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떠올려 본 오늘의 역사
2017년 4월 14일, 오랜만에 중국 베이징(北京)에 와서 과거 역사상의 오늘을 훑어보니 느낌이 평소와는 다르네요. 나는 25년 전 한중수교가 있던 그해 12월 베이징에 처음 온 뒤로 수없이 다니면서 이곳의 변화를 북경 아닌 타지의 중국인들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못 가본 데가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중국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네요.
평소 少見多怪한 나로선 세상천지 어디를 가도 의문투성이인데, 지금까지 중국에만 120번 넘게 와봤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요. 신비롭다, 신기하다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해당 대상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알면 신비로울 리가 없으니까요. 소견다괴가 뭐냐고요? 본 게 적으면 신기한 일이 많다는 뜻인데, 한나라 시대 불교서『異惑論』과 東晋의 葛洪(283~363)이 지은『抱朴子』에 나오는 말로서 견문이 좁음을 비웃을 때 쓰는 말입니다.
암튼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남긴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자위하고 싶습니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한 피카소였지만, 그는 내가 2~30년 전 그의 작품을 따라 그려보기도 한 바 있는 인물입니다. 현재의 즐거움이 중요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가 인생에서 해온 것은 현재를 위해서다. 다시 말해서 늘 현재를 위해서이며, 그러한 현재를 지속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늘 해왔다. 나는 탐구심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표현해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과거고 미래고 생각하지 않고 표현했다.”
역사상의 무수히 많은 4월 14일들 중에 가장 눈길이 가지는 건 아무래도 왜국의 침략을 받아 우리강토가 쑥대밭이 되고 조상들이 참혹하게 유린당한 임진왜란일 것입니다. 1592년(조선 선조25) 오늘, 왜군 20여만 명이 부산포에 상륙함에 따라 임진왜란(‘임진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일본에서는 이 침략을 ‘임진왜란’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이 침략전쟁을 부르는 공식 용어로는 191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文禄慶長の役’라고 쓰고 ‘분로쿠 케이쬬우노 야쿠’라고 읽습니다.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케이쬬우’는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를 따서 붙인 명칭인데, ‘문록경장의 역’이란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일본의 天正 20년(선조 25년)에 시작돼 이듬해 文禄 2년에 휴전한 文禄의 役과 慶長 2년에 있은 講和交渉決裂에 따라 재개돼 慶長 3년(선조 31년) 타이꼬우(太閤, 섭정 또는 関白의 직에서 물러난 뒤 아들이 摂関의 직에 오른 자)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게 되자 왜군이 물러남으로써 끝나게 된 慶長の役을 합친 전역의 총칭입니다. 침략의 의미는 쏙 빼버리고 중립적인 의미로 서술하고자 한 의도가 스며들어 있는 네이밍인 것이죠.
임진왜란 말이 나온 김에 이 전쟁을 조금 깊이 논하고 싶어도 여행 중이라 불가능하네요. 특히 雲靜이 평소에 불만스러워 한 비루하고 졸렬했던 선조(1567~1608)의 어이없는 논공행상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짚어봐야겠다는 의무감마저 듭니다.
장장 7년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에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안긴 전쟁이었습니다. 세 나라 모두 정권이 바뀌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었죠. 명나라 황제가 사신으로 간 백사 이항복의 간청을 조정신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받아들여 결국 산해관 일대에서 만주족의 군대를 막고 있던 정병 5만 명을 원병으로 조선에 보내는 바람에 중국에선 이 전쟁의 영향으로 명이 무너지고 청이 들어섰고, 조선에서는 실학이 대두되는 배경이 됐으며, 세상 넓은 줄 알게 된 일본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게 된 원인이 됐으니까요.
