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를 ‘구세주’로 포장하는 궤변 : 황문웅의 역사 왜곡과 일본 극우 사관의 일면
1. 침략자에게 바쳐진 ‘구세주’의 칭호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사실 관계를 비틀어 가해자와 피해자의 지위를 뒤바꾸는 것은 학술적 해석이 아니다. 그건 역사 왜곡이자 정치적 선동이다. 근년 들어 일본에서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는 극우 성향의 역사 저술들을 보면,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수준을 넘어 피침략국의 수난을 ‘구원’으로, 침략자를 ‘구세주’로 묘사하는 해괴한 논리가 서슴없이 등장한다.
이러한 논리의 바탕에는 이른바 식민지 유화론(植民地綏靖論)이 자리 잡고 있다. “식민지 유화론”이란 제국주의 국가의 강점과 식민 지배가 피식민지의 혼란을 수습하고 문명화·안정화를 가져왔다는 정당화 논리다. 피침략국 민중을 ‘지배받아 평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제하는 시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수정주의(Revisionism) 역사관'인데,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통틀어 '식민지 수정론(植民地修正論, Colonial Revisionism)' 또는 '역사수정주의(歴史修正主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 왜곡을 주도하는 일본 극우적 학자들 가운데는 타이완 출신의 일본 극우 평론가 후앙원슝(黃文雄, 코우분유우, 이하 '황문웅')도 있다. 타이완 남부의 항구도시 까오슝(高雄) 출신인 그는 196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학위를 받고 활동하면서 일본 극우파의 대열에 합세했다. 그는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면서 특히 공산 중국에 대해선 악의적으로 선동에 가깝게 얘기했다. 나도 일찌기 199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저작들을 접한 바 있지만 그는 심지어 중국이 해체돼야 한다는 “중국해체론”까지 주장해온 인물이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는진 모르지만 그는 2006년에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황문웅은 『中國仇日心態的起源』(2003年), 『中国こそ逆にかけて日本に謝罪すべき9つの理由: 誰も言わない「反日」利権の真相』(2004年), 『中国・韓国が死んでも教えない近現代史』 (2005年),『中國、韓半島を救った大日本帝国』(2006年), 『日本人はなぜ世界から尊敬され続けるのか』(2011年) 등등 다수의 일본어 저작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중국과 한국 등 피침략국의 반일 감정을 정치적 연극으로 치부하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유포해 왔다. 위 저서들의 서명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듯이 “대일본제국이 중국과 한반도를 구했다”고 한 그의 주장은 일본 극우 세력이 수십 년간 다듬어온 식민지 유화론과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재해석 논리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의 이런 주장이 곧 일본 내 극우 사학자들의 주장이라고 봐도 된다는 소리다.

2. 황문웅 사관의 핵심 주장과 논리적 오류
황문웅이 제시하는 역사 논리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나뉜다.
첫째, 근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구원 투수’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이나 한국 같은 피침략국은 스스로 역사를 수습할 능력이 없어 늘 외세에 의존해 내전을 수습해 왔다는 이른바 ‘외세 구세주론’이다.
셋째, 피침략국이 요구하는 과거사 반성과 사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부 정치적 갈등과 정권 유지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내정용 정략’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사료의 의도적인 취사선택과 개념의 혼동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이다. 황문웅은 송원, 명청 등의 전근대 왕조 교체기에서 나타난 일부 중국 한족들이 외적에 부역한 사례나 난민의 이동을 근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중의 ‘환영’으로 확대 해석한다. 또한 근대 주권 국가 간의 침략 전쟁과 전근대적 천명(天命) 사상에 따른 이민족 왕조의 중원 지배를 동일선상에 놓는 치명적인 역사적 시대착오(Anachronism)를 저지른다.
