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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 현실의 한 단면 ② : '학생인권조례'의 불합리성과 그 대안

雲靜, 仰天 2018. 6. 3. 14:33

한국교육 현실의 한 단면 ② : ‘학생인권조례’의 불합리성과 그 대안

 

욕설, 폭력, 억압, 의도적 편애 등이 일상화돼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내면서 집단적으로 세뇌된 관행을 바로 잡아 학생도 인간으로서 인격체로 대하자는 근본 취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200프로 찬성한다. 다만 우리사회가 자주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기존의 어떤 가치나 제도를 부정하면 그 모든 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기존의 그것을 모두 악으로 단정해버리는 성급함과 단세포적인 폐습이 학생인권조례에 반영된 게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수순은 물론, 내용 면에서도 결함이 적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먼저 학생인권조례 제정 전에 문제 있는 교사에 대해 제재를 할 수 있는 의식의 전환, 제도와 그 운용의 철저성을 점검해 미비점을 보완하고 편의주의, 정실주의를 없앨 수 있는 정비를 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불완전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보다는 교사와 학생을 같이 동시에 포괄하는 내용을 담은 가칭 ‘대한민국교육대장전’ 류의 조례를 만들어 그 안에 학생과 교사의 권리, 의무, 책임을 동시에 규정하고 교사와 학생의 책임과 의무가 상충되지 않도록 치밀하게 규정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현존 각 도 교육청에서 자율적으로 제정 및 시행해오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를 보면 학생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선 거의 규정된 게 없고 대부분 권리들만 열거돼 있다. 그 권리도 학생신분으로선 담지하기에 버겁거나 현실 여건상 불가능한 조항들이다. 예를 들면, 경기도 교육청인가 서울시 교육청인가의 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들도 교육정책과 학교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이는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취지는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을 교육주체로 삼아야 한다는 점만 생각하다보니 현행 학생인권조례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학생이 교육정책에 참여하겠다고 해서 다른 문제가 생기면 대처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있을 것에 대해선 생각을 하지 못한 느낌이 든다.

가령 교육청과 학교의 교육정책이라고 했는데, 학생은 어떤 교육정책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이 없어 상당히 모호하다. 학생들이 교육청에 찾아가 어떤 교육정책을 따지고 들거나 참여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대할까?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서 규정을 정하면 불합리하거나 애매모호해서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최소화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선 교사들의 얘기인즉슨 요즘 어떤 문제학생이 문제를 일으키면 꾸지람이나 주의를 주는 것, 즉 지도를 하려고 하는 교사들이 나서길 꺼려한다고 한다. 그랬다가 문제의 그 학생이나 그 학부모에게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두려워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수 년 전부터는 학부형이 교사를 경찰에 고소했다는 ‘사건’들을 언론보도에서 자주 접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는 교사가 학생에 대해 있어선 안 될 성추행 및 성폭행, 폭력 등이 문제가 된 사건도 더러 있다. 이런 사건에 대한 학부형의 고소는 지극히 당연하고, 사건을 일으킨 교사에 대해서도 엄벌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한 고소 외에도 교사가 학생에 대해 행하는 정당한 교육, 훈육, 주의에 대해서까지 “누가 감이 귀한 내 자식을 건드려?”라는 감정으로 경찰에 고발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이것은 명백히 교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학생인권조례의 일방성과 불합리성 그리고 그로 인한 교사의 교권이 무너지는 교육의 황량화에 대한 지적은 일일이 사례를 들기 보다는 학생인권조례가 교육의 정상화에 역행하는 현실에 대해 이 조례가 제정되지 않은 지방 도시의 어떤 현직 교사가 토로한 내용으로 대신하는 게 낫겠다. 이 교사가 토로한 고충을 아래에 옮겨 놨다.

