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와 고미술품 감상
어제는 오랜만에 두 눈을 호강시켰다. 침침해가던 안광이 빛나고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가서 보게 된 고미술 전시회장에서였다. 선배 한 분이 나를 불러낸 곳이 수운회관의 ‘多寶星 갤러리’였다. “봄, 옛 향기에 취하다”라는 기획취지로 이달 말까지 열린다는 고미술품 전시회다.
우선, 먼저 항간의 우려를 한 가지 씻어내고 나서 눈이 호강한 얘길 해보자. (고미술 전문가 수준의 본격적인 감상평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사회적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 있어 다중이 모이는 장소에 가거나 단체 활동 참여가 조금 조심스런 요즘이니 말이다.
어제 가본 고미술 전람회는 그런 자제로 인한 망설임을 말끔히 씻어줬다. 금속 불상, 자기 불상, 도자기, 서화, 고가구, 민속공예품 등 총 500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지만 저마다 널찍한 전시장에서 각기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하고 있어 벌써 지들끼리는 사회적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원래 타고난 천성이 그런지 하나 같이 말이 없었다. 몸은 떨어졌어도 정신과 의식은 밀착 되었고, 사회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 넘은 의식의 경계를 허물었다.
해서, 보는 객들도 딱히 그들과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침이 튈 리도 만무하다. 미술 전시장이나 음악회가 늘 그렇듯이 객은 혼자서 놀다 온다. 예술이란 게 원래 주객일체가 돼도, 物我일체가 돼도 결국은 보는 이 개별자 자신의 문제로 귀일되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잘 놀다오기 일쑤다. 예술의 기원이 놀이에서 시작됐듯이 말이다. 어제도 나는 혼자서 놀다 가는 관객들 중 하나였다. 내 나이 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는 그들 영혼들과 나눈 발화 없는 안부인삿말, 눈웃음, 눈 맞추기, 무언 대화, 독백의 질의응답을 주고받는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더 길게는 천 년도 더 전의 역사 공간으로 되돌아가서 몇 시간이나 유유자적한 유영의 흐느적거림에 어느덧 희열의 氣는 두 눈의 경계를 넘어 전신을 허물 거리게 한다.
장내를 돌다가 돌연 도자로 된 불상에 시선이 딱 멎었다. 1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靑瓷如來坐像이다. 소라 모양의 육계들이 가지런한 나발을 보니 간다라 양식이 아니라 마투라 양식에 가깝다. 두상 전체를 휘감고 있는 나발들이 흐트러짐이 없어 보는 이가 의관을 정제케 할 정도다. 나발, 상호, 삼도, 수인 어느 하나 구족함이 없는 게 없어 고타마 싯타르타의 72상 80종호를 두루 갖춘 듯 覺者로서의 위의를 느끼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토실토실 살찐 도령의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삼도가 튼실한 철불은 또 어떤가? 철불은 청동불 보다 훨씬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나 역시 실제로 많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반갑네 그려! “그대는 언제 만들어졌나요?” “네? 삼국시대라고요?” 상호가 꼭 화랑도가 좌선에 들어 있는 듯 하구랴. 또 우견 편단도 천녀의 옷 인양 얇게 빚어서 철제인데도 마띠에르(질감)가 청동제 이상이구만요!
갖가지 놋대야니, 盒이니, 화로니, 병이니 하는 것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賞品의 변을 쏟아내기엔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자기 차례가 못 올지도 모를까 싶어 눈을 흘기는 다른 선남선녀들을 의식해야 한다. 대단한 결례지만, 천상 건너 띌 수밖에 없다. 너 댓 점 정도로 단지 구색 갖추기 위해 갖다 놓은 게 아니라 수십 점이나 돼 서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청자도자기, 茶碗, 硯滴, 甁, 盒, 注子, 爐와 壺들 역시 미안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건너뛴다고 하더라도 청자와 백자들 중 서너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靑瓷象嵌雲鶴紋甁 등에서 보듯이 청자의 빛깔들은 조금 과장하면 거의 비취색에 가깝다. 전체의 형은 하늘을 나는 잘록한 허리의 선녀를 연상시킨다. 상감이든, 음각이든, 또 음양각이든 몸에 들어앉은 문양들도 학, 구름, 소나무 등의 십장생에다 화조, 물고기 등등 다양하다.
35.2×17×13.5cm나 되는 白瓷鐵畵雲龍紋壺나 이 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의 白瓷靑畵雲龍紋壺(43.2×16×16.5cm)의 어깨에서 몸통을 휘감는 용은 역동감이 있어 살아 있는 듯하다. 雲板 모양의 구름들이 떠도는 가운데 여의주를 입에 문 듯한 표정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니 친근감도 자아낸다. 게다가 백자의 빛깔은 진크(zinc) 화이트가 대하기엔 급이 맞지 않는다. 순백의 하늘 구름이다. 그래, 봄 빛깔에 취하고, 백색에 또 취한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된다는 紛靑瓷人面紋梅甁(37.4×7.8×13.5cm)은 쑥색 빛이 살짝 감도는 토갈색 위에다 人面 문양이 가히 도발적이고 해학적이다. 도공이 장난기가 발동해 낙서 하듯이 순식간에 그려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암튼 원초적 자연 상태의 느낌을 주는 즐목 문양에 반구상적 인물이 곁들여진 현대적 감각까지 엿보인다.
