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비핵화의지 : 한미의 반응과 진정성 검토
徐相文(경희대학교 중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차례
Ⅰ. 머리말
Ⅱ. 김정은 비핵화 의지에 대한 한미의 반응
1. 한국 내 반응
2. 미국 내 반응
Ⅲ. 김정은 비핵화의지의 진정성(sincerity)검토
1. 북한지도부의 정책노선 의사표현방식
2. 조선노동당의 결의와 김정은의 언행
Ⅳ. 맺는말
Ⅰ. 머리말
금년 6월의 싱가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하 직함 생략)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Denuclearization)’를 언급하면서 북한 비핵화의지를 나타냈다. 이어서 지난 9월의 평양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그 의지가 실제로 이행될 듯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북핵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12월 중순 현재, 북핵문제는 더 이상 가시적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비핵화 후 제재해제’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과 ‘선 제재해제’를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대립 속에서 교착상태에 있다.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한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교착상태에 있는 북핵폐기문제가 답보 상태에 있으며, 남북경협 가속화로 한미 간 불협화음도 노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2월 7일 개최 예정이던 미·북 고위급 회담도 연기됐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미국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지 않고 있으며, 자국은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먼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압박 때문이다. 미국이 이 입장을 고수하는 데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거나 후속조치가 부족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수진영 뿐만 아니다. 한국 내 보수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과연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진정성(sincerity)이 있는 것일까? 그 진정성 유무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먼저 북핵문제해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보는 척도로서 지난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전후에 나타난 한국 내 반응과 평가 그리고 12월 초순 현재 시점까지의 미국정부 내 관료들을 포함해 주요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의 발언과 평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과 속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아본 뒤 상황에 상응하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Ⅱ. 김정은 비핵화 의지에 대한 한미의 반응
1. 한국 내 반응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한국 내에선 크게 문재인 정부의 관료들 및 진보 측 학자들 그리고 보수 쪽 인사들로 의견이 갈려 있다. 전자는 지금까지 김정은이 행한 일련의 비핵화 발언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를 신뢰하는 편이어서 북미 간의 중재, 남북관계 진전, 김정은의 연내 방남 등을 추진하고 있다. 전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대북 정책 수행자들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지난 11월 하순,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북한에게 ‘비핵화 선택’이 옳았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긍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을 포기하면서 본인이 추구하는 것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다른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노동당 창건 75주년인) 2020년을 목표로 경제 건설에 총력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보수 측에선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및 발언에 대해 믿지 않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해오고 있다. 한 마디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불신은 근거가 없지 않다. 과거에 북한이 남한과 이런 저런 합의를 했지만 약속을 천안함폭침사건, 연평도포격사건 등의 군사적 도발로 갚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한국의 보수언론들도 미국이 쏟아놓는 ‘완전한 비핵화’ 주장만 주워 담고 있다.
보수진영 측은 문재인 정부의 북한 비핵화와 남북대화의 노력에 대해 ‘북한 퍼주기’, ‘NLL포기’, ‘비무장지대 철수는 국방포기’와 같은 이념대결의 프레임으로 몰아가면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보수 측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의 대북 비핵화 외교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북핵협상의 종착역은 북한이 한국처럼 완전히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NPT에 비핵회원국으로 복귀하는 것인데, 일련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이 추구해온 김일성의 유훈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 전략이 승리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북한이 주한미군 전술핵철수, 한미연합훈련 중지, 대북안전보장 등 추구하는 바를 얻고 있는 상황임에 반해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의 목표 및 최종 상태는 한국의 비핵화,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와해라고 보고 문재인 정부가 돈으로 평화를 구걸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다른 한편에선 평화적인 비핵화 해결은 중단될 수 있는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주한미군의 평택시대 개막, 미사일협정 개정, 한미FTA 재협상 타결과 관련해 북핵문제 때문에 한국이 크게 손해 보지 않았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북한 비핵화가 지연되더라도 미국의 세계전략에 동참하면서 굳건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보수 측에선 특히 지난 9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4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채택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 후 그에 상응하는 조치들에 대한 우려가 대단히 높다. 이 합의서는 육상, 해상,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구축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협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가 갖는 전략적 의의는 육상, 해상, 공중의 모든 공간에서 적대행위 중지를 약속한 것이어서 나중에 북한과의 검증문제로 시비가 될 소지도 있지만, 현재로선 사실상의 ‘불가침 합의서’나 다를 바 없다. 이 합의에 대해 조명균 장관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두고 “합참에서 하나하나 검토하고 유엔사와도 하나하나 점검해 전혀 이상 없는 그런 사항만 해나가고 있다”며 “안보태세가 약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안 하셔도 된다”고 언급했다.
