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아시아사

베트남전쟁 종전, 조지 워싱턴, 쿠마라지바의 대품반야경 번역

雲靜, 仰天 2018. 4. 30. 10:34

베트남전쟁 종전, 조지 워싱턴, 쿠마라지바의 대품반야경 번역

 

1975년 4월 30일 정오가 막 지난 12시 30분,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기가 게양됐다. 30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의 종언을 고한 순간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시내로 들어온 월맹군 전차가 베트남 대통령 관저 점령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날은 사이공이 함락(Fall of Saigon)된 날로 역사서에 기록됐다.

 

이보다 약 200년 전인 1789년 4월 30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이 종결된 것도 역사적으로 큰 파장을 길게 드리웠지만, 워싱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워싱턴에 대해선 별도로 소개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1793년 2월 1일 프랑스가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에게 동시에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이른바 '프랑스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국의 중립 선언과 동시에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미국이 20세기가 될 때까지 세계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던 이른바 고립주의 외교정책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3년 뒤에 3선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으나 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대통령직을 끝끝내 사양하였다. 조지 워싱턴의 고사는 그 뒤 미국이 민주주의의의 전통을 확고히 다지게 된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상의 4월 30일 오늘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전쟁의 종전과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치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역사적 영향이나 의미에 있어 상기 두 역사적 사실에 견주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인 408년 4월 30일 오늘, ‘쿠마라지바’라고 불린 학승이 ‘대품반야경’ 번역을 마친 사실이다.

 

대품반야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근본이 되는 경이다. 불교신도들이 자주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짧은 경으로서 바로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만약 쿠마라지바가 당시 인도에서 반야경을 중국에 들여와 한역이긴 하지만 번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한국 불교도들이 반야심경을 독송할 수 있을까?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답은 조금 회의적이다. 역사상 한국인들 중엔 인도에까지 가서 불경을 가져오려고 노력한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위시한 수많은 한문경전은 기나긴 세월 동안 중국 학승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산스크리트나 팔리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결정체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만든 이른바 한문경전을 수백 년 동안 의심 없이 독송하는 것에만 만족했지 우리가 직접 석가모니 열반 후에 결집된 원시불교의 생생한 목소리를 인도에서 가져와 우리말로 옮겨보려고 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또 그런 생각을 가졌던 학승이나 있었는지도 의문시된다.

 

유교나 도교 등 중국인의 사유체계와 습합된, 혹은 그것을 거쳐 재해석됨에 따라 중국화 된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그대로 부처님의 원래 말씀이라고 믿고 마는 수백 년 동안의 매너리즘이 깨어지지 않고 있는 게 한문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문경전이 한글로 역간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지 않는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쿠마라지바가 인도의 불경을 중국어로 옮긴 역경은 대단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의 역경이 토대가 돼 중국 땅에서 대승불교가 꽃피게 되고 여러 가지 사상의 보고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불교가 중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파되고 발전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쿠마라지바를 포함한 중국의 역경가들은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쿠마라지바는 어떤 인물이었길래 머나먼 이역만리 천축국이라 불리던 인도에까지 가서 불경을 구해 와서 번역까지 했을까? 중국 북서쪽에 있던 오늘 날의 신장(新疆) 쿠차에 속하는 구자국(龜玆國)에서 350년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중국명 鳩摩炎)와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ka) 사이에 태어난 그는 산스크리트 발음으로 쿠마라지바(Kumārajīva)라고 이름 지어졌다. 이를 중국명으로 음사해서 鳩摩羅什, 鳩摩羅時婆, 拘摩羅耆婆 등으로 불리며, 한국에서는 한자어의 구마라습, 구마라십 혹은 구마라집으로 불린다. 중국에선 쿠마라지바를 의역하여 童壽로도 불린다.

 

 

중국 신강성에 있는 구마라지바사 경내에 세워진 구마라지바 동상

 

쿠마라지바의 집안과 유년 시절을 보면 숙업이었을지도 모를, 어쩌면 불교와는 숙명적인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의 부친 쿠마라야나는 국가의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었으나 불교에 뜻을 두고 인도에 가서 불법을 배웠다. 쿠마라야나가 귀국하자 구자국의 왕이 예를 다해 그를 재상으로 맞이하고 자신의 누이동생을 그에게 아내로 줬다. 쿠마라지바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쿠마라지바는 7세가 되던 해 모친이 출가할 때 같이 동진 출가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레 어려서부터 많은 불경을 암송하게 됐고 의미도 잘 깨쳤다. 그가 불교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로 발원한 것은 경전을 배워 보니 많은 부분이 잘못 번역돼 있음을 알고 나서 자신이 직접 번역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쿠마라지바에게도 인생에서 시련과 곡절이 없지 않았다. 때는 중국 長江을 경계로 남북조로 갈려 흉노, 갈(羯, 흉노와 동족임), 선비, 저(氐), 강(羌) 등의 다섯 오랑캐(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경우)인 5胡가 서로 공격해 멸하고 세우고, 세웠다가 멸망한 나라들이 16국이나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른바 ‘5호16국’ 시대였다. 쿠마라지바는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呂光의 포로가 돼 18년 동안 여광과 呂纂 밑에서 양주(涼州, 오늘날의 감숙성 무위현)에서 살게 되면서 운명이 타의에 의해 결정됐다.

