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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의 초대전을 보고

雲靜, 仰天 2021. 3. 7. 05:17

‘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의 초대전을 보고

 

'쩐의 작가' 변영환 화백이 이번에도 일을 냈다. 자신의 고향 천안에서 초대받은 초대전에서 또 한 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쩐’으로 '쩐'의 유희를 벌이고 있다. ‘쩐’이란 속어로 돈을 가리킨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또 돈을 싫어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인간들이다. 한 마디로 돈에 미친 세상이다.
 
그런데 작가 변영환에게는 오래 전부터 돈이 돈 이상의 무엇을 표현해내기 위한 오브제일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관찰을 제대로 했다면 변 화백이 돈을 오브제로 사용한 초기에는 주로 동전을 많이 사용하다가 점차 종이돈으로 확장된 느낌이다. 진짜 한국돈 지폐와 달러를 사용하기도 하고, 그것들을 복사해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다는 작가가 돈을 오브제로 돈 이상을 조형해내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돈과 인간이 얽힌 이중성, 맹신성, 물신성, 돈의 순기능과 역기능이다. 한 마디로 돈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과 모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딜레마요 이율배반임을 체득케 하려는 것이다.
 
그 현장에 가보니 이번에도 변영환은 돈을 가지고 질펀하게 한 바탕 잘 놀고 있었다. 전시장 초입에 걸려 있는 전시 광고포스터부터가 심상찮다. “貨嚴의 딜레마”, 그가 이번 초대전에서 선보인 작품의 컨셉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華嚴의 세계와 쩐의 모순관계를 문제 삼아 보겠다면 "華嚴의 딜레마"라고 해야 할 것인데 화려할 華자 대신 재물을 뜻하기도 하고 貨幣를 말할 때 쓰이는 貨자를 썼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바가 있어 그렇게 조어했으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貨嚴의 딜레마라?
 
불교의 화엄 세계에서는 존재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 多卽一, 一卽多의 이 세계에는 만유가, 일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잘난 자도, 못난 자도, 주인도, 나그네도, 깨친 자도, 못 깨친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함께 존재한다. 잘난 자만이 법계를 장엄하는 게 아니라 못난 자도 똑같이 법계를 장엄한다. 깨친 자만이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못 깨친 자도 법계를 장엄한다. 주인만 필요한 게 아니라 손님도, 나그네도 똑같이 필요하다. 잘난 자, 못난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주인과 나그네가 무량겁의 重重緣起로 인드라의 그물코처럼 서로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 한 동안 불교에 심취한 바 있는 변 화백은 "華嚴"을 슬쩍 "貨嚴"으로 바꿔 놓고선 잘난 자와 못난 자, 주인과 나그네, 깨친 자와, 못 깨친 자, 부자와, 가난한 자처럼 인간 모두가 돈을 위해 살고 돈을 위해 죽는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일깨워주려고 작정한 듯하다. 物神性을 고발하고 즉물적인 인간사의 허망함을 질타하는 듯하다.
 
변영환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학교에서나 종교에서나, 아니면 책에서나 살아가면서 무소유가 자신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들며, 돈 보다는 인간이 먼저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모두가 돈을 위해 미쳐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과 딜레마를 “쩐”으로 현시한다. 작가는 쩐을 존중하고, 쩐을 희롱하고, 쩐을 비난하고, 쩐을 동경하고, 쩐을 풍자하고, 쩐을 만지고 싶어 한다.
 
변영환은 그 동안 이 염원을 수 없이 많은 행위예술로도 표현해왔다. 이번 전시회처럼 전시회 현장에서 동전과 지폐로, 또 다른 오브제를 동원해 "쩐의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엔 이 작지 않은 조형물을 발파하듯이 무너뜨리는 행위를 보여 온 그의 작업과 작품은 미술 고유의 공간을 넘어 행위예술로도 이어진다. 쩐이 좋은 것이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어서 모두가 미친 듯이 추구하지만 결국엔 바벨탑처럼 무너지고 만다는 가르침을 망치로 뒷골을 강타하듯이 일깨운다.
 