이에 반해 보수 측에선 문재인-김정은의 상호 약속에 따른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위장된 평화, 심지어 남한을 무장해제하는 조치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이 군사합의서의 체결과 이행으로 NLL 무력화, 서북5개 도서 고립, 북한군에 대한 감시 및 타격도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문재인-김정은이 벌인 일련의 회담에 대해서 “위장평화쇼”라고 공세를 펴오고 있다. 북한이 이번 합의서에 크게 만족한 것에 반해 우리 군 안팎에서는 서해상의 NLL문제가 민감하게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바라는 대로 합의해줬다는 비판이 드세다. 더군다나 얼마 전 북한의 리선권 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한국 기업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라고 한 질책성 발언은 보수진영 측에게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이성적인 평가를 마비시킬 만큼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공격의 빌미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보수 측 인사들의 불신과 반대가 있어도 문재인 정부는 기존에 해오던 대북정책을 밀어붙일 것이다. 미국의 대북대화 중단 선언, 군사적 옵션의 재가동이 아니고선 현재의 상황이 급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내 보수 측 반대의견과 주장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 및 북핵정책의 기조를 뒤집을 만한 동력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미국 내 김정은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거의 보수적 논조일색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선 미국이 비핵화의 주도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1월부터 동년 9월까지 북한을 제외한 관련국들 사이에 진행된 북핵 관련 회담 혹은 협의는 총 41회 중에 미국이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IAEA, EU, 싱가포르 등 상대측(counterpart)과 협의한 것이 26회나 됐다는 사실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정책수행자들 및 그 지지자들이 김정은의 비핵화의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비핵화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의 거부로 지금까지 쌓아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성과,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등이 뒤집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 내 반응을 주시해야 할 이유다.
2. 미국 내 반응
북핵 확산을 예방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제한적이다. 미국의 노력이 북한정권에게 일관성과 신뢰성을 주었는가 하는 면에서도 과오가 있다. 이 점은 과거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미회담이 증명한다. 물론 미국도 비핵화라는 말보다 2005년의 이른바 ‘9·9합의’에 나왔던 북한의 핵무력화와 핵능력의 포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양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북미정상회담 직후 미국은 김정은의 비핵화의지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대규모 한미군사훈련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북핵문제의 일괄타결과 리비아방식을 검토했던 입장에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핵폐기)로 한 단계씩 양보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CVIG(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체제보장)를 수용하려는 뜻을 보여준 바도 있다. 이는 과거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군사 안보적 시각을 정치 외교적, 경제적 시각으로 전환하여 북핵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트럼프 정부는 과거의 기존 보수적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북한이 약속을 이행하면 대북제재를 해제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에 핵 신고와 비핵화를 담보해줄 핵리스트와 시간표를 제출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종전선언, 평화협정체결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오 장관 등 미국 측에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평화협정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가 없다.
트럼프 정부의 관료, 주요 북한 연구기관 등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미국 내 반응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다 보수일색이다. 지난 5월 28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 보도에 의하면,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 3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믿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들의 주장을 개념화 하면 아래와 같이 크게 첫째, 북한의 비핵화 조치 미흡 및 김정은 비핵화의지의 진정성 의심, 둘째, 비핵화 조치의 일방적 요구 및 남북관계 진전에 제동 필요, 셋째, 북한과의 대화 지속, 북한에게 숨 쉴 틈을 줘야하며, 단계적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비교적 온건론 등으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1) 북한의 비핵화 조치 미흡 및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 의심
2018년 3월 18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한국석좌 빅터 차(Victor Cha)는 이 연구소 소식지에서 “평양이 보여준 자세는 ‘전략적 변화’를 보여주는 분수령이 아니라 핵무기를 외부세계의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전술적 변경’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그는 “일치된 대응을 위한 정책조율이 앞으로 가장 중요한 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며, 2005년의 9·19공동성명을 북한의 진정성 확인을 위한 기준점으로 제시했다.
수잔 손턴(Susan Thornton)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대행은 4월 24일 주한 미대사관 공보과에서 진행된 간담회에서 “현재까지 북한이 비핵화에 대해 내놓은 입장은 구두발표든 성명이든 분명 긍정적인 신호지만 (북한의 이행 정도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기엔 충분하지 않다”며, “비핵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검증도 될 수 있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 등의 사찰도 될 수 있다. 핵프로그램 포기나 해체도 있다”면서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 조치가 있어야만 진정성이 인정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직접 풍계리 핵실험장 문을 닫는다면 국제사회의 신뢰를 쌓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5월 3일 개최된 ‘한국포럼’에 참석한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e) 객원선임연구원 에번스 리비어(Evans J. R. Revere)는 “북한이 어떤 점을 약속해야 하는지, 폐기할 핵을 ㎏단위로 세분화하는 식으로 분명히 보여줘야” 진정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한국포럼’에서 新미국안보센터(CNAS, Center for a New America Security)의 아시아태평양안보소장 패트릭 크로닌(Patrick Cronin)은 “김정은에게 정말 비핵화 용의가 있고 진정성이 있다면, 어느 장소라도 불시에 사찰할 수 있도록 하는 엄격한 매커니즘이 있어야만 미국식 비핵화에 부합하는 비핵화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5월 17일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아시안리더십 콘퍼런스’에 참석한 조너단 폴락(Jonathan Pollack) 선임연구원은 “아직 북한 주민들에게 ‘비핵화’를 공표하지 않은 김정은을 어떤 근거로 믿을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아시안리더십 콘퍼런스’에 참석한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수석 부차관보는 “최근까지 환희에 차 있던 서울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10년 전 영변 냉각탑 폭파 때도 ‘드디어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였다’고 반겼는데, 결국 어떻게 됐느냐”며 “핵 완성을 선언한 4월 20일의 김정은을 잊고, 판문점에 등장한 4월 27일의 김정은만 믿을 경우,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한국·일본이 아닌 미국의 안보위협만 없애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7월 2일, 한국의『매일경제신문』과 이메일 인터뷰를 가진 랜드 연구소(RAND Institute)의 브루스 베넷(Bruce Bennet)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는 김정은 위원장의 진정성을 입증하기에는 불충분한데, 이는 폐쇄현장에 미국 기술전문가들을 참석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소속 쉴라 스미스 선임연구원은 공격적 북핵외교와 군사옵션 준비를 주문한 대북 강경론자답게 7월 10일 워싱턴 D.C.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있는지는 회의적인데, CVID를 이루려면 북한 내 사찰도 허용하고 핵시설도 폐기해야 하는데 그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의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 선임연구원은 9월 19일 남북한 간의 “평양 공동선언은 미국의 목표보다 더 나아가지 않았으며, 달갑지 않은 딜레마를 미국에 안겼다”고 할 만큼 북한의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 바 있다.
