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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봄앓이’를 쓴 동기 : 시인이 시를 쓰는 마음

雲靜, 仰天 2021. 4. 21. 22:29

시 ‘봄앓이’를 쓴 동기 : 시인이 시를 쓰는 마음

 

시인은 왜 시를 쓸까? 시인이 되기 전, 아주 오래 전 젊은 시절,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곤 세월이 순식간에 많이 흘렀다. 이제 어줍잖지만 시인이 되고난 뒤 그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어 본다. 그렇다고 이 주제와 관련해서 무슨 거창하게 작가론이나 시론에 대해 미학적인 관점에서 쓰는 본격적인 글쓰기는 아니다. 그저 가볍게 머리를 풀어보는 워밍업 정도다.
 
시를 쓰는 동기나 목적은 시인마다 다르다. 또 어떤 시를 쓰는가에 따라서도 다르기도 할 것이다. 그저께 지인들에게 보낸 나의 졸시 ‘봄앓이’를 보고 지인들이 보내온 답글들을 통해 나는 왜 시를, 그것도 특히 슬픔, 비통, 애통, 통한 조의 시를 많이 쓰게 되는지 생각해봤다. 물론, 이 시 ‘봄앓이’를 쓰게 된 것은 내 심사의 일부를 드러냄으로써 마음을 정화시키고자 한 동기가 있었지만 지금부터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비단 이 시 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글의 맥락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내가 보낸 졸시 ‘봄 앓이’를 보고 얘기하는 것이 옳겠다. 아래에 다시 올려놨다.
 
봄앓이/서상문
 
해마다 봄이면 봄앓이를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천지에 흩날리면
눈물도 후두둑 떨어진다.
지는 꽃잎이 서럽게 아프듯이
가슴이 따가워 펑펑 운다.
 
아름다운 이 별을 떠날 걸 생각하니
가는 세월 못내 아쉬워서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해서
 
꽃이 지니 내가 지고 만다.
미련 없는 無化에 미련이 남아
달구똥 같은 눈물을 떨군다.
 
더러운 세상이 날 찾지 않는 게 아니다.
시드럭시드럭 꽃이 져버리듯이
순정한 내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거다.
꽃으로 폈다가 눈물로 버리는 것이다.
 
2021. 4. 21. 10:5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먼저, 위 졸시를 본 지인 중의 수필가 한 분이 내게 아래의 답글을 보내왔다.
 
오랜만입니다. 꽃이 진다고 너무 서러워 마세요. 내년 봄이면 또 다시 올텐데요 뭘! 인생도 그럴 걸요? 윤회를 거듭한다니 이 몸을 벗고 나면 또 다른 육신으로... 윤회의 사슬을 끊은 성인도 계시겠지만.^^ 물론 육신의 윤회만은 아니겠지요. 어리석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의 단절도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이겠지요.^^
 
내가 위 답글에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답을 보냈다.
 
쇤네는 아주 이중적입니다요. 사실 인연법을 잘 알아서 죽고 사는 거 이미 넘어선 상태여서 별로 슬프거나 아쉬운 거 없어요. 평소 죽는 연습도 많이 해왔어요. 그런데 중생들을 위해서 쓰는 겁니다. 쉿!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요. 혼자만 알고 계세요~ㅋㅋ
 
수필가 왈
ㅎㅎㅎ 그럼요. 불교박사님이신데... 쓰잘 데 없이 제가 나댔단 생각을 보내자마자 했어요.^^
 
雲靜 왈
아니요 제겐 재밌는 대화입니다. 안 그래도 불교를 좀 아는 친구가 아침에 나의 같은 시를 읽고 난 뒤 나한테 비슷한 말을 보내 왔어요. 재미로 제 친구와 주고받은 아래 문자들을 보세요. 그리고 맛점 하시고요~~
 
친구A 왈
어차피 갈 길인데 준비를 해야지. 서러울 것도 없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걸. 내가 지은 업으로 온 것이니 내가 정리하고 가야지. 난 정토수행을 시작했다. 난심지법이라고 하나 믿는 것은 개인 사정이니 수행을 권하고 싶구나. 내 자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라.
 
