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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安사변과 周恩來

雲靜, 仰天 2020. 12. 13. 13:28

西安사변과 周恩來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목 차

 

. 머리말

. 張學良의 심경변화와 周恩來의 통일전선

. 중공의 대응방침 변화와 周恩來의 역할

. 周恩來의 다차원 중재와 그 결과

. 周恩來 사후 수습

. 맺음말

 

. 머리말

 

금년은 西安사변 발발 제80주년이다. 중국 현대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던 西安사변은 19361212일 중국국민당(이하 국민당으로 약함)군 서북剿共 부총사령관으로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인자인 張學良이 국민당군 제17로군 사령관 楊虎城과 함께 자신의 상관이자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蔣介石을 체포, 구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력으로 국가원수인 그를 압박해 蔣介石에게 逼蔣抗日’, 즉 항일노선으로 전환할 것을 강제한 이른바 현대판 兵諫사건이었다.

 

서안사변의 주동자 장학량(왼쪽)과 양호성(오른쪽). 1936년 12월 12일, 국민정부의 제2인자 장학량이 양호성과 함께 중공의 배후 지원을 받아 결행한 서안사변은 중국현대사의 변곡점이자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다.

 

서안사변은 蔣介石에게 대일정책과 대중공정책에서 더 이상 일방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상실하게 만듦으로써 국공내전의 중단과 함께 국민정부를 항일로 나아가게 해 중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거시적으로 보면 나아가 중국의 공산화를 초래시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출발선이기도 했다.

 

사건의 발발에서부터 해결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이 사건의 중심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蔣介石을 비롯해 張學良, 楊虎城, 周恩來宋美齡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납치된 蔣介石과 부인 宋美齡은 당연하고, 西安사변을 획책하고 주도한 張學良楊虎城도 결자해지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張學良楊虎城蔣介石의 체포와 구금의 실제 행위자였지만 사건의 해결문제에서는 의견과 처지가 같지 않았다. 국민당 내 주전파(何應欽, 黃郛, 戴季陶 )와 주화파(孔祥熙, 宋子文, 宋美齡 )의 입장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張學良이 도움을 청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함) 역시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더욱이 초기 중공 지도부 내에는 즉각 蔣介石을 처결하자는 강경한 의견이 대두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蔣介石을 처단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각 당파와 정파들 간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蔣介石이 처형되지 않고 합의 하에 석방되도록 하기 위해 周恩來張學良, 楊虎城, 宋美齡 사이를 중재한 결과 실제로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됐다. 이 역할을 주도한 것은 周恩來였던 것이다.

 

본고의 문제의식은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 周恩來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기에 이처럼 각 당파와 정파들 간에 타협점을 일치시켰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해결의 주도 인물이 왜 하필이면 周恩來였던가 하는 점에 논의의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먼저 사건 발생에서부터 張學良西安사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중공이 존재했기에 가능했고, 그 중심에 周恩來가 있었다. 그는 張學良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부터 그에게 의지처가 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해결을 주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張學良이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즉시 周恩來에게 西安으로 와서 같이 방법을 모색하고 대책을 마련하자고 전보를 쳤고, “周恩來가 도착했을 때는 그는 마치 西安의 주모자 같아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문제해결을 위해 긴급히 西安으로 날아온 宋美齡 역시 張學良을 매개로 周恩來의 중재역할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宋美齡의 부탁을 받고 西安으로 와서 1225일까지 머무르면서 張學良蔣介石의 석방교섭에 직접 참여한 바 있는 윌리엄 도날드(William Henry Donald, 중국명 端納)周恩來를 협상의 파트너로 삼았으며, 그를 사건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처럼 사건 주동자와 사건해결의 현장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들은 공통적으로 周恩來西安사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西安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과정에서 周恩來가 행한 역할에 관한 후대 역사의 평가는 국공대립이라는 이념적, 정치적 영향을 받아 객관성이 결여된 나머지 과장돼 왔거나 아니면 역할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축소돼 왔다. 예컨대 중국학계가 周恩來의 역할을 과도하게 칭송했다면, 臺灣을 중심으로 한 비중국학계의 西安사변 연구자들은 사건해결 과정에서 周恩來가 보여준 조정자 역할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했다.

 

한 때 이 사건은 반세기 이상의 시공을 뛰어 넘어 중국대륙의 주인이 바뀌게 된 원인 혹은 책임을 둘러싼 논의와 직결돼 있으며, 이것이 臺灣해협 양안의 현실 정치에까지 지속적으로 파장을 드리우게 된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張學良을 두고 중국과 대만이 각기 千古功臣매국의 역적으로 극과 극의 평가를 내리는 배경이다. 서방 측 연구서에서 周恩來가 막후에서 전면에 나타나 조정을 진행했다는 식으로 이면의 실상을 과도하게 생략한 표면적인 관찰에 그치는 배경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본고는 臺灣해협 양안의 상반된 두 정치적 입장을 뛰어 넘어 제3의 관찰자 입장에서 西安사변의 발발에서 해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周恩來가 보여준 행위를 재구성함으로써 그가 중재자로서 보여준 역할과 의미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 張學良의 심경변화와 周恩來의 통일전선

 

張學良이 중공을 항일합작의 우군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張學良1935년 말까지도 공개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인 剿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이해 10~11월 사이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西安事變懺悔錄에서 西安사변을 일으키기 전에는 절대로 중공 측과 협의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193511~19362월 사이 張學良은 대략 세 경로를 통해 중공과 접촉했다. 瓦窯堡회의(19351212~25) 이래 周恩來는 중공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중공 중앙동북군공작위원회 서기 직함을 가지고 張學良과 그의 동북군을 대상으로 한 통일전선 공작을 책임지고 있었다.

 

周恩來의 통일전선 공작은 초기에 두고 온 고향을 애틋하게 그리워한 동북군 장병들의 향수와 반일정서에 호소해 단시간 내에 효과를 보았다. 그 결과 19351231, 중공이 홍군과 甘泉에 거주한 동북군과 항일을 위해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 그 예다.

 

193611, 周恩來는 포로로 잡은 동북군의 군관을 초청하여 열병식에 참관토록 했는데, 열병식 전에 동북군과 홍군은 공동으로 항일한다는 구호를 선전했다. 또 중공군에 포로가 된 동북군 예하의 연대장이던 高福源西安으로 돌려보내 張學良에게 중공을 공격하지 말고 홍군과 함께 항일하자고 요청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125, 周恩來, 毛澤東, 彭德懷 20명의 홍군 지도자들은 항일을 위해 동북군과 연합하기를 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항일을 위해 동북군과 연합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중공의 각오가 다음과 같이 언급돼 있다. “어떠한 항일 무장부대와도 연합하고, 국방정부와 항일연합군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직접 싸우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동북군과 공동으로 이 주장을 실현하기를 원하고, 전 중국인민을 위하여 항일의 선봉이 되고자 한다.”

 

중공의 항일호소는 張學良 자신은 물론, 동북군 소속 사병들과 장교들의 마음을 근저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중공, 楊虎城과 함께 공동으로 항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는 張學良이 행한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내전을 멈추고 공동으로 항일하자는 공산당의 드높은 외침은 널리 퍼져 있었고, 사실상 나의 마음을 때렸는데, 學良뿐만 아니라 이미 대부분 동북의 장군과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으며, 최소한 소장파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또한 군중들의 의견을 듣고 마침내 공산당과 연계하고 楊虎城과 연합하여 공산당 토벌을 멈추고, 실력을 보존하고, 공동으로 항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헌책했다.” 그 결과 중공과 張學良 및 동북군의 관계는 상호 밀접해지게 됐다.

 

그러나 張學良은 내심 중공에 대해 품어왔던 몇 가지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한 쉽게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것은 蔣介石의 신변안전을 포함해 그에 대한 배제여부에 대한 중공의 의도와 복안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張學良으로서는 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중공과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 공동항일을 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없었다.

 

張學良은 중공이 劉鼎, 李克農 등과 여러 차례 접촉해 의견을 교환한 바 있지만, 여전히 중공 중앙의 최고 지도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중공에 劉鼎, 李克農보다 직위가 더 높은 대표급 인사와 교섭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 결과 193649周恩來張學良李克農, 劉鼎, 王以哲이 배석한 가운데 拖肤에서 비밀회담을 가졌다. 다음날 새벽 4시경까지 계속된 이 회담에서 周恩來張學良은 내전중단, 공동항일, 항일구국, 聯蔣抗日과 정전, 통상, 합작 등의 문제들을 두고 시종일관 격론을 벌였다. 이 토론에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의견일치를 봤다.

 

첫째, 張學良은 이 모든 방침에 완전히 동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항일구국강령과 국방정부, 항일연합군의 조직에 관해서도 완전히 동의했다.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실행 시 다시 타협하기로 했으며, 서북국방정부를 수립해 소련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둘째, 張學良국민당은 끝났고 중국은 오직 두 가지 길만 남았다. 하나는 공산당의 길이고, 하나는 파시즘의 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周恩來는 다음과 같이 호응했다. 파시즘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자산계급의 일정 형식상의 민주를 모두 버렸다. 항일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대한 군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군중을 발동시키려면 반드시 민주를 실행해야 한다. 중국 파시즘의 길은 단지 일본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중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을 해야 한다.”

 

셋째, 張學良의 최대 관심사였던 聯蔣抗日문제와 관련해 그는 蔣介石이 중국 내에서 최고의 실력자이고, 항일의 힘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만일 항일 통일전선에 을 포함시키지 않아 그가 중앙정부 명의로 반대하면 일 처리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張學良은 또 蔣介石은 민족주의자이고 국민당 안에서 영도력이 가장 뛰어나다. 그가 귀국한 후 2년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蔣介石은 항일을 할 것이다. 蔣介石은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고 언급하면서 蔣介石의 잘못은 외세를 배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부의 안정을 우선으로 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을 바꾸면 내전을 중단하고 같이 항일한다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 공산당이 밖에서 압력을 가하고, 張學良이 안에서 설득하면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張學良은 또 단지 蔣介石이 일본에 투항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은 蔣介石을 반대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周恩來張學良의 상기 언급을 경청하고 난 뒤, 중공이 과거 反蔣抗日을 주장한 배경과 동기를 설명하고, 또한 현재는 그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周恩來張學良에게 공산당은 蔣介石을 받아들이되 홍군이 국민당과 같은 자격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등 10가지 항일 조건들을 제시했다.

 

張學良은 중공측의 조건들을 蔣介石에게 진언하겠다고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쌍방은 약속한 바를 어기지 않기로 서약했다. 실제로 그 후 중공은 당 정책을 점차 바꿨다. 1936414毛澤東彭德懷 등 중공 지도부는 周恩來에게 張學良楊虎城 두 부대와의 관계는 당신이 통일적으로 교섭, 지도하라는 전보를 보내면서 張學良과의 직접 접촉을 피하되 그 부대에 대한 통일전선 공작의 모든 것을 맡겼다.

 

넷째, 정전, 통상, 협력 등의 문제였다. 張學良은 분명히 홍군과 싸우길 원치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蔣介石의 명령을 위배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후 군사행동이 있을 경우, 쌍방 모두가 먼저 협상하고 타협하기로 약속했다. 周恩來는 항일을 위해 홍군은 무선 전기 기자재와 의약품, 의료설비가 필요하니 동북군이 구매해줄 것을 요구했고, 張學良은 이에 완전히 동의했다. 쌍방은 또한 편복 차림의 정찰요원을 교차 파견해 어떠한 상황이라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자는데 동의했다.

