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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겐 군림하려 들고 강자에겐 납작 엎드리는 일본인

雲靜, 仰天 2019. 7. 18. 11:29

약자에겐 군림하려 들고 강자에겐 납작 엎드리는 일본인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쯔비시(三菱) 중공업이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는 판결이행을 거부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피해자들에게는 머리 숙여 “사과”하고 응분의 보상까지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대관절, 동일한 기업이 저지른 동일한 범죄에 대해 왜 이렇게 다르게 대할까? 정부든, 기업이든 일본은 왜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광복 후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시종일관 빳빳한 고자세를 취할까?


국내에서 일본정부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이런 걸 보고도 문제를 만든 일본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정부가 문제를 만든 것처럼 얘기한다. 도대체 이들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그들은 일본의 이러한 뻔뻔스러움을 보고 화가 나지 않는가?

 

아베 총리가 내세우는 명분은 과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이 합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은 일본인이나 마찬가지여서 조선인 노역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때는 일본법에 따라 일본인도 강제 징용됐기 때문에 일본기업이 동원한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불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베 정권이 내세우는 논리이고, 기업들은 아베의 입장에 맞춰 대응한 것이다. 동경대 명예교수 와타 하루끼(和田春樹) 등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이 1910년의 일제 강점 및 한일 병합이 원천 무효라고 선언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설령, 백보 양보해서 일본정부의 주장대로 국가간 조약의 효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개인의 청구권까지 무시하고 말살할 수 없음은 국제법적 추세가 아닌가?

 

일본 측에서 내미는 이러한 법적 근거와 이유들은 모두 표피적인 명분일 뿐,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기본적인 인권과 인도주의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힘을 숭상하는 강자의 논리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나 결기 없이 대응했기 때문이다. 독도, 일본군성피해여성,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등과 관련해 국제법의 법리적 대응도 중요하지만, 일본인들의 심성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숭배”의식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속성을 쉽게 목도할 수 있고, 그를 표현한 말들도 널리 보편화 돼 있다. 대표적인 게 “강자에게는 감겨라”(長いものには巻かれろ)라는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큰 것은 짧은 것을 삼키고, 큰 것은 작은 것을 먹는다”(長きは短きをのみ, 大なるは小をくらふ), “큰 놈(강자 혹은 부자)에게는 잡아먹히고, 긴 놈에게는 말려 들어간다”(大なるものには呑るる, なかきものには卷かるる) 등도 있다.

 


사실, 강자에게는 빌붙어서 생존이나 안위, 혹은 이익을 도모하라는 의미를 지닌 “강자에게는 감겨라”와 유사한 표현은 표현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마도 세계 각국에 거의 없는 곳이 없을 것이다. 거시권력이든, 미시권력이든 권력이 매개된 인간사회에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영어에도 있고, 다른 나라 언어들에서도 보인다.

영어에 “윗사람과 싸울 수 없다”(It is no meddling with our betters), “돌진하기보다 굴복하는 것이 낫다”(Better bow than break)라는 속담이 그것이다. 캄보디아에는 “알을 돌에 부딪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있고, 세네갈에는 “알은 돌과는 씨름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도 있다. 이란에는 “왕이 정오에 ‘밤이다’라고 하면 별을 올려다보라”는 표현이 있다. 불가리아에는 “부자와 싸우지 말고, 뿔 있는 자를 누르지 말라”는 게 있고, 멀리 아프리카 서부의 소국 부르키나파소에는 “하천이 굽어지면 악어도 굽어지는 게 좋다”는 표현도 있다.

