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각의 백선엽 기념비 : 사실을 왜곡한 비라면 철거돼야 마땅!
한국전쟁 발발 초기 백선엽 대령(이하 특별히 계급을 말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급 생략함)이 이끈 국군 제1사단은 수도 방어의 중요한 지점인 서울 북방 개성(당시는 남한에 속했음)과 임진강 하류의 문산지역 방어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장 백선엽은 전쟁발발 첫날부터 개성에 주둔한 제12연대와 연락도 두절됐고, 나머지 후방 지역의 예하 연대들도 적절히 운용할 수 없어 결국 문산을 북한군에게 내주면서부터 수중의 무기 장비를 모두 버리고 빈손으로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백선엽이 수도 서울을 사수한 것처럼 왜곡해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파주시에서 임진강의 임진각에다 2011년 6월 25일에 세운 부조로 된 기념비가 그것이다. 2021년 새해 들어 어제 1월 3일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알고서도 강행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역사왜곡의 현장을 답사했다. 설치된 기념비와 구조물들을 자세히 보니 왜곡사실이 확인됐다.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백선엽 장군 기념비"가 제작되기까지의 과정, 이 사업을 발안하고 추진한 2010~2011년 당시 이인제 파주시장의 취지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에 실려 있다.
https://mnews.joins.com/article/5691199
먼저 백선엽의 계급부터 잘못돼 있다. 기념비 부조에는 백선엽의 철모에 별이 하나 조각돼 있다. 그는 당시 준장이 아니라 대령 계급으로 사단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가 준장으로 진급한 것은 며칠 뒤인 7월에 들어가서였다.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날로부터 후퇴로 일관한 패전의 주인공이 문책되기는커녕 오히려 장군으로 진급했다니 무슨 연유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차제에 전쟁 당시 백선엽의 진급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당시 전쟁 초기 백선엽의 행적에 관해서다. 1950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백선엽은 단 한 번도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는데도 마치 그가 직접 부하들을 지휘해 전투를 치른 것처럼 새긴 것은 중대한 사실왜곡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면, 부조 왼쪽 편의 병사가 철모 끈을 풀어놓은 모습으로 조각해놓은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영화든, 조각상이든, 그림이든 전투장면을 묘사한 것에 철모 끈을 풀어놓은 것은 꼭 여기만은 아니라 흔히 자주 보게 된다. 백선엽 기념비의 부조에서도 동일한 실수를 한 셈이다. 격렬한 몸놀림이 필요한 전투에서 철모 끈을 풀어놓고 전투에 임한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전투를 멋으로 하나?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어쩌고 하는 전쟁영화들은 모두 병사들이 철모 끈을 끄른 채 전투하는 장면을 찍은 게 적지 않다. 한 마디로 어이없는 희화화다. 시인이든, 조각가든 작가는 작품에 임할 때는 먼저 대상에 대한 사실에 정확하고 치밀해야 한다.
준공기 둘째 단락에는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참전한 파주 출신 용사와 학도의용군, 그리고 국토수호에 목숨을 건 육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장병들, 긴박하고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합동으로 진지를 구축한 지역주민과 중학생들(문산공립 농업중학교, 현 문산 제일고등학교)의 나라사랑 정신과 6·25전쟁의 수난사를 이 기념비를 통해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먼저 모든 기록물은 당시의 상황을 사실대로 기록해야 한다. 당시 백선엽의 계급은 장군이 아니라 대령이었다. 휘하 부하장병들(특히 전방 개성을 방어하던 제12연대의 장병들)의 행방도 모른 채 후퇴를 한 백선엽이 과연 “국토 수호에 목숨을 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가? 이 표현은 사실에 맞지 않다. 이 역시 왜곡이다.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말은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선엽의 애국정신을 기린다는 취지에서 조성한 기념물이라면 이것이 백선엽이 한 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근배라는 시인은 표지석에 새겨진 ‘자유여, 영원한 호국의 횃불이여’란 제목의 헌시에서 “구국의 명장 백선엽 장군이 세운 무공이 겨레의 내일을 밝히고 있다”고 썼다. 시인이 뭘 하는 직업 혹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사실 확인도 없이 헌시를 바칠 수 있는 강심장이 부러울 지경이다. 전쟁 초기 당시 이곳이 어떤 곳이었던가?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수도 서울의 안전에 직결되는 결정적인 전략지다.
그런데 이곳을 방어할 임무가 있던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 대령이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하고 무기 장비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고 다니던 지프차까지 모조리 내팽개치고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인 이곳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행적을 알았다면 시인이라고 해서 헌시까지 써서 백선엽 장군을 찬양할 마음이 생길까? 이근배 시인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도 헌시를 바쳤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적지도 않은 2억원이 넘는 도민의 세금(경기도비 2억원과 추진위가 모금한 성금 2300여 만원)을 들여 만든 기념물이라면 사전에 사실 확인과 고증이 치밀해야 한다. 조형물 설치금액의 다소와 상관없이 사실 왜곡, 역사왜곡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시장에 취임한 뒤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기념 조형물’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은 이인제 파주시장의 당초 취지는 “6·25의 실상을 모르는 후대에게 안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북한과 접경인 파주의 시장으로서 뭔가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원래 이인제 시장은 백선엽의 동상을 건립하려고 구상하고 이 의사를 백 장군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러자 백선엽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지 그는 2010년 8월 파주시를 방문해서 “나만이 아니라 참전용사와 학도병들이 함께 6·25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것”이라고 조언해서, 즉 사양하게 돼 그의 동상은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파주 문산 지역에서 일어난 6·25전쟁의 전투를 알리려고 했다면 백선엽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있었던 실상을 그대로 알려야 했었다. 그래야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알게 할 수 있다. 과나 허물을 감춰선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없다. 역사는 폼으로 배우거나 배우게 하는 게 아니다.
백선엽 기념비의 내용이 왜곡돼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면 지금이라도 철거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를 추진한 이들의 자발적인 사과도 있으면 좋을 것이다. 또한 기념비 철거 후에도 새로운 기념비를 세울 재건립 의지와 시의 예산이 있다면 초기 전투에서 죽어간 이름 없는 주민들과 학생들의 넋을 기리를 비를 세우는 게 바른 길이다.
백선엽 기념비 건립에 들었던 경비를 아까워할 일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소요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인식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때론 과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수도 서울이 적의 치하에 들게 된 첫 번째 배경이 된 지역이라면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한다.
2021. 1. 4. 16:07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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