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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윤석열 vs 송시열과 이재명

雲靜, 仰天 2022. 3. 7. 14:30

윤휴와 윤석열 vs 송시열과 이재명

 
윤휴(1617~1680)라는 인물을 아는가? 조선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근 400년 동안이나 왜 오직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드는 사대주의에 빠져 있었는지 이유를 아는가? 조금 논리를 비약하면, 반미·친중·친북을 추구해온 얼치기 586세력이 한 번 더 정권을 잡으면 그것은 다시는 정권을 뺏어오기 힘든 장기 집권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되면 친중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처럼 또 한 번 중국에 예속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윤휴는 조선 숙종 때 남인의 대표적 개혁가였지만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1607~1680)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혀 서인들의 정치보복에 희생된 이 시기 최고 정치개혁가였다. 학문과 언변이 뛰어난 윤휴는 1655년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시강원의 자의로 관계에 발을 디뎠다. 정7품인 자의는 시강원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직위였지만 학문이 뛰어난 학자 중에서 과거시험 없이 등용하는 별정직이었다.
 
윤휴는 자의에서 곧 바로 정4품 진선으로 승진했으나 이를 고사하고 사임했을 정도로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고 개혁의지가 남달랐다. 그는 성리학의 학문적 지위, 왕권강화냐 신권에 의한 군왕의 독주를 견제할 것인가 하는 권력 주도권의 향방, 국방개혁, 대중국관계 및 그 전략, 그리고 군비확충에 필요한 호포제를 비롯한 과거제폐지, 신분제도 등등 몇 가지 개혁안을 추진하려고 했다. 왕도 한 때 윤휴의 개혁방안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었지만 송시열의 서인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견제를 받았다.
 
이유는 윤휴가 송시열이 중심이 된 서인들이 떠받든 주자학(성리학)을 완벽하고도 유일한 진리라는 주장에 반대하고, 세상 이치를 어찌 주자(朱熹, 1130~1200) 혼자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냐며 주자학 절대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자사상이나 유교의 이상에 다가갈 때 굳이 주자를 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가 얘기한 대로 미분화된 사회(unfused society)의 조선사회에서 종교적 기능과 함께 국가통치 이념으로 기능한 주자학을 격하시켰으니 당시로선 거의 혁명적인 도발이었다. 성리학을 군주의 학문이라고 주장한 윤후에 대해 성리학을 보편 학문으로 여긴 송시열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고, 그래서 억세게 비난을 퍼부었다. 주자학을 무기로 삼아 신권 정치를 구현하라던 자신의 구상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휴는 강력한 왕권수립을 통해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숙종)에게 간관제도와 특정 문벌이 독식하다시피 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상설기구인 비변사를 복원하자는 것도 주청했다. 이를 위해 윤휴는 조선 개국 이후 고착된 서얼차별을 철폐하자는 주장까지 폈다. 서얼차별은 고려에도 거의 없었으나 1415년 조선 태종에 의해 서얼금고법이 시행되면서 본격화된 것이다.
 
국방개혁 면에서도 윤휴는 왕권강화를 통해 전국의 모든 군사를 일사분란하게 통제함으로써 강군을 육성코자 했다. 그에게 주자학 정통론은 장애가 되었다. 주자학을 신봉하면서 북벌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윤휴의 판단도 송시열의 심기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국방력강화와 맞물려 있던 대중국관계에선 윤휴는 청을 치자는 이른바 북벌을 주장했다. 북벌은 송시열이 중심이 된 서인들의 입장과도 일치했다. 그러나 윤휴는 서인들과 추진 속도와 수단 및 방식을 두고선 대립했다. 기본적으로 송시열은 말로만 북벌을 외쳤지 실제로는 북벌할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이 명나라를 제압하고 청을 세워서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뒤에도 오로지 망해버린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했을 뿐이다.
 
