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베트남 여행 :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식민통치 시절 프랑스인들이 "아시아의 진주"라 일컫던 상하의 나라 베트남! 1960년대 중후반 포항 기차역에서 해병 청룡부대 용사들의 파월 발대식을 봐오던 소싯적 때부터 말로만 듣던 베트남을 찾았다. 난생 처음이다. 2000년 10월 23일이었다. 호치민(Hồ Chí Min)시에 20여년 째 살고 있던 초등학교 친구를 볼겸해서, 또 베트남에 비지니스 일로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친구와 같이 갔다.
가을이 익어가는 10월 하순,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어서 우리는 수도인 북쪽의 하노이(Hà Nội)는 가지 못하고 경제 수도로 일컬어지는 남부의 호치민시에서만 지냈다. 도착한 첫날은 친구의 비지니스 볼일도 볼 겸해서 호치민 시내 번화가, 백화점, 프랑스인들이 지어놓은 옛날 성당을 둘러봤다. 옛날 공산화 되기 전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던 시절 베트남의 수도였음을 감지할 수 있는 잔재가 그런대로 아직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호치민의 옛 친구와 함께 셋이서 차이나타운으로 이름 나 있는 쪼론(chợlớn)가의 중식당에 가서 회포를 풀었다.
호치민시 일부로서 사이공강의 서쪽 일대를 차지하는 쪼론이라는 곳은 원래 18세기 말 비엔 호아(Biên Hòa)에 살던 중국 화교들인 호아(Hòa)족이 떠이선(Tây Sơn) 반군에 밀려 이곳으로 도주해 와서 만든 마을이었다. 그 뒤 1931년 이후 바로 인근의 당시 수도 사이공시와 통합돼 하나의 도시가 됐다. 떠이선 반군이란 레(Le)와 찐(Thinh) 왕조의 패망 원인이 된 떠이선 마을의 3형제가 주축이 된 반란군을 말한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다 보니 술을 제법 마셨지만 이튿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세 친구가 다 한 술 하는 주당들이다. 이튿날도 친구의 비니지스를 위해 호치민시 쪽 회사들을 몇 군데 방문했다. 나는 통역을 하면서 친구와 같이 자미지게 돌아다녔다. 여행경비를 제공한 친구에게 밥값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3일 째 되던 날, 우리는 호치민시 서쪽 메콩강 하류의 델타 지대에 형성된 작은 도시인 미토(Mỹ Tho)시에 가서 대만의 내 친구가 소개해준 중국인 화교 친구의 집을 방문해서 비즈니스 얘기를 나누고 주변 일대를 둘러본 뒤 호치민시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구찌(Củ Chi) 땅굴(Cu Chi Tunnels)도 가봤다.
그런데 여기서 여행기행문 답지 않은, 아니 해외여행지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화를 한 가지 양념 삼아 곁들이고자 한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 가운데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 해외에서 의외의 사기나 봉변을 당하게 될 경우 "가능하다면", "힘이 자란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호구가 아님을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분이라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사건"이 참고가 될 것이다.
나는 해외에 나가면 어디에서든 남이 들으면 흥미진진한 무용담으로 들릴 수 있지만 본인인 내게는 바싹 긴장을 하고 대응해야 하는 예기치 못한 위험한 상황에 자주 맞닥뜨린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중국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런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에까지 처한 적도 몇 번 있다. 그때 같이 여행 간 친구들이 두고두고 얘기하는 무용담이다.
당시 호치민시내에서도 그랬다. 두 차례나 큰 봉변을 당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먼저 베트남인들이 드나드는 흐름한 선술집이 아닌 외국인들이 많이 출입하는 유흥가의 고급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같이 마시던 친구는 속이 좋지 않다면 먼저 호텔로 돌아간 뒤 나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마시고 계산을 하려는데 술값 바가지가 너무 심했다. 조금 정도 붙여서 요구하면 나도 그것 쯤이야 팁인양 흔쾌히 지불한다. 허나 우리가 마신 술값의 배가 넘게 올려놓은 계산서를 들이민다면 그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집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 술집 주인과 종업원에게 계산을 제대로 하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래도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면서 딴청을 피운다. 그런데 내가 한국인줄 알았는진 모르겠으나 나의 면전에서 자기들끼리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키득키득 웃고 시시덕거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이럴 때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모른 척하고 순간의 쪽팔림을 모른 척하면서 그들이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지불하고 돌아설 것인가?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선진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후진국에서 일어난다. 우리나라도 한 때 1960~70년대 한국에 들어온 미군들 혹은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상당 부분 이런 식으로 갈취를 했던 전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제 베트남에서, 베트남인들이 외국인이라고 나에게 그 짓을 하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이럴 때는 신사연하면서 조용히 말로 하면 더 거칠게 날뛰면서 조롱까지 해대는 건달형 장사치나 소인배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땐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다. 그날도 그랬다. 나는 화난 얼굴로 술집 주인 얼굴을 향하는 듯하면서 얼굴을 살짝 비켜 얼굴 뒷편의 시멘트 벽을 맨주먹으로 사정 없이 세게 쳤다.
