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음악 가요

가요 '홍콩 아가씨'와 함께 하는 홍콩역사 簡介

雲靜, 仰天 2023. 6. 11. 09:40

가요 '홍콩아가씨'와 함께하는 홍콩역사 簡介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
그 꽃만 사가시면 그리운 영란꽃
아 꽃잎같이 다정스런 그 사람이면
그 가슴 품에 안겨 가고 싶어요.

이 꽃을 사가세요. 홍콩의 밤거리
그 사람 기다리며 꽃 파는 아가씨
그 꽃만 사가시면 애달픈 영란꽃
아 당신께서 사가시면 첫사랑 인연
오늘도 꿈을 꾸는 홍콩아가씨

여가수 금사향이 1954년에 노래한 '홍콩 아가씨'라는 가요의 가사다.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의 이 노래는 홍콩의 밤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를 상상한 노래다. 먼저 이 노래를 한 번 듣고나서 얘기를 이어가자.

https://tv.naver.com/v/19310571

타임머신 타고 1950년으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돋보적인 보이스☆ ‘신미래 - 홍콩 아가씨

트롯매직유랑단 | 타임머신 타고 1950년으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돋보적인 보이스☆ ‘신미래 - 홍콩 아가씨’

tv.naver.com


느낌이 어떤가? 차이나타운의 광경을 연상시키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중국풍 가요 같지 않는가? 신미래라는 여가수가 이국의 분위기가 나도록 목소리와 동작을 잘 소화한 탓도 있지만 가사 또한 원래의 노래가 발표된 당시인 1950년대 홍콩의 밤거리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요 '홍콩 아가씨'가 발표된 1954년 전후는 중국 대륙에 이미 공산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래도 홍콩은 중공이 접수를 시도하지 않아서 영국이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아편전쟁(the Opium war) 이래 120년 가까이 영국이 홍콩을 통치함으로써 홍콩은 서양과 동양이 묘하게 습합되어 새로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20세기 3~40년대 아시아에선 동경과 상해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국제 도시였다.

그러한 홍콩이 배경이 된 이 곡은 발표 당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멜로디와 가사가 홍콩의 밤거리를 떠오르게 만들어서 이국풍을 맛보게 한 게 히트의 한 요소일 것이다. 아래에 붙여놓은 여러 장의 사진에서 보듯이 1950년대 홍콩은 중국인, 영국인을 비롯해 이 도시를 찾아오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시기엔 중공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려는 미국도 대중국 정보기관의 본부를 홍콩에 두고 운용했다. (따라서 그들이 획득한 중공 관련 자료들은 현재 중공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다. 내가 2000년에 홍콩 中文대학에 방문학자로 가 있었던 것도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인종의 도가니탕 같은 홍콩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꿈과 희망, 환희와 비통, 실의와 좌절, 애환과 질곡이 교차하면서 도시가 현대적 면모가 나타나는 쪽으로 변화되기도 했지만, 그 시장통이나 뒷골목에는 여전히 전 근대적인 중국의 어두운 모습들이 많이 남아 온존하던 시절이었다.

암튼, 그런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를 상상해보라. 영란꽃을 사라고 호객하는 앳띤 소녀 나이의 꾸냥(姑娘)! 위 노래 가사 속에 나오는 영란꽃은 소담스런 은방울꽃의 다른 이름이고 "5월화"라 불리기도 한다. 나는 홍콩에서 직접 꽃 파는 아가씨를 접한 바 있다. 최초로 홍콩과 마카오땅을 밟은 1988년 1월, 그 뒤 1990년대의 몇 차례 방문, 특히 2000년 중문대학에 방문학자로 가 있었을 때는 시간 여유를 갖고 홍콩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홍콩 서민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홍콩엔 길거리 곳곳에서 아열대산 꽃을 파는 아가씨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꽃 파는 여자들 중엔 20세 전후의 아가씨도 없지 않겠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래에서 풍기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다. 모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생계를 위해 장사에 뛰어든 생업 전사의 아가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가씨라고 해서 님이 될 남자, 그것도 상류층 남자를 만나게 되는 걸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럴 수 있는 개연성도 있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혹시 어떻게 아는가? 프랑스 파리의 구두가게에서 첫눈에 반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지도 못할 숙녀화를 매일 하루에 한 켤레씩 사러가선 100켤레 짼가 살 때 청혼을 한 낭만파 시인 바이런 같은 남자가 홍콩의 꽃 파는 아가씨에게도 나타날지를! 그런 낭만파 신사가 나타나서 영란꽃을 몇 송이 째를 사고 가까워 지거나 운명이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다.