스탠포드 대학 명예교수 시그프리드 헤커(Siegfried S. Hecker) 박사는 9월 27일 연세대 강연에서 북핵비핵화는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영변 핵시설 폐기는 (북한으로선) ‘진짜 빅딜(a really big deal)’이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기한다면 이것은 북한 비핵화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영변 핵시설이 “노후화했어도 가동 가능하고 북한 핵시설에서 핵심적 시설”이기 때문에 “영변의 거대한 핵시설을 폐기하는 절차를 실제로 밟기 시작한다면 가장 중요한 비핵화 과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지하다시피 영변의 핵시설은 5㎾원자로와 재처리시설, 우라늄 농축공장, 핵연료봉 제조공장 등 390개 이상의 시설이 갖춰져 있는 북한정권의 핵개발 종합단지다. 시그프리드는 이곳만 폐기해도 현재핵과 미래핵의 상당 부분을 제거하는 셈이라고 했다. 그는 북핵의 완전한 제거는 최소 15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오고 있다.
미국외교협회의 스콧 스나이더(Scott Snyder) 선임연구원은 10월 3일『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만약 영변의 핵시설이 폐쇄가 되면 적당한 시작점이 될 것이지만, 만약 유일한 합의가 된다면 심히 불만족스러우며 완전히 역행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10월 10일,『국민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빅터 차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해체와 사찰 수용을 검토한다면 과거 어느 합의보다 진정된 성과라고 볼 수 있으며, 만약 이를 거부할 경우 북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고 압박했다. 10월 11일, 정 H. 박 선임연구원과 미국 신안보센터(CNAS) 에릭 브루어는 “실무회담을 꾸려 비핵화 단계가 담긴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핵분열물질 생산을 중단해 핵개발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폼페이오 장관도 지난 10월 방북 때 김정은이 구두로 약속한 풍계리와 동창리 사찰을 포함해 ‘5가지’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져 쉽지 않은 협상을 예고했다. 미 국무부는 11월 6일 중간선거 직후인 7일 0시 헤더 나워트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미국 뉴욕에서 지난 11월 8일 열릴 예정이었던 북미 고위급 회담이 돌연 연기됐으며, “북한이 뉴욕에서 예정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장 부위원장의 북미 고위급 회담을 취소했다”면서 “이는 험난한 양국 외교 과정에 차질을 주고 비핵화 진전에 대한 기대감도 낮추는 것”이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 같은 움직임은 북한이 조기 제재완화 같은 조치를 얻어내고자 미국을 압박하려는 시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해석”이라고 전했다.
2) 비핵화 조치의 일방적 요구 및 남북관계 진전에 제동 필요
최근 대략 미국의 중간선거가 끝난 2개월 전부터 미국의 대북 기류가 변화한 듯이 보인다. 북미 정상 간의 싱가포르 합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었음에도 미국은 북한의 안전보장은 제쳐두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만 강조하면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CVID’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분명히 김정은에게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 ‘완전한 비핵화’, ‘유골의 발굴과 송환’ 등의 4개 항이 도출됐고, 약속을 이행하는 절차만 남겨 놓았었다. 이에 따라 폼페이오 장관도 비핵화와 더불어서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는 방안을 미 의회의 비준을 받는 절차를 거치겠다고 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과정만을 요구하는 행태는 싱가포르회담에서 트럼프가 한 약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미국 조야와 언론들은 트럼프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자신이 약속한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안전보장에 대한 실행은 거의 하지 않은 채 이 회담의 결론이 마치 ‘완전한 비핵화’뿐이었던 것처럼 일방적인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것에 대한 기대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 미국 행정부 관리들을 면담하고 온 조명균 통일부장관의 최근 평가는 이러한 현재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즉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조치까지 들어가야 하고, 미국은 미국대로 북한에 체제안전을 보장해 주는 상응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라며 “(북미가) 서로 상대방이 먼저 해라, 우리는 거기에 맞춰 하겠다고 하니까 진도가 안 나가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내 유력인사들의 한국 관련 발언에는 과도한 주권침해 시비가 있을 수 있는 발언도 적지 않았다.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 주한 미국대사는 “남북관계와 대화는 북한 비핵화와 연계되고, 한국과 미국의 목소리가 일치해야 한다”며, 남북의 철도-도로 연결 연내 착공 합의 등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는 주권국가를 존중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 신임 주한미군 사령관 에이브럼스(Robert Bruce Abrams)는 한국 부임 전 미 의회 청문회에서 “남북 간의 종전선언은 그들 사이의 합의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이 또한 미국 의회가 논의할 내용은 아니었다. 트럼프도 세 번씩이나 “미국의 ‘승인(approval)’ 없이는 한국이 대북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해 미국이 남북관계에 대해 통제를 한다는 의미를 밝혔다.