그러자 내 주먹이 복싱이나 태권도 같은 운동으로 단련된 옛날 같지 않게 삽시간에 솥뚜껑처럼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주먹을 들어 다시 내리칠 기세를 보였다. 그제서야 놀라 자빠진 주인이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만 하라고 손짓을 하면서 황급히 계산서에 정상가격으로 정정해주었다.
이런 경우는 이미 미군들이 대거 주둔한 사이공에서 1960~70년대의 베트남전쟁 때부터 흔히 있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베트남은 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세우는 게 상당히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외침을 많이 받아온 베트남인들이 믿는 것은 오로지 힘과 돈이나 금붙이뿐이다. 약자에게는 강자처럼 거들먹거리면서 군림하지만, 강자에게는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뒤에서는 복수를 하거나 해코지 하는 것이 베트남인들이라는 걸 나는 베트남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합리적으로 대화하거나 말로 설득하는 논리력이 아니라 누가 봐도 즉각 위협감을 느낄 수 있는 당장의 힘을 보여줘야 제압할 수 있다.
그 다음 날은 택시기사와도 싱갱이를 벌이다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던 일이 있었다. 나는 친구와 같이 사이공 전쟁기념관을 다 보고 나와서 앞에 죽치고 있던 택시를 잡아 타고 운전기사에게 우리가 묵는 호텔 주소를 말해주면 그기까지 가자고 했다. 그런데 막 출발한지 3분도 안 되었기 때문 4~500m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메타기가 막 뛰기 시작했다. 벼룩 뛰듯이 뛴다. 결과적으로 기본 거리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를 갔을 뿐인 우리에게 너댓 배 이상이나 바가지를 씌우는 못된 기사였다. 나는 미리 메타기를 조작해놓았다는 걸 눈치 채고선 운전수에게 차를 스톱시켜서 중도에 내리겠다고 하고선 요금을 2배 정도 주면서 이걸로 끝내자고 했다.
운전기사는 메타기에 찍힌 요금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달라고 한 바가지 요금을 주지 않고 우리가 타고 온 거리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요금 정도의 돈을 내밀었다. 기사는 받지 않고 한사코 메타기에 찍힌 수십만 동(đồng 베트남 화폐 단위)을 요구했다. 기껏해야 기본요금 밖에 나오지 않을 정상요금의 너댓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나는 줄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난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마음대로 속여도 되는듯이 무시하는 기사의 소행이 괘씸해서 주지 않았다. 기사의 요구대로 돈을 주면 그는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는커녕 한 건 했다면서 우리를 등신 취급할 게 뻔하다. 나는 우리가 그런 못된 자에게 키득 거리면서 호구 취급 당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경찰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경찰을 부를 턱이 없었다. 시장통 주변 길가에 택시를 세워둔 채 싱갱이가 계속됐다.
그러자 어느 사이엔가 시장통 길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2~30명이나 떼거지로 몰려와 우리를 에워싸고선 기사가 요구하는 금액을 다 지불하라고 고함을 치고 삿대질을 해대면서 위협하는 게 아닌가? 그들에게는 옳고 그른 게 없었다. 누구 한 사람 내가 하는 얘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유사한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그래도 중국에선 내 말을 들어보려는 자는 있었다.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고 오로지 돈을 뜯어야 할 대상으로만 봤다. 외국인은 호구가 아니다. 한국인도 호구가 아니다. 나는 더더욱 아니다. 어떤 험악한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베트남 지폐 몇 장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주워 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본 그들은 모두 한 편이 되어 소리 치면서 우리 더러 주어달라고 했다. 모든 지폐엔 베트남 국민들이 존경해마지않는 호치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내가 베트남 사람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나는 단호히 "No!"라고 소리쳤다. 동행한 내 친구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내 친구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돈을 줏어 주려고 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라고 큰소리로 소리치면서 만류했다. 나는 끝까지 주워주지 않았다. 그 뒤는 어떻게 됐겠는가? 운전기사와 순식 간에 같은 편이 된 베트남 행인들이 어떻게 반응했겠는가? 상상에 맡긴다!
나는 매번 외국에 나갈 때마다 내가 하는 언행이 현지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을 바라보는 표준이라는 듯이 처신해오고 있다. 현지인들이 조금이라도 한국인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왔다.
다른 한편, 지나고 보면 나는 참 겁이 없는 사람이다. 사실 베트남 갱들이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갱단 중의 하나다. 걔네들은 정말 겁이 없는 자들이다. 미국에서도 못 말리는 게 베트남 갱단들이다. 베트남의 일반인들도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엔 무서우리 만치 잘 뭉치고 단결이 잘 된다.