 

곧 자세한 과정을 설명하겠지만, 여광이 서역을 침략해온 것은 바로 前秦 왕 부견(符堅, 338~385)이 당대 최고의 학승인 道安(312~385)의 권유를 받아들여 쿠마라지바를 초빙해오기 위해서였다. 쿠차로 침공한 것은 여광이 국왕의 명령을 받아 사명을 안고 들어간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외도(?)를 해보자! 전진의 부견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낯익은 이름이 아닌가? 그는 바로 372년에 順道(생몰년대 미상)를 고구려에 보내 불교를 최초로 고구려에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불교계에서나 인터넷 정보검색에서나 중국에서 이 한국땅에 최초로 불교를 전해준 인물이 고구려에 귀화한 순도이고, 그 연대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라고 돼 있다. 하긴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으니 정설이 되다시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30여년 전 내가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할 시절,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이는 순도가 아니고, 연대도 372년이 아니라 그 보다 6년이 빠른 366년에 東晉의 지순도림(支盾道林)이라는 도인이 고구려 도인에게 보낸 글에 불교 관련 언급이 있었다는 기록이 梁高僧傳과 海東高僧傳에 나와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직도 교과서에서나 불교계에서는 내 친구와 이름이 동명인 순도를 최초의 불교전파자로 얘기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암튼 외도를 마치고 원래 얘기로 돌아가면, 여광은 382년 오늘날 西安인 長安을 떠나 도중에 여러 나라를 평정하고 서역으로 들어가 구차국에 이르러 반 년간의 정벌싸움 끝에 384년 7월에 구차국을 손에 넣었다. 부견의 바람대로 쿠마라지바는 이때 포로가 됐는데, 그의 나이 정력 넘치는 역부역강한 35세였다.

 

그런데 포로로 잡은 쿠마라지바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여광이 나중에 후진의 왕이 되는 요장과 싸운 부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전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휘하의 군대를 양주에 머물게 하고 이곳에다 후량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로부터 여광은 399년에 사망하게 될 때까지 14년 동안 왕으로서 후량을 통치했고, 그가 죽고 난 뒤에는 아들 여찬에게 왕위가 계승됐다.

 

 

여광은 실제 면목이 전해지는 건 없다. 단지 사찰 내 불보살로 조상돼 있을 뿐이다. 그는 구마라지바에게 결혼을 강제한 인물이다.

 

여광이 왕으로 살아 있었을 때 쿠마라지바는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서 軍師의 입장에서 여광을 도왔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 취급했다. 그는 여광에게서 달리는 말에서 떨굼을 당하거나 자신과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 잔학한 짓을 당하기도 했다. 쿠마라지바가 양주에서 여광 곁에서 살게 된 것은 그가 52세가 되던 16~17년 동안이었다. 부친의 고향인 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함께 배운 그는 이 기간 동안 한자와 중국 고전을 배우면서 불전을 설했다.

 

대승을 설한 여광의 명성은 인도, 중앙아시아를 넘어 멀리 장안에까지 전해졌다. 이로 인해 승예 등의 학승들이 그의 불전 강설을 듣기 위해 머나 먼 양주에까지 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윽고 401년 쿠마라지바는 후량을 떠나 그해 12월 20일 장안으로 입성해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요장의 사망으로 후진(後秦)의 왕위를 이어 받은 그의 아들 姚興이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몸소 쿠마라지바가 있던 후량을 정벌하고 그를 초빙했기 때문이다. 요흥은 쿠마라지바를 國師로 받들었다.

 

요흥은 선왕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쿠마라지바가 역경사업을 할 장소로 장안의 북쪽에 소요원이라는 역경원을 세워줬다. 쿠마라지바는 요흥의 뜻에 따라 한 여성과 혼인함에 따라 출가승에서 환속한 뒤 경전 번역에 종사하기로 했다. 여기서 역경사업에 착수한 쿠마라지바가 長安 거주 시기 번역한 불경은『坐禪三昧經』3권,『佛說阿彌陀經』1권,『摩訶般若波羅蜜經』27권(30권),『妙法蓮華經』8권,『維摩經』3권,『大智度論』100권,『中論』4권 등 도합 35부 300권이었다.