최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피부로 접한 미 행정부의 분위기는 기존에 유지해오던 대로라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즉 “남북관계는 비핵화 진전과 보폭을 맞춰야 한다”, “남북관계만 너무 앞서 가면 안 된다”는 등의 시각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의회의 상원 군사위원회의 고위 관계자는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약화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 아니냐”고 말한 것조차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유럽순방 일정 중 북한의 되돌리기 어려운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언급하자 미국 정부는 비건(Stephen E. Biegun) 특별대표를 보내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당분간은 대북 제재유지에 방점을 둬야 한다며 경고성 발언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동일한 맥락이다.
3) 대화지속, 북한에게 숨 쉴 틈을 줘야 하고, 단계적 해결이 바람직
한편, 미국 내에는 대화지속이 필요하고, 소수지만 북한정권에게 숨 쉴 틈을 줘야 하며, 단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온건론도 존재한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6월 14일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에 참석해 북핵문제 협상에 임하는 김정은의 진정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가 숨 쉴 공간이 필요하며, 주요 훈련을 중단하는 것이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 한 예다.
마이클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대화의 지속을 얘기했다. 그는 9월 27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안보리회의에서 “제재가 지속되면서도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끝내고 싶다”고 하면서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교류에 기반해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만약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 가능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에 대한 헌신이 있다면 북한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며, 북미 관계에서 긍정적인 변환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서울의 신미국안보센터의 김두연 선임연구원은 2018년 10월 3일『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영변의 핵시설 폐기는 ‘환영할만’하며 ‘실질적인’ 단계가 될 수 있으나, 북한은 여전히 은폐된 시설에서 핵 운반체와 핵분열 물질 생산확대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포괄적이고 완전하며 정확한 리스트 확보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It’s unrealistic to expect a comprehensive, completely accurate list from the get-go”)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의 시그프리드 교수는 남북이 협력하면 못할 게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간접적으로 미국의 일방적 대북 압박을 부정적으로 봤다.
특히 최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비확산담당 국장을 지낸 에릭 브루어는 12월 초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미 행정부가 ‘단계적 조치와 단계적 보상’ 방법을 담은 로드맵을 먼저 마련해야 하고, 이를 위해 반드시 북한과의 실무협상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고는 2차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미가 ‘워킹그룹’을 가동한 것처럼 대북압박에 열쇠를 쥔 중국과도 북핵 협상에 관한 실무그룹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발언 내지 평가들을 종합해볼 때, 미국 행정부의 관료들과 주요 싱크탱크 학자들의 반응은 북한에 대해 지속적인 제재와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이며, 과거 북한의 약속불이행을 근거로 의심하는 것이 기본 태도다. 미국에게 ‘confidence’와 ‘trust’는 다른 개념이다. ‘신뢰’(trust)란 지속적인 검증을 통해 ‘확신’(confidence)이 서는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이라고 인식하며, 또한 그들은 결코 북한의 처지에서 역지사지 하는 사고를 하지 않는다. 미국이 김정은 비핵화의지의 진정성을 믿게 될 경우 그 전제조건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CVID를 위한 영변 핵시설의 선제적 폐기와 북한의 선별적인 사찰이 아니라 미국이 지정하는 방식의 사찰허용, 그리고 폐기과정에서의 미국 전문가 참관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진정성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북핵문제 해결의 관건인 김정은의 비핵화의지는 어떤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Ⅲ. 김정은 비핵화의지의 진정성(sincerity)검토
1. 북한지도부의 정책노선 의사표현방식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개인이나 정부의 담화는 그 자체로 국가구성원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수단이다. 이 점에서 데이비드 벨(David Bell)은 “정치란 담화(discourse)다”라고 간명하게 개념화한 바 있다. 사실상 담화란 정당성과 효율성의 여부에 따라 개인이나 국가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개인, 정당, 혹은 정부의 메시지, 의지, 방향, 구상 등을 알려면 이것들이 내포돼 있는 담화의 내용과 숨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논리는 그대로 북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대내외적으로 공표하는 담화는 권력의 원천으로서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기도 하다. 담화는 조선노동당과 최고 지도자의 의지, 당의 노선이 집약돼 나타난다. 북한에는 담화는 당 내외의 다양한 문헌들에 실린다.
