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사막문명권의 실루엣을 만지게 한 몽골여행

雲靜, 仰天 2012. 6. 7. 21:28

사막문명권의 실루엣을 만지게 한 몽골여행

 
199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에 몽골을 일주일간(6. 5~6. 10) 여행한 적이 있다. 동행자는 후배 일명 "윤 트라볼타" 윤승권이었다. 당시 그는 중국 북경에서 또 다른 내 후배인 그의 친구와 함께 둘이서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수집차 중국을 자주 드나들 때였다. 일이 있거나 할 때는 한 달에 두 세 번 갈 때도 있었다. 나는 북경에 갈 때마다 중국의 다른 지방으로 가지 않는 한 대부분 그 후배들 집에서 묵었다.
 
6월 초 어느 날, 후배집에 갔더니 후배가 팔지 못하고 남은 한국산 브로치, 머리핀, 악세사리 등의 재고가 많다고 푸념을 늘어 놓고 있었다. 그 물건들은 그들이 모두 남대문시장에서 도매로 떼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뜸 그 재고품들을 몽땅 몽골에 가서 팔아 줄테니 짐을 싸라고 하자 자기도 데려가 주라면서 금방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을 떠날 때 계획한 한 가지 몽골여행 목적에다 두 가지를 더 보태게 됐다. 몽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보는 계획에다 더해진 북경 두 후배들의 재고상품 처리해주기, 몽골과의 비지니스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비지니스에는 여행코스 개발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일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북경에서 고생하면서 사업하고 있는 두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출로를 찾아주려고 한 것이었다.
 
우리는 재고 상품을 꾸려넣은 큰 여행용 가방 두 개를 각기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일정은 미리 정해놓진 않고 대충 일주일 예정으로 갈 때는 비행기로 가고, 올 때는 북경-울란바타르-모스크바를 오가는 국제선 열차로 만주리를 넘어 북경으로 돌아오기로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울란바타르에서 상황을 보고 괜찮으면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계속 북서쪽으로 더 올라가서 몽골 국경을 넘어 세계 최대의 담수호 러시아 바이칼 호수의 도시 이르쿠츠크까지 가보려고 생각했었다.
 
몽골은 초행이었다. 입국에 필요한 몽골 비자는 미리 서울을 떠나기 전에 서울의 몽골 대사관에서 받아 놨다. 지금 기억으로 당시 몽골비자 신청 비용은 4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였다. 다른 나라 비자신청비에 비해 꽤나 비싼 편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남아 있다. 
 
북경의 수도공항에서 연발 6시간! 항공사에서 연발을 알리는 방송 페이징이 흘러나왔다. 출발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계속 공항에서 기다릴 수 없어 인근 호텔로 가서 휴식을 취할 것이니 몽골행 비행기 탑승객들은 몇 번 게이트 앞으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북경에는 국제선 비행장은 수도비행장 하나 밖에 없었고, 항공기도 정시에 출도착 하는 일이 드문 시절이었다. 우리는 짐을 들고 항공사 측에서 잡아준 인근 호텔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간단한 점심도 제공됐다.
 
우여곡절 끝에 이윽고 오후 늦게서야 우리를 태운 비행기가 이륙했다. 처음 가는 사막과 초원의 나라 몽골이어서 가슴이 많이 설랬다. 울란바타르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으로 예정돼 있었다. 200인승 정도의 중형 비행기 안은 중국과 몽골을 오가는 몽골의 비지니스업자들, 중국인 관광객들과 학자들로 보인 서양인들로 가득 찼다.
 
이륙 후 한참이 지나서 비행기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푸른 뭉게 구름이 일어나고, 그 아래로 고비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숲은 없고 약간의 작은 야산들과 동물들이 오가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개미처럼 작은 점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두 시간 후, 우리는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의 공항에 당도했다. 비행기에서 내다 본 울란바타르 공항은 우리의 지방 도시의 소공항 규모로 크지 않았다. 입국수속은 까다롭지 않았다. 몽골 반점(Mongorian mark)을 같이 공유하고 있고 고려말 한 때는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이 나라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되니 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짐을 찾아 공항 청사를 나서니 미리 연락을 받은 몽골 친구가 고맙게도 차를 몰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 몽골 친구는 오래 전부터 알게 된 건 아니었다. 그보다 약 한 달 전 쯤, 나의 든든한 동행자 윤승권과 내가 인천에서 배로 중국 천진으로 들어 가던 여객선 선상에서 만나 알게 된 사이였다. 여객선 객실에서 서로 얘길 나누면서 몽골 음식도 얻어먹어 보기도 하고, 유쾌하게 그 일행들과 같이 떠들고 웃으면서 여행을 한 상인들이었다.
 
