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탁월한 구성미와 영화제작 노동의 신기원
지난주 토요일, 얼마 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봤다. 이 영화가 권위 있는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은 작품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작품성이란 ‘황금종려상’ 수상작답게 구성이 탁월하게 돋보인 점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도 내용을 너끈하게 소화해서 영화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 요소이니 이 점도 인정됐을 것임은 물론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하는 사업마다 실패해 실직한 가장 기택(송강호 분)의 일가족 4명이 기껏해야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동익(이선균 분)의 가정으로 한 명씩 차례로 일을 맡아 들어가서 기생하며 살다가 영화 중반부부터 느닷없이 전임 가정부였던 또 다른 기생충 부부가 나타나면서 갈등과 투쟁을 벌이다가 종국에 가서 기택 가족이 어렵사리 얻은 고정적인 수입과 안정적인 생활이 파탄을 맞게 되는 내용이다.
먼저 박사장의 일을 맡은 것은 기택의 사수생 장남 기우(최우식 분)였다. 명문대생 친구가 유학을 가면서 자기가 하던 고액 과외 자리를 넘겨준 것을 물려받아 박사장의 고등학생 딸의 과외 교사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기택의 먹고 노는 딸 기정(박소담 분)이 박사장의 어린 초등학생 아들의 미술심리치료교사로 들어갔다. 이어서 기택이 박사장의 자가용 운전수로, 기택의 아내 문광(이정은 분)은 먼저 있던 가정부를 술수를 부려 잘리게 만든 뒤 자신이 그 자리에 취업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정도가 박사장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 연교(조여정 분)가 많은 화면을 차지하는 전반부까지의 줄거리다.
영화 중반부부터는 같은 빈곤층이지만 기택 가족의 도움이 아니면 살아 갈 수 없는 또 다른 기생 가족이 나타나 두 기생 가족 간에 보수가 보장된 박사장네 일자리를 되찾거나 뺐기지 않기 위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박 사장이 자기 집 정원에서 연 야외 파티에서 박 사장이 기택 네의 집단 사기행각과 그간의 과정을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판단한 기택이 박 사장의 가슴에 예리한 식도를 내리 꽂아 죽이고 바로 이 저택의 지하시설에 들어가서 숨어 살게 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것이다.
영화의 구성과 관련해 이 영화는 계획, 냄새, 부유와 빈곤 등 몇 가지 장치로 부유층과 빈곤층, 호화저택과 지하 셋방, 계획의 유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역거운 냄새 등을 비교함으로써 신분과 수입에서 극명하게 차이 나는 두 가정을 대비시킨다. 기택네와 박 사장네 두 집안은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 지위 면에서나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대비가 장기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 자신의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기차 속 사람들의 빈부격차를 대비시킨 바 있고, 영화 ‘옥자’에서도 산골 소녀의 순박하고 따뜻한 심성과 도시의 차가움을 대비시킨 적이 있다. 이번 ‘기생충’에서도 숙주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기생충처럼 사는 사회저층의 가족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사는 집과 대비시켰다.
기생충은 구성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설정도 없지 않아 보였다. 한 가족의 부모와 아들 딸 해서 4명이 모두 실업자로 설정한 것까지는 우리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빈부격차, 사회적 지위의 격차는 실제로 현재 한국사회의 실상임을 보여준 것이다.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바 있지만, 2019년 6월 현재 한국민의 80%가 한국이 사회갈등이 심각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기택의 일가족 4명이 모두 박사장 집에 고용되는 설정은 개연성은 인정되나 현실성은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주제의식 면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시나리오를 직접 쓴 봉준호 감독의 계층의식이다. 감독 봉준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에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 사회 계층간의 경제적, 신분적 차이는 해소되거나 극복되기가 좀처럼 어려운 현실임을 보여준 셈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제작 동기나 의도였다면 제목으로 “기생충”을 단 것은 약간 본질에서 벗어 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하층계층에 마음이 간다면 영화에서처럼 그들을 부잣집에 빌 불어 사는 것을 두고 ‘기생충’이라고 이름 붙일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처지에 의식이 가도록 할 수 있는 제목을 불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빈부격차와 계층간에 벌어진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자기 가족이 저지른 사기행각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잡히면 즉각 구속될 살인범죄 때문에 박사장네 저택의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고 숨어사는 아버지를 그 아들인 기우가 구하려면 오로지 자기가 그 호화저택을 구입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아들 기우는 전혀 실현이 불가능한 꿈같은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혼자서 독백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페이드아웃 된다. 이는 빈부격차의 극복은 애초부터 엄두를 낼 일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문제만 보여주고선 그에 대한 답은 관중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암시와 복선, 트릭과 맥거핀 효과(MacGuffin effect)를 여러 차례 구사했다. 기택이 박 사장네 '사모님' 연교의 손을 은근 슬쩍 잡는 장면처럼, 관객들로 하여금 그 뒤에 두 사람이 뭔가 어떤 관계로 발전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하게 만들지만 실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식으로 처리했다. 맥거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설명을 생략한다. ‘기생충’을 분석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한국의 영화사적 의의를 말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직접 영화를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나는 특히 영화 제작의 노동이라는 면에서 ‘기생충’이 지닌 의의를 높이 평가한다. 지금까지 다른 예술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영화로 말해야 한다면서 영화의 작품성 외에 제작자들의 노동문제나 영화 배급의 경색된 유통, 스크린 독과점 등등 하드웨어의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고픈 예술가 시대는 지나도 한참 지났다. 제작진에게 하루 3~4시간을 재우면서 영화를 만들어 온 것이 한국영화판의 오랜 관행이었다. 그런 식의 예술 및 열정을 가장한 강압과 노동 착취로는 쌈박하거나 섬광이 번쩍하는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없다. 일에 대한 열정도 생겨나지 않는다. 영화제작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 끌려 다니는 노동이어선 의욕이 생길 수 없다. 영화의 작품성은 영화제작의 환경과 대우에 비례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번에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 영화 제작진의 작업방식을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근로기준법상의 최장 노동시간인 주 52시간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스탭들도 모두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 준수토록 모범을 보였다. 그렇게 해도 세계 영화계에서 최고의 상으로 인정받는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게 된 작품을 만들어냈다. 단연 한국 영화산업을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게 만든 신기원을 연 쾌거다.
기생충은 영화제작자들이 합심해서 노동인권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보여준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영화 ‘기생충’은 방송드라마 제작 ‘노동자’들과 함께 이 땅의 많은 노동자들이 아직도 일부 악덕 기업들에 종속돼 비인간적으로 그야말로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노동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사는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19. 6. 4. 05:07
臺北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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