 

이외에 서로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張學良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두뇌는 있으나 이념적 색채가 그리 농후하지 않은 사람들을 속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張學良이 간부가 부족하다는 고충을 털어놓자 그 문제에 대해서도 周恩來는 군관훈련단을 운영해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안을 제언했는데, 이것이 후에 王曲軍官訓練團등의 조직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었다.

 

周恩來張學良 쌍방은 시종 우호적으로 회담에 임했고, 쌍방은 항일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의견을 같이 했다. 이틀 후 張學良劉鼎에게 한 말은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회담 후, 나는 대단히 만족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나는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됐는데, 만나자 마자 바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周恩來는 좋은 친구로, 말에는 정과 의리가 있어 나한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내가 그를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張學良은 참회록에서 周恩來와 회담을 마친 후 은 아주 흡족해 했다. 후일 국내가 태평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항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周恩來 역시 422張學良에게 전보를 보내어 좌담으로 밤을 새웠음에도 지금까지 즐겁다라고 호응했다.

 

이처럼 쌍방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좋은 인상을 남긴 뒤로 중공과 동북군간의 직접적인 왕래와 통신은 더욱 빈번해졌다. 55, 그들은 전문을 보내 더 이상 反蔣 구호를 외치지 않기로 결의했다. 512일에도 같은 내용이 확인됐다. 810周恩來는 중공 중앙정치국회의에 참석해 항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蔣介石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周恩來의 주장을 받아들여 91일 중공 중앙서기처는 逼蔣抗日문제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고 정식으로 逼蔣抗日을 당의 공식 노선으로 정했다.

 

. 중공의 대응방침 변화와 周恩來의 역할

 

張學良은 여러 차례 蔣介石에게 剿共 중지와 일치 항일을 진언한데 이어 122일에도 洛陽으로 가서 蔣介石에게 또 한 번 진언했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또 중공토벌(剿共)을 재촉하기 위해 西安으로 날아온 蔣介石에게 127일 울면서 진언했지만 蔣介石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張學良楊虎城에게 剿共을 독전하면서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동북과 서북군을 각기 福建省河南 지역으로 배치하겠다는 최후의 통첩을 내렸다.

 

서안사변 직전 며칠 간 서안에 머물면서 장개석은 장학량을 여러 번 만나 중공에 대한 공격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고, 장학량은 중공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중공과 협력해서 화북지역으로까지 침략해들어온 일본군에 대해 전면 항일전을 벌일 것을 건의했다. 원래 두 사람 사이는 좋은 관계였다. 비록 장학량이 한때 무척이나 좋아했던 송미령이 장개석의 구애를 받고 결혼한 과거사가 있었지만, 국가대사를 두고는 협조적이었다.
12월 7일, 장학량이 또 다시 장개석에게 내전 중지를 건의하기 전 회식상에서의 두 사람. 이 당시 장개석은 유달리 얼굴이 야위어 보였는데 나라를 걱정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는 원래 마른 체구인데다가 서안으로 올 때 의치를 가져오지 못해 체류하는 동안 여러 날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했기 때문이다.

 

張學良楊虎城에게 이는 자신의 무력기반이 해체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그는 蔣介石을 체포하려고 결심하고 즉각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張學良楊虎城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의견일치를 본 시기는 1210일이었으며, 두 사람은 다음날 오후 2시 비밀리에 회동해 蔣介石을 체포할 행동개시 시간과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준비했다. 두 사람은 다음 세 가지를 확정했다.

 

첫째, 1212일 오전 6시 서안과 臨潼 두 곳에서 동시에 행동을 개시한다. 둘째, 蔣介石 관저의 전화에 접선시켜 서안, 남경에서 보고해오는 전화보고 내용과 그가 외부로 하는 전화통화 내용을 모두 감청해 그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한다. 행동개시 이전에 蔣介石이 눈치를 차려 이동하거나 혹은 특무와 기타 방면에서 蔣介石에게 비밀리에 보고할 경우 즉각 증강된 2개 중대 병력으로 서안에서 臨潼으로 출동해 蔣介石을 체포하고, 만약 서안에서의 파병이 늦게 될 경우 바로 臨潼縣 주둔한 제105사단의 劉多荃에게 명령해 신속히 체포명령을 집행하도록 한다. 셋째, 만약 상황 변화가 없다면 12일 새벽에 臨潼에서 蔣介石체포의 임무를 집행한다.

 

張學良楊虎城이 무력을 써서라도 蔣介石에게 강제하려고 한 것은 즉각적인 剿共중지와 항일요구를 수락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張學良에게 그 자체가 19286월 일본관동군에게 폭사당한 부친 張作霖의 원수를 갚는 것이기도 했지만, 국공합작의 항일로 일본에 빼앗긴 동북지역을 회복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동북군 전체의 염원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19361212일 새벽 3시 이후 張學良蔣介石이 머무르고 있던 陝西省 西安臨潼華淸池에서 蔣介石과 그 수하의 부하들에 대한 체포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張學良 휘하의 행동대원들은 행동개시 후 바로 蔣介石을 체포하지 못했다. 피신한 蔣介石을 수색하느라 시간이 경과됐고 서안의 華淸池 뒷산 중턱의 동굴까지 도피하던 중에 척추를 다친 蔣介石이 체포된 시각은 1212일 새벽 2시 경이 아니라 대략 아침 7시 반 경이었다. 陳誠, 朱紹良, 衛立煌, 蔣鼎文, 邵力子, 晏道, 陳調元 등 십 수 명의 西安 주재 국민당 고위 장교들 및 국민당 중앙정부 요원들은 모두 체포, 구금됐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蔣介石 蔣孝先, 邵元冲 같은 간부와 위병 20여 명이 사망했다

 

화청지 내 장개석이 머문 처소(다리 건너 오른쪽 편의 건물)
장개석은 이 침상에서 자다가 밖에서 자기 경호원들과 장학량 경위대 요원들 간의 총격전이 붙은 상황에서 총소리를 듣고 황급히 잠옷 바람으로 뒤편 문이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가 뒤산 중턱의 작은 동굴에 숨었다. 얼마나 놀랐기에! 그가 잠옷 바람으로 나갔다는 것은 자다가 일어나서 바로 옷도 갈아 입지 않고 여유 없이 나갔음을 말해준다.
장개석과 장학량 양 경호대원들 간의 총격전으로 총탄이 스치고 지나간 탄흔이 있는 자리. 이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설명이 돼 있는 흰 종이가 붙어 있는 곳의 위에 둥그랗게 보이는 구멍이 탄흔이다. (필자가 화청지를 방문한 때는 1998년 8월이었다.)
장개석이 창문으로 넘어 집 바깥으로 나와서 이 대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위 사진 속에서 백옥으로 조각된 양귀비의 조각상 뒤로 멀리 보이는 산 중턱이 바로 장개석이 피신해 숨어 있다가 체포된 동굴이 있는 곳이다. 여담이지만 양귀비 조각상은 얼굴이 오동통하고 두툼한 머리모양과 몸매가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 미인상으로 새겨놨다. 당나라 이전 삼국시대나 진나라 시대에는 양귀비처럼 살이 오른 풍만한 얼굴과 몸매와 달리 얼굴과 몸매가 모두 가냘프고 날씬한 여인을 미인으로 쳤다. 중국의 4대 미인 서시처럼 말이다.
장개석 체포작전에 투입돼 직접 장개석을 체포한 孫銘九(왼쪽). 그는 당시 장학량의 신변을 보호하던 경위대대의 대대장이었다.

 

그리고 張學良은 사건 즉시 중공의 毛澤東周恩來에게 전보를 보내 병간에 대한 의견을 물으면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국민당 胡宗南군의 반격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중공 홍군의 전병력을 延安 및 그 이남지역으로 이동시켜 環縣으로 집결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급전으로 전국에 蔣介石을 체포 구금한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宋美齡을 비롯해 閻錫山, 馮玉祥 등 국민당 내 주요 정치, 군사 지도자들에게도 전보를 쳐서 蔣介石에게 8개항을 실행하도록 압박할 것을 요구했다.

 

8개항이란 즉각적인 南京정부의 연합정부로의 개조, 각 정치 세력의 공동구국 요청을 받아들여 내전을 중지하고, 모든 정치범과 애국인사들의 석방, 민중의 애국운동 허용 및 집회 결사 등의 정치적 자유 허용, 즉각적인 구국회의 소집 등을 가리킨다. 張學良蔣介石이 내전중지와 항일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그를 풀어줄 생각이었다.

 

항일구국이라는 대의명분으로 蔣介石을 체포, 구금한 張學良은 사건 당일엔 자신의 주장을 蔣介石에게 설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 뒤 張學良의 내전 중지와 중공과의 연합항일 요청의사가 蔣介石에게 전해졌지만 분노에 찬 蔣介石은 이를 거부했다. 사태를 낙관하고 있던 張學良은 막상 蔣介石으로부터 자신의 요구사항이 거절당하자 심히 당황했다. 이날 자정 南京의 국민당 지도부는 긴급히 중앙정치위원회를 소집해 張學良을 당과 국가에 대한 배반자로 규정하고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다. 그리고 그의 부대는 전부 군사위원회에서 지휘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부대를 西安으로 이동시키고 군정부장 何應欽이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張學良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찌 수습해야할 지 속수무책의 상태에서즉각 保安의 중공 중앙에 급전을 타전해 대책을 논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張學良이 중공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자 한 것은 당시 周恩來張學良 사이에는 공동으로 蔣介石을 항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자는 약속이 이루어진 상황이어서 張學良 자신이 사건을 일으키는데 의지처가 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공을 제외한 그 어떤 정치집단이나 인물도 신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공이 사건 전부터 통일전선 결성을 끊임없이 촉구해온 결과였다.

 

毛澤東, 張聞天, 朱德, 周恩來, 張國燾 등 중공 중앙의 수뇌부가 張學良이 보내 온 긴급 전보를 접수한 것은 사건 발발 후 몇 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내용은 국가 최고 지도자를 구금 체포했다고 하면서 張學良 자신이 兵諫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고, 사건해결을 위해 중공지도부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張學良蔣介石에게 공산당 토벌을 멈추고 같이 힘을 모아 항일하자고 강력히 진언했지만, 蔣介石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에 부득불 蔣介石과 그 수하의 정부 요인들을 체포, 감금하는 무력 수단으로 자신의 항일 주장을 관철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張學良蔣介石이 항일주장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긴급 전보를 접수한 중공 중앙은 네 가지 방향으로 대응했다. 첫째, 중공 수뇌부는 다음날 1213일 오전 중공의 공식적인 당서기인 張聞天의 처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중공 정치국회의 수준에서 西安사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최초의 회의로서 張聞天이 주재했고 보고는 毛澤東이 했다. 의제는 蔣介石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西安에 또 다른 중앙정부를 설립할 것인지의 여부, 그리고 西安사변의 성격에 대한 평가, 즉 이 사건이 反蔣의도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세 가지였다.

