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다시 보는 뒤러의 예수
지금까지 내로다 하는 화가들이 그려낸 예수상의 작품은 숱하게 많다. 나는 그 그림들 중에 중세 독일의 화가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그린 ‘고뇌하는 사람 예수’(Man of Sorrows)를 몇 손가락 안에 꼽는다. 아무리 점수를 낮게 줘도 열 한 손가락 안엔 드는 성화다. 이유가 없을 수 없다. 물론, 이와 다른 엄숙한 분위기가 나는 예수상의 성화들도 좋아한다. 다른 면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은 1493년 뒤러가 만 22세 되던 해에 판넬에 유화로 그린 것인데, 현재 독일 동남부의 중소 도시 카를스루헤(Karlsruhe) 주립미술관(The Staatliche Kunsthalle State Art Gallery)에 소장돼 있다.
뒤러의 이 작품은 30cm×19cm의 작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상상해온, 혹은 나의 바람이 들어간 이미지인 예수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형상화 한 것이다. 이 글에선 작품성을 감상하고자 하는 게 아니어서 그림 자체에 대한 조형적 해석은 건너뛴다.
뒤러가 포착한 것처럼, 이 그림에서는 예수의 고뇌가 느껴지는 인간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실상 예수는 고통 받는 이웃과 병자와 약자, 가난하고 핍박받는 하층민들을 품고 그들의 모든 아픔을 대변한 사랑과 긍휼을 실천한, 인간으로서 가장 순수한 마음을 지닌 존재였다. 내가 그를 종교지도자임과 동시에 탐욕에 찌든 불의한 세속 권력에 저항한 정의의 실천가이자 사회혁명가라고도 보는 이유다. 내가 또 다른 예수가 출현하기를 기대해서 그렇게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그림에는 기존의 수많은 예수상 그림들에서 느끼는 엄숙함, 숙연함, 비장함 따위의 느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얽혀 있고 몸에는 대속의 상징인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얼굴 표정은 슬픔에 차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약간 코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예수의 모습이 진정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또 어떻게 살다 갔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멀리 높다란 하늘에 거하는 게 아니라 바로 지상의 이웃에서 세상의 병자와 약자들과 함께 그들은 위해 살다간 실존적 인물의 리얼리티(reallity)와 친밀성을 체감하게 만든다.
모든 작품은 원 작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평가하는 건 전적으로 감상자의 몫이자 자유다. 작가에 대해 인신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나는 이 예수상에서 화가 뒤러가 예수를 장엄하고 비장해서 초월적 존재로 인식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 곁에서 살다간 사회혁명가로 그린 실존적 측면에 주목한다. 종교적인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정치적,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예수의 언설, 역할, 고뇌와 번민도 같이 보면 좋겠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예수의 이러한 역할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예수의 여러 가지 복수의 성격들 중에 이런 모습과 메시지는 더욱 부각돼야 함과 동시에 절대선을 지향한 그런 메시아가 우리 앞에 또 한 번 나타나주기를 목 빠지게 고대하고 있다. 내가 예수의 실재성과 친근성을 느끼게 하는 뒤러의 이 작품을 수작으로 보는 이유다.
2020. 12. 25. 14:38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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