그런데 조선 조정은 사전에 일본의 침략낌새를 채고 있었고, 퇴계(1501~1570)가 정말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는 검증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양심적인 일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저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조정은 전쟁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과는 뻔했지 않습니까? 일본군에게 한 달도 안 돼 수도 한양을 내주고 용속한 임금 선조와 사대부 권신들이 백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됐습니다. 선조는 의주에서 왜군이 더 북진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넘어갈 요량이었지만, 명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1912~1997)도 똑 같이 압록강에서 가장 얇고 강폭이 좁은 강계 쪽 허름한 민가에 숨어 지내다가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런 놈들이 임금이 되고, 수령이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임진왜란 당시 문인이었지만 조정의 영상으로서 전쟁을 총지휘했던 서애 유성룡(1542~1607)이 그런 참담한 난을 두 번 다시는 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임란의 교훈을 담은『징비록』(懲毖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뒤 사람들은 그 교훈을 곱씹어 보거나 분기탱천해서 나라발전을 가로막는 각종 폐단들을 없애고 국방력을 증강하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조라는 왕부터가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충절과 재야 의병장들의 헌신에 힘입어 나라가 패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선 명나라의 군사 지원으로 위기에서 살아난 것으로 인식한 나머지 중국을 은인으로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皇恩”이라는 말이 조선 조정에서 이데올로기가 되다시피 한 출발선이었죠.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그 역사가 깊고도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부터는 아예 명을 정통으로 삼아 조선의 임금은 우습게 알면서도 중국에는 모든 것을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대하면서 권력을 농단한, 수구 ‘꼴보수’ 송시열(1607~1689)을 당수로 한 노론계열의 사대부들은 결코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결국 나중에 구한말을 거쳐 권중현(1854~1934), 박제순(1858~1916), 송병준(1858~1925), 이완용(1858~1926) 등등 친일 매국노의 계보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일제가 물러난 뒤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가 되고, 반공을 앞세워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승만과 친일파가 기득권 유지와 서민의 혹세무민에 힘을 쏟은 역사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죠.
아무튼, 약 400년이 지난 1990년 4월 14일 오늘, 백범 김구(1876~1949) 암살범 안두희(1917~1996)가 심경변화가 있었든지 어쩐 일로 일부이지만 김구암살 진상을 밝혔습니다. 장택상(1893~1969), 노덕술(1899~1968), 최운하(?~?)와 김태선(1903~1977) 등등의 경찰간부들과 김창용(1916~1956) 특무대장으로부터 백범을 암살하라는 암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입니다.
오늘은 물 건너에서도 굵직한 사건이 많이 터진 날이네요. 미국에서는 1865년 오늘,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이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배우 부드라는 자에게 저격당한 뒤 바로 그 다음날 사망했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평범한 모습의 사람을 많이 만드신 것 같다.” 흑인도 사람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그가 남긴 말입니다.
영국에서는 1889년 4월 14일 오늘 영국이 자랑하는 걸출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가 태어난 날이군요.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접하는 소위 '문명사관'으로 사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죠. 물론,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파악한 문명사관은 이론적 오류가 적지 않아서 그 뒤에 비판을 엄청 받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는 한국문명을 일본보다 못한 것으로 보고 중국문명의 아류로 보고 기술해 놓았는데, 나는 이게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아요.
또 1912년 오늘은 그 유명한 영국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Titanic)호가 칠흑 같은 밤의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날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최후를 지켜본 이가 남긴 기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일요일, 시계는 바야흐로 오후 11시 40분을 가리키려 하였다. 프리트는 갑자기 바로 앞에 무슨 물체가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주위의 어두움보다도 훨씬 검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았으나 그것은 곧 점점 커지며 다가왔다.”―로드, ‘타이타닉호의 최후’에서.
이 배에 탄 30세도 채 안 된 미국의 유망한 젊은 사업가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Harry Elkins Widner, 1885~1912)는 보던 책을 가지러 선실로 다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타이타닉호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자 가까스로 살아난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모교 하바드대학에 350만 달러라는 거액을 기증해 장서 350만 권의,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을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엔 또 그 시절에 벌써 백만장자가 아닌 억만장자로 알려진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1865~1912)도 탔던 모양입니다. 그는 가족과 자신의 하인만 보트에 태워 보내고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라며 배에 남아 한창 나이인 47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벤자민 구겐하임 대신 그의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이 상속 받은 거금의 재산으로 현대 미국 미술사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전후 파리, 뷔엔나, 취리히 등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가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된 미국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이 더욱 빛을 발하도록 터를 제공한 셈이죠.
