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공지 및 정보 마당

베이징에서 떠올려 본 오늘의 역사

雲靜, 仰天 2020. 12. 15. 08:17

베이징에서 떠올려 본 오늘의 역사

 

2017년 4월 14일, 오랜만에 중국 베이징(北京)에 와서 과거 역사상의 오늘을 훑어보니 느낌이 평소와는 다르네요. 나는 25년 전 한중수교가 있던 그해 12월 베이징에 처음 온 뒤로 수없이 다니면서 이곳의 변화를 북경 아닌 타지의 중국인들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못 가본 데가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중국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네요.

 

평소 少見多怪한 나로선 세상천지 어디를 가도 의문투성이인데, 지금까지 중국에만 120번 넘게 와봤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요. 신비롭다, 신기하다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해당 대상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알면 신비로울 리가 없으니까요. 소견다괴가 뭐냐고요? 본 게 적으면 신기한 일이 많다는 뜻인데, 한나라 시대 불교서『異惑論』과 東晋의 葛洪(283~363)이 지은『抱朴子』에 나오는 말로서 견문이 좁음을 비웃을 때 쓰는 말입니다.

 

 

갈홍의 초상화. 포박자는 갈홍 자신이 스스로 붙인 호의 이름에서 딴 서명이다. 이 책은 그가 의술을 업으로 한 의학자이자 단수련가로서 그 당시까지 전해져 오던 단수련에 관한 비법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중국 고대 의학사나 화학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 많이 수록돼 있다.

 

암튼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남긴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자위하고 싶습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한 피카소였지만, 그는 내가 2~30년 전 그의 작품을 따라 그려보기도 한 바 있는 인물입니다. 현재의 즐거움이 중요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가 인생에서 해온 것은 현재를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늘 현재를 위해서이며, 그러한 현재를 지속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늘 해왔다. 나는 탐구심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과거고 미래고 생각하지 않고 표현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피카소가 근대적 화법을 혁명적으로 바꾼 인물로 평가되는 20세기 최고의 미술가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옳은 건지 나쁜 건진 몰라도 여자를 너무 탐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피카소의 예술사적 위치와 함께 여성편력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로 소개할 생각이다.

 

역사상의 무수히 많은 4월 14일들 중에 가장 눈길이 가지는 건 아무래도 왜국의 침략을 받아 우리강토가 쑥대밭이 되고 조상들이 참혹하게 유린당한 임진왜란일 것입니다. 1592년(조선 선조25) 오늘, 왜군 20여만 명이 부산포에 상륙함에 따라 임진왜란(‘임진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임진왜란의 경과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돌리고, 지금은 전쟁의 판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 지도로 대신한다.

 

일본에서는 이 침략을 ‘임진왜란’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이 침략전쟁을 부르는 공식 용어로는 191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文禄慶長の役’라고 쓰고 ‘분로쿠 케이쬬우노 야쿠’라고 읽습니다.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케이쬬우’는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를 따서 붙인 명칭인데, ‘문록경장의 역’이란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일본의 天正 20년(선조 25년)에 시작돼 이듬해 文禄 2년에 휴전한 文禄의 役과 慶長 2년에 있은 講和交渉決裂에 따라 재개돼 慶長 3년(선조 31년) 타이꼬우(太閤, 섭정 또는 関白의 직에서 물러난 뒤 아들이 摂関의 직에 오른 자)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게 되자 왜군이 물러남으로써 끝나게 된 慶長の役을 합친 전역의 총칭입니다. 침략의 의미는 쏙 빼버리고 중립적인 의미로 서술하고자 한 의도가 스며들어 있는 네이밍인 것이죠.

 

 

작은 섬나라에서 태어나 세상 넓은 줄 몰라서 중국의 천자를 뒤엎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보겠다는 야심을 위해 동아시아를 전화로 몰아넣은 침랴의 원흉 토요또미 히데요시. 이 자에 대해서도 나중에 따로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말이 나온 김에 이 전쟁을 조금 깊이 논하고 싶어도 여행 중이라 불가능하네요. 특히 雲靜이 평소에 불만스러워 한 비루하고 졸렬했던 선조(1567~1608)의 어이없는 논공행상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짚어봐야겠다는 의무감마저 듭니다.

 

 

선조의 초상화라며 인터넷상에 떠도는 그림. 관복의 가슴팎에 붙어 있는 그림이 용이나 해와 달이 아닌 것(십장생 중구름 따위?)으로 봐선 당상관 이상의 관료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중에 자세히 고증해보고 틀린 게 있으면 바루겠다.

