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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인심이 내 친구 마음만 같으면 좋으련만...

雲靜, 仰天 2018. 5. 25. 18:14

세상인심이 내 친구 마음만 같으면 좋으련만...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을 2년이나 했지만, 고등학교도 달랐고, 대학도 달랐고, 나중엔 인생의 길도 달랐기에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작년 늦가을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가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근 45년 만의 해후였다. 그의 동생을 통해 다시 만나고 보니 서로가 너무나 반가웠다. 그 친구는 멀리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우리는 그 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누면서 오후 한나절을 같이 뜻 깊게 보냈다. 그는 구세군 사관으로 오랫동안 일해 왔다고 한다. 지금은 대전교구로 옮겨가 있다.

 

 

구세군에서 사관으로 봉직하고 있는 친구 김영문 담임사관

 

그런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타고난 천성은 속일 수 없는 법! 친구는 누가 봐도 호남형에다 바르고 깔끔하게 인생을 살아온 성직자로 보인다. 첫눈에 봐도 그는 정의감이 있고, 인정과 의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내가 알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가끔씩 카톡으로 간단한 글과 안부를 묻고 지낸다. 그가 오늘 내게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왔다.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지난 수요일 저녁예배가 끝나갈 무렵, 60대 후반의 취객이 찾아와서 광고시간에 박수로 환영을 해주었다. 예배를 마치고 개인 기도를 해야 하는데 상담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막걸리 냄새와 찌든 냄새가 악취를 풍겼지만 교회에 찾아온 손님이라 정중히 대해주었다. 차비가 없고 배고파서 돈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을 보아 노숙자는 아닌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이 그리워 찾아온 영혼이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하소연을 한다. 교인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행색을 보니까 무시할 수밖에 없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짬뽕된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소란을 피우니 어느 누가 반기겠는가? 100이면 100사람 다 싫어한다. 이런 사람을 어느 누가 어느 단체에서 좋게 받아 주겠는가? 부랑아 수용소에서는 잡아가겠지만...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될 사람이다. 아무리 말을 해도 동문서답으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일단 인적사항을 메모하고 술이 깨면 맑은 정신으로 교회에 찾아오라고 권면하여 보냈다.

 

좋은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고독사가 많다고 한다. 취객을 통하여 '제발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하는 방황하는 영혼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가 왜 이 땅을 살아가고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이렇게 내 말 좀 들어달라고 하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닌가? 아직도 나만의 어려움, 나만의 축복만을 위한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는 이 땅의 많은 종교인들,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오늘날 현대교인들이 이들의 호소하는 영적인 고독을 알아줄 마음이 있을까?”

 

 2018. 05. 25

대전에서

  

짧은 글이지만 읽고 나니 과연 성직자다운 마음씀씀이가 돋보이지 않는가? 물론 그는 꼭 성직자라서가 그렇게 마음을 쓴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이 그가 타고난 천성이다. 내가 그의 본바탕과 사람 됨됨이를 잘 안다. 중학교 시절 2년이나 같은 반에서 같이 지냈는데, 경상도 말로 "얍삽한" 친구가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그건 성직자이기 전에 자연스런 천성의 발로일 뿐이다. 정의감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마주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딱한 마음에 뭐라도 하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정의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양사회에서 신사가 되는 데는 정의감이 필수인 이유가 그래서다.

 

내 친구는 정말 그런 친구다. 나도 평소 친구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속으로 친구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일면서 기분 좋게 아래와 같이 몇 마디 청탁 아닌 '청탁'을 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역할을 끝까지 잘 해주라고 말이다.

 

“그런 호소와 하소연을 들어주는 곳이 이젠 거의 없어질 정도로 인심이 각박해져서, 결국 그 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마는 게 우리 한국사회네. 가난과 고독, 질병과 무시 등등의 원인으로 자살하는 이는 넘쳐나고,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이 결여돼 벌어지는 유사한 예가 적지 않다. 몇 년 전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을 불 질러 없애버린 이가 있는데, 자신이 당한 억울한 사정을 공무원들을 찾아가 여러 차례 호소해도 상대편 편만 들고 자신의 얘기는 들어주지 않아서 관심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의로 남대문에 방화를 했다는구먼. 방화를 잘했다고 하는 건 아니고, 우리사회가 정의와 공정성을 잃어버려 이 같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현실임을 한 예로 든 거네.

   그들의 이면엔 가난, 질병, 고독, 무시당함, 정의실종, 불평등 등 많은 원인들이 얽혀 있다고 본다. 그걸 조금이라도 들어줄 수 있는 건 우선 국가여야 하는데 그런 제도와 인식이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고, 그 다음으로 일반사회와 종교계이거늘 그쪽도 야박해진지 오래라네. 친구가 지적한 대로 이 땅에는 불교든, 기독교든 나만의 어려움, 나만의 축복만을 위한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는 종교인들이 넘쳐나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정치권에서 최저 임금을 올리고 정부가 복지예산을 늘리고 재벌기업의 독과점, 불공정 등을 시정해 사회를 좀 더 평등하게 만들어야 조금이라도 치유가 되거늘 상황은 아무리 둘러봐도 녹록치 않은 일일세.

   사회적 약자에게 귀 기울여 주는 이는 일반인이든, 종교계에서든 요즘은 내 친구 김영문처럼 아주 소수뿐인 거 같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이 귀기울여주고, 더 많이 인내해주기 바란다. 자랑스러운 성직자답다! 고맙다~ 내가 포기하기 전엔 성직자로서의 포용과 베품과 귀 기울이는 자세를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 데이~” 

 

친구에게서 이런 답이 왔다. “경건한 지성인 친구여 고마우이^^”

 

그래 나도 고맙네. 친구야, 오늘 하루도 잘 지내래이~ 새로운 각오가 있어 태권도복을 몇십 년 만에 다시 꺼내들었다는 소릴 들었는데, 무리하지는 말고야!

 

2018. 5. 25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