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장군의 못 다한 이야기 : 6.25전쟁 초기 육군의 처참한 패퇴
지난번에 이어 박경석 장군의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번 글은 대한민국 육군의 창설 및 전방 배치에서부터 전쟁 발발 직전 남북한 병력 및 무기 비교, 육군 수뇌부의 동향, 북한인민군의 남침 개시 및 주요 공격로와 서울점령 직전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밝힌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글의 출처와 전재 허락 여부는 이전과 동일하다. 원문은 박 장군의 인테넷 개인 카페(인터넷 다음의 『박경석 서재』)에서 볼 수 있다.―2021. 1. 26. 08:10, 雲靜 編註
3. 육군의 처참한 패퇴
대한민국 육군은 1948년 8월 15일 보병 6개 여단으로 발족한 이후 꾸준히 병력을 증강하여 전쟁 발발 직전에는 보병 8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 그리고 3개 특수부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육군은 38선을 연하여 서부전선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부전선으로 제1사단, 제7사단, 제6사단, 제8사단을 배치하였고 후방지역인 대전 및 그 일대에 제2사단, 대구 및 그 일대에 제3사단, 광주 및 그 일대에 제5사단을 후방 작전임무를 부여하고 나머지 1개 사단을 후에 수도사단으로 개편한 전신 수도경비사령부를 서울에 두었다.
특히 보병사단의 경우 3개 연대를 보유한 완전 편성의 사단은 4개 사단뿐이었고, 나머지 4개 사단은 2개 연대만을 보유했으며 병력 또한 편제 병력의 80%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장비 면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보유 수준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전차는 물론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성능의 대전차 무기가 하나도 없었다.
당시 육군은 전차 파괴 무기로 알고 있던 57밀리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케트포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쟁 초기에 그 효능의 전무함이 드러남으로써 대전차 작전에 큰 차질을 빚어 초기 전투에서 무참히 패퇴해야 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한편, 보병 전투를 지원하는 야포 및 박격포의 보유 수준은 북한군의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빈약했다. 가령 야포는 북한군이 11이면 육군은 1이었고 박격포에 있어서 북한군은 대구경 122밀리 박격포 226문을 포함 2,318문인데 육군은 제일 큰 구경이래야 81밀리 박격포 384문에다 보잘 것 없는 60밀리 박격포 576문을 합해 총 960문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정비를 이유로 부평 병기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육군의 지휘관 자질 면에서 살필 때에는 더욱 빈약했다. 북한 인민군의 사단장 군단장은 중공군, 소련군에서 실전을 경험한 지휘관 출신 일색이었는데, 우리 육군의 사단장급 지휘관은 정규전에서 소총 중대급 이상 부대를 지휘한 경력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군 보병 대대장으로 실전에서 용명을 떨친 경력 소유자인 전 제1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채병덕의 명태 교역사건에 항의했다 하여 채병덕과 함께 파면되었으나 기이하게도 채병덕만 복직되고 김석원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또한 북한군 사단의 구성원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에서 소련군으로 참전한 병력의 수는 약 2,500여 명에 달했고 잔여 총병력 가운데 약 3분지 1은 중공군에서, 다른 3분지 1은 조선의용군으로 항일전에 참전한 바 있는 전투 유경험자였다.
군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위에서 열거한 북한군과 육군의 전력을 비교한다면 도저히 게임이 성립될 수 없는 현격한 차이임을 알 수 있다. 좀 부풀려서 표현한다면 우리 육군은 적에 비하여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다.
일반적인 전략 개념에 의하면 공자는 방자보다 3배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만큼 압도적인 우세 없이는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견지에서 분석한다면 북한군과 우리 육군의 전력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현격한 차이와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지상군 수만 보더라도 북한군은 19만 1천명인데 우리 육군은 9만 6천 명으로 약 2대 1이지만, 북한군 사단편성은 전투원대 비전투원의 비율이 9대 1로 전투병 위주의 인원구성인 반면, 우리 육군은 전투원 7에 비전투원 3의 비율로 비전투원수가 상대적으로 월등히 많았고, 거기에 더하여 농번기 휴가 및 주말 외출병력까지 감안한다면 실 전투병 비율은 무려 4대 1 이상의 격차로 벌어진다.
여기에다 전투지원역량의 결정적 요소인 전술항공기 및 전차 그리고 야포를 연계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전력의 격차가 생긴다.
이런 상태하의 38선을 연한 육군에 기습공격이 가해진 것이 일요일인 6월 25일 04시였다.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하여 육군의 수뇌들은 모두 술에 취하여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있던 시각이었고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을 비롯한 일부 주요 참모들의 행방은 해가 높이 떴는데도 행방이 묘연했다. 장교구락부 파티 후 2차 향락을 위해 어디론가 잠적한 상태였다.