 

장장 7년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안긴 전쟁이었습니다. 세 나라 모두 정권이 바뀌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었죠. 명나라 황제가 사신으로 간 백사 이항복의 간청을 조정신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받아들여 결국 산해관 일대에서 만주족의 군대를 막고 있던 정병 5만 명을 원병으로 조선에 보내는 바람에 중국에선 이 전쟁의 영향으로 명이 무너지고 청이 들어섰고, 조선에서는 실학이 대두되는 배경이 됐으며, 세상 넓은 줄 알게 된 일본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게 된 원인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조선 조정은 사전에 일본의 침략낌새를 채고 있었고, 퇴계(1501~1570)가 정말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는 검증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양심적인 일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저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조정은 전쟁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선조의 만류를 한사코 뿌리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서 후학 양성에 힘쓴 퇴계 이황. 그는 도산서원으로 낙향할 때 이미 선조의 사람됨됨이와 국가지도자로서 왕의 자질을 밑바닥까지 본 게 아니었을까?

 

결과는 뻔했지 않습니까? 일본군에게 한 달도 안 돼 수도 한양을 내주고 용속한 임금 선조와 사대부 권신들이 백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됐습니다. 선조는 의주에서 왜군이 더 북진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넘어갈 요량이었지만, 명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1912~1997)도 똑 같이 압록강에서 가장 얇고 강폭이 좁은 강계 쪽 허름한 민가에 숨어 지내다가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런 놈들이 임금이 되고, 수령이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산에서 열차로 귀경하던 중 새마을호 열차가 대전역에서 잠시 멈췄을 때였다. 그날은 7월초였음에도 유달리 더웠던 날씨였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그날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사인이 과연 심근경색이었을까하는 점은 지금도 석연치 않게 생각된다. 자신의 전권 행사를 앞당기려던 김정일의 독살? 아무튼 이 자는 한민족의 5천년 역사에서 자손대대로, 민족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가장 큰 죄인이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죄는 그가 지옥에서 천만 번 사죄해도 사해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통일이 되고나서도 남침전쟁에 대한 책임을 두고 정치 세력들 간에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쟁투가 벌어질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문인이었지만 조정의 영상으로서 전쟁을 총지휘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이 그런 참담한 난을 두 번 다시는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임란의 교훈을 담은『징비록』(懲毖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뒤 사람들은 그 교훈을 곱씹어 보거나 분기탱천해서 나라발전을 가로막는 각종 폐단들을 없애고 국방력을 증강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서애의 이 당부만 제대로 지켜서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력을 키웠더라면 그렇게도 참혹하고 비참한 병자호란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뼈 아픈 역사를 보면 서애의 이 권고는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침략을 하는 자들이 나쁜 놈들이긴 하지만, 미래의 국가안전을 예비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외침을 당해도 싸다고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선조라는 왕부터가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충절과 재야 의병장들의 헌신에 힘입어 나라가 패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선 명나라의 군사 지원으로 위기에서 살아난 것으로 인식한 나머지 중국을 은인으로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皇恩이라는 말이 조선 조정에서 이데올로기가 되다시피 한 출발선이었죠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그 역사가 깊고도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천년 한민족의 역사에서 충무공 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도 공을 논하려면 한량 없지만, 사람으로서의 인품이나 장수로서의 자질과 능력으로선 그를 능가할 이가 없다. (이 초상화는 한 때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려서 현충사의 이순신 영정과 교체해서 문제가 된 작품임)
충무공이 남긴 난중일기 역시 사료적 가치를 형량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나는 난중일기를 통해 충무공에 대해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꽤 발견하고 그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나의 이 블로그에도 몇 편 올려놨으니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부터는 아예 명을 정통으로 삼아 조선의 임금은 우습게 알면서도 중국에는 모든 것을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대하면서 권력을 농단한, 수구 ‘꼴보수’ 송시열(1607~1689)을 당수로 한 노론계열의 사대부들은 결코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당쟁사, 사대주의사상에 대해 식견을 지닌 사람들에겐 분명 우암은 좋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의 교훈은 어디로 날려버리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뒤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노골적으로 획책한 인물이다. 위 사진에서 우암의 머리 뒤로 마치 불화 속의 광배처럼 빛이 나는 건 원래 초상화가 그렇게 그려진 게 아니고 이 초상화가 전시된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실의 조명 때문이다. 영성의 부처님에게만 나타난다는 광배가 이런 저질의 인간에게 나타날 리가 없죠.

