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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게 말을 걸다 1 : 선행과 악행

雲靜, 仰天 2024. 9. 24. 10:30

장자에게 말을 걸다 1 : 선행과 악행


선악이 뭔가? 그 기준이 뭔가?

석가모니(본명 고타마 싯타르타, B.C. 560추정~B.C. 480추정)는 일찌기 선이든 악이든 절대적인 게 없다는 사상을 펼쳤다. 이 논리를 길게 늘여뜨려서 적용하면 불교에서 살생은 피해야 할 가장 큰 네 가지 죄악(네 바라이) 중에 하나로 친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죽이고 있는 사건 현장의 강도를 죽이는 외 방법이 없을 상황에선 그를 살해하는 건 악이 아니다. 강도를 없애지 않으면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 공포와 사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최근 이스라엘처럼 자국민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여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 최소 274명이 죽고 700명 이상을 다치게 만드는 등 또 다른 희생자들을 속출케 하는 것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뭏든 선악 절대 개념에서 벗어나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3장(Three Pitaka, 論, 律, 疏)의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할 계제는 아니다. 이 글 본연의 취지에 충실하면 된다. 붓다의 선악이분법의 지양이라는 해석에서 보면 이와 유사한 사상이 석가 재세시보다 약 2세기 뒤 중국에서 전국시대 말기의 장자(壯子, B.C. 369~B.C. 289경)에게도 다른 형태로 그 일부가 나타났다.

도덕경 같은 莊子의 책은 사상가들 사이에 老子와 함께 공맹보다 더 장자가 존중되던 한대 초기 전국시대 말 이래 전해져 오던 도가의 논저(論著)들이 부가되어 형성된 것이다. 사상적으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사상은 인위적, 작위적 상황에서 벗어나 자연적 평화 상태로 삶을 사는 게 현명하다는 내용이 내재돼 있다. 시대사적 배경이 된 것은 장자가 살았던 당시 여러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관이다. 이것이 장자 사상의 형성 배경과 장자의 동기이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버리고 '虛靜', '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참자유와 자주 그리고 독립을 얻어 세상 밖에서 초연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眞人)이라는 것이다. 진인의 다른 말은 도인이고 그것의 내함은 “道樞”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無知)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가치관과 인식론이 깔려 있다. 아래 예문이 이것을 말해준다.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에 노자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재성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莊子 内篇 養生主)

이 구문 중 近은 가까이하다, 접근하다는 뜻인데
이를 추구 내지 탐하거나 욕심부린다는 함의가 있다. 名은 말 그대로 명호나 명분을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선을 행함에 근명이 없고, 악을 행함에 근형이 없다.”

이를 다시 의역하면 이렇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명성을 탐내지 않고, 악한 일을 하면서도 형벌에 직면하지 않는다.”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을 구하는 지경에 이르면 마음을 쏟는 등 노심초사하고, 나쁜 일을 저질러서 형벌을 받는 지경에 이르면 그것이 결국 타인을 해치고 자신을 해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구절은 장자의 양생과 처세의 근본 원칙을 나타내며, 자연에 순응하고, 그만두면 그치게 된다. 즉 선악이 각기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의미이지만 선행을 행해도 그걸로 이름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악행을 행하더라도 그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소리다. 예컨대 학문(현대사회에선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인격함양을 위한 것이니까 그것을 남에게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상대가 난처해하지 않게 하거나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 적당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때가 있지만 그러나 거짓말이 지나쳐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등 범죄행위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행에 관해선 전국 시대의 도가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열자(列子, B.C.4세기 경)도 이와 유사한 얘기를 한 바 있다.

“行善不以爲名,而名從之, 名不與利期,而利歸之, 利不與争期,而争及之, 故君子必愼爲善.” (列子, 說符)

선을 행함은 명분으로 여기지 않고 그걸 따르는 것이고, 명분은 시기를 따라가지 않고 이익을 위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는 이익을 다투지 않고 그것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신중해야 한다.

이를 장자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해석해줄 것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명성을 위해서 하지 않으면 저절로 명성이 따라오고, 명성이 있으면 이익을 바라지 않더라도 이익이 따라오고, 이익이 있으면 남과 다투지 않으려고 해도 다투는 것도 따라온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좋은 일을 할 때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기보다 공부 그 자체가 좋아서, 공부가 자신의 내적 성숙과 인격 도야에 필요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취업은 쉽게 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업을 할 게 아니라 사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거나 이익이 되도록 하겠다는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회사가 융성해지고 돈은 저절로 따라오는 시회 시스템이 돼야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이런 이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완전 정반대로 작동되고 있다. 벌써 사람들 스스로가 그것은 실행할 수 없는 요원한 꿈 같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이 그렇듯이 국가와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마음 먹고 생각하는 대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로 권력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지만...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에 兩行(사물과 자아가 각기 제자리를 지키며 서로 걸리지 않는다는 장자 사상의 주요 개념어, 장자 內編의 齊物論)은 요원해 보이는 현대사회다. 생각대로 되는 삶과 세상, 어떻게 하면 이런 경계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럴 때 장자는 어떤 처방을 내놓을까?

2024. 9. 24. 10:29
강북삼성 병원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면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