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권력을 능가한 모택동의 최후
1976년 6월 20일 이후부터 모택동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물론 그 전에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회복이 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증이 발작했다. 모택동은 정신은 멀쩡했으나 말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아.......아.....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새어나왔다.
혼수상태의 그를 살리기 위해 긴급히 중국 전역에서 가장 용하다는 16명의 의사들과 24명의 간호사들로 구성된 의료팀이 꾸려졌다. 의료팀의 책임자는 원래 모택동의 주치의 이수지(李綏之)였다. 그들은 두 달 이상 밤낮으로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8명의 간호사와 3명의 의사들이 모택동 곁에서 항상 대기했고, 다른 두 명의 의사들은 모니터를 통해 그의 심전도를 점검했다. 근무교대는 8시간마다 이루어졌다.
내가 다른 글에서도 한 차례 밝혔듯이 모택동은 괴벽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반인으로선 상상이 되지 않는 괴벽이었다. 몸이 아파도 의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치료 받기를 거부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모택동은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 최후의 일각이 되어서도 여전히 침을 맞으려고도, 약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세상을 뒤집는데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생로병사의 철리도 역행할 수 있다고 오만을 부린 꼴이다. 요행이 있을 수 있는 인간세상과 달리 철저하게 인과응보가 지배하는 물리적 세계에서는 반드시 과보를 받게 돼 있다. 生者必滅이다.
결국 그의 괴벽이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72년 2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기 몇 주 전, 불편했던 심신이 중병으로 악화됐다. 평생을 전장에서 생사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그는 체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강골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심신이 불안정해지고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 병을 얻게 됐다. 1971년 9월에 있었던 중공 권력의 제2인자 임표(林彪)의 쿠데타 음모사건이 그의 지병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당시 임표는 당 정치국 제1부주석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으로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돼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임표는 모택동이 총애했던 가장 친밀한 혁명투쟁 동지이자 전우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모택동을 배신하고 당 주석 자리를 빼앗으려고 자기 부인 엽군(葉群)과 공군사령관 오법헌(吳法憲) 등 몇 명의 부하 공모자들과 함께 모택동을 제거하려는 쿠데타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중간에 발각됐다. 임표는 이를 눈치 채고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소련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가던 중 외몽골의 우두얼칸(烏都爾干) 근처에서 연료부족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전원이 몰사했다.
모택동이 느꼈을 배신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주은래가 보고를 해도 한 동안은 믿지 않았고, 나중에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니 끝에 가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그가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건으로 불 같이 노하기도 하고 크게 낙담한 모택동은 마음이 엄청나게 많이 상했다. 심신이 매우 불안정해지면서 잠까지 이루지 못하는 날이 지속되면서 결국 모택동은 중병을 앓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의사들의 충고를 무시했고 치료 받기도 거부했다.
하지만 3주 후에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로 돼 있던 일정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면 역사적인 중미수교 회담에는 임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때서야 주치의에게 진료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벌써 그때는 이미 늦었다. 모택동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다. 주치의도 그가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오랜 흡연으로 인한 폐결핵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고, 울혈성 심장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런데다 나이는 적었나? 여든이 다 돼 가는 고령에다 몸이 너무나 쇠약해진 상태여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 온몸이 부어올라 입던 옷들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치수를 널려 새로 크게 맞춰 입어야만 했다. 게다가 기관지염, 폐렴, 폐기종에도 걸린 상태였다. 또 폐기관지 내벽도 탄력성을 잃은 데다 심한 기침으로 왼쪽 폐의 측면이 헐어 3개의 커다란 기흉(氣胸)이 생겼다.
호흡하기조차도 대단히 힘든 상태였다. 숨을 들이마실 수는 있었지만 쉽게 내뱉을 순 없었다. 의사는 왼쪽으로 눕게 해 체중을 이용해 왼쪽 기포를 누른 후 오른쪽의 건강한 폐로 호흡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이 가끔씩 산소마스크의 도움이 아니고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면 헨리 키신저가 1971년 비밀리에 밀사로 중국에 다녀갔을 때 가져다준 미제 호흡기로 긴급 상황을 넘기곤 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난 1974년이 되자 그는 치명적인 신경 퇴화증세까지 보였다. 이 병은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었다. 당시 서양에는 모택동이 파킨슨병에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루게릭병이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 병에 걸리면 대부분의 환자는 발병 이후 2년 이내에 죽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모택동의 증세 역시 전문의들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모택동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루게릭병만이 아니었다. 노쇠현상과 만성적인 폐결핵으로 약해진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누워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22년간 모택동의 주치의를 담당했다가 모택동 사망 후 나중에 미국으로 간 이수지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1976년에 들어와 모택동에게 심근경색증이 세 번이나 일어났다. 첫 번째는 5월 중순경 모택동이 당시 최고의 ‘문고리 권력’이었던 기요 비서 장옥봉(張玉鳳)과 말다툼을 벌이던 중에 일어났다. 그 뒤 6월 26일에도 일어났고, 세 번째 발생은 9월 2일이었다.