 

그것이 결국 나중에 구한말을 거쳐 권중현(1854~1934), 박제순(1858~1916), 송병준(1858~1925), 이완용(1858~1926) 등등 친일 매국노의 계보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일제가 물러난 뒤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가 되고, 반공을 앞세워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승만과 친일파가 기득권 유지와 서민의 혹세무민에 힘을 쏟은 역사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죠.

 

 

을사오적신의 한 사람 권중현. 그는 농상대신으로 일제를 위해 매국에 앞장 선 인물이다.
외무대신으로 을사 오적신 중의 한 사람이 된 박제순
친일내각에 들어가 정미7조약 체결에 앞장 섰던 송병준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친일파의 대명사가 돼버린 이완용

 

아무튼, 약 400년이 지난 1990년 4월 14일 오늘, 백범 김구(1876~1949) 암살범 안두희(1917~1996)가 심경변화가 있었든지 어쩐 일로 일부이지만 김구암살 진상을 밝혔습니다. 장택상(1893~1969), 노덕술(1899~1968), 최운하(?~?)와 김태선(1903~1977) 등등의 경찰간부들과 김창용(1916~1956) 특무대장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하라는 암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타국에서 독립을 위해 일제의 추적을 피해 다니면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귀국 후 만 4년이 못 돼 살해 당한 비운의 지도자였다. 우남 이승만이 아니고 백범이 대통령이 돼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 됐을까? 최소한 우남처럼 무고한 사람들은 많이 죽이진 않았을 것이다.
김구 살해범 안두희. 그는 김구가 북한 김일성과의 대화에 나선 것에 불만을 품고 경교장의 김구 선생을 찾아가서 백범의 생각을 바꾸라고 여러 차례 집요하게 권유, 종용하다가 백범이 듣지 않고 면전에서 화까지 내면서 질타하자 격분한 나머지 결국 권총을 뽑아 들고 바로 면전에서 방아쇠를 당긴 확신범이다. 이런 자의 말로는 좋을 게 없다. 나중에 평생 자신을 죽이려는 의협심 있는 분들의 증오에 찬 추격과 공격에 시달리다가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온 그도 이윽고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자택에 들이닥친 박기서라는 분에게 살해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김구 살해의 배후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 관한 내용은 내가 2년 전에 써서 이 블로그에 올려 놓은 "장개석의 김구 만사를 통해 본 장개석, 김구, 이승만 관계의 한 단면"이 참고가 될 것이다.
광복 후 초대 수도청장, 즉 요즘으로 치면 서울경찰청장을 지낸 뒤 초대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지낸 장택상.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의 색출과 제거에 앞장 선 그는 당시로는 드물었던 영국 유학출신이었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중퇴)한 그는 초기 영국생활 때 조선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이 없던 그 시절,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잠옷 바람에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양치질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영국인들에게 보여줘 자신이 동양의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온 귀족이라고 소개하고나서야 비로서 인정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노덕술이라는 자는 일제 때 일본인 형사보다 더 동포들을 잡아 족친 악명 높은 고등계형사란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광복 후 그가 이승만 정권에 발탁되더니 그의 특기인 공갈, 협박, 린치, 폭행 등의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았던 자다. 그런데 그 시절, 그가 3년 연속으로 군인이나 경찰 등 국가수호에 공로가 많은 이들에게 주는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화랑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승만 정권이 얼마 만큼 비정상적인 권력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김창룡도 노덕술 만큼이나 악괴로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문제인물이었다. 상전인 이승만에게 뭔가 임명된 모양인데, 머리를 숙이면서도 이승만을 올려다 보는 눈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오늘은 물 건너에서도 굵직한 사건이 많이 터진 날이네요. 미국에서는 1865년 오늘,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이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배우 부드라는 자에게 저격당한 뒤 바로 그 다음날 사망했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많이 만드신 것 같다.” 흑인도 사람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그가 남긴 말입니다.