서화들은 개개의 평을 내리기엔 내가 문 밖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러지 않아도 짧은 시간과 지면에 펼쳐 놓기란 가짓수와 畵題가 너무 다양하다. 산수화든, 화조도든, 나한도의 인물화든, 아니면 산신도 등의 탱화든, 민화든, 그냥 한 마디로 날렵함과 수수함이라는 모순적인 조형언어가 서로 밀어내지 않게 어우러져 있다고만 하고 넘어간다. 사람과 사물은 있을 곳에 있고, 색깔은 튀여 보이는 불협화음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정도로 매듭을 짓는다.
다만, 정말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서예 한 점이 있어 언급하고 가려고 한다. “寵辱皆忘”이라고 쓴 붓글씨다. “총애와 굴욕을 모두 잊자”라는 뜻이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형이 순종으로 즉위하자 황태자가 됐지만 일제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비운의 영친왕 李垠이 처한 당시의 시대상황과 그리고 그 자신의 내면적 심사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차마 모른 체 할 수 없다.
굵직한 작품들이 즐비한 가운데는 문책장, 나전, 문갑, 칠함, 심지어 나막신 등의 목기들과 생활 공예품도 많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실용성은 물론이고 화려함은 화려한 대로, 소박함은 소박함대로, 질박성에서 오는 고졸미도 가미된 작품들이다.
특히나 주당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다 싶은 건 나전으로 된 궁궐의 상이다. 무엇보다 흠이 갔다든가,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든가 한 게 없어 보여 온전함 자체로만 해도 한 몫 할 것 같다. 온전하게 잘 보존돼 있는데다 나전의 문양도 왕실의 어가용이라서 그런지 예사롭지 않아서 가치가 더 높을 게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에 제작돼 키가 조숙한 아이만한 宮中朱漆螺鈿官服欌(95×47.5×163cm)은 말 그대로 궁중에서 쓰던 장롱이다. 나전이 정교하기도 하고 색깔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宮中螺鈿經床(73.5×36×37.5cm) 앞에 서면 임금 내외 앞에서 기미상궁이 檢食하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자태가 정갈하고 단아하다. 평생을 속 썩여 가면서 사느라 단명하기 마련인 군왕이 되기보다 나라를 반듯하게 이끌어가는 어진 충신이라도 돼 임금과 함께 이런 상에다 차린 주안상을 앞에 두고 대작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어찌 뿌듯함과 스스로 대견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名器名作들이 수놓인 병풍에 둘러 싸여 봄날에 취하고, 주안상에 취하는 건 또 어떤가?
이번 봄나들이를 결심하게 된 이 작품들의 주인장은 이 많은 보배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데리고 나왔을까? 한 점 한 점이 수작인 이 보물들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을까? 비사 같이 존재하는 인연의 뒤안길을, 그 인고의 세월을 상상하노라니 찬탄이 절로 나오고 왠지 代謝의 念마저 솟구친다. 조상의 혼들과 숨결이 녹아 있는 이것들을 방치했다면? 문화가 선진과 후진, 淺薄과 古雅를 가르는 21세기에 끔직한 상상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일개인이 필생의 업보인 듯 온갖 수고로움을 다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간송 전형필의 부활인가 싶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다보성 갤러리는 전시 수익금 중 일부를 코로나19로 피해가 심각한 지역의 의료지원을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하니 더 가슴이 따스해진다. 나를 불러준 선배의 귀띔으로 듣자하니 이 주인장은 모든 고 미술작품도 인연 따라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해외로 빠져나간 우리 조상들의 얼과 혼이 서린 작품들을 회수하듯이 중국 작품은 중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감동도 배가됐다.
그러기 전에 그는 이런저런 세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운명처럼 하는 프로로 보인다. 조상들의 혼과 얼이 담긴 문화재를 박물관이나 교과서 속에만 넣어 놓을 게 아니라 직접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화려한 궁중 공예품, 혹은 청빈 속의 안빈낙도를 꿈 꾼 선비들의 문구나 서화에서부터 도자기와 불상 그리고 양민들의 소박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내면적 미가 봄기운에 되살아나는 듯해서 칭송돼야 할 귀감이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은 현대인들의 것만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대를 사는 사람들에겐 이를 후세에까지 안전하고 온전하게 전해 줄 임무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 말은 사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예술의 기원과 인류 문화유산에 관한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긴 엠마뉴엘 아나티(Emmanuel Anati)가 한 말이다. 누가 한 말이든 아무튼, 갤러리 다보성의 金種春 대표는 앞으로도 그 일을 해나가는 데는 맨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와 이런 저런 茶談을 나누고 나서 드는 확신이다.
2020. 4. 23. 11: 07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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