이처럼 베트남인들의 배외적이고 맹목적인 단결, 그에 대응한 나의 대담한 대응과 두둑한 배짱 등등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는 적지 않다. 또 믿기지 않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호치민으로 날아가는 4시간 동안 베트남어학 책을 한 권 다 통독하고 사이공 거리를 다니거나 식당과 택시 안에서 기본적인 간단한 대화가 다 통한 일도 있었다. 중국어를 할 수 있으면 베트남어에 있는 6성의 성조를 빨리 터득할 수 있고, 어순도 중국어와 비슷한 데다 베트남어에는 한자어도 많아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어를 배우는만큼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숨은 사건(?)들에다 내가 가본 전쟁박물관에서 보고 느낀 베트남전쟁과 그 역사를 다 섞어서 제대로 된 인문학적 여행기를 쓸 형편과 시간이 되지 못해서 본격적인 경험담과 여행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호치민 근교의 구찌터널을 가본 것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이라도 언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오래 전부터 베트남전쟁을 연구하면서 접한 바 있는 곳인데, 직접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게 돼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패한 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한 가지 의미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구찌터널은 호치민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어 하루 당일치기 관광이 가능한 곳이다. 친구와 나는 미토에서 돌와온 뒤 바로 호텔 주변의 여행사를 찾아 가서 구찌 터널까지 왕복할 승용차와 기사 그리고 가이드까지 1명 붙여서 같이 떠났다.
호치민시를 벗어나서도 남국의 햇빛은 변함없이 여전히 따가웠다. 습기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나마 승용차에 에어컨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그다지 노면 사정이 좋지 않은 국도를 약 2시간 정도 달리자 우리를 태운 승용차가 구찌터널 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전시관 주위에 전시돼 있는 각종 전시물들을 본 뒤 안내를 받으면서 바로 땅굴 속으로 들어가봤다. 지상에서 땅속으로 통하는 입구는 몸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대단히 비좁았다. 뚱뚱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몸집이 크지 않은데다 마른 체구의 베트남인들만 들어 갈 수 있는 크기였다. 몸집이 베트콩들 보다 평균 1.5배 이상이 큰 미군 병사들은 이 입구를 찾는다 해도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10월 하순이라고 해도 한국의 한여름 보다 더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내 친구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매우 좁은 곳이지만 땅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완전 딴판이었다. 1965년에 완성된 이 지하 땅굴은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면 얕은 통로도 있지만 가장 깊은 곳은 대략 깊이 3층으로 파져 있고, 1층의 높이는 3m, 2층은 6m, 3층은 3m의 구조로서 지상에서 12m나 됐다고 한다.
깊이도 놀라웠지만, 지하 땅굴의 총 길이도 무려 200km나 된다고 하니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정말 새삼 인간의 초인적 힘을 실감하며서 불가사의한 일이다라는 느낌이었다. 거미줄 보다 더 복잡하게 연결돼 있는 미로 사이 사이의 지하 땅굴 속에 회의실, 작전상황실, 숙소, 식당, 부식창고, 화장실, 무기고, 의무실 등등 거주 및 지상에서의 게릴라 작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장비가 다 갖춰져 있었다. 월맹군, 즉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20여 만 명이 지하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 정도로 거대한 지하 요새였다. 놀라서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베트콩들은 사방팔방이 미로로 돼 있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호치민 시내로까지 연결돼 있는 지하 통로를 통해 수시로 지상으로 나가서 미군을 기습 공격하고 숨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호치민 시내에 빈발했던 폭탄테러나 미군공격, 남베트남군이나 혹은 민간인 린치사건들의 범인을 쉽게 잡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호치민시나 육상으로 통하는 비밀 출입구와 통로는 여러 곳이 있었지만 모든 통로와 출입구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네 사람의 여성 베트콩 뿐이었다고 한다.
이 터널 위 지상의 바로 맞은 편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사단 규모 이상의 병력들이 주둔한 미군 사령부가 있었어도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월등히 우수한 무기 장비로 무장한 미군이 초보적인 재래식 무기 뿐이었던 베트콩과 월맹군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나무나 기타 나무를 예리하게 깎아서 만든 갖가지 죽창과 나무창들을 줄로 연결해 놓아서 건드리면 순식간에 나무 위에서 떨어지거나 땅을 파서 만든 함정 속에서 튀어 나오도록 장치해놓은 부비 트랩(booby traps) 따위의 원시적 무기들이 한 두 종류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 영화에서 익히 봐오던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보니 섬뜩해서 모골이 송연했다. 한 마디로 베트남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이 거국적인 전 베트남민족의 게릴라전으로 첨단 무기장비를 이겨낸 비정규전의 승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찌 터널을 보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다음 번 베트남 여행의 목적지가 정해지는 듯했다. 베트남전쟁의 격전지 북위 17도선 중부의 안케패스, 후에, 다낭, 나짱(나트랑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나트랑은 당시 베트남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이 잘못 읽은 것임) 등지는 물론이고, 더 북쪽 월맹군의 심장부 하노이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계획에 올려놓기로 했다.
이윽고 우리를 태운 승용차가 호치민 시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몰의 해거름이 떨어지기 시작해도 우리가 도착한 호치민시는 여전히 후끈히 달아 있었다. 야자수 열매 아래 형성되는 남국의 야시장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0. 10. 25
호치민시에서 저녁 초고 기록
2021. 6. 15. 13:09 가필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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