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의 죽음과 정치권의 빈곤한 역사의식
서상문(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 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신군부의 후배들에게 밀린 한 때를 제외하곤 평생을 부귀영달을 누려왔으면서도 정치를 ‘虛業’이라고 한 인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그저께 23일 9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향년 92세라면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영생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줬을 뿐이다.
정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했길래 김종필은 정치를 ‘虛業’이라고 했을까? 속고 속이는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 대한 염증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는 자신을 雲庭이라고 호를 붙인 것과 맞아떨어지는데, 약간 허무감이 엿보인 그의 성향이 드러난다.
이승에 남은 정치인이 저승으로 간 동시대 선배 정치인을 어찌 평가하는가를 보면 그 나라 정치계의 역사의식을 알 수 있다. 현 한국정치계는 전반적으로 雲庭을 바라보는 긍정의 눈빛과 존숭의 의식에 쌓여 있다. ‘人死有名, 虎死留皮’라는 말이 있듯이 사후 자신에 대한 평가가 좋기를 바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의 역사 인물에 속하는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신중하고, 정당하고, 理에 들어맞도록 균형적이어야 한다.
김종필은 정치인이었다. 그것도 존재감 없는 거수기 정치인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영욕을 겪으면서도 대통령 한 자리만 빼고 이 나라 최고위직을 두루 거친 정치인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 지시 하나로 수많은 국민들이 싫든 좋든 지대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장삼이사, 필부필부를 두고 하는 저잣거리의 말과 달라야 한다.
그에 대한 공적 평가도 개인적인, 사적인 평가가 좋고 나쁘고를 넘어서야 한다. 평가가 어떤가에 따라 당사자의 영욕이 결정됨은 물론, 남겨진 현실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망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함부로 개인적인 호오, 친소관계, 망자의 인격이나 재능만을 보고 평가해선 안 된다. 선입견이 섞여 전면적이지 않아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雲庭은 생과 사의 간극 차이로 이제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됐다. 물론 “비교적” 온당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려면 세월이 쌓여야 할 것이다. 첨예한 이익이 결부돼 있는 세속에서의 이해상충이 소실될 만큼 분진이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 가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섣부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망 뒤 그를 얘기하는 후배 정치인들의 평가는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나 역시 섣부른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의 생전을 보고자 한다. 역사가의 걸망은 선반 위에 올려놓더라도 “구름에 가린 뜰”이 아니라 구름이 걷힌 현재 정치권의 역사의식을 바로 보자는 것이다.
김종필은 현 문재인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 깜이 안 된다고 인격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당 정치인들은 그가 한국의 정치발전에 공이 크다면서 찬사 일색이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했다. 그가 속했던 야당 정치인들도 극찬 일변도다.
그런데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매겨도 김종필은 공이 과를 덮을 수 없다. 공이라고 해봐야 1990년 ‘구국의 결단’이라는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만들었고, 1997년에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 연합’으로 정권교체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정치권이기 때문에 좋게 봐준 것이다. 이 평가마저도 온당치 못한 측면이 있다.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의 결과 극보수 한나라당을 탄생시켜 진작부터 해결했어야 할 역사적 평가와 과거의 각종 적폐청산이 미뤄지고 지체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을 공이라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작지 않은 과에 해당된다.
얼마 되지 않는 공에 비해 그의 과는 태산 같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가 일본과 수교를 맺는 과정에서 1949년 9월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청구했던 식민지 피해배상금 73억 달러는 온데 간 데 없이 겨우 유무상 차관 총 6억 달러를 받는 것으로 끝냈다.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대일전쟁배상 청구서상의 73억 달러는 일본정부가 갖고 있던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각종 미지급 임금자료에 근거해서 일본정부가 이승만 정부에 제시했던 금액과 일치한다. 즉 일본에게서 정당하게 받을 수 있던 대일전쟁배상 청구서상의 73억 달러를 형편없이 축소해 겨우 6억 달러로 매듭을 지었던 것이다. 이는 아무리 좋게 봐도 김종필의 지울 수 없는 과오다. 김종필의 과 중에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뭐니뭐니해도 ‘5.16군사쿠데타’와 유신의 주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정치와 공작정치를 주도한 것이다.