雲靜 왈
그래 나도 그런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생각에 너무 철두철미 해버리면 이런 시를 못 써요. 물론 오도송을 써도 되긴 하지만! 그 하부의 낮은 근기 단계에 머물면서 이런 글을 문화의 한 현상이나 장르로 쓰는 걸세. 나도 이미 마음은 그 경지를 훨씬 넘어서 있다네. 단지 다른 일반 중생들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글을 써주는 거지. 스스로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한 마디로 보살심이지!
 
세상에는 벼라 별 사람들이 다 있지.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근기도 제각기 다르고, 또 체득한 도의 정도도 많이 달라서 천차만별이야. 내 글을 보고 아래처럼 이런 반응을 보내 온 친구도 있어요.
 
친구B 왈
사람이 와 일렁죠···웃음도 주고, 눈물도 주고, 감탄도 주고, 탄복도 주고, 애잔함도 주고, 사랑도 주고, 정도 주고, 쓸쓸함도 주고···살면서 주고, 다주고 갈라 카네···.
 
위 글 속에는 이미 친구 B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는 마음이 내재돼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방향을 향해 있다는 소리다. 그가 나의 졸시를 접하고 미미해도 약간 마음이 순화되고 순간적일지라도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시를 쓴 나로선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일이 답글을 보내지 않아도 마음 속으로 약간의 공감대를 가지고 스스로 내면을 보는 이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문제작으로 알려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일약 20세기 최대의 작가 반열에 오른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도 나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행복은 몸에 좋다. 하지만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슬픔이다.”
 
기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기쁘고, 즐겁고, 유쾌하거나 혹은 그 대척점의 화냄, 분노 따위의 느낌을 주는 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런 마음 상태는 모두 氣를 들뜨게 만든다. 가라앉지 않는 氣로는 자기를 보기가 어렵다. 가라앉고 낮은 곳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본성에 접근할 수 있다. 묵상, 묵언, 입정, 좌선, 참선, 요가, 위빠사나 등등의 마음수행은 모두 먼저 자신을 가라앉고, 조용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로 가게 만들어서 시작한다. 이런 생각에 이르러 나는 다시 아래 내용을 친구A에게 보냈다.
 
드라이하지만 불교식 인연법에 순응하는 경계에 오르려면 그 아래, 아래의 단계에서 同體大悲, 측은지심이 생겨나는, 자기를 돌아보는 내면의 반성 단계를 거쳐야 된다고 봐. 근데 그 측은지심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사회와 사물에 대한 일체성에 기반한 동질성 회복, 즉 물아일체의 상태로 귀일해야 하거든. 이게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경계가 아닌가 한다. 이를 위해선 즐겁고 유쾌한 글보다는 이런 슬픈 調의 글이나 정서가 공감을 일으켜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많은 작용을 하지! 맛점 하소~
 
결론적으로 매듭을 지으면, 내가 시를 쓰는 마음은 가수 장사익의 마음과 맥이 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위로다. 내가 ‘동백아가씨’를 부르면 사람들이 같이 운다. 비 온 뒤에 하늘이 개는 것처럼, 슬픔에 푹 빠졌다가 거기서 나오면 개운해지는 거지. 일종의 카타르시스야.”
 
본질은 슬플 게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體다. 그러나 때론 슬픔을 느낀다. 가식 없이 마음속에 슬픔이 꽉 들어설 때가 있다. 애통, 비통과 슬픔의 느낌을 촉발시킨 그 대상과 일체가 된다. 이 마음은 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이 독자와 함께 진심으로 같이 슬퍼하지 않으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떨어진다. 허위와 가식은 되려 독이 된다. 하느님의 자비심인 아가페(Agape)적 사랑이요, 노자의 물아일체의 경계요, 공자의 측은지심이요, 부처의 동체대비 마음이다. 다만 부처와 다른 점은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은 슬퍼하지 않는 심적 상태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 역시 哀而不傷일 때도 없지 않지만 나는 아무래도 보살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봐?
 
2021. 4. 21. 13:08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