북한문헌들은 크게 공간(公刊)문헌과 내부용 문헌의 이중구조로 나누어져 있다. 공간문헌과 구별되는 내부용 문헌은 주로 당내 권력투쟁, 숙청, 후계문제 등과 같은 예민한 정치적 사안들을 다룬 것들이다. 이 경우 공간문헌과 내부용 문헌은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인다. 노동신문이나 일반 출판물들과 같은 공간문헌은 대체로 사건을 암시하는 고도의 은유적 표현들이 거의 전부다. 이에 비해 회의토론 내용을 녹취한 녹음테이프나 김일성의 연설을 받아 쓴 문건들, 그리고 전원회의 결정집 등으로 이루어지는 내부용 문헌은 사건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대 북한정권에서 내부용 문헌이란 정책수행의 제1순위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 지시, 당대회 보고기록과 같은 저작들을 들 수 있다. 당과 국가기관들이 김정일에게 ‘제의서’라 불리는 문건을 제출하여 친필 재가를 받아 하부에 시달하는 지시들도 실린다. 물론 현지지도과정에 남긴 지시사항들, 심지어 기자와의 인터뷰나 차를 타고 가다가 가볍게 한 얘기도 모두 교시와 말씀으로 등록되어 하부에 시달된다. 친필제의서인 경우에는 김정일의 말씀과 같은 격을 가지고 집행되게 된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의도와 사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에 최우선 순위로 적용되고 최고의 정의로 인정된다.
북한정권은 노동신문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공표해도 무방한 회의결정 내용은 발표하지만, 권력변동이나 숙청과 관련된 회의결정사항, 토론내용과 김일성의 연설 등은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숙청이나 김정은 후계자 등장과 같은 권력구조상의 변동이 있게 되면 노동신문은 고도의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암시하는데,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을 쌓지 않은 평범한 눈으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북한문헌들의 이중구조 현상의 예로는 1956년 8월에 있었던 ‘8월 종파사건’, 1968~69년 초에 있었던 군부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사건을 들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노동신문 등의 공간문헌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직접 보도하지 않은 채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도했을 뿐이다. 따라서 두 사건 이후 노동신문만 보아서는 조선노동당 내부에서 격렬한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는지, 또 군부 내에 최고위 인사들이 당 정책의 불이행과 군벌만능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대량 숙청됐는지는 전혀 알 수 없고, 단지 군내부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점이 암시됐을 뿐이다.
이종석은 북한문헌의 특징으로 담화의 은유성, 이중성, 간행시기별 서술의 차이 세 가지를 든다. 신문, 잡지, 학술지, 연감, 방송내용문 등 북한 공간 문헌의 유형과 특징은 대외적으로 발표되는 공간문헌으로서 권력투쟁 같은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고도의 은유성이 내재돼 있다. 과거 은유성의 대표적인 예로는 김정일의 부상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1970년대부터 꾸준히 자신의 후계체제 확립을 위해 움직여온 김정일의 동향에 대해서는 대외에 비공개에 부쳐졌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공간문헌들은 1980년 이전까지 철저하게 김정일의 존재를 노출시키는 직접적인 표현들은 쓰지 않았다. 그 대신 고도의 은유적 표현을 통해서 조선노동당에 새로운 지도 중심이 서고 있음을 암시해 왔던 것이다. 또 1972년부터 공식문헌에서 김정일의 지도를 받은 예술작품들에 대해서는 “당의 직접적 지도 밑에”라는 표현, 즉 “당”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해 그의 존재를 암시하다가 그가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 된 1974년 2월부터는 “당 중앙”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로 공개화 된 1981년 이전까지 김정일을 지칭하는 익명의 호칭으로 사용됐다.