10여 명의 몽골인들 중에는 아주 교양과 품위가 있어 보이는 40대 초반 정도의 아주머니도 한 분 계셨다. 그는 누가 봐도 기품이 있어 보여 고운 자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는 영어도 못하고 중국어도 못 한다며 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서 나에게 "인텔리겐차!"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면서 러시아어로 러시아를 말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마침 대만에서 석사 과정 중 러시아어를 수강해서 배운 바 있어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계속 러시아어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부친이 몽골군 장군이었다고 했다. 니체가 미치도록 좋아했다가 실연 당한 러시아 장군의 딸 루 살로메가 연상되는 몽골군 예비역 장성의 딸이었다.
 
대화 중에 나는 그들 몽골인들에게 몽골역사를 공부한 바 있어 꼭 실제 몽골땅을 밟아 보고 싶다고 했다. 러시아혁명 이후 1924년 몽골이 소련 볼셰비키 혁명세력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사실, 장개석과 달리 모택동이 몽골을 독립시켜준 배경, 그리고 한국전쟁 때 몽골에서 수만 마리의 말을 북한에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 부상자들을 몽골에 데려가 치료까지 해준 사실을 예로 들면서 몽골 현대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다음 번에 북경에 가면 그 때는 혹시 몽골에 가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를 환영한다고 하면서 후배와 같이 오라고 명함을 건네 주어서 전화로 연락을 해오던 중이었다. 
 
우리는 몽골친구의 환영 속에 승용차에 몸을 싣고 울란바타르 공항을 출발해서 도심을 향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멀리 울란바타르 시가지의 실루엣이 선연하게 보이는데도 시간이 그 정도나 걸린다고 했다. 그만큼 공기가 맑았다는 소리다. 일망무제의 사막에서는 눈에 걸리는 게 없으니까 몽골인들은 눈이 좋아서 시력이 평균 5.0이나 된다는 말이 실증적으로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난생 처음 접하는 몽골의 첫 인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공기가 대단히 맑았고, 날씨도 너무 좋았다. 6월인데도 낮엔 대략 섭씨 17도에서 18도 정도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햇빛은 따사로우면서도 피부에 닿는 공기는 감촉이 시원한 날씨였다. 
 
우리는 울란바타르 시내로 향해 가는 도중에 재미 있는 광경을 보게 됐다. 우리 승용차가 달리는데 2차선 포장도로 양쪽에 자동차 소리를 듣고 바깥에 나와 초원에서 햇볕은 쬐고 있던 제법 큰 동물들이 제각기 순식간에 자기들이 파놓은 땅속 구멍으로 쏙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마치 바닷가 모래사장의 게들이 인기척을 듣고선 구멍으로 쏙쏙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너구리, 오소리 따위의 동물들이었다.
 
공기도 맑고 시야가 확 트이는 이곳을 달리다가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몽골 친구에게 차를 잠시 멈추게 했다. 보기만 해도 체증이 확 가시는 듯한 시원한 초원에 서보고 싶었다. 울란바타르 시내 외곽의 초원에 서니 공기가 너무가 맑아서 머리에 끼인 때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듯해서 환호성이 저절로 나온 기억이 새롭다.
 