 

 

미국은 '자유'라는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였다. 그러나 '자유'가 '평등'을 제치고 너무 흥한 나머지 결국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날로 심해지던 격차시대였다. 그런 배경에서 평등개념을 주창하고 그 가치를 미국사회에 불어넣음으로써 미국 정치발전에 거의 혁명적인 공헌을 한 링컨 대통령(대리석 석상 앞에 선 멀대 같은 자는 링컨이 '듣도 보도' 못한 한국에서 온 그의 7할 정도의 추종자)

 

영국에서는 1889년 4월 14일 오늘 영국이 자랑하는 걸출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가 태어난 날이군요.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접하는 소위 '문명사관'으로 사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죠. 물론,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파악한 문명사관은 이론적 오류가 적지 않아서 그 뒤에 비판을 엄청 받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는 한국문명을 일본보다 못한 것으로 보고 중국문명의 아류로 보고 기술해 놓았는데, 나는 이게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놀드 토인비 교수. 나는 그를 세계적인 역사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저서 '역사의 연구' 보다 그가 악에 대한 신의 책임을 거론한 이 말 한 마디가 훨씬 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같은 역사학도인 내가 보기에 그의 문명사관은 이론상의 문제들이 적지 않은 역사관이다.

 

또 1912년 오늘은 그 유명한 영국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Titanic)호가 칠흑 같은 밤의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날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최후를 지켜본 이가 남긴 기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일요일, 시계는 바야흐로 오후 11시 40분을 가리키려 하였다. 프리트는 갑자기 바로 앞에 무슨 물체가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주위의 어두움보다도 훨씬 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았으나 그것은 곧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로드, ‘타이타닉호의 최후’에서.

 

 

문명의 침몰인가? 신의 농간인가?

 

이 배에 탄 30세도 채 안 된 미국의 유망한 젊은 사업가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Harry Elkins Widner, 1885~1912)는 보던 책을 가지러 선실로 다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타이타닉호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자 가까스로 살아난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모교 하바드대학에 350만 달러라는 거액을 기증해 장서 350만 권의,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을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독서광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엘킨스 와이드너. 그는 죽어서 하바드대학의 발전을 견인한 셈이다.

 

타이타닉호엔 또 그 시절에 벌써 백만장자가 아닌 억만장자로 알려진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1865~1912)도 탔던 모양입니다. 그는 가족과 자신의 하인만 보트에 태워 보내고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라며 배에 남아 한창 나이인 47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벤자민 구겐하임. 따지고 보면 그는 전후 현대 서양미술의 중심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온 뒤 미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한 첫번째 큰 손의 원조가 아닐까?

 

벤자민 구겐하임 대신 그의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이 상속 받은 거금의 재산으로 현대 미국 미술사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전후 파리, 뷔엔나, 취리히 등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가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된 미국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이 더욱 빛을 발하도록 터를 제공한 셈이죠.

 

 

페기 구겐하임. 그는 동양미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 안목 있는 현대 서양 미술계의 큰 손이었다. 지난 세기 '액션 페인팅'으로 일약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된 잭슨 폴록도 그가 발탁해서 키운 인물이었다. 한때 그는 한국인들에게 "걸레 스님"으로 불린 중광의 기행과 작품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그래서 중광도 한 동안 미국으로 자주 들락 거렸다. 아차! 페기가 아니라 랭카셔였던가?

 

타이타닉호의 소유주 조셉 브루스 이스메이(Joseph Bruce Ismay, 1862~1937)는 몰래 보트에 뛰어내려 타는 바람에 살게 된 반면에 타이타닉호의 수석 설계자 토마스 앤드루스(Thomas Andrews, 1873~1912)는 튼튼한 배를 만들지 못해 미안하다며 배에 남아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멋진 선장에, 멋진 선주였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주 조셉 이스메이. 덕분에 그는 그 뒤 25년을 더 육지에서 숨을 쉬고 살았었다.
양심적인 죄책감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토마스 앤드루스

 

이는 거대한 배 전체가 침몰되어 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울부짖는 승객들을 뒤로 하고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 대비되지 않나요? 이걸 보면 토마스 앤드루스의 최후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살신성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선장처럼 멋진 최후를 보낸 타이타닉호의 밴드 마스터 왤리스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는  또 어떻고요? 그도 승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악단 단원들 8명과 함께 끝까지 남아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처연해서 숭고미까지 들게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은은하지만 비감어린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타이타닉 호에 탄 승객 총 2,206명 중 703명이 구조됐습니다. 나머지 1,503명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타이타닉 영화에서처럼 생사가 교차되는 순간에도 의연하게 연주하던 음악이 끊이지 않도록 끝까지 악단을 지휘한 악단장 왤리스 하틀리. 멀대도 그런 경우를 맞닥뜨린다면 그렇게 갈 것이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참사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역시 선장은 어떻게 대응했냐는 점입니다. 털보로 마음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J. Smith, 1850~1912) 끝까지 승객구조 작업을 지휘한 뒤 마지막엔 정든 배와 함께 운명해서 결국 주검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통상 해난사고를 만나 승객들을 구조를 해야 할 상황에선 선장은 승객들을 다 이선시키거나 구조하지 못하면 배와 함께 최후를 맞는 게 해운업계의 통념인데, 그러한 정신을 실천한 예라고 봅니다.