서대숙 교수의 지적처럼 1972년 이후 당중앙위원회의 개최가 뜸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연설에서 “당과업”보다는 “정부의 사업”을 강조하는 빈도수가 늘어난 점에 근거해 1972년 신헌법제정 이후 북한정권의 정책결정에 대한 권한은 조선노동당에서 정부로 이전된 듯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북한은 당이 우선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유념할 점은 북한문헌에서 담화의 이중성이란 문헌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나 표현이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현실과 반대되는 양상’을 표상하는 경우가 있음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예로는『노동신문』과 『근로자』자의 공동사설에 나타난 담화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즉 북한지도부가 자립경제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에도, 또 북한 현실을 반영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매체들에선 자립경제를 추구하자는 식의 구호들, 예컨대 “자립만이 살 길”, “자립적 민족경제의 우월성을 발휘하자”, “강력한 중공업을 핵심으로 하는” “우리식 경제구조”의 발양을 강조하면서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발전 방식을 비난하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당국은 통치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내놓는 언어와 비공식적으로 흘리는 언어가 다르다. 주요 정책노선 결정에 대해 조선노동당 지도부가 당내와 당외에 공표하는 내용도 차이가 난다. 북한 당국은 ‘미제는 원수’라고 가르치지만 주민들은 미국이 부국이자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북한주민들까지도 집안에서 하는 얘기와 집 바깥에서 하는 얘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2. 조선노동당의 결의와 김정은의 언행
김정은이 표명한 비핵화의지가 전략적 노선의 변화인지 아니면 상황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술적 변화인지는 최근 북한 조선노동당 내부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공간문헌에서든, 내부용 문헌에서든 북한지도부는 지금까지 조선노동당이 목표로 하고 있는 대남통일전략을 폐기한 적이 없다. 노동당 당강에서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있다. 2016년 7월 북한 당국이 정부성명으로 밝힌 “체제보장 5개 원칙”이 이를 증명한다. 5개 원칙은 첫째, 남한 내 미국 핵무기 공개, 둘째, 남한 내 모든 핵무기 기지 철폐와 검증, 셋째, 미국의 대북 핵타격 중단, 넷째, 대북 핵위협 및 핵불사용 확약, 다섯째, 주한미군 철수 등이다. 이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립한 황장엽이 북한통치자들은 남북간에 전쟁이 꼭 한 번은 더 있게 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밝힌 내용과 앞뒤가 맞는 맥락이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 핵무기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핵화를 하더라도 데이터든, 기술자든 핵능력은 그대로 보유한다고 주민들은 믿을 것이다.
김정은 역시 2012년 권력을 잡자 2015년을 “조국통일의 대사변의 해”로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 내부 회의와 군대회의에서도 2015년까지 전쟁준비를 끝내기로 했다. 김정은 자신도 직접 군부대를 시찰하며 전쟁준비를 점검했다. 그 뒤 이듬해 2016년 2월 김정은은 제3차 핵실험을 단행해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된 정밀 핵타격 능력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3월 31일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 경제 병진노선’을 조선노동당의 정책으로 공식화 했다. 이는 김정은이 핵보유국의 헌법 명시, 핵경제 병진노선 채택을 통해 북한의 핵 보유를 헌법과 당 정책에 명문화해 국내법으로 제도화하는 작업을 대략 2013년 상반기에 마무리했다고 한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과 일치한다. 2016년 5월 6일~5월 9일에 개최된 제7차 조선노동당대회 결정문에서 암시됐듯 이것은 갑작스런 임기응변은 아닌 듯하다. 이 제7차 조선노동당대회는 1980년의 제6차 당 대회 이후 36년 만에 열린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자기 사업을 성과적으로 끝마치고” 폐막되었다는 암시가 있었다.
위 내용을 보면 김정은이 올해 들어 한미 양국에 내보인 비핵화 의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의 유무 혹은 그 정도를 가늠하려면 그가 한 발언과 관련 조치들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김정은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유한 핵을 폐기하겠다고 직접 밝히거나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단지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썼을 뿐이다. 금년 3월 김정은이 국무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북중정상회담에서 그간 중국이 제안했던 동보적 단계(steps in syncronization)의 비핵화를 천명한 게 전부다. 이것은 중국정부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던 쌍궤병행(雙軌竝行 비핵화프로세스와 평화체제구축)과 유사한 형식으로서 미국과의 북핵문제 동시진행을 의미했을 뿐이다.
세기적인 싱가포르 ‘6·12북미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약속한 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였다. 이 회담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관계 수립과 한반도의 지속적이고 견고한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된 사안들을 주제로 포괄적이고 심층적이며 진지한 방식으로 의견을 교환”한 뒤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다. 트럼프는 북한의 안전보장을 약속했고, 김정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확고하게 약속했다. 여기서도 김정은은 “한반도의 비핵화”라고 했지 “북핵을 폐기하겠다”고 언명하진 않았다.
그런데 국내 많은 국민들은 김정은과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거의 모두가 김정은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정부를 통해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4일 한미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이제 북한의 핵 포기는 북한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식화됐다”며,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전 세계 언론 앞에서 비핵화 의지를 직접 밝히고 내가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김 위원장과 한 비핵화 합의를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역설한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김정은의 북핵폐기 의지가 있는지 진정성을 어떻게 판별하고, 그것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의지는 현재로선 전략적 변화를 위한 전술적 시도일 것이라는 점이다. 김정은에게 조건부이긴 하지만 비핵화 의지는 지금도 있다고 본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2018년 초 남한과 대화 국면이 시작될 시점에 북한이 전략적 전환으로 보인 것이 핵포기라는 전략노선의 변경이 아니라 경제노선에 관한 전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먼저 조선노동당의 결의에서 읽어낼 수 있다. 2018년 4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의 사회주의경제 건설노선 의정보고에서 김정은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은유와 암시만이 있었다.
