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짧은 글, 긴 생각

출근길 아침에 만난 유마 힐 거사

雲靜, 仰天 2015. 6. 1. 11:19

 출근길 아침에 만난 유마 힐 거사

 

세속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松賢이라는 불명을 가진 한 친구는 거의 매일 아침마다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살면서 경험과 사색을 통해 직접 깨달은 삶의 지혜 혹은 마음을 일깨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냅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래처럼 유마 거사의 말씀을 보내왔네요.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 할 수는 없다. 현실 속에 살면서도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維摩經>
 
불기 2559년 06월 01일
松賢
 
유마 거사는 원래 인도인인데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로서 비마라키르띠(Vimalakirti)를 가리키고, 중국인들은 그를 한문 이름으로 維摩詰로 번역했습니다. 유마힐은 중국 불교인들에게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캐치프레이저로 석가모니의 정신과 가르침을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으로 한층 숙성케 하는데 사상적 지표가 된 인물입니다. 
 

인도에서 조상된 Vimalakirti의 조각상
당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그린 유마 힐 거사의 불화

 
나는 지금까지 형식과 본질과의 관계, 그리고 본질의 중요성을 언급한 글로는 친구가 보내준 위 비유만큼 잘 묘파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만 깨달아선 의미가 없으니 자신의 득도를 잠시 보류하고 나 이외 대중의 구제를 먼저 생각하라는 대승불교 가르침의 본질이 담겨 있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유마힐의 정신을 좀 더 확장하면, 위 말씀은 불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종교가 究極的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화두에까지 닿습니다. 어쩌면 유마 힐의 글을 보내준 내 친구는 그런 세상과 그런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매일 아침 정갈한 마음으로 보내주는 깨침과 가르침에 대해 늘 고마움을 느끼지만, 오늘은 내가 닮고 싶어도 내겐 부족한 유마 힐의 유연성, 즉 ‘體와 用’의 자유자재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준 그가 고마워 나도 새삼 ‘우리’의 言外 의지를 확인하는 화답 글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진흙 속에 살아도 더럽지 않고 깨끗하게 예쁘디예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사바세계에 살아도 세속에 휩쓸리거나 浮遊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이는 곧 和而不同이라는 말처럼, 같이 어울리지만 닮거나 물들지 않도록 가르치는 유교의 가르침이나, 어디에서든 거하게 되는 곳을 거부하지 않고, 또 어떤 형태든 상대의 의지와 뜻에 맞춰주지만 결코 자신의 본래 면목인 ‘물’이라는 고유한 성격은 바꾸지 않는 물처럼 살라는 도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앎 보다 더 큰 무게를 둬야 하는 건 앎에 대한 부단한 실행이겠죠? 허나, 앎이 없는 실천은 나침반 없이 칠흑 속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물론 어떤 앎인가 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바른 앎이라고 하더라도, 앎만 충만하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개의치 않고 산속에서 혼자 도만 닦다가 생을 마감하는 면벽 도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앎과 실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승적, 상보적인 관계입니다. 양자는 무엇을 위한 상승적, 상보적인 관계여야 할까요?
 
2015. 6. 1
아침 출근길에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