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아소산(阿蘇山), 큐우슈우인의 심령적 聖地, 그 고아한 자태를 품다!

雲靜, 仰天 2024. 11. 13. 14:12

아소산(阿蘇山), 큐우슈우인의 심령적 聖地, 그 고아한 자태를 품다!


아소산(阿蘇山)을 오늘 드디어 올랐다. 일본 큐우슈우(九州) 지역에선 최고의 명산이다. 아니 큐우슈우인들에겐 단순한 명산이 아니라 성산이다. 중국의 불교 4대 명산이 그렇듯이 자연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고 불교 및 샤머니즘과 관련된 민간신앙의 넉넉한 품이기도 하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구나(登泰山而小天下)”(孟子 盡心上)라고 읊었듯이 나도 아소산에 올라 “아소산에 오르니 일본이 작구나(登阿蘇山而小日本)”이라고 외쳐보고 싶었다. 해서, 적어도 일본 큐우슈우에선 오래 전부터 꼭 한 번은 올라와보고 싶어 했던 버킷리스트에 들어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아소산의 정상 타까다께(高岳) 등정에는 실패했다. 왜, 무엇 때문에? 글쎄 결론부터 내지르면 “내탓이 아니로소이다!” 그래도 아소산의 자태는 품어 본 등정이었다.

쿠마모또(熊本) 시내 신수이젠지(新水前寺)역에서 JR철도로 아소(阿蘇)역에까지 와서 하차한 후 다시 바로 역옆에 붙어있는 버스 정류소에서 아소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왔다. 와보니 누구든 혼자서도 쉽게 찾아올 수 있겠다 싶다. 대략 1시간 반이면 너끈히 닿을 수 있는 거리라서 멀지도 않다. 교통비도 JR열차와 버스비를 합쳐 왕복 4만 원이 채 들지 않았으니 비싼 일본의 교통비 치고는 생각 보다 비싸지 않은 편이다.

갈아 탄 버스가 평지에서 아소산 산정으로 들어서니 온통 억새풀과 단풍들이 가을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전체적으로는 푸른 녹색 지대다. 들판 불태우기(野燒き)> 우마의 방목> 제초(採草)의 사이클로 지속되는 농업에 힘입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식물들에게 흡수되면서 공기의 신선도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실 수 있어 무엇보다 폐와 눈이 살만하다 할 게 틀림없다. 또 이 산역 전체에 서식하는 동식물도 상당할 것이다. 도합 600종 쯤 된다고 한다. 그 중엔 희귀종도 적지 않을 것이다. 유네스코에서 무턱대고 아소산을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Unesco global geopark)”으로 정했겠는가? 오는 도중 곳곳엔 드문드문 마치 고대 왕릉이나 고분 같은 형태의 융기된 산봉우리들도 보인다.

크기가 대략 경주의 왕릉들보다 크고 중국 당나라 시대 고도 시안(西安)에 있는 백거이(白居易)의 무덤만해 보였다.

활화산답게 멀리 보이는 아소산의 정상 타까다께의 분화구에서 뭉게구름처럼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안내문에 따르면, 중악은 대략 2만 몇 천 년 전부터 계속 분화구에서 불을 내뿜고 있다고 하니 고악도 이와 연대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생명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날숨을 쉬는 것일까? 얼마를 더 살려고 저럴까? 들숨, 날숨으로 우주와 기를 주고받는다는 느낌도 든다. 말없는 존재라고 해서 영적으로 생각마저 할 수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본인들이 이 산을 영적 존재, 신적 존재로 인식한다고 하니 無所不知의 신 답게 지금까지 일본민족이 걸어온 역사는 익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무엇에 분노하고 있을까?

이윽고 내가 탄 버스는 면적이 만만찮은 아소산의 대략 9부 능선에 위치해 있는 평지인 나까다께(中岳)에 위치한 휴게소와 헬기장을 지나 아소산의 최종 종착지에 도착했다.