 

“학생인권조례를 도입하게 되면, 학생들의 성관계나 임신 출산에 대해서도 지도를 하지 못하고(제5조 차별받지 않을 권리), 학생들이 문신을 해도 지도하지 못하며(제12조 개성을 실현할 권리), 담배나 술을 소지해도 가방검사나 압수를 할 수 없게 되고(제13조 사생활의 자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을 깨우지도 못합니다.(제10조 휴식권). 또한 수업시간에 심하게 떠들어서 다른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밖에 나가 서 있으라고 해도 자신에게 학습권이 있다며 버티게 됩니다.(제8조 학습에 관한 권리). 학교폭력의 원흉인 일진회와 불법사상 동아리가 생겨도 지도를 할 수 없게 되며(제13조 사생활의 자유-원하는 인간관계 형성 권리), 이에 더 나아가 헌법 제36조 제1항의 ‘양성평등 조항’에 위배되는 ‘성적지향(동성애)’의 조항(제5조 차별받지 않을 권리) 때문에 동성애에 대해서도 올바른 지도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성애를 옹호하는 교육을 받거나 실시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수 있다고 교육하는 것은 괜찮고, 남성간의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고 교육하는 것은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지난 2017년 4월에는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고 있는 서울의 한 중학교 선생님이 동성애를 하면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고 교육을 했다가 동성애(성적지향)에 대한 차별과 비판을 했다고 하여 학생인권옹호관과 학생인권센터로부터 조사를 받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위 내용은 내 주변의 교사들로부터도 비슷한 고충을 듣고 있어 사실로 봐도 될 듯하다. 특히 이른바 ‘문제학생’에 대한 일선 학교 측의 교육은 속수무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사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으면 보통 “솔직히 세게 혼내는 것도 쉽지 않다. 야단맞은 학생이 교육청이나 경찰에 ‘교사 때문에 힘들다’고 신고하면 아동학대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세상 아니냐. 결국 상당수 교사가 문제학생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라는 답이 나오는데, 이 답변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같은 위 지적을 접하면 사실상 학생인권조례는 한 마디로 모순되고 불합리한데다 효율성이 의심되는 내용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학생의 인권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권리만 예거해주게 돼 결국 학생 자신의 학습권만 주장하고 자신의 부주의로 타인이 입게 되는 학습권의 방해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학생조례에 자기 자신을 넘어선 공동체 의식과 유지라는 점에서 타인의 학습권이 방해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선 설명이 없는 것이다. 한 예로, 남들 앞에서 문신을 드러내는 것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경범죄에 속하는 범법에 해당되지만 문신을 한 학생을 문제시하면 학생인권조례의 개성의 자유라는 조항에 근거해 곧 해당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학생의 책임과 의무는 없고 권리 일색인 학생인권조례만 있는 교육체제는 하루 빨리 개선돼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학생인권조례뿐만 아니라 교사인권조례나 혹은 교사교권조례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교육은 학생만이 교육의 주체가 아니고 교사도 엄연한 교육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간엔 학생인권조례는 그대로 존치시키고 교사의 교권조례를 제정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주장도 있어 보인다. 그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발로 비칠 수 있는 ‘교사교권조례’를 별도로 만들기 보다는 ‘대한민국교육대장전’이란 것을 만들어 기존 학생인권조례와 교권조례를 한 곳에다 넣어 두 조례를 충돌 없이 회통, 원융이 되도록 새로 제정하기를 권하고 싶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한민국교육대장전’엔 국가 차원의 교육이념과 교육철학의 제시는 물론이고, 교육과 관련해 국가의 역할과 책임,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책임 및 의무와 권리를 조항들 간에 상충 없이 규정하고 제시하는 건 기본이다. 현재로선 이것이 최선이다. 만일 그것이 여건과 시간상 당장은 어렵다면 차선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수정해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을 다 같이 묶어서 가칭 ‘초중고등학교 師弟조례’로 통합한 조례를 제정하길 권유한다.

 

위 결론 이외에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면, 학생인권조례 문제의 개선과 관련해 18세기 프랑스의 교육학자이자 계몽철학자인 장 자끄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한 얘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거치는 아동기는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동들에게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도덕과 지식을 가르쳐 보았자 소용없다. 그때는 악덕으로부터 그리고 오류로부터 아동을 보호하면서 이성이 출현하는 토대가 되는 감성이 충분히 증장되도록 정서적 발달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가 주장한 교육철학적 입장이다.

또한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루소의 경고도 과중한 학습노동으로 아동을 혹사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발달이 미흡한 학생들만의 권리만 보호해주는 현재의 우리 교육의 현실에 여전히 큰 교훈을 주고 있다.

 

2018. 6. 3. 14: 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