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세 가지를 들고 싶다. 개체로서의 욕구 그 이상의 것을 가지거나 누리려는 탐욕이 첫째요, 무엇이든 가진 것이나 아는 것을 모두 절대시하고 절대화 하려는 무지가 둘째다. 이 또한 탐욕의 범주에 드는 것이지만, 무지에 대한 반사가 이끄는 지나친 지식욕도 사는 것을 자유롭지 않게 만드는 자기 질곡의 함정이다. 셋째는 근거 없이 어느 한 쪽에 망동적으로 치우치는 비중용적 언행이다.
사람의 몸은 편해지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인간이다. 물질은 편안하게 만드는 일정한 조건이다. 삼시 세 끼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밥을 먹으니까 더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고, 더 나은 호화 주택을 갖고 싶고, 여기에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고급 승용차도 갖고 싶은게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은 생의 의지를 지탱시켜주는 리비도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과하면 탐욕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자신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고 큰 불편함이 없는 것 그 이상을 손에 넣으려는 과욕이다.
옛날 전통사회에서나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나 세속적 출세는 지식의 유무에 좌우된다. 그런데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고 해서 지식을 지나치게 상대화 하고 그걸 절대시해선 안 된다. 자신이 조금 안다고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각도도 360도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에선 종교를 이끄는 성직자들이 스스로 늘 자기 경책을 해야 한다. 기독교의 신성성을 부정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왜 신념의 절대화를 경계하였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Convictions are more dangerous enemies of truth than lies.) 머리에 든 건 없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남들을 피곤하게 만들듯이 무식한 자가 자신이 믿는 바 신념이 절대화 돼 있는 사람도 사회와 국가에 많은 해악을 끼친다.
의사라고 해서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창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라고 복잡다기한 인간만사와 세상을 모두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분야에는 제각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세상은 거대한 분업의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기준(rule)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은 물론, 기존에 세워진 합리적인 기준을 파괴하거나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기성찰과 절제가 필요하다. 장자(莊子)가 말했듯이 지식욕에 끄둘려 오히려 유한한 그것을 무한한 듯 쫓는 것도 삶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직관에서 오는 지혜와 달리 지식은 분별심이 전제돼 있다. 더군다나 인간의 이분법적 가치판단과 분별심은 여타 동물들 보다 유달리 질긴 인간만의 種差인 듯이 보인다. 이것저것 분별하고 구분하는 이분법적 지식의 추구는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치우친 지식은 이미 타인을 배타하는 독성이 내재돼 있어 또 다른 문제나 폐해를 만드는 역기능이 있다는 점도 찰지해야 한다. 그것은 합리화, 편견, 아집이라는 굴레를 만든다. 세계를 현상과 이상(Idea)으로 이분화해서 그걸 절대화한 플라톤의 동굴 비화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반대자를 만들고 마찰, 갈등, 오만 나아가 무시와 투쟁의 씨앗을 배태시키도 한다.
물론, 지혜는 수승하고 지식은 덜 중요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단견이거나 편견이다. 냉수가 폐 건강에 대단히 좋지 않다는 의학 지식을 모르고 평생을 매일 새벽 냉수마찰 후 정한수 떠놓고 빈 후의 그 찬물을 마셔 결국 폐암으로 입적한 법정 스님의 사례를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그는 인생에 필요한 지혜는 있었는 듯해도 건강에 필요한 지식은 부족했던 셈이다. 법정스님의 사례는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은 각기 제 기능이 있고 그 쓰임새와 가치는 등가적임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언행도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지혜가 내재되지 않은, 균형감각이 결여된 경사된 언행은 자신에 그치지 않고 가족은 물론, 공동체, 사회와 나라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세상엔 절대적 선도 없고 마찬가지로 절대적 진리 또한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그런 식으로 언행을 보이는 이들이 차고 넘쳐난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우리 민족의 역사문화적 DNA나 다를 바 없다고 해도 크게 비난 받지 않을 터다. 조선조 500여 년이 왜 선비들간의 당파싸움으로 시작해서 나라를 빼앗기는 것으로 끝났는가? 유학사에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주자학에 목숨을 걸다시피 올인한 자신들의 앎과 가치만을 절대화, 교조화 하여 다른 이념이나 가치(예컨대 불교, 양명학, 천주교=서학 등)와 그 상대에 대한, 다름에 대한 역지사지를 해보는 내면적 힘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소수를 제외하곤 절대 다수의 선비들이 국가가 나아갈 바의 방향을 단선화 시킨 상태에서 공부를 잘못 한 것이다.
선악 관념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에고(Ego)를 놓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간단(單)하게 보라(示)는 의미가 결합돼 있는 禪이라는 한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禪의 세계가 지향하듯이 모든 것을 간단하게 본질을 직관하고, 있는 그대로 사람과 사물을 보면서 현상을 통합적으로 品受해야 한다. 대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것은 직관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어떤 직관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주 많이 산 건 아니지만, 이 나이 정도 살아 보니 순리대로 탐욕에서 벗어나 매사 사리에 맞게 행동하고 억지로 무리하지 않으면 양심에 부끄러울 게 없다. 누구에게나 매우 떳떳하고 의연해진다. 그것이야말로 진이요, 선이요, 미의 현현으로서 하늘의 의지에 닿아 있다.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허허롭게 자족하는 사람이다. 겸허는 비우는 것에서 채워진다. 언제, 어디서고 중정(中正)과 중용(中庸)을 기준으로 살면 큰 무리는 따르지 않을 것이어서 자신을 망치는 해는 없을 것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항상 중용에 따라 사는 것"(緣督以爲經)이 좋으리라! 그러면 누구든지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천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언설을 절대시 할 생각은 없다. 그냥 평심하게 평소 나의 생각을 적어 보았을 뿐이다. 공감해도 그만이고 공감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2023. 8. 17. 06:0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静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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