이해 7월말에 발생해 35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당산(唐山) 지역의 대지진도 모택동의 심신을 더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게다가 연초부터 주은래가 사망하더니 7월 초엔 주덕(朱德)도 뒤를 이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싫든 좋든 평생을 같이 지낸 혁명동지들의 잇따른 사망도 모택동에게는 초조감을 안겨준 보이지 않은 충격이었다.
며칠 전부터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섰다. 모택동은 숨을 거두기 불과 몇 시간 전, 즉 9월 8일 초저녁 때까지도 병상에서 당시 협상 중에 있던 중일수교 회담에 영향을 미칠 일본의 미끼 다께오(三木武夫)수상 관련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16명의 의사들은 하나 같이 감히 발설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모택동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내일 촌각을 다투던 상황이었다.
이날 밤 의무요원들이 곁에서 모택동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혈압과 맥박을 재고 소변이 나오도록 하고, 심장박동을 듣고, 산소를 불어넣는 등 쉬지 않고 움직였다. 7시 10분, 갑자기 모택동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당직 의사가 즉각 흉부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모택동이 모기만한 소리로 곁의 근무자에게 “내가 아주 참기 어렵다. 의사를 불러라”(我很難受, 叫醫生来)라고 말했다. 의사가 긴급히 산소관을 그의 코에 연결했다. 몇 분이 지나자 모는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때 의사는 모택동의 콧구멍 속에 약간 엉겨 붙은 물질이 있는 것을 보고 살짝 산소호흡기를 떼어내 솜으로 닦아낸 뒤 다시 산소호흡기를 갖다 댔더니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는 다시 극도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바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응급처치에 이은 응급처치가 계속됐다. 무려 4시간이나 계속된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혼수상태에서 더 이상 깨어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주치의는 모택동의 오른 손을 잡으면서 “주석님 괜찮습니다. 우리가 주석님을 도울 것입니다”라고 위로했다. 잠시 모택동의 눈에 흡족해하는 듯한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분홍빛 반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곤 그의 오른손이 주치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심전도에는 평평한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0시 10분이었다. 향년 83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절대 권력자 모택동의 시대, 그 한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불같은 열정과 타의 추종을 불허한 성격과 카리스마로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 일세를 풍미한 현대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그렇게 최후를 마쳤다.
모택동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없었냐고? 과거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 중 대개는 마지막 유언을 말이나 서한으로 남겼다.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모든 동지들에게 필히 자신이 지은 ‘建國方略’,‘建國大綱’, ‘三民主義’ 및 ‘第一次全國代表大會宣言’에 의거 계속 노력해 관철시키고, 중국이 외국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하루 빨리 철폐하도록 할 것을 당부한 손문(孫文)의 유촉 서한 같은 거 말이다. 또 공산주의 종주국의 초대 지도자 레닌도 죽음 전에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에게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원들의 면면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그 중 스탈린에게는 총서기직의 권력이 절대로 그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유촉(Завещание Ленина, 정식명칭은 "대표대회에 전하는 서한", 즉 "Письмо к Съезду")을 남겼다.
그런데 모택동은 유촉 같은 건 없었다. 손문이나 레닌처럼 당내 유력한 후계자들에게 당부한 뭔가 묵직한 유언을 남길 것도 같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허망할 정도였다. 사망 약 5시간 전에 “내가 진짜 참기 어렵다. 의사를 불러라”라고 한 말이 결국 모택동이 남긴 최후의 한 마디였다.
현대판 진시황, 아니 진시황을 능가한다고 스스로 말한 20세기 최대의 인물 모택동의 사망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중소분열의 간극이 벌어진 만큼 중미관계를 진전시킨 기폭제 작용이 있었는가 하면, 냉전 해소의 여명이라는 빛도 선사했다.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별도의 장이 필요하니 일단 접어두자. 여기에선 중국 국내정치 상황에만 주목해 우선 그는 참으로 무책임한 지도자였고, 혁명지상주의의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실용주의가 대두될 수 있는 최대의 걸림돌이 제거됐다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모택동은 전혀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권력의 이양이 되도록 국가권력을 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국원들 간에 싸움을 붙여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어 자기 권력만의 안정과 공고화를 꾀했을 뿐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모택동의 위독한 상황은 국가 초특급 비밀이었다. 모든 것이 극비로 부쳐지고 진행된 것이었다. 모택동의 사망은 시간문제였다. 절대권력이 사라지고 나면 정치국원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등의 4인방(강청과 張春橋, 姚文元, 王洪文)은 자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속으로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각자 주검이나 다를 바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모택동을 둘러싸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다.
모택동이 위독한 상태가 되자 이 사실을 아는 중공 정치국원들 간에 벌써 모택동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부터 권력투쟁은 시동이 걸렸고, 모택동 시신이 식기도 전에 격화되었다. 4인방, 20여년 이상 모택동의 경호를 책임져온 왕동흥(汪東興), 모택동으로부터 친히 후계자로 지목된 화국봉(華國鋒), 엽검영(葉劍英)을 중심으로 한 광동출신의 군부세력, 막 복권된 등소평(鄧小平) 등등 남겨진 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의 향방은? 촉수를 곤두세우고 냉엄한 각자도생과 치열한 합종연횡이 시작됐다.
2018. 12. 12. 19:40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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