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존재의의 : 문학활동은 왜 하는가?
내가 참여해오고 있는 어느 ‘수필문학회’의 한 원로 분께서 문학과 문학인은 문학의 주제로 사회문제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평소 선생께서 가지고 계신 문학관을 피력한 코멘트를 이 수필문학회 동호인 단톡방에 올리셨다. 나도 늘 같은 생각을 해오던 바이고 공감하는 부분이라 이에 호응하는 댓글을 달았다.
언제부터인가(아마도 민주화 이후 거악이 사라지고 나서부터---실상을 말하면 거악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기존 거악이 사라지고 새로운 거악이 그것을 대체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만) 많은 문인들이 그다지 현실문제에 치열한 문제의식 없이 무덤덤하게, 보송보송하게 지내면서 감성팔이나 가벼운 신변잡기에 안주해오는 것을 보아오던 차에 모처럼의 문제제기라 싶어서 짧고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이지만 여기에 올린다. 원로 분의 문제제기는 이 글 맨 아래에서 두 번째에, 나의 댓글은 그 아래 맨 마지막에 올려놨다.
이 문제제기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해묵은 논쟁으로서 문학의 역할을 두고 순수미를 추구하느냐 아니면 현실에 개입해야 하느냐 하는 오래된 주제에 닿아 있다. 사실 이건 꼭 문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학 이외의 모든 예술이 다 동일하다. 참여문학을 가리키는 이른바 '앙가주망 문학'(Engagement literature)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철학의 주창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제기한 뒤 한국사회에서도 1960년대에 한 동안 문학인들 사이에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불붙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애였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문학을 한 건 아니었지만, 사르트르의 이러한 문학사상에 대해선 옳다고 봤다. 그가 강조했듯이 문학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고 우리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삿된 정치세력들에 대한 투쟁의 대오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문한 탓일지 몰라도 요즘은 문학하는 이들 사이엔 그런 주제의식, 문제의식을 가지는 치열성과 열기가 사라졌거나 옅어진지 오래된 일 같아 많이 아쉽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도려내지 못한 숱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문제들까지도 지속적으로 불거져 나오고 있는데도 벌써 전선에서 한참이나 이탈한 듯해서 말이다.
10대 후반부터 철들기 시작해서 20대 후반까지의 10년 정도, 내게도 한창 철학이니 예술이니, 종교니 하는 쪽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자, 시인, 화가들의 저서와 작품들을 많이 읽고 감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동서양의 적지 않은 인물들의 사상을 조금씩 맛봤다.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대략 쇼펜하우어, 칸트, 니체, 사르트르, 까뮈, 에리히 프롬, 리즈만, 아놀드 하우저,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시몬느 보봐르, 시몬는 베이유, 하이네, 아폴리네르, 피카소, 마르셀 뒤샹, 토인비, 베네딕트, 캐린 듄, 석가, 예수, 공자, 맹자, 나가르주나, 크리슈나무르티, 라즈니쉬, 우찌무라 칸조, 원효, 안중근, 정약용 등등의 인물이 나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물론 손에 잡히는 쪽쪽 닥치는 대로 읽었기 때문에 체계적이진 않아서 지금 알맹이는 채에서 다 빠져나가고 없고 쭉정이만 남았다. 당시 나는 문학도는 아니었지만 문학인은 사르트르가 제시한 그러한 의무감과 임무를 포기한다면 문학과 문학인으로서 존재의의와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상식 같은 얘기지만, 무엇보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침략을 받아 자유를 잃은 조국 프랑스의 현실에 처한 사르트르가 히틀러의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조직에 직접 참여해 반파시스트 투쟁을 전개한 실천적인 지식인임을 높이 평가했다. “적이 침략해오는데, 다들 뺑소니치면 누가 나라를 지키나?” 작고 소박한 애국심과 공동체적 의식은 아마도 그 시절에 생겨났던 게 아닌가 싶다. 그 시절 나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처한 암담한 상황에서 문학의 현실참여를 강조한 사르트르의 문학관에 깊이 공명했다.
아무튼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문학은 왜 있어야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어디서 존재의 의의를 찾아야 하는가? 완벽성이 결여된 인간들의 군집생활에서는 필경 탐욕에 따른 투쟁이 불가피하고, 그로 인한 갖가지 불합리하고 불안전한 사회적, 국가적 문제들이 생겨나게 돼 있다. 문학인이나 지식인이나 그로 인한 부조리(알베르토 까뮈가 말하는)들을 외면한다는 건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시키는 게 아닌가?
원로분의 문제제기 글
“(포항시) 문화회관 앞에 세워진 (안내인이라는 단어 대신 영어의 ‘어셔’라는 단어를 써놓은 외국어 남발 안내) 간판 사진 때문에 벌어진 잠시 동안의 논란을 재음미하는 순간 20~30년 전 타임지에서 읽었던 좋은 정치에 관한 공자님의 말씀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잊혀 지지 않고 가끔 생각나던 것인데, 유교에 관한 글 중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어려운 것 없고 편하여 행복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살려오도록 하는 것”이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번의 경우처럼 사회에 모순이 되는 것을 보면 공론화 시키는 일도 동호인 클럽의 설립목적의 하나이고, 사명일 것이며, 좋은 정치가 되게 하는 데에 일조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주는 못해도 가끔이라도 하면 싶습니다.”
위 글에 대한 나의 댓글
“역사학이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과거가 현재 속에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어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와 관련이 있는 현현성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사회학과 정치학 등의 사회과학이 현실문제의 치유 혹은 극복의 수단을 지향하지만 미래사회를 상정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듯이, 문학 같은 인문학도 어떤 형태이든 간에 현실과 괴리됐을 때는 의미가 반감된다고 봅니다. 1997년 90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가 노벨상 수상 연설로 ‘동시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 연극, 문학, 예술은 얼토당토않은 것이다'라고 한 말은 문학의 본분을 강조한 것이었죠.”
이처럼 어떤 형식의 것이든 문학은 직접 몸으로 뛰는 현실참여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제 면에서, 인식 면에서, 제시하는 메시지 면에서, 즉 글로서 우리가 사는 주변과 사회, 나아가 권력문제에 대한 참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친 김에 지구환경과 생태계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그것 또한 결국 거대 권력의 문제로 귀결되지만...
물론, 주변의 일상사나 개인의 신변잡기가 문학의 주제가 되면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주제가 시종 그것으로 시작해서 그것만으로 끝난다는 게 문제라는 얘기다. 문학인들이 사회문제에, 미시권력이든 거시권력이든 권력의 작동 문제에 고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논의가 많으면 많을수록 공동체는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과 삶도 윤택해질 것이다. 가치지향적인 공론화의 전제로서 그것에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2018. 12. 17. 12:4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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