 

이 의제들은 모두 蔣介石의 처분여부로 수렴되는 문제들로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사뭇 중요했다. 왜냐하면 西安에 중앙정부를 설립한다는 것은 南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의미하고, 西安사변의 反蔣성격의 존재여부 문제 역시 그 여부에 따라 蔣介石의 처분이 결정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1213일과 14일부터 毛澤東 등은 張學良楊虎城에게 보낸 전보 그리고 15일 발표한 홍군 장교가 西安사변에 관해 국민당과 국민정부에 보내는 전문, 세편의 전문들이 모두 蔣介石을 파면하고, 국민에게 넘겨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이전의 주장을 일관되게 따르고 있었다

 

당시 모택동이 장학량에게 보낸 친필 서한. 종이도, 글씨도 조악(모택동의 필체는 악필임)하지만 이것이 뉴욕의 한 경매에서 100만 달러를 홋가했다고 한다. 편지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이 서한이 엄청난 분량의 모택동문고에 수록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내겐 모든 종류의 모택동문고가 소장돼 있음)

 

둘째, 사건해결의 방침 혹은 방향제시와 국민당군의 西安 공격에 대비한 군사적 조치 그리고 蔣介石에 대한 신병확보를 분명히 하라는 당부였다. 1213일 밤 9毛澤東周恩來는 연명으로 張學良에게 보낸 답신을 통해 원칙적으로 사건은 민중운동적 입장에서 접근해야만 승리할 수 있으며, 신속히 전체 장병들에게 蔣介石의 죄상을 알리는 것이 긴급한 임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동시에 陝西省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胡宗南, 曾萬鐘, 毛炳文, 關麟征, 李仙洲 등의 국민당 각 부대에 대해서는 홍군이 견제할테니 즉각 동북군의 주력과 楊虎城의 국민당군 제17로군의 주력을 각기 西安平涼 일선과 西安潼關 일선으로 이동시켜 西安 방어에 치중해줄 것을 건의했다. 또한 蔣介石張學良 자신의 경비부대에 감금하고, 감금임무를 맡은 자들이 매수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을 촉구했으며, 南京 측의 공격 등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蔣介石을 즉각 처단하라고 제언했다. 당시 西安 일대에는 동북군과 서북군을 제외하고 약 7,000명 정도의 국민당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셋째, 張學良에게 상기 내용을 전한 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서기처에 張學良의 전보와 함께 蔣介石의 구금사실을 전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향후의 방침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소련의 지지 및 지원을 요청했다. 즉 이 사건은 周恩來, 張學良, 楊虎城 세 사람으로 구성된 ‘3인위원회를 조직해 해결할 것이며, 장차 蔣介石을 제외하고 홍군, 동북군, 17로군, 晉綏軍이 주력으로 항일을 전개하겠으니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라는 내용이었다.

 

넷째,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명의로 전군에 西安사변의 상황을 전하는 통고를 발했고, 중공 중앙기관지인紅色中華蔣介石을 인민이 공개적으로 심판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여론몰이를 시도했다. 동시에 그들은 중공 중앙의 소재지인 保安에서 군민 간부대회를 열어 蔣介石의 죄상을 성토하도록 유도했다. 중공 중앙은 1215일 중공 홍군 장교들의 공동 명의로 국민정부에 직접 전보를 보내 국민정부와 담판하고 화해하겠다는 의사도 없이 경멸과 명령조의 어투로 정치적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현재 도발 중인 내전을 멈추고, 을 파면시켜 국민의 심판에 맡길 것. 2. 각당, 각파, 각계, 각군 조직을 연합해 항일 통일전선정부를 조직한다. 3. 蔣介石이 좌지우지하던 권력집중과 기강통일 등등 무의미한 관료들의 허세를 떨쳐버리고, 허심탄회하게 국민과 다시 시작하며, 언론의 자유를 개방해 지난날의 암흑을 광명이 되게 하고, 좋지 못한 것을 경사스러운 일로 바꿀 것 등이었다.

 

당시 蔣介石의 신변은 석방되거나, 살해되든가 아니면 감금이 지속되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중공 지도부 내에는 갖가지 반응이 나타나 의견이 분분했다. 西安사변 발발 직후 중공 당지도부 내부에서 蔣介石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동향을 전해주는 직접적인 사료는 공개된 바 없다. 이 기능을 선별적으로 대신하고 있는 張國濤의 회고록에 따르면, 인민의 공개재판을 거쳐 반공분자인 蔣介石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구금된 그를 인질로 삼아 南京정부로 하여금 항일을 재촉하여 西安 군사세력의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중공 지도부 내 최고 연장자인 朱德은 우선 처형하고 보자는 주장을 강력히 개진했다. 毛澤東의 견해도 그가 1213일과 14일에 걸쳐 張學良, 楊虎城에게 보낸 전보에서 蔣介石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하게 암시하는 등 蔣介石의 제거는 어떤 경우라도 중공에게 득이 되니 처형하자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예컨대 毛澤東이 보낸 1213일의 전문은 원흉이라 칭하고, 전문 서두에 원흉을 체포하여 온 세계가 함께 기뻐하고 있다고 하면서 蔣介石이 나라를 팔고 백성을 짓밟았다는 죄상을 강조했다.

 

1214일의 전문에도 마찬가지로 원흉이라고 칭했다. 이 전문에는 蔣介石을 처분하라는 자는 보이지 않는데, 張國燾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이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거론하기가 거북했고, 더군다나 굳이 蔣介石 살해의 흔적을 문자로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컨대 사건발생 초기 중공 중앙지도부 내의 분위기를 보면 西安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蔣介石을 살려두면 화근이 되어 후환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중론이었다.

 

이처럼 毛澤東을 비롯한 중공 지도부 내에 蔣介石을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 것에 반해 周恩來는 그들과 달리 구금된 蔣介石을 압박해 그로 하여금 剿共을 중지케 하고, 홍군과의 합작을 통한 홍군의 항일전 참여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周恩來는 사태해결의 주체를 분명히 했다. 즉 그는 신중하게 이 사태는 중공이 주도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張學良楊虎城의 태도여하에 따라 기민하게 대응하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중공이 나서지 않고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周恩來는 중공지도부 요원들에게 張學良으로 하여금 소련측의 상황판단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왜냐하면 張學良은 소련의 평가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는데, 소련의 공개반응 보다는 중국의 일반여론과 중공 및 西安 측 내부의 의견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1213일 처음 西安사변의 발발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毛澤東의 의지와 상반되는 판단을 내렸는데, 이것은 일본인의 음모이며 張學良은 일본의 간첩이라고 비난했다. 모스크바 주재 중공의 코민테른 대표 王明은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이 기회에 蔣介石을 처단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크게 노하면서 반대했다. 스탈린은 소련 주재 중국대사 등 여러 경로를 통해 蔣介石聯蘇抗日하겠다는 의사를 접한 상태였다.

 

서안사변의 해결에 스탈린의 역할은 거의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근년에 중국에서 보도된 신문보도인데, 스탈린이 서안사변에 반대했었다는 표제가 달려 있다. 사실상 스탈린은 서안사변 뿐만 아니라 1920~40년대, 심지어 1953년 3월 그가 죽기 전까지 중국정치, 한국전쟁에 걸쳐 동아시아 역사에 깊은 음영을 드리운 자였다. 1945년 4월 모택동군이 장강을 건너 장개석을 추적해 섬멸하려고 출동하기 전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내 추적을 그만 두고 장강을 경계로 북쪽은 모택동이, 그 남쪽은 장개석이 분할해서 통치하라는 의사까지 피력한 바 있으니 말이다.
반면, 친국민당 계열의 언론매체들과 달리 연안, 보안 등 섬서성 일대 중공계열의 언론매체들에는 장학량과 양호성의 병간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 위 신문의 머릿기사에서 당시 중공의 처지와 인식을 엿볼 수 있듯이 장과 양이 발동한 장개석에 대한 병간을 "중화민족의 생존을 쟁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스탈린의 입장을 대변한消息報1214일자에 西安의 반란은 유명한 일본 하수인汪精衛張學良이 공동으로 계략을 꾸민 것이라는 논평이 게재됐다. 蔣介石의 집권으로 중국은 이미 힘이 집중되어 국방을 지도할 수 있는 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금번 張學良의 배신은 항일역량의 통일을 와해시키고 南京정부와 중국인민 모두에게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게 논평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였다.

 

예전처럼 이번 사건에도 직접 개입한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은 일본이 蔣介石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중국내륙으로 침공해올 것이고, 사태가 그런 식으로 발전되면 일본군은 소련의 동쪽 국경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蔣介石을 처단하면 중국은 전면적인 내란에 빠지게 되고, 그럴 경우 일본만 유리해지기 때문에 蔣介石이 석방돼 그가 항일전쟁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중일간에 전쟁이 폭발하면 그것은 충분히 일본의 대소 압박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대중공 압박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 정권 이래 줄곧 일제의 대소 공격에 중국을 방어벽으로 활용하려는 以夷制以의 지정학적 전략의 관점에서 西安사변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또 다른 매체인프라흐다1215일자 기사도 유사한 논조였다.

 

蔣介石을 처분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향하에 있는 南京정부를 여전히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남았다. 따라서 西安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周恩來는 중공 동지들에게 자신이 張學良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언명했다. 西安에 별도의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周恩來는 정치적으로 南京과 대립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에둘러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周恩來의 이 주장은 중공 당내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周恩來는 당시 동북군에 대한 통일전선 공작을 주관한 주요 책임자였고, 당내의 지위도 毛澤東에 버금갔다. 따라서 사실상 당내에서 그의 의견은 毛澤東의 입장과 같이 할 경우 거의 절대적인 힘이 실리게 되고, 중공 중앙의 방침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경우에도 결국 毛澤東周恩來의 입장을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이 일은 우리가 배후에 있어야 하고, 張學良楊虎城을 나서게 해야 한다周恩來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毛澤東은 사건 해결 면에서 대략 反蔣이 되거나 혹은 反蔣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국가권력 문제에 대해서도 반南京 정부의 수립이 필요한지는 현 상황에서는 잘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南京정부 측과 사건을 지지하는 각 세력들을 규합 내지 지원을 득한다는 전제하에 蔣介石의 파면을 요구하고, 그를 인민의 공개심판에 맡기자고 방침을 정했다. 말하자면 南京정부측과 전국의 각 정치세력들의 지지를 받을 경우에는 蔣介石을 처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해결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毛澤東이 회의의 결론으로서 제시한 방침은 곧 중공의 공식적인 입장이 됐다. 당시 중공 중앙은 오랫동안 정식 회의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의 책임을 지고 있던 林育英이 회의에 관여하지 않았던 연유로 정치국 임시 확대회의에서 毛澤東이 결정을 주도했다.

 

중공의 공식적인 대표인 당서기 張聞天도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했지만 西安사변에 대한 대응은 당 중앙위원이자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사를 책임지고 있던 毛澤東周恩來가 주도했다. 毛澤東이 배후에서 기획, 총괄 지휘했고, 周恩來가 밖에서 상대와 협상하면서 방침을 실행에 옮기는 구도가 됐다. 사건과 관련해 외부와 교신한 전보에 대해서는 모두 毛澤東이 처리했으며, 특히 張學良에게 보낸 전보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다.

 

중공 중앙의 방침과 입장이 정리되자 周恩來는 자신이 西安 현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南京 국민당 측의 공세에 대응하고, 蔣介石의 신병확보 상황을 지속시키기 위해 張學良에게 전체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향후의 군사대응책을 제시했다. 즉 일본은 張學良의 거사를 혁명으로 단정하고, 南京정부를 지지하고자 준비하고 있으며, 국민정부의 군정부장 겸 국민당의 討逆軍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何應欽鄭州에 도착해 국민당군의 西安 진격을 총지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또한 현재 국민당군 제46군단이 潼關으로 향하고 있고, 국민당군 제3집단군 제10종대 지휘관 겸 제13사단 사단장 萬耀煌咸陽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홍군을 전력으로 증원할테니 동북군을 대거 집결시키되 서북의 군사요충지인 蘭州가 점령당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했다.