바로 이때 주공집단인 북한 인민군 제1군단은 38선을 돌파하여 육군 제7사단 방어정면인 철원-연천-의정부-서울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육군 제1사단 방어정면인 개성-문산-서울 축선에 조공을 지향, 공격을 개시했다.
인민군 제2군단은 38선을 돌파하여 육군 제6사단 방어정면인 화천-춘천-이천-수원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육군 제8사단 방어정면인 양양-강릉 축선에 조공을 지향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뜻밖의 기습을 당한 육군의 사단들은 적의 전차와 야포의 위력에 놀라 조직적인 전투를 하지 못하고 초전부터 혼전을 거듭, 방어선은 조기에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개성의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제1사단은 방호산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6사단의 공격을 받고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한 채 불과 다섯 시간 만에 개성시내를 빼앗기고 패퇴를 거듭 25일 밤에 임진강 남안으로 철수하였다.
의정부 전선에 유재홍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은 이영호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3사단과 이권무 소장이 지휘하는 제4사단에 의해 하루 사이에 무려 10km 남쪽으로 패퇴, 재편성을 서둘렀다.
춘천 전선의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은 최헌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고 비교적 적절한 방어전을 전개, 잠시 적의 전진을 교착시켰다. 38선 국군 방어선에서 방어전의 책무를 다하고 있던 사단은 오직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뿐이었다.
동해안 전선의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은 오백룡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제5사단과 특수부대로부터 지상공격과 상륙전의 협공을 받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가장 취약한 전선은 의정부의 제7사단과 임진강 남안의 제1사단이었다. 이 두 전선 모두 수도 서울의 방벽이고 보면 매우 위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에서는 위급사태에 대비한 적절한 단계별 방어계획이나 긴급시에 대비한 대응책이 없었다. 다만 「수도서울의 사수」란 구호만이 유일한 전략이었다. 따라서 수도 서울의 사수를 위해 가장 취약한 의정부 전선에 태릉의 육군사관하교 생도들을 투입하라는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태릉의 육사에는 육군의 장래를 위해 정규 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단기 교육을 지양하고 정규 교육제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 기초작업으로 생도 1기생을 2년제로 모집하고, 다음해인 1950년 6월1일에는 최초의 4년제 정규과정 생도 2기생을 입교시켰다.
당시 생도 1기생은 1년의 수학을 마치고 임관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모집시에는 2년제로 계획했었으나 장교 부족으로 1년을 단축 임관시키기로 확정 상태였다. 생도 2기생 330명은 입교 25일째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교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 하에서 생도들을 소총병으로 투입했으니 얼마나 무계획적이고 무모했는가를 알 만하다. 생도들은 포천전투, 태릉전투, 광나루 전투 등 숱한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냈다. 특히 생도 2기생은 이 전투에서 86명의 희생자를 내어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비극을 남겼다.
육사 생도 전선투입에 이어 육군본부는 후방의 제2사단, 제3사단, 제5사단을 동원하여 수도 서울 사수를 위한 병력 투입을 강행했지만 그 병력을 집중 사용하지 않고 소부대 단위의 도착 순서대로 의정부와 임진강 쪽에 축차적으로 투입함으로써 투입 순서에 따라 전력이 와해되었다. 얼마나 무모했는지 대대 단위 투입은 괜찮은 편이고 거의 중대 단위로 적진에 투입함으로써 투입 즉시 와해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육군 지휘부에서 소외되어 있던 육군참모학교 교장 김홍일 소장은 후방의 3개 사단을 한강 남안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 전방에서 와해되어가고 있는 제1사단과 제7사단을 신속히 철수케 하여 한강에서 결전을 시도, 공세이전(offensive return)으로 전세를 만회하자고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에게 건의하였으나, 「수도 서울의 사수」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6월 27일이 저물면서 수도권전선 방어를 담당하던 제1사단과 제7사단은 물론 후방에서 전선에 축자 투입된 제2사단, 제3단 및 제5사단은 붕괴되어 부대의 건제(建制)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한강교가 폭파됨으로써 와해된 사단병력의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막대했다. 중장비에 속하는 야포를 비롯한 공용화기 및 모든 차량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9만 6천 명의 육군병력은 급속도로 감소되어 2만 5천여 명만 남게 되었다.
대한민국 자체가 붕괴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심각한 사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북한 공산당의 손을 흔쾌히 들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승승장구하던 북한 인민군 또한 국군에 못지않은 결정적인 패착을 두는 실책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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