위 표현들의 공통성은 강자에게 약자가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상기 미국 속담 2개 중 하나를 빼고 다른 속담들은 모두 강자와 약자가 적대적 관계로 설정된 건 아니다. 예컨대 “왕이 정오에 ‘밤이다’라고 하면 별을 올려다보라”는 표현은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강자에게 감기는 건 아니다. 양자가 적대적인 것은 미국속담 “돌진하기보다 굴복하는 것이 낫다”는 것뿐이다. “윗사람과 싸울 수 없다”는 말은 의미의 방점이 장유의 서에 치중된 것이다. 또 “부자와 싸우지 말고, 뿔 있는 자를 누르지 말라” 중 “뿔 있는 자를 누르지 말라”는 것은 약자지만 “뿔 있는 자”, 즉 뱃심 있고 성깔 있는 자를 누르면 반발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돌진하기보다 굴복하는 것이 낫다”는 미국 속담을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은 공히 강자에게 복종한다는 표현의 정도가 일본의 그것 보다 심하지 않다. 위에서 본 일본의 속담은 표현이 아주 노골적으로 강자에게 붙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 말들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러한 현실을 추구한다는 지향성, 경향성을 나타낸 말이다.

 

언어에서 어떤 표현이 있다는 것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인식이 존재하고,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제로 행동도 그렇게 한다는 얘기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이 한 동안 “1억 총옥쇄” 구호와 “까미까제”(神風)특공대로 미군들이 진절머리를 낼 정도로 악착 같이 최대의 적국 미국에 저항하다가도 막상 일왕의 항복 선언 후 미군의 일본 본토 진주가 시작되자 갑자기 모든 일본인들이 손에 손에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미군을 환영한 사실이 좋은 예다. 어느 날, 한 날 한 시에 모든 꽃들이 지고 마는 벚꽃처럼 말이다.

 

이번 미쯔비시의 강제징용 건의 판결과 관련해서도 미쯔비시 경영진이 중국에게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3,000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한 사람당 10만 위앤씩을 손해배상금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회사를 대표해 자사의 끼무라 히카루(木村光) 상무를 미국 LA 소재 유대인 인권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로 보내 “우리는 전쟁포로를 가장 심하게 착취한 기업 중 하나”라면서 “미국 전쟁 포로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공언케 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과 미국이라는 강자에게 휘감긴 것이나 다름없다.

머리 숙여 끼무라 히까루(木村光) 상무.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일본은 철저하게 힘을 추구하는 역사의 길을 밟아온 민족이다. 과거 허명 뿐인 "천황"을 천상의 꼭대기에 두고 혼자서 실권을 행사한 "쇼군"을 정점으로 한 사무라이 계급과 그 사회구조가 수백 년 동안이나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야꾸자 등이 버젓이 활동하는 “칼의 문화”(현대의 야꾸자는 시대변화에 적응해 각종 총기를 사용), 즉 약육강식의 힘을 숭배하는 정신이 이를 대변한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으면 비굴하게 강자에게 붙어도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힘을 최고의 가치라고 숭상하는 자는 힘이 빠지면 바로 힘없이 주저앉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 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힘이 없어도 끝까지 결연히 대항하고, 할 말을 다하는 이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생결단의 대항, 할 말 다하는 것이 바로 일본인에게 내재돼 있는 가장 취약한 고리이자 우리에겐 가장 강력한 힘이다. 한국인과 비교해 대체로약자에겐 지배하거나 군림하려 들고, 강자에겐 비굴할 정도로 바싹 몸을 낮추는 게 돼 있는 것이 일본인이자 일본사회의 구조와 문화다. 마음속으론 승복하지 않지만,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의 힘 앞에서 대세에 순응해 하는 수 없이 손들고 자세를 낮추는데서 오는 자아불일치적인 스트레스는 모두 내면으로 욱여넣고 참고 사는 게 일본인의 주류다. 겉으로 보면 일본인들이 평화롭고 친절하게 살고 있는듯이 보여도 집단적으로 분노지수와 스트레스가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인 이유다

 

과연, 우리는 이번에도 어중간 하게 타협하거나 항복해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영원한 굴종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아니면, 기왕에 한 번은 “결연한 승부”를 거쳐 한일관계의 판을 다시 짜야 할 과정, 국운을 걸고 끝까지 싸워서 한국과 한국민을 깔보는 일본의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일본과 완전 대등하고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토대를 만들어 놓을 것인가?

 

2019. 7. 18. 09:57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에서
韓國訪問學者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