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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장군의 못 다한 이야기 : 정의와 불의, 그 기로의 선택①

雲靜, 仰天 2021. 1. 26. 10:01

박경석 장군의 못 다한 이야기 : 정의와 불의, 그 기로의 선택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는 말 그대로 군이 총을 들고 나와 국가권력을 찬탈한 사건이다. 그것은 광복 후 친일파청산의 실패, 북한의 남침에 이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시작되는 세 번째 출발점이었다. 당연히 군사쿠데타이었기에 군이 이 사건의 주체였다쿠데타의 원인을 이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 군의 내부 구조에서 찾는 관점도 타당한 시각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군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군 역사의 산증인이자 연구자인 박경석 예비역 장군이 육군 내부의 구조적 문제점을 간단하게 밝혀 놓았다. 당사자인 박경석 장군의 허락을 득하고 그 글을 원문대로 올린다. 원문은 박 장군의 인터넷 개인 카페(인터넷 다음의 박경석 서재)에서 볼 수 있다.2021. 1. 26. 09:53, 雲靜 編註

 

 

133.박정희와 군부

 

[1] 5.16쿠데타를 배태케 한 원인(遠因)

 

지금의 군부는 비교적 선진국 수준의 인사제도 하에 운영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치 권력에 의해 상하 위계질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던 지난날의 군부와는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은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따라서 임관서열과 능력위주로 평가된 승진과 진출의 기회는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일정한 정년제도를 적용하여 후진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 정상적인 군사 운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세계 군사상(軍史上) 유례없이 95%의 장성진급을 기록한 군 초창기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들은 군의 요직을 장기간 독점하고 있었다.

 

 

군사영어학교 교사. 당시는 오늘날의 감리교 신학대학 자리에 있었다.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 전경

 

육군의 경우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이응준 준장은 초대 참모총장을 맡았고 2대 채병덕 준장에 이어지고 특별임관 신태영 소장이 3대를 거쳐 채병덕이 다시 총장으로 복귀한 후 장장 20년간 18대 김계원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독점하였다.

 

 

군사영어학교(위 왼쪽)와 훈련 중의 생도생들(위 오른쪽) 대한민국 현대사의 모든 비극은 광복 후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것 그리고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6.25전쟁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해군을 제외하고 육군과 공군 등 군 내부도 친일파 군인들로 득실 거렸다. 위 사진 속의 군번 1번에서 5번까지의 4명은 모두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가 있었다.

 

20년 사이에 6대 이종찬만이 특별임관자였다. 어디 그 뿐인가. 채병덕을 비롯 정일권, 백선엽 등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성들은 각각 두 번씩 총장을 연임하였다.

 

합참의장의 경우 초대 이형근으로부터 9대 장창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13년간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독점하였다. 합참의장의 경우도 김종오는 3대를 연임하였으며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등은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각각 중복 연임했고 특히 정일권과 백선엽은 총장 2, 합참의장 1회를 역임함으로써 극심한 인사적체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인사적체는 현대적 개념의 군사시스템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파행이었으며 이로 인한 폐단은 급기야 육사 8기생의 하극상 사건과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에 의해 군 수뇌직이 장기간 독점되었기 때문에 후진들은 진급과 진출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비능률과 함께 불평불만이 군 전체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가령 육사 8기생의 경우 소위에서 소령까지 승진하는 데 4년이 걸린 반면, 소령에서 중령으로 한 계급 승진하는 데는 그 두 배인 8년이 걸렸다. 1960년 김종필 중령 등에 의한 8기생의 하극상 사건은 마침내 516군사 쿠데타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였다. 불만의 감당할 수 없는 누적이 마침내 도화선이 되어 군사 쿠데타로 폭발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은 그럴싸한 목적과 명분을 들고 나오지만 근본은 탐욕에서 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