이번 김종필 조문 및 훈장 소요사태에서 소수의 일부를 제외하고 정치권 전체가 역사의식이 바닥임을 확연히 보여줬다. 역사평가의 출발부터가 잘못됐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협애하게 당이나 정치진영의 이익 및 호오에서 행하는 게 아니라 민족사적, 인류사적 각도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런 인물을 정치권 전체가 떠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다수 국민의 의사와 배치되고 그와 같은 한 통속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의 결여를 입증할 뿐이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는 정치인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국가의 대의기관인 국회의원이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를 정치인들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특히 과거 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문희상은 또 한 번 그의 천박하다 못해 코미디 같은 역사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그저께 6월 23일, 김종필 빈소를 찾아 “DJP연합을 완성해서... 민주화 과정의 초석을 닦았다”고 했다. 표를 의식할 선수는 지났을 위치임에도 말이다. 민주헌정을 파괴한 김종필을 가리켜 “민주화 초석”을 닦았다고 하다니 너무나 가벼운 발언이다.
문희상은 과거에도 그런 언행을 한 것으로 보아 이번 발언이 단순히 일회성 발언이 아니라 그의 역사인식으로 보인다. 2013년 4월 1일 당시 야당 대표로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문희상이 종편 채널 JTBC에 출연해 박근혜에 대해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지성적이기도 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다. 근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다. 또 예쁘시고. 박 대통령,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쁘다. 동료의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자질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동일한 사람을 보는 눈이 어찌 이렇게도 다를까? 내 눈엔 대선 전부터 언론에 노출된 박근혜의 언행을 보고선 그의 지적 수순은 거의 초등학교 4~6학년 수준에서 성장이 멈춘 듯 느껴졌다. ‘세월호침몰’ 사건과 ‘메르스 사태’ 발생시에 노출된 미숙한 대처, 각종 기자회견에서 어리버리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선 정치는커녕 혼자선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정치문제를 떠나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한일 간의 민감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당사자들에겐 한 마디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해버리는 무지함과 잔인함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느끼는 공감능력이 제로에 가깝다는 점을 알게 해줬지 않는가? 타인의 마음 상태나 처지에 대한 이해력이 바닥 수준에다 자신 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적인 인간으로 보였다. 게다가 무식한 주제에 고집은 부모도 말릴 수 없고, 5,000만 명의 전국민이 반대해도 꺾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김종필도 살아생전에 박근혜는 자기 부모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문희상은 이러한 사실들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해서 그랬을까? 못 봐도 그렇지 문희상은 조선시대 내시(內侍)처럼 왕에게 하는 아부성 발언으로 박근혜를 극찬했다. 뭘 보고 박근혜를 그렇게 극찬했을까? 군사쿠데타의 우두머리인 박정희가 집권시에 어떤 정치를 펼쳤는지를 조금이라도 알면, 그 딸도 어떤 정신성을 가진 인물인지 안다면 그에 대해 그렇게까지 극찬할 수 있을까? 그 근거가 몹시 궁금하다. 정말로 그렇게 판단이 돼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문희상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박근혜의 그런 치부를 잘 알고도 그렇게 평가했다면 문희상은 희대의 아첨꾼이다.
문희상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 사안을 보는 판단력, 시대를 내다보는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 눈엔 모두 낙제점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당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람을 평가하는 눈은 오히려 수구적이고 정치희화적이다. 박근혜를 “지성, 우아, 기품, 예쁘시고, 더할 나위 없이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자질”을 가졌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국회는 이러한 문희상을 6선 의원이라고 해서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문 의장의 취임을 환영”한다면서 “문 의장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평생 책무를 다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평가했다. 이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는가? 이 발언도 동업자들끼리 돌아가면서 서로 치켜세워주는 자화자찬이다. 실상을 아시는 "분"에겐 가소롭기 짝이 없는 호도요, 모르는 "자"에겐 사기성 발언일 뿐이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짓들이다.
