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동해미래연구원 주최 인문학 강연 : ‘독도밀약설’이란 무엇인가?
Ⅰ. ‘독도밀약설’의 출현 : 폭로? 혹은 주장?
1. 1960년대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을 지낸 시마모토 겐로(嶋元謙郞)가 2005년 『日韓協力』이라는 계간지에 기고한 ‘독도밀약’의 내용이 한일 양국에 알려지게 됐다. 이 기고문에서 시마모토 겐로가 주장한 독도밀약설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한일 양국 정부의 비선라인 간에 비밀 회담이 있었다.
2) 시기는 1965년 1월 11일 쯤(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 조인식 6개월 전)이었다.
3) 장소는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집이었다.
4) 참석자는 한국 측 정일권 국무총리, 문덕주 외무차관, 김종락 VS 일본 측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고노 담화’의 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의 부친)의 지침을 받고 온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1989년 제75대 일본총리), 시마모토 겐로였다.
5) 상기 비밀 회담에는 시마모토 겐로가 김종필의 형 김종락과 현장에 동석해서 한일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기록했다.
2. 이 비밀 회담에서 합의된 합의문은 하나의 핵심 조항과 4개 부속 조항으로 돼 있다.
핵심조항 : 독도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1)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영토로 하는 선을 긋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3)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늘리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하지 않는다.
4) 두 나라는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Ⅱ. 비밀회담 및 ‘독도밀약’의 신빙성은 어떤가?
1. 상반된 증거들
1) 긍정
① 노다니엘 교수가 시마모토 겐로와 김종락을 각기 인터뷰했다. 김종락은 이때 처음으로 독도밀약에 대한 자신의 증언을 이야기했고 시마모토 겐로와 대체로 일치하는 증언을 남겼다. 이 인터뷰를 토대로 2007년 4월에 한국의 월간중앙(“한일협정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에 독도밀약 내용이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② 여타 언론 보도들
독도문제 빌미된 ‘친일 군인’ 박정희의 ‘독도밀약’ 2011.5.15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977.html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295.html
③ 2012년 9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비롯한 일본 시민사회단체 대표, 지식인, 시민 등 1,270명이 진상 공개를 촉구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2) 부정과 침묵
① 2015년 5월 4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김종필은 독도밀약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이른바 ‘독도밀약설’도 헛소문이다.”)
② 한일 양국의 외교부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에 관해 침묵해오고 있다.
Ⅲ. 의미 : 한일 간 독도관련 오랜 미스터리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1. 한일 정부 간 독도 협상 과정에서 나타난 대립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
제1~4차 시안에 이르기까지 협상 중 공방에 나타난 세 가지 쟁점
1) 분쟁의 범위
2) 강제성 및 구속력 유무▶조정 VS 중재
3) ‘독도를 포함한’ 문구 삽입 여부
한국 : “양국간의 일어날 분쟁” VS “양국간의 분쟁”
2.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 중에 한일 간의 모든 문제 혹은 현안들이 전부 거론됐지만 정작 타결된 협정문에는 유독 독도문제만 빠진 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짐작케 해준다. 게다가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제4장에는 독도문제를 암시한 듯이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1965. 6. 22)으로 아래 내용을 왜 명문화 해 놨는지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하여 해결을 도모한다.”
3. 한국외교부가 왜 저토록 오랫동안 독도의 분쟁지화가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현상유지와 무대응 정책을 고수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 일본 정부가 역사적 자료로나 국제법적 현황에서 볼 때 일본이 이길 수 없는 독도영유권문제에 대해 왜 저토록 집요하게 독도를 포기하지 않는지 짐작케 해줄 방증 자료가 될 수 있다.
4.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정부의 독도 관련 홍보영상의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일본 방위백서와 중등교육 교과서에도 “다케시마는 일본 땅”인데 한국이 불법 점유(나중엔 “점령”으로 격상)하고 있다고 기술한 배경과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1) 일본의 對독도 입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독도문제를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서 누구 땅인지 결론을 내자는 것이다.
2)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명확한 타결은 안 되더라도 뭔가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면 독도는 영원히 한국 손에 들어 갈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해결전망” 만이라도 세워보고자 하는 게 일본정부의 목표였다.
5. 한국은 당연하지만, 일본도 ‘배타적 경제수역’의 범위를 주장할 때 한국에 맞서 독도를 출발점으로 삼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또한 2005년 일본이 독도에 대해 취한 일련의 도발의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1) 1905년 일본이 한국조정 모르게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한 2월 22일 날 일본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하는 조례를 최초로 만들었다.
2) 일본 고이즈미 정부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내용을 2005년 일본 방위백서에 처음으로 수록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뚜렷하게 심증이 가는 진실로 보이지만, 그대로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엔 조금 이른 듯하다. 좀 더 확실한 자료들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설”로는 얘기를 할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엔 약간 조심스럽다. 한일 양국에서 그간 공개한 외교자료들 외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하루 빨리 공개해서 역사 앞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 특히 한국정부와 달리 아직도 한일 외교사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일본정부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2019. 10. 22. 20:15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硏究室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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