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숨겨진 악행 : 12.12와 5.18 정치군인들에게 무공훈장 수여 압력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악인이 한국현대사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가일층 나빠질 것이다.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행들이 더 많이 발굴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연히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전두환이 그 자신이 중심이 돼 일으킨 신군부의 12.12로 국가권력을 찬탈한 뒤 12.12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작전에 참여한 100명 가까운 정치군인들에게 육군공적심사위원장이었던 박경석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심사해줄 것을 압력을 넣은 사실이다.
박경석 장군은 전두환이 바라는 대로 무공훈장 수여를 결정해주면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군인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하는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불의의 승진 기회"를 박차고 "예비역에 편입되는 정의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숨겨진 이 사실을 밝힌 당사자인 박경석 장군의 허락을 득하고 글을 원문대로 올린다. 원문은 박 장군의 개인 카페(인터넷 다음의 『박경석 서재』에서 볼 수 있다.―2021. 1. 3. 08:36, 雲靜 編註
전두환과 나
박정희 시대의 군부는 영남권 실세들이 권력을 독점했던 시기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그 여파로 영남권 친위세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살해되었고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으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박정희 시대의 긍정적 군부의 업적은 첫째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국위선양과 함께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졌다는데 있고 둘째, 한국방어의 성공적 임무수행을 들 수 있다.
불과 중대 병력 규모의 소수 정치군인들이 대한민국 국군에 흙탕물을 끼얹고 있었을지라도 거의 모든 장병들은 그 굴욕을 참으면서 임무수행에 전념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현재의 국군에는 이런 정치군인은 한 사람도 없다.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왜냐하면 하나회와 같은 사리사욕 집단은 전근대적 조직이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세기에 있어서 원시적 사조직이 필요할 까닭이 없다. 군부의 오욕을 훨훨 털고 새 세기를 향하고 있는 오늘의 군부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내야 한다.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의 군부의 오점은 역사적 교훈으로 항상 잊지 않고 있을 때 그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과 나는 진해 육군대학 정규과정 클래스메이트였다. 당시 육군대학 정규과정은 1년제로서 3개월 단기과정에 비해 그 선발이 매우 엄격하였다. 영관장교의 집체 교육이 1년이라면 학과 과목이나 시간 수에 있어서 일반 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2년보다 오히려 긴 편이었다.
1963년에 선발시 선발 기준을 보면 전체 영관 장교 가운데 근무성적 상위자와 군사학교 성적 등 최우수자 중에서 두 번의 심사를 거쳐 100명을 선발하고 다시 50명씩 2개 클래스로 나누는데 나와 전두환 소령은 같은 클래스에 배정됐고 나는 그 클래스의 반장 격인 대표 학생장교였다.
당시 나는 중령 계급으로 전두환보다 상급자였으나 나이는 전두환 소령이 두 살 위였다. 나는 4년제 육사 선배임을 고집했고 전두환은 졸업 못한 선배임으로 자기의 정통성을 고집했다.
1년간 사사건건 트러블이 계속됐고 나는 늘 그를 압도했다. 그러나 극렬 대결까지는 안갔는데 마침내 졸업을 앞두고 실시하는 함안 종합야외훈련장에서 일이 터졌다. 실습이 끝나고 교수부장 백문오 대령이 초청하는 학생대표 만창장에서 누가 뉴스를 전했다. 그 내용인즉 보안사령관 전신인 육군방첩부대장 박영석 장군이 윤필용 장군과 교체되었다는 것이었다. 박영석은 바로 내 위 형이었기에 순간 흥분하면서 "정치군인이 점령하는군" 하고 내 뱉자 전두환 소령이 나에게 대들었다.
전두환 소령은 학생 대표 자격이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한다고 해 특별히 초대됐다.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멱살잡이까지 가는 지경에 이르자 백문호 교수부장이 나서서 일을 수습했다. 전두환은 나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여러번 접근을 시도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그후, 전두환이 장군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위세를 떨칠 때에도 나는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의 고위 장군들은 계급과 관계 없이 굴욕적인 태도로 그에게 극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령 그가 준장일 때 상급부대를 헬기로 방문하면 3성 장군인 군단장은 물론 4성 장군인 군사령관까지도 헬기장에 나가 그를 마중했다. 육군내 장교 간에는 전두환을 황태자로 조롱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전두환은 나를 껄끄럽게 보면서도 나의 경력과 업적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척했지만 내면으로는 나를 늘 질시하며 경계했다. 육군대학 졸업 후 훨씬 훗날 이야기지만 전두환은 '자기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박경석은 웬 놈의 무공훈장이 그렇게 많으냐'고 술만 마시면 투덜댔다고 한다.
내가 잠시 전두환보다 앞섰던 시절이 있었는데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 시절이었다. 나는 몇 달 후면 장군진급이 예약된 정황이고 전두환 대령은 대령 진급 2년 늦은 후임 대령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찾아와 간곡히 저녁 식사 대접을 한다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나섰는데 도착해 보니 어마어마한 요정이었다. 아마 내 생애 최고 식사 장소로 기억된다. 물론 미녀들의 시중은 영화에서나 볼 정도의 요염 그 자체였다.
나는 긴장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탓인지 그가 이야기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내가 한 말들은 '훈계'였을 것이다. 분위기가 냉랭해지면서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 요정에서 벗어났다.
몇 개월이 지났다. 장군진급 1순위라는 대령과장 박경석은 장군진급 명단에 없었고 다음 해, 다음 해도 장군과는 먼 퇴역을 앞둔 고참 대령 신세가 되어있었다.
12.12군사반란 후,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어 경복궁 경회루 축하 연회장에서 잠시 나와 스칠 때 놀라는 기색으로 "아직도 준장이네요' 하면서 동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며칠 후 나는 뜻밖에 육군소장 직위인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영전됐다. 그런데 이 자리가 선심 쓴 직위가 아니라 함정이었다. 바로 인사참모부 차장은 당연직이 육군공적심사위원장이었다.
얼마 후 12.12 및 5.18 관련 백 명 가까운 정치군인에게 무공훈장 수여 심사 과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정치군인들의 충성 테스트의 함정이라고 짐작이 갔다. 나는 반란군에게 무공훈장 수여 결정하여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음을 결심하고 불의의 승진 기회를 박차고 예비역에 편입되는 정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였다. 1981년 7월 31일.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개정된 인사법에 따라 1년 단축한 만기 육군준장 7년 정년으로 군복을 벗었다.
군복을 벗자마자 전두환은 나를 국영기업체 감사로 임명했지만 나는 사표를 내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군사(軍史) 바로잡기 위한 '대장정'의 험로로 결연히 향했다.
위 글은 박경석 장군의 다음 카페(박경석의 서재)에서도 원본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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