울란바타르 공항에서 울란바타르 시내로 들어가는 근교의 초원, 공기가 너무 맑아 도회생활에서 찌든 오래된 노폐물들이 모두 몸에서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몽골의 공기는 정말 너무나 맑고 신선했다. 비단 초원뿐만이 아니라 도심에서도 비가 온 뒤에 나타나는 무지개가 어릴 적에 봤던 크기 만큼 엄청나게 컸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데, 솔롱고스는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뜻이다. 즉 몽골인들은 한국인들을 '무지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마도 과거 몽골인들이 고려인들의 오색 한복 색깔을 보고 그렇게 불렀던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울란바타르 시내에 도착해서 호텔에는 투숙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몽골 친구들이 소개해준 아파트에 묵었다. 값이 굉장히 저렴했다. 방 두 개에다, 피아노까지 놓여져있는 거실, 식당, 화장실이 있는 약 스무 댓평 정도의 아파트에 민박하는데 하루 20달러! 우리는 몽골을 떠날 때까지 여기서 머물면서 식사는 집에서 해결했다. 시장에 가서 쌀, 계란과 여러가지 부식들을 사와서 밥을 해 먹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내가 준비해간 소고기 볶음 고추장, 명태, 김으로 계란 넣은 명태국을 만들어 먹었다. 고추장과 명태국이 입맛을 잃지 않게 해줬다. 또 간혹 김밥을 싸서 돌아다니면서 먹기도 했다.
 

몽골의 시장은 추운 겨울날씨를 감안해 주로 건물 내에 있었다. 시장이든, 바자르든, 아파트든 모든 건물의 문과 창문은 거의 다 세 겹으로 돼 있었다. 물론 한 겨울에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돼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몽골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나 보다 훨씬 식성이 좋고 비위도 좋은 윤 트라볼타도 그다지 몽골 음식을 좋아하진 않았다. 우리는 이미 인천에서 천진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몽골 친구들이 건네준 말린 고기를 먹어 본 뒤로 몽골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 머리에 인식됐다. 말린 말고기는 입에 넣는 순간 바로 욱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음식을 준 사람들에게 대단한 실례란 걸 알면서도 자제할 만 겨를도 없이 바로 음식이 입에서 욱하고 튀어 나왔다. 노린네가 엄청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는 달랐다. 그는 입에 넣은 고기 덩어리를 씹느라 우물거리면서 몽골인들을 보고 웃는 얼굴로 히죽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도 역한 냄새가 심히 역거웠지만 그래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끝까지 씹어삼켰다. 역시 천하의 상남자 윤 트라볼타였다!
 
몽골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당시 울란바타르에는 한국 식당이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어 일식당이나 중국식당을 찾아 가려고 했다. 해외여행을 다녀 보면 한국 음식이 없을 땐 가장 우리 음식과 유사해서 그래도 입맛을 약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일식과 중국식이다.
 
그런데 울란바타르엔 일식당도 없었고 중국식당만 한 곳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중국집을 찾아갔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진 모르겠지만,  몽골 체류 중 매일 밤 10시 반까지 해가 지지 않는 백야였기 때문에 한국시간에 맞춰 저녁을 6시에 먹고 나면 그래도 해가 지지 않고 허연 대낮 같아서 정말 따분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매일 5성급 호텔에 가서 보드카를 마셨다. 러시아산 보드카도 있었지만 상표에 징기스칸 얼굴이 그려진 몽골산 보드카도 있었다. 
 
아뭏든 우리는 그 다음 날부터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우선, 가져간 브로치, 악세사리 등의 물건을 팔아치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나의 부탁을 받은 몽골친구들이 미리 몇몇 회사에 연락을 해 놨다. 우리는 물건이 든 큰 가방 두 개를 하나씩 들고 시내에 위치한 어떤 무역회사로 택시를 타고 찾아갔더니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 기품 있어 보이는 여사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는 영어가 가능해서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간단하게 흥정을 하고 난 뒤 바로 시원스럽게 물건을 처리해줬다. 그리고 결제 대금으로 현찰도 받았다. 
 
