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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리더)가 지켜야 할 '四毋'

雲靜, 仰天 2021. 10. 25. 06:49

군자(리더)가 지켜야 할 '四毋'


공자는 군자(君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행동양식을 제시한 바 있다. 논어 子罕篇에 나오는 “君子絶四”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즉 毋意, 毋必, 毋固, 毋我인데 군자에겐 사사로운 의견이 없고,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고, 끝까지 고집하는 일이 없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의 맥락은 공자 자신이 수양을 통해 이 네 가지를 단절한 경지에 올랐고 자신의 이 가르침이 널리 갖춰진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길 희망한 것이다. 공자의 이 말씀은 無我를 중핵으로 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도 일부가 상통하는 게 있다.
 
군자란 요즘 말로 하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편의적으로 리더라고 볼 수 있다. 리더도 규모에 따라,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 한 마디로 일률적으로 규정할 순 없다. 옛날 군자의 개념엔 반드시 배움(學)과 배움을 체현하는 學人이라는 사실과 그 인식이 공통적으로 내재돼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리더가 반드시 배우지 않아도, 또 學人이지 않아도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다. 비웃는 논조로 얘기하면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세상이니까! 또 지식과 학인적 소양 보다는 권모와 술수가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리더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바른 코스”처럼 믿는 세상이니까! 
 
아무튼 배우고 안 배우고, 학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언행이 사회구성원이나 국민 다수에게 직접 간접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큰 기초단체의 시 의원 이상의 정치인 및 행정기관 기관장과 사법기관의 판검사는 모두 일단 '리더'라고 치겠다.
 
그런데 리더는 네 가지를 끊고 살아야 군자다운 리더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군자를 리더와 동일시했지만, 사실 지식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둘은 다르기 때문에 리더는 군자다울 때 비로소 리더답다. 군자와 리더 사이엔 배움을 본령으로 삼는 學人의 여부가 가로 놓여 있다. 君子絶四의 이면에는 배움이 매개돼 있다. 군자가 말아야 할 네 가지를 구체적으로 풀면 아래와 같이 주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가 공적인 일을 추진함에 개인이나 패거리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사로운 의견은 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小我를 버리고 大我를 지향하고 無私心, 無邪心을 견지해야 한다는 소리다.
 
둘째가 어떤 일에 임할 때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만사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찬성하고 공감할 정도로 완전무결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中庸의 도가 필요하다. 중용은 다른 두 의견을 절충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것을 행해야 할 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의 바른 이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졸문('앎과 진리와 中庸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셋째는 또 무슨 일이든, 특히 반대자들이 있음에도 끝까지 혼자만 옳다고 고집하는 독불장군이 돼선 안 된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毋固의 는 말 그대로 완고함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21세기 임에도 구시대적인 가치, 관념과 수단에 사로잡혀 있어선 안 된다는 소리다어떤 생각과 이상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홀로 영원히 불변의 가치로 통용될 수 있는 건 없다. 사람도 지고지순의 완전무결한 인간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상을 품거나, 혹은 꿈을 꾸더라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부합되도록 인식, 생각과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넷째는 오만과 자만심에 차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我라는 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엔 바른 견해나 방법이라면 남의 조언과 충고를 받아들이라는 권유가 들어가 있다.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서 안하무인,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이도 없지만, 그런 시대는 지났음을 알아야 한다.
 
전반적으로 공자의 위 말씀은 타당한 가르침이다. 일부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도 직결된다. 또 이 네 가지는 내적으로 “사욕”이라는 것이 관통하고 있고 그것을 끊는 데는 배움과 학인다운 자세가 뒤따라야 한다. 배움은 지식, 기술, 교양 등의 일차적 목적을 넘어서 마음을 외부의 物事에 합일시키는 과정일 터고, 제대로 된 학인이라면 모든 경우에 理에 계합되는 과학성과 합리성이 몸에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교양인이다. 
 
絶四를 지키면 문제가 없는가? 성공할 수 있는가? 직설하면 현실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絶四를 지키고 살다간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더욱 그렇다. 매사에 너무 옳고 바르게 살면 사회생활이 고달프고 삶이 힘들어진다. 편법, 탈법, 위법이 아닌 정법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도 어렵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모여들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외로울 수도 있다. 즉 왕따가 되기 쉽상이다.
 
허나, 정말 제대로 된 군자의 그릇과 瑞氣를 지닌 군자다운 리더라면 그 외로움과 고독도 이겨내야 한다. 사사로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리차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의 갈매기처럼 높이 날아서 굽어봐야 한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고,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군자의 호연지기다. 
 

 
한국 현대정치의 최대 취약성 중에 한 가지는 군자다운 리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군자다운 리더를 키우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외관상 대략 3김 시대 이후부터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전무한 건 아니지만, 한때 隔代指定 형식으로 차기 지도자를 키웠던 중국의 정치시스템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격대지정은 시진핑 집권기에 와선 중단됐지만 초급간부 때부터 배양하는 省長급 지도자는 지금도 그대로 밑바닥부터 경험시켜서 리더를 키우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19세기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면서 미래를 담지할 수 있는 인재들을 길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지식이었던 인재들이 국가의 목표를 부국강병에 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실현 시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으로 하층계급에 대한 착취와 타국에 대한 침략에 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자기 개인의 이익, 자기가 하고 싶은 분파적인 것을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 생각과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탐욕, 오만과 자만에 차 있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득시글거린다. 이런 풍토이니 자기 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리더가 없고 리더를 기르지도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과보다.
 
군자다운 리더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리더여, 군자답게 개인의 사적인 출세가 아닌 역사에 남을 의미 있는 일을 해내듯 크게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우선 높이 날아서 멀리 가보라. 그 과정에서 시야는 하나 밖에 몰라 언행이 고집이 될 정도이고 자신을 비우기는커녕 배타적으로 채우려고만 하는 게 행동률이 돼 있는 소인배들을 피하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배울 게 있는 이를 긍정하며, 의인을 따르고 홀로 됨을 두려워 말라. 정말 진정코 성공하고 싶은가? 만일 그러하다면 외롭게 되는 걸 감수하더라도 세상사에서 毋意, 毋必, 毋固, 毋我를 품에 지니고 살아 보라.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데 외롭다거나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2021. 10. 25. 06:50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