하지만 앞 절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내부용 문헌에서 개혁개방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북한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순 없다. 김정은은 이미 2013년 3월 자신이 국정목표로 제시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 승리한 것으로 평가하고, 이 노선의 종료선언과 동시에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 등 중공의 새 지도부가 국정운영의 중심과제를 정치과다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현대화건설로 전환시켰던 것과 같은 패턴이다. 중국 개혁개방시 사회주의개조의 기초 완성처럼 김정은에게 노선전환의 조건은 핵보유국이다. 이는 핵보유가 “경제발전을 위한 대외적 조건”이라는 선대의 유훈과 일치한다.
지금까지 김정은이 보여준 행보는 조건 없는 즉각적인 북핵폐기가 아니라 기존 군사 강성대국과 군사대결 우선주의에서 경제회복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겠다는 의사를 보였을 뿐이다. 이것과 북핵폐기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조건부적인 것이다. 즉 만약 미국과의 협상이 원만하게 이뤄지면 전략적 변화로 나아가겠지만 협상이 장기화 되면 전략적 전환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한시적인 것이다. 김정은이 한국과 미국의 두 지도자에게 북핵을 포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전략적 결단이 아니라 핵보유국 지위에서 미국과 핵군축협상을 벌여 미국의 대북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술적 대응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북한은 핵포기 후 경제발전노선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는 있어 보여도 북한이 먼저 핵을 아무 조건 없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4월 김정은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새로운 전략적 노선”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했다면서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길을 빨리 걸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라고 한 말에서도 새 시대에의 의지가 나타났다. 김정은은 당시 방북한 쑹타오(宋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에게도 중공의 경험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은 그가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북한이 처한 국내외 정세와 김정은의 언행으로 봐선 그는 베트남모델이 아닌 일부 중국식 경제시스템을 답습해 북한식 경제개혁 노선, 즉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으로 나아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중국의 개혁개방 때와 유사한 행보를 걷고 있는 점이 그 근거의 하나다.
김정은의 중국모델 선택은 미국주도의 봉쇄에 직면해 외부세계, 국제체제와의 단절로 인한 고립이 더 지속될 경우 북한 내부의 억제된 분출욕구가 임계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다 무역의존도가 90%를 넘고 있는 중국이 아니면 미국 견제는 물론, 미국을 대신해 핵포기 반대급부로 경제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김정은이 미국과의 동시적 조치에 따른 북한 비핵화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와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을 받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자신이 말한 대로 남북관계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가 읽혀진다. 올해 신년사에서 그가 “우리민족의 역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고, 지난 4월 판문점 ‘자유의집’ 방명록에서도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서명한 점도 그렇다.
김정은의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화의 의지는 그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북한이 속임수를 쓰거나 시간 끌기 해서 도대체 북한이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미국이 더 강력하게 보복할 것인데, 그 보복을 북한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북한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했다.
지난 5월 9일, 김정은이 두 번째로 방북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에게도 자신의 비핵화의지를 믿어달라고 했다. 즉 만일 미 해군이 원산항에 기항한다면 그것은 곧 동해가 미국의 바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난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과 손잡겠다. 미국이 원산에 투자해 카지노를 지어달라. 미 해군의 원산항 기항도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같은 취지로 읽혀지는 것이다. 원산이 중국과 러시아의 해군함대의 동해진출도 견제하면서 중국의 동북과 수도권을 겨냥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에게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기도 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라고 한 것도 기존과는 다른 발언이었다.
미국과의 북핵문제 동시진행 의지는 김정은이 지난 9월 남북한 두 정상의 평양선언 후 엔진시험장, 미사일발사대 폐기를 합의했고 영변 핵시설까지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치며 미국에 상응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한 데서도 표현됐다. 김정은이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의 영구 폐쇄조치를 자발적, 선제적으로 결행했다. 약속 이행의 첫 단계에서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미군사훈련 중단 조치 외에 북한이 바라는 제재완화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본고에서 예시한 김정은의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과 관련 조치들은 남한으로 망명해온 태영호 전 북한공사가 말한 “성급하고 즉흥적인 것”일까? 태영호는 김정은이 대단히 급한 성격에다 즉흥적이며, 거칠면서도 두뇌와 논리가 있는 편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과격한 행동에 성격적인 측면과 전략적인 측면이 존재하며 때로는 그 두 가지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김정은의 발언들은 오히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솔직한 표현으로 읽히고, 성격적인 측면과 전략적인 측면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북한이 작년까지 보여 온 대외협상의 패턴을 보이지 않고 있는 점도 김정은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한 의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엔 북한은 대외협상에서 일정한 협상패턴을 반복해왔다. 그들은 협상의 최초 단계에서 거창한 제안을 해놓고 협상태도를 경직 시킨 다음, 마지막에는 상대방이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식이었다. 북한은 필요에 따라 입장을 뒤집기도 하고 때때로 합의도출에 열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똑같은 주제에 관한 똑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지만, 올해부터는 그런 농간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봐서 김정은이 새 시대의 전략적 전환으로 나아가려고 한 데는 북한 내부사정과 맞물린 몇 가지 중대한 이유들이 있어 보인다. 즉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한 제2의 고난의 행군 가능성, 트럼프 집권 후 미국의 대북 군사공격 가능성이 높아진 점, 핵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협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포함), 김정은 정권의 경제발전 의지 등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김정은의 행보로 판단할 때 김정은은 북미 대화를 선전하면서 자신의 개인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트럼프, 문재인, 김정은 3자가 절묘하게 얽힌 시운에 즉응해 자의든, 타의든 어차피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중국을 뒷배로 해서 그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겠다는 게 김정은의 속내로 보인다.