 

. 周恩來의 다차원 중재와 그 결과

 

張學良逼蔣抗日을 이뤄내어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향후 사태가 어떻게 변화할지, 또 다음 단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해 심경이 매우 복잡했고, 마음도 초조했다. 張學良은 초기 한동안 소련 측의 입장이 어떠하든 독자적으로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지가 약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련의 승인이나 지원은 그가 사태를 처리하는데 절대적으로 고려하거나 영향을 받은 결정적 변수가 아니었다.

 

張學良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방황하고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물어 볼 사람이 없어 두 위원회를 성립시키는 것 외에 즉시 周恩來에게 西安으로 와서 같이 방법을 모색하고 대책을 마련하자고 전보를 쳤다는 것이다. 張學良의 주장과 달리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周恩來西安 현지 파견은 張學良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할 대상자로 특별히 周恩來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데에 따른 것이었지만, 周恩來가 중공대표로 사건해결의 중재자로 선정된 것은 중공 중앙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즉 그때까지 周恩來는 국민당군을 대상으로 한 통일전선 공작업무를 맡아왔으며, 張學良과도 오랫동안 시국과 항일문제를 논의해온 점, 그리고 蔣介石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싼 정치상황이 복잡하고 변화무상한 정보를 시시각각 접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협상의 적임자로 판단된 周恩來를 보내 일일이 중공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상황변화에 따라 단안을 내리게 할 필요가 있었다.

 

중공 중앙은 사태해결에 관해 긴급히 상의하자는 張學良의 요청에 응해 1212일 밤 9張學良에게 보낸 毛澤東, 周恩來의 연명 전보로 周恩來를 책임자로 한 중공중앙대표단일행을 1216延安에 도착하도록 할테니 그들을 西安으로 실어갈 비행기를 연안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周恩來葉劍英, 秦邦憲, 羅瑞卿, 杜理卿, 張子華, 童小鵬 18명을 데리고 1215일 이른 아침 말을 타고 保安을 출발했고, 다음 날 밤 연안에 도착해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뒤 張學良이 보내준 전용기편으로 1017일 밤 西安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의 대응방침을 가지고 보안을 떠나 긴급히 서안으로 달려간 주은래가 도착했을 때의 모습
서안사변 기간 동안의 주은래 모습. 그는 첫날과 달리 말쑥한 차림으로 장개석을 면담했다. 주은래는 원래 1924년 황포군관학교가 개교됐을 때 이 학교의 정치부 주임을 맡아 교장인 장개석을 상관으로 모신 부하였다. 세월이 흘러 국공투쟁이 시작됨에 따라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됐지만 서안사변 담판 중 주은래는 장개석에게 깎듯이 대했다. 장개석도 그런 주은래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가 주은래에게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신은 중국공산당 중에 가장 인정미가 있다."(你在中共最有人情味)
장학량 역시 장개석에서 공손하게 대했다. 비록 자신의 명령으로 체포 구금돼 있었지만 여전히 상관으로 대우한 장개석에게 자주 찾아가 내전 중지, 전면 항일을 호소했다. 직접 찾아 가지 못할 때는 위 사진처럼 전문을 보냈다. 전문내용에서도 일기가 고르지 않으니 건강에 유의하라고 할 정도로 배려하는 마음을 보였다. 장학량은 1920년대 중국 최고의 국제도시 상해에서 알아 준 플레이보이(花花公子)였음에도 놀랍게도 위 붓글씨를 보면 서예를 많이 익힌 솜씨다. 서체에 붓놀림이 예사가 아닌 게 드러나 보인다. 혁명한답시고 공부는커녕 글도 쓰질 않아서 글씨가 초등학생보다 못할 정도로 엉망인 중공의 간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품위가 있어 보이는 글씨다.

 

西安에 도착한 周恩來張學良이 기내 영접을 보낸 劉鼎으로부터 西安사변을 일으킨 張學良의 의중에 관해 보고받으면서 사건해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張學良이 행동요원들에게 蔣介石을 보호해 그가 항전할 수 있도록 모셔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는 소리에 周恩來는 중공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保安을 떠난 周恩來西安을 향하고 있을 즈음에 국내외 여론은 張學良에 대해 악화일변도에 있었다. 당시 蔣介石의 피납 구금은 세계적인 뉴스거리였으며, 그의 석방여부는 미국과 중국 국내 다수의 요구이자 희망이었다. 廣西 등지의 소수 지방 세력들을 제외하고, 국내외 여론은 물론이고 대다수 중국인들 및 北京 소재 각 대학의 총장들, 胡適 등 저명한 지식인들, 군벌 閻錫山張學良楊虎城을 질책하거나 蔣介石의 석방을 권고했고, 심지어 경고까지 했다. 예를 들어 당시 중국 지식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胡適張學良을 가리켜 역적이라고 비난했다.

 

장개석 구금 사실이 보도되자 전국적으로 장개석을 성원하고 장학량을 비난하는 시위들이 줄을 이었다. 위 사진은 서안 시민들이 장개석 석방을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 행렬 광경

 

北京의 각 대학 총장들도 1215張學良에게 전보를 보내 강경한 어투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陝西省의 사변은 전국을 경악하게 했다. 蔣介石이 국가 중임을 맡고 있는데, 만일 그가 해를 당한다면 국가사업이 최소한 20년은 퇴보할 것이다. 귀하는 나라의 어려움과 원수들을 생각해 가능한 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뉘우쳐 蔣介石을 보호하여 위험에서 구해내고, 자중하여 벌을 받는다면, 혹 국민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명분으로는 적을 대적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그 후회가 만리장성과 같을 것이며, 틀림없이 적을 대단히 기쁘게 하여 귀하는 장래 영원히 국가와 민족의 죄인이 될 것이다.”

 

건발발 전까지만 해도 평소 張學良과 이심전심으로 서로 마음이 통했던 閻錫山까지도 1214일 정중하게 張學良의 행위에 대해 경솔한 것으로 보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리고 1주일 후, 그는 다시 張學良楊虎城에게 전보를 보내 蔣介石의 석방을 요구했다.

 

1930년대 중국 여론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언론사인 中聯社1216일 성명을 발표했다. 14개 대도시의 신문과 보도기구들이 이 성명에 서명했는데, 내용은 張學良蔣介石을 감금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북경주재 미국 총영사 록하트(F. P. Lockhart)는 중국 각계의 西安사변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다.

 

전국 각계는 蔣介石이 처해 있는 곤경에 대해 동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 위험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南京 국민정부에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만일 다른 여론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방법이지, 원인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위원장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고, 또 그가 다시 南京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종 여론은 張學良에게 압박을 가중시켰다.

 

이 상황에서 周恩來는 그에게 雪中送炭같은 존재였다. 周恩來西安 도착 후인 1217張學良과 밀담을 가지고 먼저 고립된 처지에서 우군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張學良을 안심시켰다. 張學良은 사건 발생 후 張學良을 극렬히 비방한 소련과 코민테른의 입장과 중공의 의견을 무척 듣고 싶어 했다. 코민테른을 통해 중공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던 스탈린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소련의 공개적 비판은 張學良이 소련뿐만 아니라 중공 측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품게 만든 요인이었다. 중공은 예전에 소련이 지원할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었음에도 현재 張學良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하고 약속은 이행하지 않으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張學良의 의문에 대해 먼저 周恩來는 소련이 아마도 張學良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이 일은 중공 중앙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또 원하지도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서 소련도 중국 국민정부와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張學良은 소련의 비판에 그다지 괘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공의 지원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周恩來는 중공이 시종일관 張學良과 입장을 같이 할 것이며, 중공 자체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감당하겠다고 했다. 절대로 서로 원망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처음 지향했던 대로 같이 대책을 세우고, 행동을 통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건의 주동자인 張學良이 사건해결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을 때 周恩來는 사태변화의 가능성을 추론하면서 해결의 방안을 분석하고, 張學良에게 蔣介石과의 담판 조건, 군사조치, 군 내부의 사상적 동요를 막을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한 것은 대단히 유의미했다. 그럼으로써 張學良을 심리적으로 크게 안심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중공에 의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張學良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周恩來에 대해 그가 오자 모든 게 수가 생겼다고 했다.

 

周恩來張學良에게 중공의 입장 혹은 방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즉 중공이 필요한 것은 전국적인 항일이라고 강조했다. 西安의 한 부분에 치우친 점거 국면에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중공이 원하는 것은 단결과 합작이며, 분열과 내전이 아니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현재 南京 측에서도 내전을 원하지 않는 인사들이 있고, 西安 측이 蔣介石을 제재하는 것은 더욱 더 원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런 상황에서 중공은 한편으로 대국민당 전쟁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蔣介石과 담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일 蔣介石이 자신들의 주장을 명확히 받아들인다면, 나중에는 승낙한 일을 번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대해 張學良은 다른 외부 사람, 심지어 楊虎城에게도 이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극비사항에 부치기로 하고, 먼저 구체적인 방안에 따라 상황을 장악한 후에 대외적으로 알리기로 방향을 정했다. 그리고 蔣介石을 대면할 방법과 蔣介石에게 어떻게 진언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두 사람은 향후 대응방침으로 두 가지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1. 즉시 내전을 중지하고, 중앙군은 전부 潼關에서 떠나게 한다. 2. 전국에 명령을 내려 绥遠을 지원하여 적과 대항한다. 3. 宋子文으로 하여금 南京 과도정부를 수립하도록 하고, 모든 친일파의 숙청을 담당하게 한다. 4. 항일 연합군을 결성한다. 5. 정치범 석방, 민주주의의 실현, 군중 무장과 함께 구국회의를 개최하되 먼저 西安에서 그 준비회의를 연다. 그리고 蔣介石 계열 군대의 출동을 완화시키기 위해 周恩來 자신이 南京정부 내부의 각 정치세력들을 분화시키며, 이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한다. 정략적 관점에서 蔣介石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만일 南京이 군대를 동원해 내전을 일으킨다면, 蔣介石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공표하기로 했다.

 

요컨대 張學良南京 측과의 담판조건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蔣介石을 인질로 삼으면 蔣系의 출병을 제지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南京 측을 분열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周恩來 자신이 그 임무를 자임하겠다고 건의한 셈이다.

 

밀담 후, 周恩來는 즉각 毛澤東과 중공 중앙에 위 내용을 전보로 보고했다. 이것은 周恩來西安에 도착한 후 중공 중앙에 처음으로 보낸 전문이었다. 이 건의에도 불구하고 중공 수뇌부가 견지해오던 기존 蔣介石에 대한 강경한 적대적 기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음날 1218, 周恩來西安사변에 대한 각계의 반응을 분석한 후 그 내용을 재차 두 통의 전문으로 毛澤東과 중공 중앙에 보고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南京 친일파의 목적은 내전을 조성하는데 있지, 蔣介石을 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南京親日派目的在造成內戰不在救蔣)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蔣介石의 부인 宋美齡은 서한을 보내 蔣介石에게 항일을 할지언정 何應欽, 汪精衛 같은 오랜 정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孔祥熙는 화해를 시도하고 있으며, 宋子文이 정전을 조건으로 西安에 왔다고 전했다. 또 친일성향의 何應欽의 귀국요청을 받은 汪精衛도 곧 귀국할 것이며, 閻錫山張學良에게 蔣介石을 자신의 근거지인 山西省으로 송치해줄 것을 제의했다고 전했다.