고악 바로 밑의 버스 종점

해발 1592m라는 아소산의 최정상인 타까다께의 분화구로 올라 가는 길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넓은 평지다. 육안으로 보니 아마도 이 평지는 정상 보다 대략 70~80m 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육상선수를 하면서 감이 잡힌 나의 거리감각이 완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도를 보니 얼추 나의 눈대중이 맞다. 내가 지금 와 있는 곳 바로 아래, 방금 버스로 지나오면서 보였던 평원이 아소산의 중간 위치인 나까다께(中岳)인데 표고가 1506m라고 하니 이곳은 중악 보다 약 20~30m 정도 높은 곳이니까.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아소산은 크게 6개의 봉우리(평지처럼 된 곳도 있음)로 돼 있다.
중악에는 넓은 평원에 호수도 있다. 이곳엔 많은 야생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마지막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이제 오르기만 하면 된다. 30대 후반 중국 섬서성 오지에서 3800m의 고산준령의 설산도 산을 보고 올라가볼 생각이 들자마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운동화 신은 채 바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2000m도 되지 않는 이까짓 산쯤이야 싶다. 원래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가슴이 조금씩 뛰는 법이다. 정상에 서면 웅장한 아소산의 위용 뿐만 아니라 아소산 부근의 여러 군소 도시들, 예컨대 북쪽으로 히타(日田)시, 서쪽으로 쿠마모또시, 동쪽으로 아소(阿蘇)시, 벳부(別部)시와 오오이따(大分)현, 남쪽으로 멀리 미야자끼(宮崎)시까지 보일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푸른 창공과 암수로 어울어진 희푸른 태평양 바다까지 펼쳐질 것이다. 장엄하지 않겠는가?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다. 이제 소걸음으로 올라가도 20분 후면 이 모든 장관을 품으리라.

그런데 왠걸? 정상의 분화구에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화산재가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연보호 등의 이유로 입산을 금지한단다. 안내판에는 언제 개방될 지 알 수 없다고 고지해 놓았다. 정상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오를 수 없다니!? 그래서 지금은 분화구로 올라가는 정상 바로 밑의 넓은 분지와 같은 평원까지가 사람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은 곳이 돼버린 셈이다. 윤리적 교화를 통해 도덕과 사상으로 천하를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한 공자는 태산에 오르게 했지만 나는 평생을 영양가 없이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멀대 같은 무지랭이라고 젠장 아소산도 오르지 못하게 하는가? 아쉽고도 아쉽도다! 내 언제 또 다시 오르겠는가?

화산 가스 때문에 연휴한다니 따질 일도 아니다. 이따금씩 인간들의 출입을 막아 산을 쉬게 하는 게 필요하다.
아소산 정상 타까다께(高岳)의 분화구, 등정 금지가 돼 있어 사진으로 보는 걸로 만족한다. 분화구 좌측에 보이는 건물들이 있는 곳이 바로 버스 종점이다.


일단 발심한 마음을 제자리에 접어넣어 놓고 먹이감을 놓친 늙은 숫사자처럼 이 일대라도 어슬렁 거릴 수밖에 없다. 하산 버스 시간이 될 때까지는! 이곳에서 주위를 돌아보니 멀리 반대편에 아소산보다야 낮지만 제법 위용이 있어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몇 개 보이고 그 사이에 넓은 분지 같은 평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속에 들어가지 않고선 그 외에는 볼만한 경치라고는 눈에 띄는 게 없다. 여긴 말 그대로 산속의 오밀조밀한 조화를 보지 않고는 겉으론 그저 평온한 기운을 주는 산일 뿐이다. 문화와 역사의 뜻을 음미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일단 가시적으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든지 비가시적인 영성의 눈과 귀로 보고 듣고자 하면 보이고 들린다. 정신적이고, 종교적이고, 사상적인 역사 내지 설화들은 두드리는 자가 아니면 말이 없는 법이다. 덩그러니 앉아 있는 불교 사찰과 깨어진 불상 조각들이 그 길로 인도해줄 것이다.

아소산은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암튼 고대부터 자연신으로서 숭배돼 왔다고 한다. 분화구를 개척신, 즉 “타께이와따쯔노미꼬또(健磐龍命)”로 제사를 지내고 국가의 기도 대상이 돼 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분화구를 11면 관음보살(타께이와따쯔노미꼬또의 화신)로 믿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곳이 신령스런 곳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분화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빛을 받아 비치는 오색의 신비로운 현상이 신의 조화라고 믿은 것이 점차 신격화 되면서 태동됐다고 한다. 고대 모든 종교의 발생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실 초월성의 작용이 여기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일설에는 약 8세기부터 분화구 주변이 영험한 장소(靈場)가 돼 승려나 山伏의 거점이 된 절과 암자가 각기 37개와 51개소가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화산신앙과 불교(“산악불교”)가 습합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인들에겐 산신과 부처가 공존하는 성스런 영지로 받들어지고 있다.

