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안고 바람을 일으키는 화가, 박용운 교수의 작품을 보고
도시인들이여! 회색빛 콘크리트를 떠나 숲을 거닐고 싶은가? 현대인들이여! 경쟁이 주는 비정함과 각박함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야외나 바다로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은가? 그렇다면 굳이 멀리 산으로, 바다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 도심의 미술전시장으로 가보라. 그러면 숲을 만나고 바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삭막한 도시의 전시장에 무슨 바람과 숲이 있냐고? 있다! 내가 다녀온 경험자다. 그저께 나는 잠시 짬을 내어 아내와 함께 강남의 코엑스에 마련된 미술전람회장을 다녀왔다. 숲으로 사람들을 덮어주고 바람을 일으켜 내면의 기를 일으켜 세우는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작품들을 선보인 이는 중견 작가에서 원로급 작가의 반열에 설 수 있는 박용운 교수이다.
박 교수가 원로급 작가의 반열에 설 수 있다고 한 것은 근거 없는 나 혼자만의 찬사가 아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가늠이 된다. 중앙대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박용운은 지금까지 서울, 동경, 토론토, 뉴델리,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개인전을 27회나 열었다. 단체전은 560회나 참여했으니 작품에 대한 창작의욕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단체전은 멀리 멕시코,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국립미술관에까지 간 이력도 포함되어 있다. 또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양화 비구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여타 규모가 큰 미술전람회의 운영위원장을 맡은 바도 있다. 현재는 중앙대 서양화학과 고문으로 있으면서 예원대 문화예술교육원 주임교수다.
이날 바깥에는 봄을 떠나보내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강남 코엑스의 넓디넓은 전시장은 수많은 전시작품들과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출품작을 훑어봤더니 조각, 공예, 서양화, 한국화 등등 다양한 장르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많은 작품들은 제각기 하나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예술에서는 작품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일단 독창성이란 측면에서 고유한 작품으로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다는 고유성 때문에 모든 작품이 다 뛰어난 작품이라거나 명작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제, 표현 양식, 재료사용, 메시지 등등의 유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표현을 바꿔서 말하면, 조형언어의 미적 요소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소리다.
지구상에 수많은 화가들이 있지만 개별자로서는 모두 제각기 자기 한 사람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 미술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화가가 단 한 명뿐이듯이 미술작품 또한 단 하나뿐이어야 한다.
이러한 개별성 또는 하나뿐인 유일무이성(uniqueness)은 예술작품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 하는 말로 독창성(originality)이다. 독창성과 유일무이성이 예술의 생명이다. 이는 모든 예술의 영역에 걸쳐 있는 불변의 가치다. 또한 이는 현대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화가나 시인들, 음악가와 소설가들이 추구해온 예술의 바람직한 존재양태이기도 하다.
미술에서도 예외일 리가 없다. 20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저명한 미술비평가 루시 스미스(Edward Lucie-Smith, 1933~)가 얘기한 바 있듯이 화가는 독창성에서 조상을 모시기보다는 자손들을 거느리기를 원하고 있다. 요컨대 모든 작가는 자신이 자기 사조의 비조가 되기를 원한다는 소리다. 작품에 독창성과 유일무이성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작품, 특히 프로 작가의 작품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위대한 작품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자주적이고 개별적인 것(Einzelnes)이다. 유파에 휩쓸리지 않고 저만치 홀로 서 있거나 유파를 떠나 있다.
피카소 생전에 그의 작품이 당시의 유파에 속해 있거나 분류되었는가? 그는 늘 유행이나 사조를 벗어나 홀로 앞서 갔다. 자기가 처음 선 보인 작품들이 유행이 되면서 다른 화가들이 자기를 따르거나 모방한다 싶으면 자기는 자신의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예술가로서 피카소의 위대성은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피카소의 작품들이 무슨 무슨 시대니, 무슨 무슨 주의로 분류된 것은 그의 사후 미술사학자들이 금을 그었기 때문이다.
박용운 교수의 작품은 한국 화단에서 유일무이하다. 어쩌면 세계 화단에서도 하나밖에 없을 수 있다. 이번에 그가 내걸은 이 작품들은 장르, 재료, 표현양식,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면의 유사성에서 같은 범주로 분류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내가 견문이 좁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까지 이런 형식의 조형 언어는 접하지 못했다.
아래 작품들은 박 교수가 다년간 천착해오고 있는 시리즈다. 이 작품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가진 손놀림이 있어야 된다. 핀셋을 사용하여 한지를 1cm 정도 높이로 선의 흐름을 구축해 가면서 바람의 이미지를 상징적(심상적)으로 구축해 나간다.