 

오스트리아 국적의 국민정부 고문 윌리엄 도날드와 같이 서안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송미령은 장개석의 구금 소식을 듣고 급히 남경에서 비행기로 서안으로 날아와서 장개석을 건사하면서 장학량, 주은래와도 대화를 시도했다. 사실상 장개석이 풀려나게 된 데는 송미령의 역할도 작지 않았다. 특히 송미령은 한 때 1920년대 상해 사교계에서 장학량과도 염문을 뿌리면서 가까이 지낸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장학량과의 이러한 미묘한 감정이 작용한 바가 컸다.

 

또한 馮玉祥은 이 사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로서 처음부터 줄곧 강경한 태도를 취해온 蔣介石이 지금은 태도를 바꿔 자유를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서북문제와 홍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 전적으로 張學良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전했다.

 

석방을 바라는 蔣介石의 태도변화 그리고 중공과의 관계 문제는 張學良에게 일임했다는 사실에 중공은 최종적으로 입장이 정해졌다. 중공 지도부는 1218일까지도 蔣介石의 석방을 확정하지 않았고, 국민당에게 蔣介石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필히 일련의 조건에 동의하라고 요구했을 만큼 대국민당 태도가 여전히 강경했다. 이 점은 1218일 중공 중앙이 西安사변에 관해 국민당 중앙에 보낸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소련은 1214일과 15일 양일 西安사변에 대한 입장을 신문에 발표했지만, 모스크바는 중공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명확히 지시하지는 않았다. 毛澤東張學良楊虎城에게 보낸 전보와 국민당에게 보낸 전문에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을 근거로 모스크바의 지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중공은 과거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해왔다.

 

즉 코민테른이 당시 1216일 중공 주재 코민테른 서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를 통해 전보 한 통을 보냈고 중공 중앙이 다음날 이 전보를 받았지만, 전신부호의 오류로 인해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공 중앙은 모스크바측에 재타전을 요청했지만, 답전이 도착하기 전 중공 수뇌부는 이미 1219일의 중앙 정치국확대회의에서 周恩來가 내린 정세분석 판단을 근거로 蔣介石과 평화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방침을 결정했으며, 그리고 바로 西安사변에 대한 중화소비에트 중앙정부 및 중공중앙의 통전을 발표했다고 주장해왔다.

 

중공 주재 코민테른 서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그런데 중공이 1217일에 접수한 전보를 전신부호의 오류로 인해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다는 말은 믿을만한 게 못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는 1217毛澤東張學良에게 보낸 전문에서 우리는 원방(소련)에게 이미 보고를 했으나 아직까지 회신이 없다고 말한 점을 들 수 있다. 周恩來1218일 중공 중앙에 띄운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점도 들 수 있다. 張學良은 우리 의견을 무척 듣고 싶어 했다.

 

특히 코민테른의 입장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의견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1218일 중공 중앙이 西安사변에 관해 국민당중앙에 보낸 전보를 보면, 국민당에게 필히 일련의 조건에 동의하라고 요구하는 등 중공지도부의 태도가 여전히 강경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蔣介石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코민테른의 지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중공이 1218일까지도 蔣介石의 석방을 확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219, 중공은 불과 하루 만에 상기 5개 항의 요구사항을 蔣介石의 완전한 자유의 회복을 위한 교환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수일 전 사건 발생 초기 격분해 즉각 蔣介石을 처형해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는 사라졌다. 그리고 反蔣입장을 회복시키는 것에도 서지 않을 것이며, 蔣介石을 인민의 공개재판에 세우자는 구호는 적당하지 않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중공이 급작스럽게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으로 변화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는 대략 세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차례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공이 西安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결정했을 때, 모스크바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다. 특히 周恩來가 평화적인 해결방침을 확립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 지시가 언제 중공 중앙에 도달했는지를 명확히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1218일 밤늦게 중공은 모스크바로부터 蔣介石을 석방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평화적으로 사변을 해결하도록 하라는 새로운 전보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건데, 1218일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전보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毛澤東은 코민테른으로부터 西安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최대한 노력하고, 蔣介石을 석방함과 동시에 각종 기회를 만들어 그와 접근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을 때 펄쩍펄쩍 뛰며 반발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만일 코민테른의 전문이 1019일 이후에 도착했다면, 그 시점은 중공이 이미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뒤가 되는 셈인데, 毛澤東이 그렇게 격하게 화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종전의 태도를 바꿔 정식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전문을 연속으로 두 편이나 발표했다.

 

둘째, 중공 중앙은 蔣介石을 제거해버리면 거국일치의 항일전쟁을 이끌 전국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해낼 수 있는 대안 인물이 없었다는 현실을 고려했을 수 있다. 당시 毛澤東周恩來 등 중공 중앙의 지도적 인물들 중에서는 국민당이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없어 아예 스스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타 국민당 내에 정치적, 군사적 위망과 리더십을 지닌 주요 인물들을 망라하면 국민정부 주석 林森, 행정원장 孫科, 宋子文, 汪精衛, 閻錫山, 馮玉祥, 胡宗南, 龍雲, 戴季陶, 陳誠, 何應欽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林森은 국민정부 주석이었지만 蔣介石이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실권이 없었다.

 

그 밖에는 汪精衛 정도가 정치적으로 蔣介石에 비견될 정도였지만, 그 역시 군사적인 식견과 경험을 갖추지 못해 蔣介石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타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더 말할 나위 없이 蔣介石에 견줄 수준이 아니었다. 따라서 蔣介石이 부재할 경우 항일전쟁은 지리멸렬해질 수밖에 없게 됨은 불을 보듯이 명확한 일이었다.

 

셋째, 국내 여론의 압박 이외에 상기 周恩來가 보낸 보고내용도 중공 중앙에게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周恩來가 중국 내 각계각층의 동향과 蔣介石의 태도변화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내린 상황판단은 중공 중앙이 평화적 해결 방향으로 선회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戴季陶, 居正, 孫科를 중심으로 南京정부 내 주전파들이 蔣介石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이 기회를 이용해 내전을 조성하려고 한다는 판단은 중공 지도부로 하여금 蔣介石을 처단해선 안 된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西安사변이 발생하자 강경진압을 주장한 국민당 내 주전파는 국민정부 내 張學良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何應欽討逆軍總司令으로 임명해 그 휘하의 장교들을 앞세워 蔣介石을 구출한다는 명목하에 군대를 西安으로 이동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이에 대응해 중공도 西安을 방어하기 위해 홍군, 동북군과 楊虎城의 제17로군을 모두 인근 지역으로 이동 배치했다.

 

따라서 만일 蔣介石이 주전파에게 해를 당한다면, 중공은 국민당과 담판을 벌일 수 있는 蔣介石이라는 흥정물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미래에 비관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219, 중공이 연속적으로 공표한 西安사변에 대한 중화소비에트중앙정부 및 중공중앙의 通電西安사변 및 우리의 임무에 관한 중앙의 지시는 중공의 이 같은 입장변화를 알린 것이었다.

 

1220, 周恩來毛澤東에게 전보로 국민당군의 움직임을 보고하면서 毛澤東의 지시대로 天水, 寶鷄 지역으로부터 西安을 위협하는 국민당의 胡宗南軍 등의 군대이동에 대응해 홍군 등의 연합군을 배치했다고 보고했다. 그 후로도 周恩來는 수차례 毛澤東에게 西安을 방어하기 위해 홍군을 항일연군으로 참여시키자고 건의했다. 이처럼 객관 정세와 상황이 호전됨으로써 중공은 최초의 정치적 목적 달성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지만, 蔣介石을 즉각 석방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蔣介石의 석방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蔣介石의 석방을 둘러싸고 張學良楊虎城 사이에 존재한 입장 차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張學良楊虎城蔣介石의 석방을 둘러싼 조건에 대한 견해차로 인해 자주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張學良蔣介石이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항일을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그의 일기를 통해 알고 난 후 내심 자신의 거사를 참회하는 심정에서 蔣介石의 안전을 중시했다. 더욱이 그는 蔣介石을 압박해 항일을 이루더라도 동북군 장병들의 염원인 동북지역의 실지회복과 자신들의 귀향까지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그러한 목적달성의 관건인 蔣介石의 신변안전만은 반드시 지키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張學良은 동북군 장병들로부터 항일을 해서 귀향하자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무시할 수 없던 그로서는 南京 측과 타협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 주화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楊虎城蔣介石의 석방을 반대하면서 南京측과의 협상을 극력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수준을 넘어 아예 그들과 결별하고자 한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심지어 楊虎城蔣介石을 위해하려는 의도까지 보였다. 張學良은 이러한 楊虎城을 심하게 책망했고, 두 사람간의 언쟁은 마치 금방이라도 결별할 듯이 격렬했다.

 

만일 張學良楊虎城의 두 세력이 분열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국민정부에 대한 협상력을 급전직하 시키는 자중지란에 다름 아니었다. 이 와중에 周恩來가 두 사람간의 언쟁과 마찰을 종식시킨 역할을 맡았다. 周恩來楊虎城을 설득해달라는 張學良의 요청에 따라 먼저 張學良에게 조금 더 자중하도록 권고하면서 楊虎城을 대책회의에 참석하게 해 해결방법을 상의하는데 그를 배제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張學良周恩來에 대한 믿음이 무척 강했고, 그의 말이라면 거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향을 보였다.

 

楊虎城周恩來와 몇 차례 담판을 벌인 결과 당파의 이익보다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중공의 태도, 그리고 蔣介石에 대한 (오랜) 원한을 덕으로 감싸 안는”(以德報怨) 정신에 감복해 중공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蔣介石이 입장을 번복할 경우 중공은 국민당과 대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화를 입지 않겠지만, 그의 부하인 자신은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蔣介石의 석방에 대해서만큼은 난색을 표명했다.

 

당시 양호성이 장개석을 믿지 못한 것은 장개석이 서안에 온 목적이 장햑량에게 중공공격을 강화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직위를 해제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대중공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음에도 대중공 작전은 등한히 하면서 개인적으로 축첩, 도박, 아편흡식에 빠져 있는 등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다. 장개석도 이미 당내 정보기관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경질할 생각이었고, 양호성 역시 장개석의 속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장개석이 석방된 뒤에 해외 시찰 명목으로 외유하게 되는 조치를 당한다.

 

이에 대해 周恩來蔣介石 본인은 현재 항일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상황”(現在是抗日則生, 不抗日則死)에 처해 있고, 그를 핍박하면 대일 항전으로 나아가게 할 가능성이 존재하며, 가장 중요한 보복문제에 대해서는 蔣介石 한 사람에 달려 있지 않고 서북의 세 세력인 자신들이 합심 단결해 전국전인 항일로 나아가고 강력한 세력만 형성한다면, 그가 설령 보복하고자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했다.

 

둘째, 楊虎城 휘하의 부장들을 비롯해 동북군 내 蔣介石의 석방을 극력 반대한 급진 장교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들 사이에는 蔣介石의 신병 처리에 대해 의견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처형하자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소련으로 압송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혹은 항일만 하겠다면 여전히 蔣介石을 영수로 모실 수 있다는 주장 등이 혼재했다.

 

그러나 당시 西安城을 장악하고 있던 楊虎城의 제17로군은 蔣介石을 석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楊虎城이 언급한대로 자신들의 생명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張學良宋子文, 宋美齡우의가 아주 각별했기 때문에 蔣介石이 그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와 별개로 楊虎城과 휘하 참모들의 사정은 달랐다.