3. 역사적 사실에서 본 황문웅 주장의 허구성
황문웅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송대와 명대의 역사적 사례를 끌어들인다. 남송 말기 몽골군이 남하했을 때나, 명말 청초 만주(滿洲)족 팔기군이 뻬이징(北京)에 입성했을 때 중원 민중이 그들을 ‘구세주’로 열렬히 환영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20세기 일제의 만주 진주 역시 군벌의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에게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제공한 질서 회복 행위였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역사적 실상은 그의 주장과 정반대다. 이하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역사의 실제는 아래와 같았다.
① 남송의 40년 대몽 항쟁
남송은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0여 년간 몽골 제국에 맞서 전 국가적인 저항을 펼쳤다. 그들은 샹양청(襄陽城) 전투에서는 6년간 성을 지켜냈고, 띠아오위청(釣魚城) 전투에서는 몽골의 몽케 칸(Möngke Khan, 蒙哥汗)을 전사시켰으며, 마지막 야산(厓山) 해전에서는 십수 만 명의 신하와 백성들이 바다에 투신하여 왕조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럼에도 황문웅이 일개 관군의 투항을 민중 전체의 환영으로 포장하는 것은 부분을 전체라고 주장하는 역사에 대한 유기적 모독이다.
② 명말 청초의 격렬한 반청 항쟁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뻬이징이 함락된 후 만주족이 들어섰을 때, 한족 민중은 만주족이 내린 변발령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청나라 군대가 단행한 ‘양주십일(揚州十日)’과 ‘가정삼도(嘉定三屠)’ 같은 참혹한 학살은 민중이 만주족의 지배에 끝까지 맞섰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증거다. 백성들이 집 앞에 붙인 ‘대청순민(大清順民)’ 표지는 학살을 피하기 위한 생존형 연명 행위였지, 외세를 향한 진심 어린 칭송이 아니었다.
③ 일제 침략과 만주국 괴뢰정권
군벌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이주한 중국 민중의 움직임은 도피성 생존 투쟁이었을 뿐, 그것이 일본 군국주의나 만주국 같은 괴뢰정권의 정통성을 승인한 것은 아니다. 난징대학살(南京大屠殺), 무차별 폭격, 강제 동원 등 일제가 저지른 참혹한 수탈과 폭력의 본질은 ‘구세’라는 미화 뒤로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
④ 난징대학살(南京大屠殺) 부정론의 허구성
황문웅은 1937년 일제가 저지른 난징대학살을 두고 “수십만 명의 학살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며, 이는 중화민국 국민당(中國國民黨)과 서구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이자 날조”라고 강변한다. 일제가 중화민국 수도 난징 입성 후 질서를 유지하고 주민을 보호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난징 안전지구 국제위원회(Nanking Safety Zone International Committee, 南京安全區國際委員會)에 참여했던 서양인 외교관·기자들의 일기와 기록, 토우꾜우재판(東京裁判)의 증언, 심지어 일본군 자체의 진중일기(陣中日記) 등 압도적인 사료로 입증된 진실을 전면 부정하는 아전인수격 궤변에 불과하다.
4. 중국혁명 지도자에 대한 자의적 악마화 : 손중산(孫中山) 사례
황문웅의 역사 왜곡은 비단 외세 미화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의 근대 지도자를 자의적으로 악마화하는 방식으로도 확장된다. 그는 손중산(孫中山, 쑨원)을 두고 “꽝쪼우(廣州)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 권력을 잡기 위해 고향 주민을 도살한 인물”로 묘사하고, “학살이야말로 깊이 뿌리박힌 중국 문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학살하는 것이 문화의 한 부분이었으니까 손중산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사실 황문웅의 이 주장은 1924년 꽝쪼우상단 사건(廣州商團事件) 당시, 제국주의 세력 및 반혁명 군벌과 연계된 상단 무장세력의 진압 과정을 맥락 없이 '민중 도살'로 왜곡한 것이다. 근대 국가 형성기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갈등을 '학살 문화'라는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단정 짓는 행태는 정당한 학술적 비평이 아니다. 이는 중국 사회와 인물 전체를 '야만'으로 규정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문명화의 구원'으로 돋보이게 만들려는 의도적인 인물 왜곡 공작이다.