통상 은방울꽃으로 불리는 영란꽃


젊은 시절, 나는 여러 차례 홍콩에 갈 때 마다 홍콩아가씨라는 이 노래를 머리에 떠올리기도 하고 때론 야시장 같은 곳에서 한 잔의 술로 객수를 달랠 때 혼자서 '스잔나'라는 노래와 함께 이 노래를 읊으면서 홍콩의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때의 여행담을 얘기할라치면 또 다른 긴 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말이 나온 김에 아래에 첨부해놓은 사진을 중심으로 홍콩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물론 전문적인 소개는 아니지만 이것도 홍콩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무익하진 않을 것이다.

공전의 히트를 친 용쟁호투, 정무문, 당산대형 등의 영화에서 이소룡이 무대로 찍은 정크선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찾아가봤다. 점보 아바딘이라는 해상 레스토랑이 있던 인근 바닷가였다. 이 식당은 지금도 홍콩의 명물인데 나는 당시 길거리에서 만난 내 또래의 콜럼비아에서 온 일본인 남성과 같이 돈을 "분빠이"(분배)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해서 중국요리를 싼값에 푸짐하게 먹은 추억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마카오와 함께 홍콩을 여행했을 때는 내 나이 29세 때인 1988년 1월 초였다. 당시는 물가도 저렴했고 사람들의 인심도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지금은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랐다. (2019년 9월 홍콩에 들렀을 땐 우동 한 그릇에 자그만치 18000원!) 중공이 홍콩의 민주세력들을 제어코자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홍콩에 들여보낸 100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들로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그래서 원래부터 비쌌던 집값은 더 올라서 가히 살인적이 된지 오래다. 극심한 경제적 빈곤, 실직, 차별 혹은 무시 등등의 사회적 문제로 인해 내가 거주하던 2000년에 벌써 매년 자살자가 만 명이 넘었다. 사진 속 멀대와 같이 생맥주를 마시고 있는 이는 홍콩 구룡반도의 번화가 침사초이에 위치한 한국사찰 홍법원에 다니던 한국인 신도였는데, 내가 머물던 그 절에 놀러왔다가 나와 죽이 맞아서 야시장으로, 호프집으로 쏘다니면서 밤 늦도록 술을 같이 마셨다. 그뒤 그와는 연락이 끊어졌는데 지금이라도 연락이 된다면 다시 한 번 만나서 회포를 풀고 싶다.
포르투갈이 약 300년 정도 식민지로 통치했던 마카오에 남아 있는 포르투갈 성당 앞에 선 멀대. 당시 홍콩에서 배를 타면 마카오까지는 편도 약 1시간 정도 소요됐다.


중국이 오랜 제국의 깊은 잠에서 서구의 "堅船砲利"의 대포 몇 방에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연 게 1840년대 초기였는데, 1842년 8월 남경조약(南京條約)으로 맨 처음 빗장을 푼 게 상해(上海), 영파(寧波), 하문(廈門), 복주(福州), 광주(廣州) 등 5개 항구 도시였다. 이 때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었다. 이른바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패전의 대가로 승전국인 영국에 배상조건으로 홍콩을 떼어주기로 약정한 남경조약이 맺어진 1842년 당시는 구룡(九龍)반도는 내주지 않았고, 그 반도의 남쪽에 있는 홍콩섬만 넘겨준 것이다. 물론 나중엔 청조가 또 한 번 영국에 패함(제2차 중국-영국 전쟁)에 따라 그 배상으로 구룡반도까지 다 영국에 넘겨주게 된다.

그 이후 홍콩은 대영제국의 일각으로 들어가 중국을 견제하거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시키는데 창구나 통로 역할을 하게 됐다. 2세기에 걸친 서세동점, 제국주의시대의 산물, 중국인들이 치욕으로 생각하는 "半식민지"의 상징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회귀한 1997년에 이르기까지!