이어서 또 다른 회사 두 군데를 더 다녔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그곳 사장들과 몽골에서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몽골이 양모수출국답게 대부분 양모를 수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양모는 몽골이 해외에 수출하는 상품들 중에 가장 많아 나가는 주력 품목이었기 때문에 몽골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정부에서 제공하는 인센티브 같은 것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들처럼 여행코스 개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길 나눠봤다. 몽골에 오기 전 나는 그냥 상상으로 몽골은 야생동물들이 풍부하고 전국 곳곳에 여기저기 담수호도 많기 때문에 사냥, 낚시를 하면서 힐링을 하면 한국에서나 중국인들이 몽골로 많이 찾아들 것이고 북경에서 여행사를 차려놓고 있는 두 후배에게 아웃바운드로 여행업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우선 몽골에서는 사냥을 하려면 정부에 사냥허가 신청을 해야 했다. 사냥을 신청할 때도 날짐승과 들짐승으로 나눠서 신청해야 한다고 했다. 왠고하니  중국에서 동식물을 보호하고자 날짐승을 신청한 사람은 날짐승만 잡아야 되고, 들짐승을 신청한 사람은 들짐승만 잡아야 된다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날짐승을 신청해 놓고 사냥 중에 들짐승이 눈에 띈다고 해서 들짐승을 잡았을 경우에는 벌금을 물고 심할 경우에는 강제 추방까지도 당할 수 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낚시에 대해선  그다지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후배가 관심 있어 한 비즈니스도 알아볼 겸 해서 우리는 한국산 중고자동차를 몽골에 수출하는 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몽골친구의 안내로 울란바타르시 외곽에 위치한 중고자동차 매매시장에도 가봤다. 그 곳에 가보니 주로 소련제, 스웨덴제, 독일제 자동차들이 많이 거래되고 있었다. 한국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시내를 돌아다니던 차들 중에 뒷 유리에 한국에서 쓰던 대로 "마포 유치원"이라는 글자나 혹은 승합차 노선 번호가 지워지지 않은 채 달리는 승합차를 본 것이 전부였다. 
 
3일간 돌아다닌 결과 이제 공식 비즈니스가 끝났다. 관광하는 일만 남았다. 1주일 간 머물면서 몽골 친구들의 안내로 수도 울란바타르의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중간에 친구의 주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는 아주 덩치가 큰 여성이 통역으로 우리를 따라 다니면서 이것저것 성심껏 많이 도와줬다. 통역비는 몽골 측 친구회사에서 지불했지만 아무튼 대단히 고마웠다. 오후 잠시 비가 오고난 뒤 굵은 무지개가 떠길래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옆에 서니 노린내가 진동을 해서 잠시 숨을 멈추고 서 있었던 기억이 있는 여성이었다. 
 

울란바타르 시내 거리 광경. 이 시기만 해도 울란바토로는 인구도 50만 명 밖에 되지 않았고 거리도 한산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또 당시는 길거리를 돌아다녀 보면 러시아인과의 혼혈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의 덩치도 컸다. 마치 과거 우리사회에 6~70년대 미국인과의 혼혈아들이 있었듯이 몽골도 러시아의 지배를 70년이나 받다 보니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 전에 하루는 먼저 몽골 친구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자기 남편, 두 아이들과 함께 음식과 돗자리 등을 준비해서 울란바타르에서 자동차로 대략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초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가는 도중에 몽골 친구의 친지가 사는 집에 들러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한국인 아낙네로 보인 그 집 주인이 우리가 왔다고 특별히 바베큐를 만들어 대접했다. 우리의 불고기와 흡사한 모양의 바베큐 맛을 보니 불고기와 거의 진배 없었다.
 
우리 일행은 야외 초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야산이 있고 또 조그만한 계곡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옆 초지에는 엄청난 크기의 오래된 철제 솥이 놓여 있었다. 내 기억으로 대략 높이가 1m 50, 직경이 2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솥이었다. 몽골 친구 남편의 설명으로는 그 솥은 대략 몽골의 징기스칸 전성기 시대에 몽골 병사들에게 음식을 해먹인 취사용 솥이었다고 한다.
 

초원에 설치돼 있는 우리의 간이 화장실 같은 진짜 화장실. 몽골의 분뇨처리 문제 그리고 시체 처리 문제에 대해서 나중에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별도로 소개할 생각이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인천에서 천진 가는 여객선 배 안에서 보았듯이 또 다시 몽골 친구 가족들은 말린 고기를 끄집어내서 큰 칼로 썰어서 먼저 우리 둘에게 한 조각씩 먹어보라고 권했다. 고기를 먹는데 그들은 우리처럼 김치나 채소 같은 건 일체 없었다. 오로지 고기뿐이었다. 손님에게 먼저 청하는 예절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몽골도 같았다. 다만 나는 여기서도 몽골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난 번처럼 토해내서 또 다시 결례를 반복할 순 없었다.
 