윤휴는 심지어 숙종에게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절을 하거나 교외에까지 나가 영접하는 건 하지 말라는 직언도 했다. 또 10만 정병을 길러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의 군량미를 동원한다면 10일 안에 청나라 거점지 심양을 점령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 내 반청세력이 호응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도 가지고 있었다. 윤휴가 이러한 주장을 편 것은 명나라의 유민 세력이 청에 저항하던 1670년대 전반기 동북아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이 도래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윤휴를 기득권자들인 서인들이 가만히 놔 둘리 없었다. 윤휴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분열되기까지 했다. 송시열에게 동조해서 강경비판론을 편 노론과 비교적 관대했던 윤선거·윤증 부자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다.
 
결국 윤휴는 중화주의, 주자학으로 구조화된 당시 체제 및 엄격한 신분질서의 붕괴를 우려한 서인세력의 강력한 저항 앞에서 주저앉았다. 만약 윤휴가 서인 세력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아서 개혁을 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물꼬가 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통탄스럽게도 윤휴는 패했다. 그는 다방면에 걸친 혁신 사상가였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 질서로 자신들만의 부귀영달을 영속화 하려던 서인의 강력한 장벽에 막혀 북벌도 시도해보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자신이 품었던 개혁적 구상도 실현되지 못했다. 임진전쟁과 양차 호란 후 최대의 국정 과제인 국방력 강화와 사회개혁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문약한 조선은 더욱 약체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정 권력을 장악한 송시열 제자들이 중심이 된 서인들은 권력을 움켜쥐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제에게 나라를 내줄 때까지 위로 이미 멸망하고 없어진 명나라를 신주 모시듯 받드는 사대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윤휴가 제거된 이후부터는 성리학이 사상문제의 시비를 가리는 정통학문으로 고착되고 성리학 이외 양명학이라든가 여타 고증학 등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치부되는 역사를 밟게 됐다.
 
조선의 당쟁이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피비린내 나도록 격화된 것은 송시열의 서인들이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죽이기까지 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는 윤휴가 유배형을 받아 함경도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형량이 바뀌어 뒤따라온 금부도사의 사약을 받으면서 한 말이 함축한다.
 
“유학자가 싫으면 나라에서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어디 있느냐?”
 
당시 송시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의 성리학 교조주의, 주자학 교조주의에 포박된 조선 실정을 개탄한 소리다. 사실 이른바 ‘예송논쟁’ 이전에는 학문적 비판이 인정되고 공존체제가 온존됐었지만 그 뒤로는 목숨을 걸고 당쟁을 벌이게 됐다.
 
송시열 추종자들의 세상이 된 이후로 조선은 그야말로 일부 극소수의 사대부들이 자신의 사상적 모태인 중국에 대한 사대체제를 유지하면서 왕권까지 침해하고 아래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 나라를 거덜 냈다. 자신들만 배불리 먹고 세상의 변화를 외면하면서 살다가 결국 나라까지 빼앗겼다.
 