 

이러한 방대한 불경의 한문 번역은 대승불교가 꽃을 피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문화사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필생의 대역사였다. 서양미술사에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은 황제와 귀족들이 ‘파트롱’으로서 화가들에 대한 물질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듯이 대승불교의 토대가 된 불경의 번역이라는 거대한 사업도 당시 왕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300권의 불교 경전은 쿠마라지바 이전에 번역돼 있던 한역 불경들의 오류가 대폭 수정된 것이다. 쿠마라지바 이전에도 후한의 安世高(생몰연대 미상)와 지루가참(支婁迦讖, 생몰연대 미상)이 주가 돼 불경의 한역이 이뤄졌지만, 그들의 번역은 한자 술어에 적지 않은 부정확성을 안고 있었다. 쿠마라지바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함에 따라 그때까지 노정되던 교의의 혼란들이 거의 해소됐다. 동시에 이로 인해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됐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쿠마라지바가 역한 번역문의 특징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번역에서 쿠마라지바만의 장점이자 단점이었을 수 있다. 그는 직역 보다는 거의 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의역을 많이 했는데, 이 때문에 후대에 와서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평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후 그는 불교식 화장인 다비로 화장됐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승전』권2). 이는 아마도 후대의 비평가 혹은 호사가들이 쿠마라지바의 한계를 불식시키려고 빗대어 한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마라지바의 번역문이 뛰어난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의 번역문은 간결하고 유려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 384~414)가 자기 스승의 번역을 두고 “문장은 간결하나 뜻이 깊고, 원문의 본뜻은 은근하나 또렷하게 드러나니, 미묘하고도 심원한 부처님 말씀이 여기서 비로소 확실해졌다”고 한 평가가 이를 대변해준다. 그래서 훗날 쿠마라지바를 중심으로 그 앞의 불경 번역은 古譯이라 불리고 있으며, 자신이 번역한 것을 두고 舊譯이라 불린다. 이는 그 뒤 唐나라 시대 현장(玄奘) 법사가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중국에 들고 들어와 번역한 것을 新譯이라 부르는 것에 대비한 명칭이다.

 

이처럼 쿠마라지바의 노력 덕분에 대승불교의 정수가 담겨 있는 大智度論 등의 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됐다.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불교를 보급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般若經 연구에도 연구의 심도를 더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했고, 주로 나가르주나(Nagarjuna, 중국명 龍樹, 150?~250?)의 중관학파(중관부)의 논서를 번역함으로써 중국의 三論宗, 成實宗이 형성되는데 교리적 기초를 제공하게 됐다. 또 그가 번역한 法華經이나 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法儀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쿠마라지바를 산스크리트어로 경, 론, 소 등 세 가지 보귀한 경의 총칭을 의미하는 ‘트리 피타카’(Tri Pitaka)를 번역한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 즉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 이유다. 사실상 그의 역경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찬연한 공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명사적 역경의 공적이 인정돼 쿠마라지바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불교계에서도 현장과 함께 2대 大譯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眞諦), 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로 꼽히고 있다.

 

쿠마라지바의 역경이 훗날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의 동아시아 불교계 전체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이 지역에서 오늘날에도 널리 독송되고 있는 금강경, 아미타경, 세간에 법화경으로 알려진 묘법연화경이 모두 그가 번역한 한문경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역시 이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불교용어들 중에 極樂, 그리고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어 가운데 하나인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 등도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것이다.

 

외국어를 자국 언어로 번역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쿠마라지바 역시 번역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작업인지 체득한 것 같다. 그가 번역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번역의 어려움과 한계, 즉 언어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옮기는 번역이란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서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다. 또 “천축의 풍습은 문체를 몹시 사랑하여” “인도에서 가장 숭상하는 부처님을 찬미하는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실제 번역을 통한 체험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쿠마라지바는 대품반야경 번역을 완수한 이듬해인 장안에서 409년에 타계했다는 설도 있고, 413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도 있어 사거의 정확한 연대는 불분명하다. 4월 30일 오늘, 2세기 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보다, 세계를 냉전에서 열전으로 몰아넣은 반세기 전 베트남전쟁의 종전 보다 1600여년 전 일개 학승에 불과한 쿠마라지바가 ‘대품반야경’ 번역을 마친 사실이 문명사적으로 더 위대하게 보여서 새벽에 일어나 쓰다 보니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게 됐다. 일부러 그대의 시간을 뺏으려고 길게 쓴 건 아니니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면 오늘 하루 마음이 가벼워지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2018. 4. 30. 08:25

구파발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