2023. 6. 11. 16:4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홍콩 섬의 오션 피크에서 내려다본 홍콩섬과 그 대안의 구룡반도의 번화가 전경이다. 구룡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침사초이 일대인대 내가 머물렀던 한국사찰 홍법원은 지금도 변함 없지만 내가 간 1980년대 말 당시도 이곳의 모스크 맞은 편에 있었다.
홍콩의 야경은 그야말로 백만 불짜리다. 그러나 화려한 이 불빛의 뒤안길에는 빈곤, 빈부격차, 온갖 범죄와 억압과 갈등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홍콩은 이처럼 솟아오른 마천루가 휘황찬란하게 보이지만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홍콩을 영국에게 할양했을 때는 아래 사진처럼 한적한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개항장이 된 상해 보다 더 인가가 드문 한적한 분위기다.
산봉우리의 산은 홍콩섬이나 구룡반도에서 중국 심천 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들어오는 大帽山인 것 같아 보인다. 대모산이 맞다면 이 산 아래 지역이 지금의 구룡반도의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다.
영국, 포르투갈 등의 서양 상인들이 무역을 하러 홍콩에 와서 정박한 무역선들이다. 영국 상인들은 산업혁명 후 비약적으로 급증한 면직물을 식민지인 인도에 가져가 팔고 그곳 벵골만 지역 아샘 등의 동인도지역에서 기른 앵속(아편)을 싣고 홍콩과 광동성의 광주에 와서 팔고 아편으로 번 그 돈으로 도자기, 비단과 차를 사갔다. 즉 이른바 영국-인도-중국 간의 삼각무역이었다. 당시 도자기, 비단, 특히 차는 유럽에서 고수익을 올린 국가 전매품이었다.
앵속이라 불리는 아편. 짙은 분홍색 꽃이 양귀비를 연상시킬 정도로 고혹적이다. 원래는 한약재에서 마취제로 쓰였으나 영국이 의도적으로 인도에서 대량으로 재배한 것을 중국에 환각제로서의 아편으로 수출해서 중국인들을 흡식케 만들어 결국 아편전쟁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아편전쟁의 발발 배경과 원인은 복잡하다. 그래서 짧은 지면의 여기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편전쟁 당시 청조와 영국 사이의 아편 밀수 무역에 관해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본 블로그에 올려놓은 멀대의 학술논문( 近代 중국 아편 密輸貿易의 한 단면 : 1842∼1887년간 홍콩의 대중국 아편 밀수를 둘러싼 中ㆍ英交涉과 그 영향을 중심으로)을 참고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홍콩엔 여러 대에 걸쳐 이런 수상의 정크선에서 사는 빈민층이 많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흔히 보이는 수상 가옥인 셈인데 홍콩과 광동성 이북 지역의 여타 중국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아편전쟁 직전 영국군과 대적하기 위해서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신식군대의 모습
중국 서민들의 주요 오락거리였던 경극, 상생 등 갖가지 무대극이 시연되고 있는 모습이다.
1840년 아편전쟁 때 홍콩 앞바다에서 영국군함에게 포를 맞아 파괴되고 있는 청나라 수군의 군함들
홍콩의 뒷골목 노점상 풍경. 이 사진을 포함해서 지금부터 아래에서 보게 될 여러 장의 사진들은 1950~60년대 홍콩의 거리 풍경들이다.
홍콩의 빈민촌 뒷골목 광경이다. 벽보에 붙어 있는 임질, 매독 따위의 성병을 치료한다는 광고가 사회사적으로 홍콩사회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만주족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인 변발을 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또 가로 간판도 보이지 않고 거의 대부분 세로 간판이 붙어 있다. 이로 봤을 때는 1950년대의 홍콩 모습은 아닌 것 같고, 그 이전 淸末民初의 거리 풍경 같아 보인다. 참고로 변발을 문화적 관점으로만 볼 게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의 확장이 필요하다. 즉 명을 멸망시키고 세운 만주족의 청조는 명나라 유신들을 비롯해서 청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변발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전국민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던 것이다.
당시 길거리에 보이는 키 큰 외국인들은 거개가 홍콩을 다스리기 위해 와 있던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인들이었다.
사진 중간에 보이는 홍콩 경찰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의 복장은 같은 시기 영국 경찰과 또 다른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경찰의 복장과 비슷하다. 영국이 통치하는 곳에선 영국의 제도가 거의 그대로 이식됐기 때문이다.
노래 속의 홍콩 아가씨가 있었다면 이런 거리에서 꽃을 팔았을 것이다.
1960~70년대의 홍콩 거리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