박 작가는 처음부터 이 시리즈에 천착한 건 아니다. 이 작업을 해 온지는 이제 대략 10년 쯤 정도 된다. 그 전에는 의왕시 소재 모락산에 둥지를 틀고 “오매기 작업실”이라고 이름을 걸고선 자연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눈과 귀와, 코와 몸과 마음이라는 五官을 통해 들어온 자연을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근대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말한 바 있듯이 예술작품이란 예술가의 기질을 통해서 본(seen through the temperament of the artist) 자연의 일부다. 이 점에서 예술은 자연물 앞에 세워 놓은 거울이 아닌 것이다. 박용운은 이 작업을 강산이 한 번 바뀔 때까지 했다고 한다. 즉 그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관찰과 표현의 스킬을 진득하게 연마한 셈이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현재의 작업으로 전환했는데 주제는 지금의 숲과 바람이 아니라 “뿌리 깊은 나무”라는 주제로 한지, 닥지, 고서들을 이용해서 작품을 빚어냈다. 당시의 작품들을 접한 바 없어 뭐라고 코멘트 할 순 없지만 필경 작가는 단순한 재현만 하려고 했다면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조금 진부한 이야기지만 예술은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눈과 주관에 따라 재구성되는 표현(expression)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감성과 상상력으로 자연의 모든 형상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재배열, 데포름 하는 창조자다.
이러한 대전제에서 작업에 임한 화가가 해야 할 첫째 일은 자신의 화폭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이것은 비단 그림뿐만이 아니다. 조각이나 판화도 마찬가지다. 또 한 때 한국에서만 습관처럼 장르를 나누었던 이른바 동양화나 서양화에서도 다 요구되는 사항이다. 기운생동은 표현된 대상 그 자체를 힘 있게 표현하는 것에서도 영향을 받지만 전체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에서 생성된다. 우리가 보통 그림에 생기가 없다거나 성공하지 못한 작품을 보통 죽었다고 말한다. 랭거(S. Langer)가 예술작품에 있어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중요시하면서 “살아 있는 형식”(living form) 또는 “역동적 형식”(dynamic form)을 강조한 맥락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용운 교수의 화폭은 역동적이지 않는 구석이 없다. 특히 바람을 형상화 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율동(vital rhythms), 회오리바람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마저 느끼게 한다. 초자연적인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속에 자신을 맡겨보라.
반면에 숲 연작 시리즈 앞에 서면 정지된 중심, 안정성이 주는 편안함 그리고 조형 요소들 간의 불협화음에 대한 상호 견제 그리고 그로 인한 조화가 돋보인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작가 박용운은 회색의 거대한 콘크리트로 상징되는 현대문명 속에서 자연 본연의 푸르고 파란 숲을 조림하고 심연에까지 침투해 들어갈 바람을 일으키는 주관적 자연의 창조자다.
주지하다시피 숲은 대자연의 일부로서 산소를 내뿜음으로써 자신을 살림과 동시에 전체로서의 모든 생명을 함께 보듬는 존재다. 숲은 생명성과 안정성, 공생과 겸손함, 평온함과 평화를 추상하게 만든다. 바람은 또 어떤가? 바람은 얼음과 물의 변형이자, 공기라는 운동체다. 가만히 있지 않고 늘 움직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바람은 숲에서 내뿜는 산소가 모이면 바람이 되는 것이다. 내게는 자연 전체의 구조가 그렇듯이 서로 품고 지탱시켜 주는 相依相存의 연기적 세계관의 반영이 바로 숲과 바람으로 읽힌다.
바람은 기다. 바람은 힘이다. 바람은 흥이다. 바람을 형상화 한 작품들은 작가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접하는 이로 하여금 바람을 숙고시키고 바람의 기에 젖어들게 만든다. 바람은 육안으로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이 작품들을 통해서 기를 느낌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내면에서 의식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곳으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숲과 바람을 창조하는 박용운 교수는 말하자면 내면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안정, 평화라는 정태적인 것과 운동과 공생이라는 동태적인 이상태를 추구하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안정적인 기와 힘과 흥을 일으키는 화가인 셈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자기의 것이 아니다. 작품을 보는 감상자와 그것을 읽고 비평하는 평가자는 모두 비접촉적인 존재를 언어로 옮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의 눈과 심리상태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감성의 부분을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말과 문자로, 즉 언어화 한다는 것은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고, 한계성이 존재하며 심지어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술사학자인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 1896~1984)가 미술작품 해석을 하나의 재창조이자 재생산(eine Re-produktion)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술평론 전공자도 아닌 내가 최고 수준의 프로작가의 작품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곤란과 한계와 오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해석이 아니라 느낌을 적어보는 개인의 소감이라고 해두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실수라든가 무지가 위에서 소개한 제들 마이어의 정의로 면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또 굳이 비가 내리거나 다른 여차저차 한 이유로 미술관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나 차안에서라도 박용운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잠시나마 바람을 느끼고 숲의 기운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나의 이 시도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게 아닐 것이다.
앞으로 박용운 교수는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왕성한 작업을 지속하겠지만 사회와의 소통은 그만큼 자신의 작품성과 명성에 걸맞게 불러주는 곳이 많아서 몸이 받쳐줄까 걱정이다. 올해 하반기만 해도 당장 큰 전시회가 세 개나 잡혀 있다. 오는 11월에는 수원시 해움미술관에서 초대한 개인전이 잡혀 있고, 12월에는 부산 국제 아트페어(벡스코) 초대작가로 제법 큰 부스를 통 채로 빌어 전시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다. 또 이어서 같은 달 서울 아트 쇼(코엑스)에도 화랑의 초대작가로 출품한다.
화가 박용운! 그는 종횡무진으로 숲과 바람을 몰고 다닌다. 그럼으로써 숨 막히는 콘크리트 문명에 찌든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 자신이 곧 숲과 바람인 것이다.
2021. 5. 28. 11:3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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