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
안중근의 서체는 아주 독특하다. 현재 남아 있는 50여점을 보면 알겠지만 필법이 한결 같다. 누구든지 한 작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작품을 보고도 한 눈에 도마의 작품이란 걸 알아 볼 수 있다. 그의 유묵은 서체도 독특하지만 글의 내용도 그의 정신을 살필 수 있어 좋다. 仁, 義, 信義, 愛, 忠, 和平 등등 가히 군자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와 고결한 품격이 담겨 있다.
안 의사는 삶도 유묵 내용처럼 살다 가셨다. 짧은 31세의 생애는 언행이 일치하고 명과 실이 상부한 至誠과 세계적 차원의 스케일이 큰 浩然之氣의 모습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이유이자 많은 이들이 그의 유묵을 소장하길 좋아하는 이유다. 그 유묵들 중에는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라는 글귀도 있다. 뜻은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수치로 아는 자와는 같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의미쯤으로 새겨진다. 1910년 3월, 중국 뤼쉰(旅順)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전 옥중에서 쓰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 친필 유묵은 1972년 8월 16일 대한민국 보물 제569-4호로 지정됐다. 4년 후인 1976년 3월 17일 이도영 당시 홍익대 이사장이 이 유묵을 청와대에 기증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검색일 2020. 10. 20)
그런데 청와대에 걸려 있던 이 보물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언제 사라졌는지 시점도 불분명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략 1980년 중후반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문화재청 인터넷 사이트의 도난문화재 정보란에는 이 유묵의 소유자가 ‘청와대’이며, 도난장소도 ‘서울 종로구 세종로1 청와대’로 되어 있다.
안 의사의 체취와 정신이 서려 있는 보물이 도난당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도난당한 곳이 청와대라고 하니 더욱 놀랍다. 어떻게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상주하고 있는 청와대에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도난당한 후 청와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추리로 판단해보면 도난 경로는 대략 네 가지 가능성의 범주 중의 한 가지일 것이다.
첫째, 청와대에서 다른 외국에 선물이나 기증을 해놓고 착오로 잊어버렸을 경우다.
둘째, 청와대를 방문한 외부인사가 가져갔을 경우다. 아 물론 도둑놈도 외부인사이긴 하지만 그건 방문자에서 제외한다.
셋째, 문화재전문털이범 같은 도둑놈이 들어가서 훔쳐간 경우다.
넷째, 청와대 직원이 몰래 가져간 경우다. 대통령도 청와대 직원이니까 가능성 있는 인물 안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네 가지 가능성 중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해외에 선물을 하면 미리 사전에 심의를 하고 선물 후에도 청와대 재산대장에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도 쉽지 않다. 청와대에 초대된 외부 인사들 중에는 “盜心”을 낼 만큼 저질스런 사람이 드물 것인데다, 설령 가져가려고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고 쳐도 경계 서는 초소가 한 두 곳이 아닌 청와대 관문을 빠져나가기는 낙타가 쥐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도 첫 번째와 두 번째 보다는 가능성이 높지만, 청와대에 그런 보물이 있다는 걸 아는 도둑이 거의 없겠지만, 아는 도둑이 있다고 해도 간뎅이가 배 밖에 나온 도둑이 아니고선 엄두를 낼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성이 크지 않다.
네 번째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에 다니는 직원은 대통령을 비롯해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청와대 어디에 걸려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가져가기로 마음만 먹으면 가져가기도 외부에서 침입한 도둑보다 훨씬 쉽다. 그렇다면 과연 대도는 누구였을까?
도난 시기는 1980년대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있었던 시절이다. 전두환 정권의 임기가 1980년부터 1987년까지였으니 도난 된 시기는 전두환 정권 때였을 가능성이 높고, 범인은 그 시절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청와대 직원이나 청와대에 출입한 각종 인력들 중에 누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 가지는 혼자 감행한 단독범이 아니라 몇 명이 모의한 공동범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또 소설 같은 얘기지만 문화재 전문털이범이 청와대 직원을 구워 삼아서 공모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귀중한 유묵이 도난당한 곳이 다름 아닌 청와대였다니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이 최고 권부에서 자취를 감춘 지 어느덧 최소 30년이 넘었다. 하루라도 원래의 자리에 다시 걸리게 되길 바랄 뿐이다. 요즘은 과거와 달리 법이 바뀌어 도난이나 도굴된 문화재인줄 모르고 샀다고 해도 “도난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한 것이라고 하면 그만”이던 ‘선의취득’은 인정되지 않고, 2002년부터는 도난 당하거나 도굴 당한 문화재는 소장만 하고 있어도 처벌을 받게 됐다. 그러니 안 의사 유묵 소장자는 고민하지 말고 하루 빨리 되돌려 주면 좋겠다. 혹시 누구라도 안 의사의 유묵을 보게 되면 즉시 당국에 신고하기 바란다.
팁 한 가지! 해외 우리문화재의 국내환수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든 조항에 근거해 100년이 지난 문화재가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올 경우 무관세 혜택을 받는다. 또 2007년부터 문화재보호법 내 이른바 ‘선의취득 배제’조항이 신설돼서 도난 문화재의 공소시효가 연장됐기 때문에 도난문화재를 사고파는 행위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2020. 10. 20. 18:50
구파발행 3호선 전철 안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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