 

 

자신의 몸처럼 아낀 타이타닉과 운명을 함께 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한국에는 그런 선장이 나올 수 없는가? 세월호 선장도 선장이었지만 사람의 격이 다르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라면 그런 경우에 스미스 선장처럼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또 눈여겨 볼 점이 더 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여성과 어린이와 노약자를 우선적으로 구출한 사실,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발휘한 사실입니다. 당시 생존자와 사망자가 이를 말해줍니다. 남성은 생존자가 315명, 사망자가 1,348명이었음에 반해 여성은 생존자가 336명, 사망자가 103명이었고, 어린이는 생존자가 52명, 사망자가 53명이었습니다.

 

남성이 구조된 비율 보다 여성과 어린이가 구조된 비율이 훨씬 많았던 이유는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사도가 극적인 상황에서도 발휘된 것으로 보는 게 맞겠죠. 자신은 죽더라도 어린이, 노약자, 여성부터 살리는 게 신사도의 요체잖습니까? 이는 중세 기사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어린이에 대한 보호,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기사도의 유산입니다. 이 정신은 영국 군인들에게도 계승돼 내려져 오고 있다는데,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정신이죠.

 

프랑스에선 1980년 오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세상을 떠났고, 묘하게도 6년 뒤인 1986년 오늘 사르트르의 부인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도 남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봐르는 생전에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 부부는 雲靜이 청년 시절 한 때 겉멋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글도 읽고 정신을 닮고자 한 ‘위인’들이었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시가 파이프를 입에 문 장 폴 사르트르. 멀대가 젊은 시절 좋아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계약결혼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시몬느 보봐르. 그는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노력한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2010년 오늘 중국에선 칭하이(靑海)성에서 진도 7.1도의 강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2,000여 명이나 된 참사가 났습니다. 같은 날, 저 멀리 유럽의 아이슬란드에서는 에이야프알라요쿨(Eyjafjallajökull) 화산이 189년 만에 다시 폭발해서 항공대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이날 미국 오클라호마(Oklahoma) 주에서도 토네이도(Tornado)가 발생해 7개 주를 강타해 최소 45명이 사망했다고 하네요.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위에서 전화로 어디엔가 구원을 요청하는 라마승. 이 지역은 원래 1945년 이전 중국 국민당 통치시절만 해도 티베트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티베트 라마승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구체적인 위치는 靑海성 玉樹(티베트어로는 '제쿤도'라고 불림) 티베트족 자치주 玉樹市(제쿤도시)다.
에이야프알라요쿨 화산폭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함을 또 한번 일깨운다.
저 회오리 바람에 휩쓸리는 날이면 동식물이고, 사람이고, 건물이고 뭐고 간에 하나도 남아 있을 게 없을 것이다.
가공할 위력의 오크라호마 토네이도. 엎드려라! 최대한 낮게, 지면에 바싹 붙어라. 그러면 안심이 될 뿐만 아니라 목숨도 부지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작년 2016년 오늘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진도 6.5도의 지진이 발생해 22일까지 총 783회 여진들이 이어졌습니다. 이 지진으로 사망 48명, 2차 피해 사망 10명에다 실종 2명, 부상 1,159명, 이재민은 무려 9만여 명이 발생했습니다. 별스럽게도 이날에 지진이 유독 많이 일어났군요. 그래서 오늘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날이라고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확률이 뒷받침된 사실일까요?

 

 

인간들이란 지금까지 그토록 수없이 많이 자연재해를 당하고도 아직도 탐욕스런 개발 위주의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니깐! 또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까?
이날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의 진앙지

 

자, 이제 외출을 서둘러야 할 시각이군요. 베이징의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요. 오늘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나니 뭔가 오늘 하루는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자화자찬하자고 하는 소리지만 그래서 자신감이 용솟음치는군요.

 

 

많은 사람들이 모택동을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정치가라고 얘길 하고 있지만, 모택동을 역사의 건달이나 룸펜 같은 류의 우스운 인간으로 보는 멀대가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져 있는 천안문 광장 앞에서 중국혁명의 역사를 복기해본다.

 

2017. 4. 14. 10:25

중국 베이징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