변영환의 작품에는 쩐이 핵심적인 오브제로 동원돼 있지만, 그 쩐에 얽힌 인간과 인간사회의 얘기를 위한 오브제로 다양한 물건들이 또 동원되고 있다. 불상, 불경이 사경된 서예작품, 법전, 마네킹, 구두, 안경, 해골, 예수상, 불상,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여러 가지 장난감, 나무토막, 철사 등등 갖가지다.
 
압권 중의 하나는 동전으로 돈 꽃이 만발하게 하듯이, 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돈을 생각하는 광경을 연출하듯이, 여기에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인 메두사까지 소환시키고, 성스런 이미지의 예수와 부처까지 등장시켜 돈을 쫓다가 돈으로 망하는 인간과 세상을 풍자한다. 작가 변영환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다양하고 기발한 오브제들로 쩐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성찰의 무게를 더해주는 장치에 그 묘미가 있다.
 
고향의 대표적인 미술관이 특별히 작가를 겨냥해서 초대한 이번 초대전은 천안이 낳은, 천안을 넘어선 “전국구” 작가 변영환이 지금까지 해온 작업의 중간 결산 정도쯤의 전시회가 아닌가 싶다. 초대한 측에선 지금까지 서울에서 선보인 것들을 고향에서도 베풀어달라는 무언의 바람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아무튼 변영환의 작품과 그 정신세계가 이제는 고향과 서울과 대한민국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이나, 자본주의를 혐오해서 새로운 대안 이념을 만들어낸 사회주의 국가 중국 등지의, 지구촌 세계로 비상하는 자양분을 함축해가고 그의 열정과 에너지가 비축되는 여정이기를 기원해본다.
 
2021. 3. 7. 5:4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동전으로 만든 돈꽃, 심상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면서 실제 꽃 이상의 미감을 돋군다.
"머리 속에 똥 밖에 들어있지 않는 인간"이라고 욕하듯이 머리 속에 온통 쩐으로 가득한 현대인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현대인은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 로뎅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이 쩐을 생각하는것을 조형화함으로써 쩐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물신성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인 "쩐의 바벨탑". 높이가 자그만치 10m가 되는 이 탑은 여타 작품들을 압도한다.
변영환의 작품은 이미 협소한 캔바스를 벗어난 지 오래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이뤄낸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폭의 제한이 주는 옹색함을 훌훌 벗어버리고 가치의 단일성과 사유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가 전시회장 안의 바닥에다 1주일 이상 걸려서 10m나 쌓아올린 "쩐의 바벨탑"은 바로 현대미술의 응축이다. 전통적인 그리기에서 용접, 조각, 공예, 심지어 퍼포먼스적인 행위예술, 설치예술, 키네틱예술에 이르는 무변으로 확장된다. 탑신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은 石柱나 나무가 아니라 동전을 모아서 한 묶음으로 만든 錢柱다. 이를 쌓아올린 수고로움이 범상치 않다.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동전과 실제 사용이 가능한 종이돈이 주요 오브제이지만 그 밖에도 마네킹, 예수와 석가상, 지필묵, 구두, 사전 등등의 소품들이 사용된 쩐의 바벨탑에는 쩐에 찌들어 사는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풍자하고 인간사의 허망함과 공허함을 체득케 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주는 경건성과 쩐의 물신성을 결합시켜 가시 돋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암시하는 철조망에 갇혀 있는 모습을 조형화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풍자에 성공한 작품이다.
변영환의 작품들에는 미술이 놀이에서 출발했듯이 오락과 여흥도 듬뿍 가미돼 있다.
전시 마지막 날에는 이 쩐의 바벨탑을 작가가 직접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로 대미를 장식한다. 나는 몇 년 전 그의 서울 전시 때에 그 웅장함을 직접 목도한 적이 있어 이번 퍼포먼스도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변영환은 신명나고 질펀하게 노는 놀이와 해머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풍자와 카타르시스의 통쾌함을 선사할 휘날레로 사람들을 성찰과 사유의 경지로 이끈다.
그리스 신화에 출현한 메두사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쩐과 결합시킨 작품
작가 변영환과 함께. 오른쪽이 작가, 왼쪽은 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