고악의 정상 분화구에서 용출한 물이 형성시킨 작은 하천.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런 하천의 계곡이나 냇가에선 빛을 받아 영롱한 무지개 같은 현상들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그런 현상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이성력과 인지력도 원시수준에 머문 고대인들에겐 신의 조화나 현현으로 믿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 아소산의 화산활동이 멎어주길 빌기 위해 끊임 없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다. 연인 사이, 부부 사이의 인연, 아이들의 건강과 행운이나 소원을 빌러오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사찰 주위에는 연인들 간 인연의 간구나 3세, 5세, 7세('시찌고상' 七五三)
아이들의 축복 및 행운을 위한 의식을 올릴 수 있는 단도 놓여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티베트의 영매처럼 고매한 존재가 아니어서 그런지 타께이와따쯔노미꼬또와는 전혀 영적으로 교감이 되지 않는다. 아소산과 그 종교적 행태와 문화 연구에 목적을 두지도 않았다. 그저 이 산을 오름으로써 큐우슈우의 상징이자 일본 고대사와 근대사에 얽힌 숨은 사연들, 밝혀지지 않고 있는 얘기들을 듣고 싶어 올랐을 뿐이다. 아마도 한민족의 단군신화처럼 일본민족의 태동과 관련된 天孫降臨시에 출현된 3종의 神器(동판 거울, 칼, 곡옥)와 아마떼라스오오까미(天照大神)의 신화가 비롯된 곳이 아닌가 하고 상상됐을 뿐이다. 고대에서부터 일본인의 신앙형태가 왜 이런 식으로 나타났는지 제한적으로 얻은 힌트 따위나 영감이 없지 않아서 실망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아 있는 활화산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하지 못한 게 발길을 돌리는 내내 아쉽다. 그저 한국엔 없는 활화산인 아소산에 올라와 봤다는 것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내려가면 후일 재등정이 가능할까? 장담할 수 없다. 수천리 머나먼 이곳까지 온김에 문득 떠오르는 하이꾸나 한 수 짓고 하산하려고 한다.

阿蘇山の夢

秋の阿蘇(あきのあそ)
怒りを吐くや(のこりをはくや)
和の夢よ(わのゆめよ)

아소산의 꿈

가을 아소산
분노를 내뿜는구나
화목의 꿈이여!

2024. 11. 13. 14:45
아소산역발 쿠마모또행 전차 안에서
雲靜 초고

고지대의 아소산역까지 타비까라스(旅烏)를 실어다준 JR선 열차
종착역인 아소역, 추색이 짙어온다.
아소역에서 아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보이는 아소산 산록의 경관. 대부분 초지다.
중악으로 가기 전에 보이는 풍경들이다. 대략 아소산의 2~3부 능선 정도 되는 지역이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아소산 정상이다. 갈대 나무들이 연도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정상 전 단계의 중악은 넓게 형성된 평지다. 어쩌면 죽은 분화구의 터인지도 모른다.
중악에도 살아 있는 분화구가 있다.
고악 바로 아래 평원에서 본 정상의 용암 분출시 나오는 연기
아소산은 신과 부처나 공존하는 성지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신이란 유일신이 아니라 자연신을 말한다. 일본인들은 고대로부터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는 신앙형태가 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죽어서도 후대인들이 그 망자를 신으로 받드는 신사를 만들고 재를 올리진 않는다. 살아 있을 때 영향력이 있었던 쇼군, 영주, 가신, 무장이나 무사들, 아니면 이름을 날린 학자나 유명인이라야 신으로 모신다. 그런 신사나 절이 일본 전역에 부지기수다. 심지어 외국인들도 신이 될 수 있다. 이순신 장군, 최익현, 안중근 의사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다. 이외에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신이 돼 있다.
이름은 불교의 절이라고 돼 있지만 건물 내부엔 불상은 1구도 없고 위패 같은 것들이 안치돼 있다.
연인들이 와서 빌면 맺어진다고 믿어지는 소. “연인의 성지”라는 게 재미있는 발상이다.
정상 바로 밑 평원에 있는 서암전사(西巖殿寺) 안 모습, 절이라지만 불보살상은 없다. 이 걸 보면 일본 사찰 문화의 한 특징인 불교와 신사가 같이 공존하는 곳인 듯하다.
인연을 찾거나 맺게 해줄 것을 간원할 때 쓰이는 오색
특이한 불상이다. 불보살은 아니고 신상으로 보인다.
자연석의 비에 '용궁'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걸로 보아선 아마도 큐우슈우 지역도 대만, 오끼나와 일대에 널리 분포돼 있는 바다를 주재하는 여신(媽祖)을 믿는 도교문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즉 바다의 어로 종사자들이 이 아소산에 올라와서 자신들의 안전과 풍어를 위해 비는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훼손된 불상의 잔재들. 오랜 풍화에 자연적으로 마모된 것일 수도 있어보이지만 왼쪽의 불두가 상체에서 잘라진 석상은 그렇지 않고 인위적으로 절단 당한 것 같아 보인다. 이유가 뭘까? 여기도 극성스런 기독교인들의 훼불행위가? 전체 인구중 1%가 될까말까한 기독교인들 중에도 근본주의자들이 있다는 소린가?
비석 기단에 새겨진 “愛馬鎭魂之碑”는 과거 이곳 사람들에게 말이 주요 교통수단이나 노동력의 원천이 된 역사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