"용감한 자"라는 의미를 지닌 몽골은 면적이 우리 한반도의 7배가 되는 큰 나라다. 그에 비해서 인구는 이제 겨우 3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년에 반이 겨울인 이곳에서 엄혹한 추운 탓에 신생아들이 쉽게 자라지 못해 사망율이 높아서 인구가 오랫동안 증가하지 못했다. 몽골 정부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겨우 200만 명이 넘은 것도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그래서 몽골은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지만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다 보니 위생학 만큼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 받을 정도로 발달돼 있다.
 
사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외에 몽골인구가 적었던 이유는 역사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에 대해선 중국의 책임이 크다. 즉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골에 침략을 받아서 나라까지 다 내주기까지 혼쭐이 났던 중국 민족이 그 뒤로, 특히 명청대에 와서는 몽골민족에게 두번 다시 당하지 않도록 고안해낸 정책을 시행한 탓이었다. 중국은 몽골이 다시 강성해지는 걸 막을 요량으로 그들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썼다. 그 중에 불교를 장려했던 것도 한 가지였다. 불교를 장려하면 우선 출가승려들이 많아지는데 그러면 자연히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는다. 또 불교의 불살생 계율이라든가 평화정신 때문에 몽골민족의 상무정신이 줄어들기 때문에 호전성을 제어해서 또 다시 몽골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중국인다운 묘책이었다.
 
여기에다 몽골이 인구를 늘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남성이 바깥 초원으로 일을 나가면 전통가옥인 기르(중국어로는 빠오 包)에 남아 있는 여성들이 길손의 성교 요구에 응해서 아이를 낳아도 용납되던 문화도 인정됐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무조건 아무 남자나 다 받아주는 건 아니었다. 길손이 집주인 여성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몇 살이라고 답을 하면 관계에 응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습속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골고루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인류학적 특징인데, 모두 인구를 늘리기 위해 용납되던 고육지책의 수단이었다. 문화인류학에선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過客婚"이라고 칭한다. 영어로는  "Past Guest Marrige"라고 부른다.
 

몽골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몽골독립의 영웅 담디니 수흐바타르(Damdin"i Suhbator)의 동상 앞에 선 젊은 날의 필자. 내가 2003년에 출판한 나의 저서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 인물이어서 아주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동상의 말 탄 이가 바로 수흐바타르이다.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하고 몽골이 독립을 하는데 큰 공을 세운 현대 몽골민족의 독립영웅이다. 그는 지금도 몽골인들에게 "몽골혁명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우리 일행은 야외 소풍에서 한참 동안 놀고 쉬었다가 오후쯤에 울란바타르로 돌아왔다. 소풍을 오가면서 본 몽골민족의 전통적인 이동식 천막가옥인 기르와 어울어져 시원스레 펼쳐진 초원과 시골지역은 그야말로 몽골다운 전형적인 유목문화의 정경이었다.
 
반면, 당시 인구 50만 명의 수도 울란바타르는 전혀 달랐다. 소련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서 그런지 거리에는 소련풍의 건물, 몽골인과 러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 많이 눈에 띄었다. 몽골민족은 우리 한민족과 뿌리가 같다고 하지만 사실 외양을 보면 얼굴 생김새나 몸집으로 보나 러시아인에게 더 가까워 보였다.
 