5. 식민 지배를 시혜로 위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기만
황문웅의 논리는 일제의 대만 및 한반도 강점을 미화하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에서 극에 달한다. 그는 일제가 철도, 도로, 학교, 병원 등 근대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법치주의를 도입해줌으로써 미개했던 피식민지를 구원하고 문명화시켰으며, 피식민지 민중이 그 혜택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제가 구축한 인프라는 피식민지 민중의 복리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혜(施與)가 아니었다. 이는 식민지 자원 수탈을 원활하게 하고, 향후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침략 도구에 불과했다. 근대화의 외피 뒤에서 자행된 토지·식량 수탈, 강제 동원,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려 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과 창씨개명(創氏改名) 등 본질적인 폭력성을 은폐한 채, 결과론적인 시설물 몇 개로 지배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식민지 유화론의 전형적인 기만책이다.
6.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전과 책임 회피의 정치학
황문웅 사관이 지닌 가장 악의적인 지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역전시키는 데 있다. 그는 중국과 한국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근본적 이유가 침략 피해 때문이 아니라 내부 정치 투쟁과 정권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내정 문제’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이러한 논리는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책임을 덮기 위해 피해자의 목소리를 ‘정치적 연극’으로 몰아세우는 전형적인 책임 회피 방식이다. 피침략국의 역사 교육이나 대외 정책에 정치적 활용이 일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근본적 원인은 일본이 저지른 불법적 침략과 수탈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있다.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가 피해자의 반발을 두고 내부 불만 해소용 정략이라 비웃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를 넘어 인류 보편의 윤리적 기준마저 저버리는 행태다.
7. 왜 왜곡된 사관을 경계해야 하는가?
황문웅의 저작은 학술적 검증을 거친 연구 결과물이 아니다. 극우적 프레임을 매개로 자극적인 주장을 펼쳐 대중적 선동을 노린 상업적 출판물에 불과하다. 정통 학계에서 그의 저술이 인문·사회과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문웅의 주장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궤변이 일본 내 극우화 분위기와 결합하여 일본인 대중의 역사 인식에 왜곡된 자긍심을 주입하고 피침략국에 대한 적반하장식 태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침략의 피해를 구원의 손길로 위장하며, 반성과 사죄를 열등감의 표현으로 왜곡하는 학술적 아전인수는 결국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저해하는 독소가 될 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역사를 침략의 도구로 비틀어버린 사이비 지식인에게 돌아갈 유산 역시 궤변이라는 비판뿐이다. 우리는 황문웅이라는 인물을 통해 일본 극우 사관이 얼마나 위태롭고 비이성적인 논리 위에 서 있는지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국내에도 이러한 일본의 극우파가 자의적으로 왜곡한 역사관에 호응하는 세력이 있다. 아무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라 하지만 역사학 연구의 기본을 무시한 작태여서 같은 역사학자로서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다.
2026. 8. 16. 18: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앎의 공유 > 일본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재무장의 길로 치닫는 일본, 대안은 없는가? (0) | 2026.04.06 |
|---|---|
| 왜 우리가 ‘정신대’, ‘종군위안부’, ‘군위안부’라고 부르는가? : '난징대학살'과 ‘일본군 성 노예’ (1) | 2026.02.01 |
| 심심풀이로 읽는 언어 이야기 11: 일본어 단어 '쿠다라나이'(くだらない)에 얽힌 숨은 역사 (8) | 2025.07.11 |
| 무라하찌부와 왕따 : 일본사회의 집단적 배제와 그 현대적 변형 (0) | 2025.06.24 |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10주년에 일본참전의 득실 논한 논문 소개 (1) | 2024.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