모든 것은 변한다. 역사도, 문화도, 사람도, 인간의 운명도 다 변하게 돼 있다. 절대 불변은 있을 수 없다. 불변의 진리, 절대적인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500년 이상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든 사대사상 그리고 그 사상적 모태가 된 주자학을 신봉하는 극단주의자들은 결국 20세기에 들어와 나라를 뺏기게 만든 일차적이고 구조적인 원인 제공자들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자학 극단주의는 현 북한의 김일성 3대 세습주의자들이나 아프칸의 탈레반, 나이지리아 보코하람과도 닮았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질기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 김씨 왕조가 선전하는 수령 절대 무오류의 완전한 지도자라는 인식이 바로 그런 것들이고, 백두혈통 신격화가 그런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재명이 권력을 손에 넣으면 안으로 보편복지를 명분으로 사회주의화가 강제될 것이고, 밖으로 반미친중친북 구도는 심화되고 더욱 고착화 될 것이다. 대중국 저자세가 더 심화될 뿐만 아니라 중국에 예속되는 쪽으로 한 발 더 들여놓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재명이 추진하려고 마음먹은 정책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체포, 구금, 폭력, 고문, 암살 따위의 공포정치가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벌써부터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이 대장동 게이트의 몸통임을 암시하거나 누설할 기미가 있어 보이는 이들 중 벌써 여러 명이 의문사 됐다. 또 같은 민주당 내에서 이재명을 비판하는 글을 썼거나 현수막을 만든 민주당원들 마저도 보복성 고발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현수막 제작에 후원금을 낸 당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예견하고도 남는 일이다. 이재명은 문재인이 너무 착한 게 문제라면서 "나는 권력은 잔인하게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듯이 최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반대자들에 대해 권력을 정말 잔인하게 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국가지도자가 갖춰야 할 언행일치, 정책의 신뢰성과 안정성, 예측가능성 따위는 아예 전혀 기대할 게 못 된다. 지금까지 이재명이 해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수많은 범죄 사실과 거짓말 그리고 수시로 말을 바꾸는 그런 언동들을 보고도 정책이 제대로 이뤄질 것이며, 나라가 안정적으로 굴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입만 열면 거짓말, 수시로 말 바꾸기,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다른 이에게 덮어씌우는 책임전가, 자신의 범죄나 실정들이 들통 나는 걸 막기 위해 관련자들까지 의문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공포정치, 사회주의 독재로 나아가고, 나라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은 불을 보는 듯하다.
 
 

두 후보 중 누가 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판이하게 갈린다.

 
이는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있을 수 있다는 "검찰공화국"에 대한 우려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염려가 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검찰공화국"은 충분히 시민들의 견제가 가능하고 개혁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조정과 예측이 가능하다. 또 이재명과 그의 지지자들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공격한 윤석열의 대북 선제타격 혹은 예방타격 발언도 주한 미군과의 협력하에 결정될 것이어서 통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공약과 정책들은 도시 종잡을 수 없다. 변화무쌍하고 심지어 분노조절장애, 사이코패스 같은 증세까지 보이는 그의 성격상 일부 국민의 반대가 있다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철회되거나 어디로 튈지, 어떻게 변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푸틴(Vladimir V. Putin, 1952~)을 보지 못했는가? 그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노림수 외에도 분노조절장애 때문이었다. EU에 가입하고자 한 우크라이나와 그 배후의 서방국가들에 대한 분노가 조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세기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시대 대슬라브 민족주의의 대러시아를 만들고자 먼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발트 3국에 이어 여타 과거 러시아에 강제 병합됐다가 독립한 친서방 반러시아적인 나라들을 다시금 손에 넣으려는 구상의 첫 수순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야만의 시대로 회귀하느냐, 문명의 시대로 한 걸음 더 전진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역사를 퇴보시킨 이 시대의 서인세력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천년 이상 중국의 속국으로 지내온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천재일우'의 기회다. 윤휴가 당시 동북아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포착했듯이 지금은 미중대립의 격화 그리고 그에 따른 대만의 전략적 가치 부상 등 국제관계의 축이 바뀌는 일대 전환기에서 지금까지 대등하지 못했던 대중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재정립할 호기를 맞이한 셈이다.
 
먼저 작금에 자행되고 있는 계획적인 부정선거를 반드시 저지해야 된다. 그리고 기획 및 책동자들을 모두 밝혀내어 준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활이 걸려 있는 이 문제에 총력을 모아야 한다. 이어서 그 동력으로 현재 국힘당에서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는 상태에선 오로지 국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윤석열에 대한 지지를 60% 이상 끌어올리는 방법 밖에 없다. 정의로운 유권자들이 역사동인의 담지자가 돼야 한다.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역사의 濁流를 밀어내고 미래를 예인하는 淸流를 안착시킬 견인차는 우리 자신이다. 시대의 전이기를 넘어 역사의 전환기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2022. 3. 7. 15:4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