한국이 영어와 미국문화에 잠식돼 있다면, 몽골은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화에 종속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영어 알파벳은 보이지도 않았고,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내게 영어통역으로 붙여준 프랑스유학 출신의 젊은 인텔리 여성 외에는 극소수였다. 거리에 나붙은 간판의 문자도 모두 구몽골어(파스파 문자)가 아니라 러시아어의 끼릴 문자뿐이었다. 중국세력이 물러난 지 오래돼서 그런지 한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몽골인들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중국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눈에 띈 중국상회 간판에만 한자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소련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도처에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어를 읽고 간단한 회화 정도는 말할 수 있던 나로선 덕분에 소통하는데 도움이 돼서 좋았다.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곳곳에 과거 소련군이 70년간 주둔했던 소련군 기지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루는 몽골 친구들이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구 소련군 기지 내에 있던 외국인 전용 바에 갔다. 우리로 치면 미군이 주둔한 용산 미 8군 부대 같은 곳이었는데, 소련군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던 곳이었다. 보드카는 당연하고, 틀어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죄다 소련 음악 일색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몽골은 중공업은커녕 경공업도 발달하지 못해서 대부분의 일상 생필품은 외국에서 수입해다 쓰고 있었다. 그래서 맥주, 약품, 가전제품을 포함한 이런저런 생필품은 외국제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우리를 환대해주고 안내해준 몽골 친구들과 함께 구 소련군 기지 안 칵테일바에서
이 몽골 여인들은 지금은 예순이 넘었거나 거의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됐을 것이다.
가요라곤 흘러간 영어로 된 팝송과 러시아어 노래뿐이었지만, 평소 가수 소릴 들어오던 차에 몽골땅에서 노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 후배 윤승권(맨 오른쪽)

아무튼 짧은 일주일 기간이었지만 여행 성과는 작지 않았다. 우선, 맑은 공기에 머릿속 때들을 말끔히 다 지울 수 있었다. 여기에다 후배들이 골머리를 앓던 재고품들도 한 방에 해치웠으니 혹을 뗀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동안 책에서만 보던 몽골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사막문명권에 대해 새롭게 눈 뜬 계기가 됐으며, 여기엔 역사해석에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농경문화와 확실히 달리 인식해야 될 이유를 확인하게 된 소득도 있었다. 고비사막을 중심으로 그 남쪽 정주의 농경문화권과 그 북쪽의 이동 유목문화가 확연히 갈렸다. 이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별도의 전문적인 글로 소개할 필요가 있어 여기선 생략한다. 또한 몽골이 20세기 20년대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 정권의 힘을 빌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고, 나중에 1950년대 초에 모택동의 결단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뤘지만, 또 다른 외세인 소련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여행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몽골의 최대 축제인 나담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기차역까지 환송나온 몽골 친구와 함께 기념촬영. 그로부터 근 30년이 흘렀지만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연락처도 끊겼다. 내년쯤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몽골을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그때가 되면 이 친구들을 한 번 수소문해볼 생각이다.
동행한 윤승권과 함께. 이 국제열차로 울란바타르를 떠났다. 이 열차는 북경과 모스크바를 왕복하는 국제열차다. 당시 내가 시베리아 횡단여행이라는 대로망을 꾸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 전후였다.

 
열차가 서서히 플랫폼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정이 듬뿍 든 여행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침 햇살이 따사한 플랫폼에서 흘러나오는 고음의 티베트 여성가수의 노랫소리가 이별의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날 아침의 그 노래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가수가 부르는 엄청난 고음의 노래소리를 뒤로 한 채 우리가 탄 열차는 그렇게 떠났다. 몽골 친구도 모습이 점차 작아 졌다간 결국엔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열차가 이윽고 기적을 울리면서 울란바타르 역을 완전히 벗어나자 우리는 지정된 객실 칸막이 방의 좌석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몽골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자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손자에게 찡긋 눈인사를 했다. 우리는 열차를 타기 전에 미리 아파트에서 김밥을 싸 가지고 왔다. 썰지 않은 김밥을 통채로 손에 들고 둘이서 우걱우걱 씹어 먹는 걸 보고선 맞은편의 몽골인 손자와 할머니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먹어볼래 하면서 하나씩 줬다. 두 사람은 난생 처음 본 것인데 뭔가 검은색 뭉치 같은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직접 먹어보니 너무 맛있다고 기뻐했다.
 

