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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慈堂 곽낙원 여사의 생애 : 중국신문의 보도내용에 보태어

雲靜, 仰天 2020. 3. 5. 13:20

김구 선생의 慈堂 곽낙원 여사의 생애 : 중국신문의 보도내용에 보태어

 

우리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면에는 감춰진 여성들의 활약과 헌신이 적지 않다.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郭樂園, 1859~1939) 여사도 그 중 한 분이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막후에서 지휘해 성공시켜 중국 국민정부의 성원 혹은 지지와 실제적인 지원을 받게 했고, 종국엔 광복을 쟁취했다.

 

이러한 김구 선생의 활동과 지도가 있기까지는 뒤에서 죽을 때까지 오직 한 마음으로 아들 김구의 항일 독립투쟁을 지지하고 매진하도록 한 모친의 편달과 헌신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불행하게도 여사께서는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9426일 중국 중경에서 81세의 세수로 타계했다.

 

그런데 학계에선 곽낙원 여사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돼 있지 않다. 오늘은 우선 곽낙원 여사의 죽음을 계기로 중국 신문에서 보도한 여사의 일생을 살펴보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선 약간 보충하기로 한다.

 

 

「韓黨領袖金九丁母憂 一生艱苦敎子復國」 『大公報』, 天津, 1939年 4月 30日.

  

한국독립당 영수 김구 선생이 重慶으로 온지 이미 오래 됐다. 그 동안 김 선생은 항전대업을 위해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일전에 모친상을 당했다. 벌써 어제 아침, 중경의 韓國黨 사람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단촐하지만 엄숙하게 모친의 장례식을 단체장으로 거행했다. 한인 친구 모군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김구 모친이 살아온 일생은 크게 우러러 받들만한 분인데, 그 대략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타계한 김구 모친 곽 여사의 樂園이고,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한국 황해도 長淵郡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초혼이 성행해 14세 때에 해주김씨 문중에 출가하였다. 곽 여사는 시댁이 빈곤하여 남의 집 일을 하면서 살다가 17세에 김구 선생을 낳아 갖은 고생을 다하며 호구를 유지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17세 때까지 길렀다.

 

그 뒤 김구 선생의 항일운동이 40여년 간 계속되는 동안 모친은 가계를 유지시키는 한편으로 옥중의 사랑하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오랜 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왔는데 보통사람들로서는 감내할 수 있는 게 아닐 정도였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오로지 지극정성으로 하루 빨리 조국이 광복되기만을 바랐다.

 

서기 1919년 한인들의 3.1운동이 돌발했다. 김구 선생은 그전 상해에 와서 모든 계획을 세우고 참여했다. 3년이 지나서 곽 여사가 상해에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곽여사가 중국에 온지 3년이 지나 며느리의 참상을 당했다. 김구 선생이 가정사의 부담 때문에 국권회복의 열성이 사라질 것을 크게 우려하여 또 다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두 손자를 데리고 귀국해 친척 집에 의탁하며 9년 동안이나 그 두 어린 손자를 길렀다. 곽 여사는 9.18사변이 발생한 뒤에는 또 다시 권속을 데리고 중국에 와서 남경에 몇 년 살다가 금년 2柳州에서 중경에 와서 불행하게도 이 달 26彈子石에 있는 댁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향년 81세였다.

 

곽 여사의 일생을 종합해보면, 시종 고난과 역경 속을 떠돌아 다녔음에도 항일 국권회복의 염원이 조금도 없어지거나 퇴보되지 않았다. 또 세간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평소 여사는 자신에게 필요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은 스스로 마련해서 살았다. 그렇지 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다는 자세로 살았다. 이 때문에 여사는 어려서부터 시작해 늙어서까지도 손수 바느질을 하고 먹을 것을 장만했지 결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이번에 병세가 위중하자 여사는 의연하게 28일이나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임종에 이르러서도 여사는 간절하게 전방에서 적을 죽인 첩보가 없는지 물었다. 최후엔 여사는 결연하게 다시 한 번 죽은 뒤 자신의 장례를 크게 치르지 말고 일체의 의례도 필히 멈춰 줄 것을 당부했으며, 다행히 광복되어 옛 강토를 다시 찾게 돼 유골만이라도 선영에 묻히면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등의 말씀을 남겼다. 또 들리는 바로는 (介石) 위원장이 보고를 듣고 특별히 장례비로 1000원을 보냈으나 가속들은 깊이 고마워하면서도 고인의 유촉을 받든다는 뜻에서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위 신문 보도 기사 내용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된다. 사망 일시와 사망 장소도 정확하고, 무엇 보다 여사의 일생이 과장되지 않게 적절히 잘 요약돼 있다. 다만, 위 보도기사에서 빠진 약간의 사실을 보태면 아래와 같다.