Ⅳ. 맺는말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김정은의 북핵 폐기의지를 의심하고 대북제재를 풀어줄 의사가 없다. 이것은 미국내 한반도 전문가들의 보수적인 대북 판단 및 평가와 대동소이하다. 미국이 외국과 맺은 모든 합의를 관장하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더는 (북한의) 핵 위협이 없다”며 성과를 자랑한 트럼프 대통령의 합의가 모호하다고 회의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반응은 실제로 북한의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명확하게 북한의 전면적인 핵폐기를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지도부에서는 지금까지 조선노동당이 제정한 대남통일전략을 폐기한 적이 없고, 조선노동당 강령에서도 핵폐기를 명기한 일도 없다.
하지만 2018년 12월 중순 현재까지는 김정은 및 북한지도부의 북한 비핵화 의지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전제조건이 달려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동시적 상응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북한에게만 비핵화 조치를 계속 요구했을 때는 북한은 무한정 양보하지 않고 응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일 미국이 평양사무소 개설, 선제적 플루토늄 생산중단, 상호불가침협정 체결, 북미평화체제 구축 협상개시, 문화교류 확대, 미국내 반대파 설득을 위한 공공외교 확대 등 김정은 정권이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면서 북한 경제개발을 지원할 것에 신뢰를 보여준다면 김정은은 “새로운 전략적 전환”을 실천하는 경제발전을 위해 핵 포기는 실제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다. 즉 역설적으로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 위해 핵을 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핵전쟁으로 북한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핵을 개발했다는 게 평양의 논리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국가존립과 관련된 사활적 문제에 직면해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실행케 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협상에서는 일방적 주장보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줘야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지듯이 북한의 비핵화 문제도 미국과 북한이 서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이 북한에게 비굴한 방식으로 핵을 버리라고 요구하면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평양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북핵을 폐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북핵의 폐기조치와 미국의 제재완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동시에 논의할 상응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2000년대 초부터 주장한 바 있지만, 사실상 북핵문제의 해결은 역지사지가 필요하고, 가령 유엔 감시하에 미국과 북한이 동시에 착수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지 않으면 해결이 쉽지 않다. 북한의 CVID를 이루려면 북한 내 핵사찰의 허용과 핵시설 폐기가 필요한데, 북미 간에 북핵사찰의 대상, 방법 등을 둘러싸고 합의가 이뤄지기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이 신고한 핵시설 및 기지에 대한 ‘신고기지 현장사찰’(Declared Site Inspection)을 선호할 것임에 반해 미국은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형태의 비핵화 신고와 검증방식을 넘어서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제공한 신고목록만을 갖고 북한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북한 주도의 사찰과 검증에 ‘참관’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검증을 마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CVID는 워싱턴이 평양과 CVIG(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체제보장)를 함께 동시에 풀어야 한다. 궁극적 책임은 약속하고선 실행하지 않는 쪽이 져야하지만, 세계평화를 책임진다는 강자에게는 포용해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근래 미국이 더 강렬하게 북한의 선비핵화 조치 요구를 강화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5월 24일 미 의회에 출석해 “북한과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한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며 “합의가 이뤄지면 상원에 조약으로 제출하겠다”고 밝혔음에도 그 뒤 입장선회가 감지되고 있다. 미국은 김정은이 북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백기투항을 하지 않는 한 그의 비핵화 의지나 관련 발언들에 대한 불신을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비핵화의 이행을 머뭇거리는 쪽은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이 과연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진정 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지 않고 계속 보유하면 미국은 대북제재를 강화하면서 한미 군사훈련을 포함해 군사훈련을 상시적으로 재개할 것이다. 그럴 경우 북한이 원하는 체제보장과 경제재건은 어려워진다. 규범화, 법제화하지 않았을 뿐 시장경제에 들어서고 있는 북한의 시장을 봉쇄 내지 악화시키는 정책을 미국이 구사하면 북한경제는 버텨내기 어렵다. 북한이 버텨낼 내구성을 가졌다면 북미간의 줄다리기는 오래갈 것이다. 현재로선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앞으로 평양은 뒤에서 후견해주는 중국에 기대어 협상을 긍정적 분위기로 이끌어가면서 시간을 끌 것이다.
이 달 안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었던 김정은의 서울 답방이 북미회담의 답보상태가 깨질 돌파구로 보였지만, 김정은의 연내 답방 여부에 대해서 북한이 12월 9일 현재까지도 묵묵부답이어서 이 회담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정은이 진실로 한국과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서울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는 한 북한비핵화 문제가 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재의 북미 신경전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나 교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위 글은 2018년 12월 21일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 주최 한중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발표 전 원고인데 수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고, 원문에 있던 각주는 블로그에 올리니 사라지고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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