 

楊虎城은 평소 아편흡식, 도박, 축첩 등의 여러 비리사실이 국민당 정보계통을 통해 蔣介石에게 보고되고 있어 蔣介石의 눈 밖에 나와 있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蔣介石으로부터 경질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그의 참모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했다. 또한 張學良이 언급한대로 신변을 보장한다는 한마디 약속도 없이 위원장을 석방한다면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릴게 뻔했다. 이로 인해 楊虎城 휘하 고급 장교들의 반발이 심했고, 그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동북군 장교들도 楊虎城 군대와 동일한 문제를 우려했기 때문에 蔣介石이 반드시 자신들의 신변을 보장하고, 그 약속 문서에 서명해주기를 원했다. 요컨대 1225일까지 楊虎城과 그 휘하의 부장들 그리고 약간의 동북군 장교들은 蔣介石이 석방된 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증서를 써주기를 강력하게 원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宋子文은 각 장교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다방면으로 타협과 설득을 시도했으나 타결되지 않고 각계의 구실만 계속 쌓여갔다. 소위 최후 요구”, “최후 논거등의 요구사항이 끊임없이 제시됐다. 하나를 설득하면, 두 번째, 세 번째 더 나아가 십여 종의 최후불가능이 끊임없이 반복됐고, 그 반복은 하루에도 수 없이 되풀이 됐다.

 

宋美齡楊虎城 측 장교들과 담판, 교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심리를 관찰하고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張學良南京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믿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모두 국법으로 다스려 질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그 화를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楊虎城이 설득된 논리로 또 다시 周恩來에게 설복 당했다.

 

셋째, 蔣介石을 석방시키려는 국민당 측 대표들로부터 만족할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1217, 周恩來南京 측에다 蔣介石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만 만약 남경측이 내전을 일으킨다면 蔣介石의 안전은 보장할 수가 없다는 중공의 입장을 전했다. 그는 또한 蔣介石剿共은 나아갈 길이 없기 때문에 일치 항일해야 하며, 蔣介石이 항일만 선언하면 중공은 전국에 국민정부를 옹호하라고 호소할 뿐만 아니라 항일통일전선을 조직하겠다는 중공의 입장도 전달했다.

 

1222, 周恩來는 줄곧 자신을 만나주지 않겠다고 한 蔣介石 대신 張學良의 소개로 蔣介石의 부인 宋美齡과 만나 두 시간 동안 대담한 결과 宋美齡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宋美齡에게 현 상황에서 蔣介石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그를 대신해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점, 蔣介石의 직위를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보증하겠다고 정중하게 약속했던 것이다. 張學良은 최고의 경의로서 위원장을 모실 수 있지만, 蔣介石이 그와 국책을 논하기를 원하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동시에 周恩來는 그간 문제해결에 걸림돌이었던 楊虎城을 설득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蔣介石을 석방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이 같은 난제들이 정리되자 1223일부터 西安, 南京과 공산당 등 각 세력의 대표들이 張學良의 공관에서 회합을 가지고 정식으로 蔣介石의 석방 조건 협상을 개시했다. 서북측은 張學良, 楊虎城, 周恩來가 출석했고, 蔣介石 측은 宋美齡, 宋子文이 대표로 참석했다.

 

장개석 옆에 앉아서 장학량 측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송미령

 

먼저 周恩來蔣介石 측에 6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정전하고, 국민당 병력을 潼關 지역 밖으로 철수시킨다. 2. 南京정부를 개조하고 친일파를 척결한다. 항일인사를 가입시킨다. 3. 정치범을 석방하고 민주적 권리를 보장한다. 4. 剿共을 즉각 중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한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활동한다(즉 홍군이 독립적으로 조직을 이끄는 것을 보장한다. 민주국회 개최 전에 소비에트구를 그대로 존치시키되 명칭에서 항일혹은 구국이라는 자구를 덧붙인다). 5. 각당, 각파, 각계, 각군이 참여하는 구국회의를 소집한다. 6. 항일에 뜻을 같이 하는 국가와 협력한다.

 

상기 조건에 대해 宋子文은 개인적으로는 동의한다고 했고, 이 제안을 蔣介石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南京정부의 개조요구에 대응해 국민당 계열의 인물, 민주인사, 중공 계열의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한 뒤 3개월이 지나면 항일정부로 개조하자고 제안했다. 蔣介石이 국민당의 철군을 명령하고, 그가 南京으로 돌아가면 7인의 애국인사(즉 항일 ‘7공자’)들을 석방하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周恩來는 과도정부 시기 동안 張學良의 동북군, 楊虎城의 제17로군과 홍군으로 서북연군을 조직하고, 각 대표들이 참여하는 연합위원회를 조직하여 張學良의 지휘하에 항일을 준비하되 군대의 훈련과 병력보충에 필요한 재정비용은 南京정부가 지원해줄 것을 제의했다. 宋子文은 이 제안도 蔣介石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회담 후 그날 밤 10, 周恩來宋子文과의 회담내용을 중공 중앙서기처에 보고하고, 중공 수뇌부가 자신의 안에 동의한다면 그대로 蔣介石과 담판하겠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담판은 다음 날인 1224일까지 계속됐고, 주로 그 전날 周恩來가 제시한 안건에 대해 宋美齡宋子文이 이행을 보장한다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의사를 蔣介石 본인으로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周恩來는 그 날 오후 宋子文과의 회담을 통해 그 날밤 蔣介石을 면담하기로 약속받았다.

 

1224730, 周恩來博古宋美齡, 宋子文과 담판한 결과를 중공 중앙서기처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蔣介石은 그날 張學良에게 西安을 향해 포진하고 있던 국민당 동로군의 潼關이동 지역 철수, 서북 지역으로부터 중앙군의 철수, 孔祥熙, 宋子文 책임하의 국민정부 조각, 何應欽의 해외외유, 감금돼 있던 국민당 중앙요원들의 陝甘지역 철수, 聯紅容共, 공동 항일, 蔣介石 回京 후 항일 7공자의 석방, 홍군과 소비에트구의 인정, 국민대회 개최 등을 골자로 한 내용을 인정할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周恩來蔣介石으로부터 蔣介石 석방의 전제조건을 약속받게 된 셈이었다.

 

넷째, 張學良의 요구를 거절한 蔣介石 자신의 완고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蔣介石은 처음에는 담판 자체를 거절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약속한 실천사항을 담은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전까지 중공측 인사를 만나기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1224일 밤 10시 경 周恩來宋美齡의 안내로 蔣介石을 만났다. 張學良宋子文이 배석한 상태에서 진행된 이 회담에서 蔣介石周恩來가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여전히 설이 분분하다. 蔣介石이 남긴 일기에 의하면, 이 날은 蔣介石周恩來를 만나주지 않았던 것으로 돼 있고, 다음날 다시 찾아온 周恩來에게 蔣介石은 얘기 할 게 있으면 張學良에게 자세히 하라고 하자 周恩來는 인사를 하고 蔣介石의 처소에서 물러났던 것으로 돼 있다.

 

일설에 의하면 周恩來蔣介石에게 攘外必先安內정책을 바꾸고 내전 중지, 일치항일만 실행하겠다면 자신은 물론 중공의 홍군도 그의 지휘를 받을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하는데, 張學良을 통했던, 아니면 직접 건의를 했던 간에 周恩來의 이러한 의사는 분명히 전해졌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蔣介石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剿共중지, 聯紅抗日, 중국통일을 달성함에 蔣介石의 지휘를 받을 것. 둘째, 현재 宋美齡, 宋子文, 張學良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周恩來蔣介石 자신을 대리한 그들과 모든 문제를 상의할 것. 셋째, 蔣介石이 귀경하면 周恩來와 직접 담판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1225, 周恩來는 중공 중앙에 蔣介石이 처음으로 내전을 벌이지 않겠다고 한 의사표시와 상기 합의사항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蔣介石의 약속을 어떻게 보장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宋子文西安 측에 자신이 약속 이행을 책임질테니 蔣介石宋美齡1225일 당일로 西安을 떠나게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대해 張學良은 동의했고, 자신이 직접 蔣介石을 수행해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실제 약속한 대로 장학량은 12월 25일 장개석을 구금에서 풀어주었다. 낙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장개석을 배웅하는 장학량

 

周恩來蔣介石이 떠나기 전에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사실을 공문서로 남겨주기만 한다면 그의 석방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蔣介石1225일에 西安을 떠나는 것과 張學良이 그를 책임지고 보내주겠다고 한 것에는 반대했다.

 

그런데 張學良楊虎城을 대동하고 周恩來와 한 마디 상의 없이 1225일 성탄절날 오후 3시가 지나 독단적으로 비행기로 蔣介石 일행을 洛陽으로 호송해버림에 따라 蔣介石은 석방돼 西安을 벗어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짓게 됐다. 전세계가 경악한 이 사건이 발발한 날로부터 2주째가 되던 날이었다.

 

. 周恩來의 사후 수습

 

蔣介石의 석방은 西安측 고위 장교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張學良 측이 출발을 앞당긴 결과였다. 당초 西安측과 蔣介石측 간에 담판이 타결되고, 그에 따라 蔣介石의 석방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동북군과 제17로군의 일부 고위 장교들은 1225일 이른 아침부터 宋子文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경고했다. 즉 쌍방이 약정한 사항은 반드시 문서로 남겨 당사자가 서명해야 하며, 潼關 以東 지역으로 철수하겠다는 중앙군의 철수가 먼저 이행돼야 蔣介石의 석방이 가능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張學良楊虎城 두 장군이 동의했다고 해도 자신들은 蔣介石의 석방을 결사반대하겠다고 한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宋子文張學良에게 蔣介石의 조기 석방을 부탁하고 서두른 것도 이 소식을 전해들은 蔣介石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張學良도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蔣介石을 조기에 석방해 예기치 못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周恩來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행해 옮긴 것이다. 그리고 張學良 자신은 蔣介石 체포에 대해 심판해줄 것을 자청해서 제 발로 蔣介石을 따라 南京으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周恩來가 뒤늦게 차를 몰아 황급히 비행장으로 쫒아 갔지만 이미 비행기는 날아 오른 뒤였다.

 

그러면 장개석 체포의 주역이었던 손명구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남경으로 소환되지 않고 서안에 머물다가 나중에 국공합작 후 장개석의 압력으로 중국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으로 전출당했다. 그 뒤 그는 왕정위 정권에 투항해 친일파(漢奸)가 됐다. 그는 1920년대에 일본에 파견돼 일본육사에서 수학한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후 상해시정부의 참사를 지냈다가 2000년에 91세로 병사했다.

 

蔣介石西安을 벗어나 洛陽에 도착한 후 바로 張學良에게 楊虎城더러 陳誠, 朱紹良, 衛立煌, 蔣鼎文 西安에 구금돼 있던 국민정부 요원들에 대한 석방조치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감금된 국민당 고위 지도자들도 전원 풀려났다. 동시에 사건 당시 張學良 측에 압류됐던 50여대의 군용 비행기도 송환됐다.

 

한편, 蔣介石西安을 벗어난 것은 西安 측에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문제는 張學良南京 도착 후 바로 연금됨으로써 그의 귀환여부와 방법을 둘러싸고 동북군 내 원로파와 소장파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원로파란 張學良西安을 떠나기 전 동북군의 통솔을 맡긴 于學忠 휘하의 王以哲何柱國이 중심이 된 세력이었다. 于學忠張學良으로부터 통솔을 위임받았지만 동북군의 적계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멀리 蘭州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실제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西安에 주재한 王以哲何柱國이 실권을 행사했다.

