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원장과 최우수상

雲靜, 仰天 2018. 5. 15. 16:59

원장과 최우수상

 
방금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를 걸어가는데 우연히 두 종류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어떤 미술학원의 미술대회 입상 내역을 알리는 것이다. 그 포스터에는 우수상, 최우수상, 최고상, 대상 순으로 소개돼 있다.
 
다른 하나는 어떤 병원을 소개하는 광고포스터다. 아~글쎄 병원장이 4명이나 되고 대표원장이 1명이 있는 게 아닌가! 병원 개원에 5명이 투자를 같이 한 것일 게다. 예전부터 우리사회엔 오랫동안 대표이사가 있었고 그 직함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으니 대표원장이라는 말이 생겨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병원장은 병원의 장이다. 그런데 요즘은 원장을 해당 병원의 최고 책임자로 보다간 착오가 일어날 수 있겠다 싶다. 원장 위에 그 보다 더 높은 대표 원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장 밑의 직급에 있는 직원들은 저 많은 원장들에게 각기 똑 같이 원장으로 대하려면 꽤나 신경이 쓰이고 번삽해질 터다.
 

원장이 여럿 있고 대표원장을 둔 이런 사업형태가 많아짐에 따라 위와 같은 광고도 일반화 되어 가는 추세다. (위 사진은 특정 병원을 홍보하기 위해 올린 것은 아니다.)

 
최우수상은 음악, 미술, 영화 등 예능이나 학술 분야의 경연대회에서 가장 성적이 뛰어난 자에게 수여하는 상이었다. 나도 학창시절엔 최우수상을 십 여 차례 받은 바 있다. 대회 마다 달라서 어떤 대회 땐 최고상이라는 명목의 상도 받았다. 그 위에는 더 높은 상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선 최우수상이 가장 좋은 상으로 알았다간 역시 착오를 일으킬 수 있게 된 듯하다. 최우수상 위에 최고상이 있고 예능분야엔 대체로 최고상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대상도 있다. 그러니 최우수상 밑의 상을 받는 사람들은 크게 기뻐할 것도 없고 기뻐할 맛도 나지 않겠다. 도대체 최우수, 최고, 大의 차이가 뭘까? 어이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상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만든 셈이다.
 
영화판이나 드라마 제작 분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한다. 이 분야에는 원래 감독이 한 사람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카메라맨을 카메라감독으로 부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 직함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대접받고 싶어 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직업에 긍지를 가지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자족감 상실이 불러온 현상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는 참으로 “최고”와 “최상”을 너무 좋아하는 민족이 아닌가 싶다. 지나친 출세주의, 입신주의와 우리사회에 정착되지 못한 평등의식이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지위 상승 의식은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있는 너무나 오래된 병폐 중의 하나다.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오로지 출세하거나 최고와 최상을 위해 달려온 우리다. 그래서 경제 규모는 커지고 민주주의 제도는 어느 정도 착근이 된 듯해도 그에 비례해 평등의식은 그다지 진전된 게 없어 보인다.
 
19세기 유럽의 사상사와 노동운동사에서 수평주의와 평등주의가 사조의 한 유파로 존재한 적이 있고, 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창한 유럽사회주의운동으로 수렴돼 결국 오늘날 북구의 평등적 복지가 주안점이 된 사회주의국가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되지 않았던가?
 
후진적이고 독재적인 나라에 상이 넘쳐나고 상이 많을수록 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듯이 직위에도 장이 많을수록 장의 권위가 약화된다.
 
최고가 아니라도, 최상의 직급이 아니라도 직분 그 자체에 자긍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 그렇게 되도록 평등의식과 관념이 사회저변에 널리 깔려 있으면 우열, 격차, 경쟁, 비교 등의 관념에 내포돼 있는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 중에 후자가 왜소해지지 않을까 싶다.
 
평균주의가 더 널리 퍼지면 사회의 안정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전철 안에서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에 몇 마디 사족을 달아봤다.
 
2018. 5. 15. 16:56
구파발 발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