역사가든, 정치인이든 그 누구에게든 역사의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는 자연과 함께 인간정신의 현상들이 세계를 파악함에 활용하는 가장 넓은 개념이다. 역사는 인류의 부단한 전진을 견인하는 운동이다. 과거엔 식민지, 분단상황에서 실천으로서의 역사가 있었기에 식민지 역사를 극복할 수 있지 않았는가?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시간의 집적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형태로 오늘 여기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내재돼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조건 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짜는데 동력으로 작동된다. 그것은 과거에 죽은지 오래된 사화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활화산이다. 미래엔 과연 역사는 무엇을 향해, 어떤 목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즉 그것은 인륜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들이 결합되는 힘들의 계속적인 전개이자 그 완성을 향한 전진이다.
근대 독일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 1908~1884)이 내린 정의에 의하면, 보편적 자아, 즉 인류의 자아가 역사의 주체이다. 역사는 인류의 자기 인식이며, 인류의 자기의식이며 인류의 양심이다. 역사의 주체는 개인이라는 특수성을 넘어 개인의 총합으로서의 보편성이다.
김종필에 대한 현 정치권의 평가든, 박근혜에 대한 문희상의 평가든 그기에 어디 인륜적, 생태적 힘들의 계속적인 전개이자 인륜과 생태적 완성을 향한 전진이라는 관점이라든가 혹은 인류의 자기인식, 인류의 자기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한 의식이 엿보이던가? 없다! 터럭만큼도 없다. 그냥 같이 밥벌이하는 정치권의 동료로서 서로가 서로를 핥아줄 뿐이다.
이러한 普遍愛的, 共愛的 역사의식 없이 정치를 하니, 그런 정치인들을 뽑은 국민들이 받게 되는 과보는 정직하다. 정치는 하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가 하나의 시각과 평가를 거부하는 이유다. 역사에서 史實의 통일을 강제하는 건 파쇼나 독재자들의 메뉴일 뿐, 과거사의 다양한 면을 보는 까닭도 집합으로서의 인간의 삶이란 복잡다기한 것이고 모노크롬처럼 단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인물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는 것은 역사가의 역할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민주화가 전제돼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역사의식은 역사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민도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더욱 더 흔들리지 않는 역사의식을 갖춰야 한다.
정치인은 무엇으로 정치해야 하는가? 현실의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선 과거를 양심적으로 보고,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미래에의 통찰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오늘 우리의 삶을 조건지우고 있는 역사 動因 가운데 하나인 기득권층의 역사적 책임 방기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역사, 역사적 책임을 지우게 하는데 실패한 역사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압도적인 역사동인이 돼 있어 모든 악과 비정의의 근원임과 동시에 역으로 역사의 순류를 가로 막는 비정상적인 역사동인이어서 이 문제를 천착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새로운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아직도 친일파들이 안장돼 있는 국립현충원 하나 제대로 재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만 봐도 우리 정치권이 얼마만큼 역사의식이 부재한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이러니 해방이 된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묘지에 누워 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근린공원 등에 방치해 놓은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지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준 열사와 손병희, 신익희, 김창숙, 이시영, 여운형 선생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는 북한산 자락에 흩어져 있다. 박은식, 양기탁, 이상룡 등이 안장된 서울현충원의 ‘임정 묘역’과 권동진, 권병덕을 비롯해 남자현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애국지사 묘역’은 이응준, 신태영 등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묘역’ 아래에 조성돼 있어 항일 운동가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발아래 잠들어 있는 것이다.
雲庭이 자연인다운 면모가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그래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선 수구초심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는 살아선 몰라도 저승에서는 눕힐 곳을 알고 누웠다는 것이다. 자신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던 독립운동 선열들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2018. 6. 2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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