한 전문적인 논의는 다른 계기가 있어야 될 것 같다. 오늘은 귀국날이어서 일단 철수하고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2024. 11. 14. 14:17
일본 쿠마모또 공항에서 초고
2025. 1. 4. 14:25
북한산 淸勝齋에서 부분 보충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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