 
울란바타르를 벗어나니 이제는 보이는 건 초원과 낮은 구릉지대와 사막의 모래뿐이었다. 열차가 쉬지 않고 달려도 끝없는 평원의 연속이었다. 또 한 가지, 실제 두 눈으로 확인한 게 있다. 철도의 폭이 다른 두 철길이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일제 침략사와 러일관계사를 공부할 때 일본이 몽골을 점령하고나서 적계 러시아를 공략하기 위해 철도를 폭이 좁은 협궤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러시아의 공격에 밀려서 후퇴할 때는 이 철도를 다 걷어냈는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광궤 철도인 러시아가 이 철로를 탈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점심은 열차 내 구내식당에서 때웠다. 그리고 진열장의 보드카를 그냥 놔두고 지나칠 순 없었다. 음주가무라면 역시 한 술하던 윤 트라볼타도 가만 있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식당 차에서 마시는 보드카의 맛이란! 마셔 보지 않는 자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마치 사과를 먹어 보지 못한 아프리카 사람에게 사과 맛이 어떻다고 설명하는 거나 똑같다. 암튼 그 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비사막의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 초여름 햇살이 설핏할 때가 된 오후 무렵, 달리던 열차가 한 역에 멈춰섰다. 밖을 내다보니 민가가 몇 채 없는 아주 초라한 촌락의 작은 역사였다. 플랫폼엔 이미 제각기 우유차통을 들고선 차를 사주라고 호객하는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나이 또래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나와 있었다. 차를 한 잔 사서 마시면서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찡해온다. 내 유년의 모습이 일렁이는 모래바람 속에 그기에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미군들에게 비친 헐벗은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순간,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었다. 왜 그들은 문명의 이기와 전혀 상관없는 황량하고 편벽한 이곳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그곳에서 운명처럼 살아야만 할까? 어쩌면 나의 이 생각이야말로 문명에 찌든 오만한 발상이 아닐까? 어쩌면 그들이 도시인들 보다 훨씬 더 행복한 건 아닐까?
 
열차는 가던 길을 다시 떠났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철마처럼 달렸다. 나는 어둠이 짙어오자 이내 스르르 잠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후배가 급히 나를 흔들어 깨운다. 잠결에 깨고 보니 공안들이 열차로 올라와 열차 안 짐칸뿐만 아니라 천정까지 다 뜯어보면서 혹시 양모 밀수품이 있는지 샅샅이 찾아보고 있어 차안은 어수선하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차창으로 내다보니 바깥 역사에 "二連浩特"라는 표지가 보였다. "아, 이제 중국에 들어왔구나, 이것이 내가 역사책이나 지리부도에서 자주 접하던 중국과 몽골의 국경역인 얼롄하오터구나!"
 
차장이 내게 다가와선 중국 입국비자 심사를 하니 패스포드를 보자고 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제서야 나는 몽골에서 중국 들어가는 재입국 비자를 울란바타르의 중국대사관에 가서 신청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못했던 게 떠올랐다. 비자가 없어 입국이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장이 중국거류증이 있던 후배는 놔두고 나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내가 내리자 열차는 바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설마 나를 두고 떠나겠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일순 긴장이 됐다. 차장을 따라 역사 사무실로 갔더니 역장인 듯한 사람이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하는 사람인데 비자 없이 국제열차를 탔느냐고 했다. 순간 나는 머릿속에 반짝이는 기지가 떠올랐다.
 
"나는 대만에서 중국역사를 공부하는 한국유학생입니다. 그런데 몽골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중국입국 비자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만에서 우리가 배우기로는 장개석의 통치하에 아직도 몽골은 중국의 일부라고 배웠기 때문에 비자가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역장은 이렇게 물었다. "참 그렇지! 우리는 몽골을 독립된 나라로 가르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은 아직도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알았어요, 돈은 얼마 있어요?"
 
나는 일부러 수중에 중국돈 20원 짜리 한 장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역장은 껄껄 웃으면서 그 돈이면 됐다고 한다. 그리곤 내가 내민 돈을 받으면서 나의 패스포드에 비자 도장을 "꽝!"하고 기분 좋게 찍어주는 게 아닌가! 내게는 비자 없이 승차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비자를 정상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비자를 받았으니까 말이다.
 
다시 차장을 뒤따라 갔더니만 열차는 다른 철로에 들어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배는 걱정을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차는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이튿날 정오쯤 여전히 종착역인 북경 서역으로 들어가는 열차 속에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고 나니 그날따라 북경은 대단히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떠난지 만 이틀도 안 됐는데도 벌써 몽골 초원의 시원한 날씨가 그리워졌다. 이제 다시 만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다시 보자 몽골이여! 기다려라 울란바타르여!
 
2012. 6. 6
북한산 淸勝齋에서 초고
2022. 4. 23. 08:37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