 

곽낙원 여사의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18592월에 태어난 그의 출생지는 황해도 재령이다. 곽 여사께서 타계한 시기는 중국 언론의 보도대로 1939426일이 맞다. 한인 독립운동 가족들을 위한 선발대가 중경의 서남쪽 관문인 綦江에 도착하고 임정 요인들과 각 당 독립운동가들의 식구들 100여 명이 무사히 중경에 안착한 뒤였다. 임정의 가속들이 잠시 머물렀던 기강은 貴州성의 성도 貴陽에서 북상하면 중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시기 김구는 임정에 참여한 여러 당들 간의 통일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라 그 문제의 논의에 힘을 쏟고 있던 때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곽 여사가 타계 직전에 머물렀던 곳은 중경시내 南岸 鵝宮堡孫家花園에 있던 김홍서의 집이었다. 중경시의 남안이란 곳은 현재의 남안구이고, 花園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보통 여러 집들이 한 곳에 모여 마을이나 촌락을 이루는 곳을 가리키는 커뮤니티(community). 그래서 孫家화원이란 손씨 성의 집성촌이거나 손씨와 관련된 마을 공동체다. 김홍서는 김구를 존경하고 따랐던 한인이었는데 柳州에서 병이 든 곽 여사가 한시바삐 중경으로 오고 싶다고 해서 손자 김인 형제가 가서 모시고 온 곽 여사를 모시겠다고 해서 손가화원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셨던 분이다.

 

곽 여사의 병은 당시 중국말로 咽喉症이었다. (咽喉)이 아프면서 붓거나(腫痛), 發赤(급성염증 시에 나타나는 징후의 하나인데 국소의 소동맥, 모세혈관의 충혈에 때문에 피부 및 점막이 빨간빛을 띠는 증상)하거나, 혹은 막히는 閉塞 증세와 기타 목에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일컫는 용어다. 인후증은 당시 廣西 지방에 풍토병의 일종으로 많이 유행하던 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곽 여사의 이 병이 초기였더라면 다룰 방법이 있었고, 또 고령만 아니었더라면 수술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는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노쇠한데다 병까지 겹친 곽 여사는 劉振東, 姜瑛波 부부에게 진료와 시중을 받고 있었다.

 

유진동은 상해 同濟대학 의과 대학 출신의 한인 의사로서 졸업 후 고령 폐병요양원을 열어 운영하다가 김구선생이 독립운동에 전념하도록 곽 여사를 모시겠다고 자원해서 일가족을 데리고 중경에 온 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중경의 남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곽 여사는 그곳의 仁濟의원에서도 손을 놓고 퇴원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이날 타계한 것이다

 

병이 날로 심해져서 중퇴에 빠지자 임종을 예감한 듯 곽 여사는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김구 선생에게 유언을 남겼다.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곽낙원 여사의 장지는 손가화원에서 5리 가량 떨어진 和尙山의 공동묘지였는데, 김구 측에서 이곳에 만든 석실에 안장됐다. 이곳 공동묘지는 그때까지 한인들 중 玄正卿, 韓一來 등등 한인 여성 사망자들이 수십 명이나 매장된 곳이었는데 가장 연장자로 이곳에 안장됐다가 광복 후 김구의 지시에 따라 아들 김신이 이곳으로 다시 와서 유골을 수습해 한국으로 가져왔다.

 

 

앞 줄 중간에 앉아 있는 분이 곽낙원 여사, 그 뒤 중앙에 김구, 그 좌우로 각기 장남 김인과 차남 김신. 이 사진은 1918년 생인 장남 김인이 대략 예닐곱 정도의 고등학생으로, 또 1922년생인 차남 김신이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인 것으로 보아 대략 1934년 전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김구 3부자(좌로부터 김인, 김구, 김신) 1940년이나 1941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故 곽낙원 여사 장례식을 마치고 묘소 앞에 선 김구( 좌로부터 김구 둘째 아들 김신 , 장남 김인 , 김구 , 김홍서) ( 사진 출처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김구자서전』)

  