타이타닉호의 소유주 조셉 브루스 이스메이(Joseph Bruce Ismay, 1862~1937)는 몰래 보트에 뛰어내려 타는 바람에 살게 된 반면에 타이타닉호의 수석 설계자 토마스 앤드루스(Thomas Andrews, 1873~1912)는 튼튼한 배를 만들지 못해 미안하다며 배에 남아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멋진 선장에, 멋진 선주였습니다.
이는 거대한 배 전체가 침몰되어 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울부짖는 승객들을 뒤로 하고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 대비되지 않나요? 이걸 보면 토마스 앤드루스의 최후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살신성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선장처럼 멋진 최후를 보낸 타이타닉호의 밴드 마스터 왤리스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는 또 어떻고요? 그도 승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악단 단원들 8명과 함께 끝까지 남아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처연해서 숭고미까지 들게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은은하지만 비감어린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타이타닉 호에 탄 승객 총 2,206명 중 703명이 구조됐습니다. 나머지 1,503명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참사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역시 선장은 어떻게 대응했냐는 점입니다. 털보로 마음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J. Smith, 1850~1912)는 끝까지 승객구조 작업을 지휘한 뒤 마지막엔 정든 배와 함께 운명해서 결국 주검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통상 해난사고를 만나 승객들을 구조를 해야 할 상황에선 선장은 승객들을 다 이선시키거나 구조하지 못하면 배와 함께 최후를 맞는 게 해운업계의 통념인데, 그러한 정신을 실천한 예라고 봅니다.
여기서 또 눈여겨 볼 점이 더 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여성과 어린이와 노약자를 우선적으로 구출한 사실,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발휘한 사실입니다. 당시 생존자와 사망자가 이를 말해줍니다. 남성은 생존자가 315명, 사망자가 1,348명이었음에 반해 여성은 생존자가 336명, 사망자가 103명이었고, 어린이는 생존자가 52명, 사망자가 53명이었습니다.
남성이 구조된 비율 보다 여성과 어린이가 구조된 비율이 훨씬 많았던 이유는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사도가 극적인 상황에서도 발휘된 것으로 보는 게 맞겠죠. 자신은 죽더라도 어린이, 노약자, 여성부터 살리는 게 신사도의 요체잖습니까? 이는 중세 기사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어린이에 대한 보호,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기사도의 유산입니다. 이 정신은 영국 군인들에게도 계승돼 내려져 오고 있다는데,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정신이죠.
프랑스에선 1980년 오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세상을 떠났고, 묘하게도 6년 뒤인 1986년 오늘 사르트르의 부인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도 남편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봐르는 생전에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 부부는 雲靜이 청년 시절 한 때 겉멋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글도 읽고 정신을 닮고자 한 ‘위인’들이었죠.
2010년 오늘 중국에선 칭하이(靑海)성에서 진도 7.1도의 강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2,000여 명이나 된 참사가 났습니다. 같은 날, 저 멀리 유럽의 아이슬란드에서는 에이야프알라요쿨(Eyjafjallajökull) 화산이 189년 만에 다시 폭발해서 항공대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이날 미국 오클라호마(Oklahoma) 주에서도 토네이도(Tornado)가 발생해 7개 주를 강타해 최소 45명이 사망했다고 하네요.
일본에서도 작년 2016년 오늘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진도 6.5도의 지진이 발생해 22일까지 총 783회 여진들이 이어졌습니다. 이 지진으로 사망 48명, 2차 피해 사망 10명에다 실종 2명, 부상 1,159명, 이재민은 무려 9만여 명이 발생했습니다. 별스럽게도 이날에 지진이 유독 많이 일어났군요. 그래서 오늘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날이라고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확률이 뒷받침된 사실일까요?
자, 이제 외출을 서둘러야 할 시각이군요. 베이징의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요. 오늘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나니 뭔가 오늘 하루는 내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자화자찬하자고 하는 소리지만 그래서 자신감이 용솟음치는군요.
2017. 4. 14. 10:25
중국 베이징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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