 

소장파는 동북군의 대대장으로서 蔣介石 체포에 앞장섰던 孫銘九, 동북군 정치처 처장 應德田, 항일동지회 책임자 苗劍秋 등이 중심이 된 중하급 장교 및 정치공작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항일과 동북의 실지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한 강성의 청년 장교들로서 張學良에게 건의하는 식으로 동북군에 영향을 미쳐 왔으며, 이로 인해 張學良의 신임을 받아왔다.

 

그런데 張學良西安을 떠나고 없자 원로파들은 소장파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두 파는 특히 張學良을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상호 갈등이 심했다. 이들은 張學良楊虎城蔣介石을 체포해 신병을 확보하고 있을 때만 해도 단결이 잘 됐다.

 

그러나 蔣介石張學良을 연금시킨 후 양군을 분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에게 西安을 벗어나 타지에 주둔하게끔 명령을 내리고, 내부 요원들을 매수하자 내부 동요가 일어나면서 내분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동북군, 17로군, 홍군이 단결하지 않고 삼위일체가 깨어진다면 蔣介石에게 항일구국의 약속을 이행하게 압력을 행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張學良의 구출도 어렵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周恩來1937116蔣介石에게 陝甘지역의 국민당 중앙군을 철수케 하고, 서북지역을 지휘케 하기 위해 張學良을 석방해주도록 요청했다. 동시에 중앙군이 이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한, 홍군은 절대 내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楊虎城에게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충고했다.

 

즉 첫째, 서북군은 張學良으로부터 동북군을 지휘 통솔할 책임을 부여받은 楊虎城于學忠이 직접 지휘통솔 하도록 할 것. 둘째, 楊虎城于學忠이 고향 奉化에 머무르고 있던 蔣介石에게 사람을 보내 蔣介石이 제시한 두 가지 방안 중 삼위일체가 무너지게 되는 방안을 거절하고, 조건부로 나머지 다른 방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할 것. 셋째, 군사적으로 세 군대가 서로 밀착돼 있도록 하고, 정치적으로는 곧 개최될 국민당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蔣介石이 제시한 두 가지 방안은 西安측이 첫째 요구를 선택할 경우 동북군, 17로군, 홍군이 삼위일체를 유지할 수 있고, 둘째 요구를 선택하면 삼위일체가 와해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전자의 방안은 중앙군이 西安으로 진주해오고, 동북군과 제17로군이 陝西省 서부 및 甘肅省 일대로 물러난다. 그리고 홍군은 원 주둔지인 陝北으로 돌아가고, 17로군 중의 사람으로 陝西省정부의 주석을 충당하라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앙군이 西安으로 진주해오고, 동북군은 安徽淮河유역으로 이동한다. 17로군은 甘肅으로 이동하며, 홍군은 陝北으로 돌아가고, 安徽省정부의 주석은 동북군 중의 사람에게 위임하는 방안이었다.

 

상기 방안의 선택문제는 周恩來가 개입해 蔣介石에게 사자를 보내 조건을 조율한 결과 西安측이 첫째 방안을 선택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런데 동북군 내 소장파는 어느 방안이나 張學良을 귀환시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張學良 구출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현재 국민당 내 원로파가 취하려던 첫째 방안은 중앙군의 西安진주를 불러일으키는 꼴이 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張學良을 대신함으로써 그의 구출을 포기하는 처사라고 격분했다. 그들은 중앙군과의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하면서 동북군 내 원로파에게 張學良을 구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의 주장과 의분은 동북군 내 하층병사들 및 일반인의 관심과 지지를 불러 일으켰다.

 

楊虎城南京 측을 상대로 개전하면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張學良이 하루 빨리 西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심 중앙군이 들어오면 자신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대해서는 소장파도 공감했다. 이들의 의구심에 공감한 周恩來도 삼위일체의 구도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각계에 홍보했다. 그러나 소장파는 20여명이 회동해 단체로 張學良의 회귀를 요구하면서 그가 돌아오기 전에는 결코 蔣介石의 방안대로 西安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장문의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周恩來는 이들을 설득했다. 설득 논리는 두 가지였다. 소장파의 주장과 행동이 사태해결과 張學良 귀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중앙군과의 전쟁 발발시 홍군은 반드시 동북군을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즉 소장파가 자신들의 주장을 꺾지 않고 끝까지 고수할 경우 南京과의 전쟁을 초래할 위험이 크며, 전쟁이 발발하면 蔣介石 측은 더욱 張學良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지금은 西安에서 철수해 삼위일체로 굳게 단결한 상태에서 南京측에 석방을 계속 요구하면 張學良은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장파의 이 같은 행동은 국가의 장래, 항일단결과 동북군의 장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張學良의 장래에도 좋을 게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중공이 동북군, 張學良과 혈육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 동북군과 끝까지 같이 할 것이며, 또 삼위일체를 유지하고 단결하는 한 중앙군이 공격해오더라도 홍군은 필히 최선을 다해 동북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周恩來의 설득에 孫銘九 등 일부 소장파들은 수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장파 전체 의사로서의 기존 주장은 여전히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로 인해 西安측은 결국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의견이 갈렸다. 1937129, 소장파의 제의로 40여명의 동북군 연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이 渭南에 모여 군사회의를 열었다. 대표적 주화론자인 王以哲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는 何柱國이 주화론을 폈지만 참석자 대부분의 반대에 부딪쳤다. 회의 참석자 대부분인 40여명이 모두 張學良이 귀환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西安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하면서 만약 중앙군이 재차 진격해온다면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했다.

 

王以哲何柱國은 소장파들의 결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장파를 설득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그들은 급히 비행기로 蘭州于學忠을 모셔와서 1231일 밤 고위급 군사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楊虎城, 于學忠, 王以哲, 何柱國周恩來 5명이었고, 소장파 장교들은 실외에서 이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봤다. 회의 결과 전원이 평화적 해결, 즉 주화론으로 의견일치를 봤다. 이 때도 周恩來는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고, 내부단결을 강조했다.

 

회의가 뜻밖에 주화론으로 의견일치를 보자 楊虎城이 동원령을 내릴 줄 알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이 결과에 수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결과가 王以哲何柱國이 파괴한 탓이라고 여겼고, 두 사람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22王以哲은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친 경비대 병사들의 손에 살해됐다. 楊虎城의 공관으로 피신한 何柱國은 화를 면했다. 王以哲은 동북군 내 위망이 두텁고, 가장 널리 존경받던 고위급 장교였다. 그의 피격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장병들이 분노했다. 심지어 중앙군과 대치하고 있던 최전선인 渭南에 주둔중인 동북군은 즉각 西安으로 되돌리려고 선봉대를 臨潼까지 보냈다. 그들은 소장파의 리더격인 孫銘九, 應德田, 苗劍秋 등을 西安에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른바 “22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도 周恩來가 개입해 해결됐다. 周恩來楊虎城과 상의 끝에 孫銘九 등을 雲陽의 홍군 주둔지로 보냈고, 나중에 다시 天津으로 전출시킴으로서 王以哲의 복수를 갚으려는 자들에게 복수 대상자를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으로 무마했다. 이 사건의 무마는 동북군 내 우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눠 많은 인명 살상자가 날 수 있는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이를 통해 周恩來가 강조한 서북측 삼위일체를 지속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

 

중재 및 설득과정에서 周恩來 본인도 처소로 난입한 일단의 소장파 장교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예의 내부단결, 삼위일체론으로 그들을 설복시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22사건후 중공 중앙은 周恩來, 博古, 葉劍英, 李克農, 劉鼎 西安 주재 중공대표들의 안전을 염려해 그들을 안전한 지역인 三原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周恩來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三原으로 이주했지만 周恩來는 그대로 西安에 남아 顧祝同이 이끈 중앙군이 西安으로 진입해오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홍군의 판사처를 설립했다.

 

. 맺음말

 

西安사변의 발발에서부터 해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과정에 걸쳐 사건에 직접 관련된 인물은 사건 당사자인 張學良 이외에는 周恩來가 유일했다. 毛澤東張聞天은 후방에서 총 지휘를 했지만 그들이 국민당 고위 인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제한적이었다.

 

또한 사건해결에 나선 宋美齡은 물론, 다른 주모자인 楊虎城도 협상과정에서 배제된 경우가 많았다. 사건 발발 요인과 관련해 周恩來가 중공의 통일전선 책임자로서 張學良에게 전해주고 안심시킨 내전중지, 일치항일에 대한 중공의 정책적 진정성 그리고 끝까지 張學良을 지지하겠다는 의지 등의 복안은 張學良西安사변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됐다.

 

또한 周恩來蔣介石을 즉각 처단하자는 중공 중앙의 강경책을 완화시킨 노력을 했다. 동시에 그가 蔣介石을 인질로 삼아 蔣介石측과 담판을 벌이면 剿共중지와 攘外必先安內정책의 포기 등 중공이 노렸던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위해 南京 측 분열을 시도하겠다고 건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중공 지도부의 강경태도를 완화시켜 평화적 해결 방침으로 선회하게 만든 것도 의미 있는 공로였다.

 

蔣介石이 체포 구금됐을 때 중공 중앙 내에는 즉각 그를 처단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周恩來는 담판을 통한 문제해결을 주장함으로써 蔣介石을 즉각 처형하자고 주장한 강경파들을 만류시켰으며, 정치적으로 南京정부와 대립하지 말 것을 강조함에 따라 중공 지도부의 격양된 분위기를 안정시킴과 동시에 중공 지도부로 하여금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든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중공 지도부는 국민당 중앙군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 이동 및 배치, 南京정부와 정치적 대립 각을 세울지 말 것, 蔣介石의 신변안전 확보, 그리고 타협을 통한 평화적 해결 등 세 가지로 西安사변에 대한 대응방향을 결정했다. 중공의 공식 입장이었으며, 최초단계에서 蔣介石을 처형하겠다는 중공 내 과격한 주장들이 잦아들게 된 데는 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중공 지도부의 강경입장이 누그러뜨려진 데에는 학계의 기존 주장과 달리 스탈린의 지시는 결정적인 지침이 되지 못했다.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은 일본이 蔣介石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중국내륙으로 침공해올 것이고, 사태가 그런 식으로 발전되면 일본군은 소련의 동쪽 국경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蔣介石을 처단하면 중국은 전면적인 내란에 빠지게 되고 그럴 경우 일본에게만 유리해지기 때문에 蔣介石이 석방돼 그가 항일전쟁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스탈린은 蔣介石을 대신할 대안인물이 부재했던 점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일 간에 전쟁이 폭발하면 그것은 충분히 일본의 대소 압박을 완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대중공 압박도 완화시킬 수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 정권 이래 줄곧 일제의 대소 공격에 중국을 방어벽으로 활용하려는 이이제이의 지정학적 전략관점에서 西安사변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중공이 스탈린의 전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입장 전환을 결정한 뒤였다.