위 중국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김구의 가정사는 필설로 다하기엔 붓끝이 움직여지질 않을 정도로 비참했다. 김구의 부인이자 곽 여사의 며느리 최준례 여사는 23녀 중 막내인 김신을 낳은 뒤 산후조리중에 낙상을 입어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장녀 화경과 차녀 은경 그리고 3녀까지도 모두 일찍 죽고 장남과 차남만 살아남았지만, 장남 김인도 광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53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중경에서 폐병에 걸려 페니실린을 구할 수 없어 두 눈 뜨고 죽게 됐다. 장남 김인마저도 아내로 맞이한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 안미생과 장녀 효자만 남기고 타국에서 부모 보다 빨리 사망했으니 어버이로서 김구의 심정은 어떠했을지는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보지 못하게 된 김구의 가정사는 정말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가슴 아픈 통한으로 점철돼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곽 여사는 며느리가 일찍 사망한 뒤로는 모든 가사와 생활비 조달, 손자 교육을 포함해 모든 것을 손수 했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았다. 일제 강점 전까지 종(노복)을 부린 관습이 남아 있었는데, 나라가 일제에게 병탄된 뒤엔 곽 여사는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라고 하면서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곽 여사는 노복제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80평생을 남을 고용한다는 고용이라는 두 글자와도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 보지 않으신 것이다.

 

위 신문보도에서 언급된 곽 여사의 김구 옥바라지와 손자 양육 등의 가정사와 독립운동 지원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곽 여사가 김구의 옥바라지를 한 것은 두 번 있었다. 일제가 낭인들을 동원해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에 대해 복수하고자 김구가 1896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츠치다(土田壤亮)를 맨 주먹으로 타살해 죽인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을 때 그리고 1911년 김구가 신민회(新民會)에 연루되어 다시 15년 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을 때였다.

 

곽낙원 여사가 중국 상해에서 두 손자를 데리고 황해도 안악으로 귀국한 것은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내다가 며느리가 병사한 뒤인 192512월이었다. 이 시기 곽 여사는 두 손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면서도 생활비를 절약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 쓰라고 김구에게 송금까지 했다. 그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막후 지도자가 김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더 한층 심해진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3월 다시 두 손자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갔다.

 

곽 여사는 이 시기 두 손자인 김인과 김신 형제에 대한 교육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한 교육은 일제와 싸울 독립운동청년들을 길러야 한다는 독립운동의 인재양성 차원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상해 정착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켰을 뿐만 아니라 장개석의 허락 하에 중국국민당군의 장교육성 사관학교인 중앙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한인 청년 20여명까지 돌보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통탄스럽게도 두 아들 중 장남인 김인은 일제 말기 중경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차남 김신 만이 살아남아서 미국에 보내져 공군조종사 교육을 받고 전후에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공군참모총장으로 전역한 후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1960년대에 다년간 대만 대사를 지내는 등 외교 분야에도 헌신했다.

 

한편, 곽 여사는 매번 끼니도 제때 때우지 못했을 정도로 궁핍하게 살면서도 틈틈이 생활비를 아껴서 모은 돈에다 임정에서 선사한 생신 축하금을 모아 단총 2정을 구입해 임정 지사들에게 독립운동에 쓰라고 선물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또 죽기 1년 전인 자신의 팔순 때에도 팔순 축하 잔치를 베풀어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그 돈으로 총보다는 붓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싸울 의지를 길러주기 위해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준 일화도 잊어선 안 될 귀중한 귀감이라고 할만하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정말 특기할 것은 곽 여사께서 임종이 가까이 옴을 느끼고선 양식을 아끼고 더 이상 가족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근 한 달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돌아가신 점이다. 이런 정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말 보통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신이다. 김구의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면 이러한 모친의 피와 훈육의 힘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 모친에 그 아들이란 말 외의 다른 설명은 모두 사족으로 느껴진다.

 

이제 곽낙원 여사도 타개했고, 그 아들 백범 김구 선생도 이승을 하직한지 어느덧 70년이 넘었다. 애국과 나라 찾는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다 간 두 모자의 정신이 잊혀져가고 점차 퇴색돼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곽낙원 여사는 물론, 여타 독립운동 지사들의 배우자들을 포함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공적에 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뤄져서 그들의 정신이 되새겨지고 공로가 현창되기를 소망한다. 다시 한 번 곽낙원 여사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맺는다. 

 

2020. 3. 5. 12:3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