 

중공 중앙이 담판의 중재자로 周恩來를 보낸 것은 그의 사태판단력 및 출중한 교섭능력, 張學良 사이에 형성된 개인적 유대감 및 신뢰를 바탕으로 항일구국이라는 동일한 정치적 지향점을 공유한 점 등을 고려한 적절한 인선이었다. 한 마디로 西安 현지에 급파된 周恩來는 최후까지 동북군을 지지하고 지원하겠다고 강조하면서 중공과의 운명공동체 의지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해결의 방향감을 상실하고 있던 張學良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중국측 연구서에서 周恩來張學良에게 사건의 평화적 해결원칙을 제시해 받아들이게 했다고 하는 흔히 접할 수 있는 평가는 실상을 외면한 아전인수격 해석이었다. 周恩來가 제기하기 전에 張學良이 이미 蔣介石측과의 담판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평화적 해결방향은 周恩來張學良 두 사람의 일치된 견해로 가속도가 붙었을 뿐이지 周恩來만의 독창적인 공헌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또한 周恩來는 정확한 상황판단을 보고함으로써 중공 지도부가 평화적 해결과 蔣介石의 석방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데 길라잡이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西安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중공 지도부에 보고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건의한 周恩來의 전문은 중공 중앙이 정책을 조정하고, 결정하는데 주요 판단 근거가 됐다. 중공 지도부의 방침이 蔣介石의 즉결 처분에서 담판을 통한 평화적 해결로 결정된 것을 토대로 周恩來는 문제해결의 장애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첫째, 周恩來는 먼저 張學良楊虎城 사이에 蔣介石의 처분문제 및 南京정부와의 관계, 사건의 해결수단을 둘러싸고 존재한 견해 차이와 마찰을 조정해 신변의 안전을 크게 우려한 나머지 시종 군사적 대응을 주장해온 楊虎城에게 평화적 해결방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 두 세력의 분열을 미연에 막거나, 혹은 적어도 분열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국민정부에 대한 서북 측의 협상력을 급전직하 시키는 자중지란의 초래를 막은 공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周恩來楊虎城 휘하의 부장들을 비롯해 동북군 내 蔣介石의 석방을 극력 반대한 급진 장교들에 대한 설득을 성공시킨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원래 宋子文이 양군의 각 장교들 사이를 왕래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타협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한 과제였다. 楊虎城張學良蔣介石 처리문제를 둘러싼 협상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 휘하 강성 성향 장교들의 동의를 득하지 못한다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것은 협상을 타결짓는 전제조건 중의 하나를 선결시켰던 것에 그치지 않고 급진적인 장교들을 진정시켜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던 유혈사태를 사전에 차단한 의미가 있다. 周恩來의 설득논리는 현재 항일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상황에 처해 있는 蔣介石으로서는 대일 항전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급진적인 청년 장교들이 우려한 자신들에 대한 보복문제는 서북의 삼위일체 세력이 합심 단결해 전국전인 항일로 나아가고, 강력한 세력을 유지한다면 蔣介石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셋째, 周恩來張學良, 楊虎城과 함께 蔣介石을 석방시키려는 蔣介石측 대표들과 장시간의 논쟁적인 담판을 벌인 끝에 만족할만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것은 周恩來蔣介石의 부인 宋美齡에게 蔣介石의 직위 존속의 보장과 그에 대한 張學良의 계속적인 충성맹서, 그리고 楊虎城을 설득해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蔣介石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녀의 우려를 불식시킴에 따라 거둬들인 소득이었다.

 

줄곧 면담을 거부한 蔣介石을 움직일 수 있던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던 宋美齡과 타협을 이뤄낸 점은 결국 蔣介石의 심경변화를 유도하는 첩경으로서, 궁극적으로 蔣介石으로 하여금 중공 측이 제시한 6개 항의 요구에 준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촉진시킨 기폭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周恩來西安사변의 해결방법에서 구체성이 결여된 張學良에게 蔣介石의 신변안전을 담보로 즉각적인 내전 중지, 중앙군의 西安철수, 공동항일, 정치민주화, 南京정부의 개조 등 6개 항을 제시한 것은 분명히 周恩來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나 周恩來는 소기의 정치적 양보를 구두로 보장받았지만, 蔣介石으로부터 그것을 확약한 문서를 남기는데는 실패했다. 물론 그것은 張學良이 사전에 周恩來와 상의없이 급작스럽게 蔣介石을 석방해 西安을 벗어나도록 조치한 잘못에 기인한 것이었기에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과적으로 張學良과의 공조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표증으로 남는다.

 

張學良의 귀환을 보장받고 내전 방지와 항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蔣介石을 계속 구류한 상태에서 그에게 약속이행을 보장하고 촉구할 필요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실수는 周恩來 본인으로 하여금 그 후 張學良의 석방을 요구하며 반발하고 나선 西安 측 급진적인 청년장교들의 집단행동 저지에 다시 한 번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 자업자득의 결과를 낳았다.

 

蔣介石을 계속 구류하거나 혹은 석방 시 구두가 아닌 문서로 확약을 받지 못한 것은 張學良의 석방 방법을 두고 西安 측 장교들 사이에 의견대립과 마찰이 발생되는 원인이 됐으며, 결국 周恩來가 이를 최후까지 중재하고 해소시켜야 했다. 周恩來南京측에 대적하고자 한 급진 장교들의 집단 움직임을 차단한 것은 결국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국공합작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있었기에 자신이 약속한 바를 실천할지 미지수였던 蔣介石으로 하여금 거국적인 항일을 실행하게 만든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상기 사실들과 관련해 만약 周恩來 동지가 西安에 없었다면 西安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주석과 당 중앙의 방침이 관철되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이며, (그렇게 됐다면) 내전은 다시 발생했을 것이며, 西安사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초기단계의 승리는 공고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중공 측의 자화자찬은 지나치지 않은 합당한 평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西安사변의 평화적인 해결이 있었기에 국민당과 南京정부가 외세를 배척하려면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蔣介石攘外必先安內의 기치하에 중공을 소탕해오던 정책이 내부단결, 일치항일”(團結內部一致抗日)노선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거국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훗날 毛澤東이 사건의 평화적 해결은 시국전환의 분기점으로서 이로 인해 국공합작의 서막이 올랐다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배경을 두고 한 말이었다.

 

주은래의 중재로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장개석으로부터 중공에 대한 초공 중지와 대일항전 약속까지 받아내자 중공은 해체될 최대의 위기에서 벗어나 합법적으로 존재를 인정 받게 됐다. 중공 지도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과 환희에 찬 분위기였다. 모택동이 서안에서 중공 근거지로 돌아온 주은래를 환영하기 위해 그가 타고온 비행기 입구에까지 직접 나가서 반겼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위 사진은 주은래가 타고온 비행기다. 오래된 사진이라 희미하지만 오른쪽 세번째 인물이 모택동이고, 그의 왼쪽 옆 안경 쓴 자는 박고로 보이고, 주은래는 두 사람 건너 조종사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공과 홍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9년간 지하당의 입장에서 전개해온 소비에트(Soviet)운동을 끝내고 다시금 중국의 정치무대로 나와 특수한 처지의 야당으로서 국민당과 대일 국공합작을 이루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毛澤東은 훗날 미국 여기자 스메들리(Agnes Smedley)와 대담하면서 西安사변 당시 만약 蔣介石을 석방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일본에게 침략할 좋은 기회를 주어 중국이 망하게 됐거나 혹은 최소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됐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총괄하면, 중공 지도부의 대응방침을 변화시키고 張學良, 楊虎城, 宋美齡, 蔣介石 등 각계와 협상하고 중재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마치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았다는 평가가 있었듯이 西安사변이 평화적으로 해결하게 된 데는 周恩來의 주도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그것은 당의 사활이 걸린 중공의 최대 위기상황을 능동적인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한 周恩來의 의지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활동하게 만든 것이다. (끝)

 

대만으로 이송된 장학량이 죽을 때까지 기거한 張學良故居 전경(위치는 新竹縣五峰鄕). 지금은 이곳 일대가 '張學良文化園區'로 지정돼 있고, 건물 내부는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다. 나중에 장학량에 관한 다른 얘기를 할 때 이곳도 세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사건 당시 장학량의 공관은 현재 서안사변기념관으로 돼 있다.
양호성의 별장도 서안사변 유적지로 지정돼 중국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English abstract

 

Xian shibian and Zhou Enlai

 

Suh, Sangmun(Korea University Research Professor)

 

This study focused on the role of Zhou Enlai in resolution process of Xian shibian which broke out 80 years ago and came up with the conclusion following below :

 

Zhou Enlai believed that if Chinese Communist Party(CCP) negotiates with Jiang Jieshi’s faction, taking Jiang Jieshi as a hostage, CCP could realize their political goals such as interruption the suppression on Chinese communists and policy of Resisting Foreign Aggression after Stabilizing the Country" from Jiang Jieshi’s faction. He suggested to his leadership that he would induce internal conflict of Nanjing(Nationalist Party of China, NPC) and it ultimately cause the leaders of CCP to convert their hard-line stance which was execution of Jiang Jieshi and turn it into a peaceful solution. To sum up, Zhou Enlai can be regarded as having made three major contributions to the peaceful settlement and the release of Jiang Jieshi by persuading leaders of CCP.

 

First, Zhou Enlai coordinated different viewpoints and conflicts between Zhang Xueliang and Yang Hucheng regarding relations with Nanjing, dealing with Jiang Jieshi and solution method. Eventually, he convinced Yang Hucheng who insists the military response due to concerning personal safety to take peaceful resolution.

 

Second, Zhou Enlai successfully persuaded Yang Hucheng’s subordinates and radical commissioned officers who oppose to release of Jiang Jieshi in Northeastern Army(Dongbei Jun). Even if the Yang Hucheng and Zhang Xueliang agreed to negotiate the issue over the treatment of Jiang Jieshi, his proposal was likely to return to the blast without consent of the radical commissioned officers. In fact, Zhou Enlai’s persuasion meant not just prior settlement of preconditions for negotiations. Actually, it blocked the bloodshed which is likely to be caused by radical officers.

 

Third, Zhou Enlai has reached a satisfactory agreement at the end of a long and controversial discussion with Yang Hucheng, Zhang Xueliang and representatives of Jiang Jieshi’s faction who wanted to release Jiang Jieshi. The compromise with Song Meiling, one of the most influential characters who could impact Jiang Jieshi who refused any interview, led to the change of mind of Jiang Jieshi. This compromise ultimately became the trigger that encouraged Jiang Jieshi to accept the terms of the six-clause proposed by the CCP. Under this situation, Zhou Enlai’s proposal which secures personal safety of Jiang Jieshi including six-clause such as the immediate cease-fire of civil war, the withdrawal of Xian from the Central Army, the joint anti-Japanese movement, political democratization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Nanjing government to Zhang Xueliang who has not concrete solution was wholly his(Zhou Enlai) achievement.

 

Although Zhou Enlai was guaranteed desired political concession from Jiang Jieshi, he failed leaving written records of it. His failure caused conflicts among the commissioned officers of Xian regarding Zhang Xueliang’s release methods. Therefore the best he could have done was to reconcile disputes till the end.

 

Key word : Xian shibian, Zhou Enlai, Zhang Xueliang, Yang Hucheng, Jiang Jieshi

 

위 논문은 『군사논단, 통권 제88(2016년 겨울호, 1225)에 게재된 글입니다. 학술논문이어서 각주가 달려 있지만, 이를 블로그에 올리니 각주가 다 사라지고 없네요. 또 단락도 인터넷 상에서 가독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 재조정했습니다. 각주가 있고 단락이 조정되지 않은 원문이 필요하면 군사논단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글의 모두에 적어 놓은 직함은 이 졸문 발표시 필자의 직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