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단어 '쿠다라나이'(くだらない)에 얽힌 숨은 역사이야기
일본어 단어들 중 쿠다라나이(くだらない)는 '시시하다', '하찮다', '가치 없다', '별 볼일 없다' 등의 뜻을 지닌 단어다. 유사한 뜻의 동의어로 츠마라나이(つまらない)가 있다. くだらない는 통상 下らない라고 표기하지만 일본어 한자로 百済無い라고도 쓴다. 즉 “百済가 없다”는 뜻이다.
참고로 高句麗는 코우꾸리(こうくり), 新羅는 통상 “시라기(しらぎ)”라고 읽고 역사학에선 “신라(しんら)”라고도 읽는다. 가야금을 신라금(新羅琴)이라고 쓰고 “시라기고또(しらぎごと)”라고 읽듯이!
그런데 왜 “百濟가 없다”는 것이 '시시하다', '하찮다', '가치 없다', '별 볼일 없다'는 뜻이 되었을까? 일본어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말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숨어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
663년 백촌강전투에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그 이전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남진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沸流백제 계열의 유민들이 그동안 계속 유형 무형으로 형제국인 溫祚 계열의 백제를 지원하고 성원을 보냈지만 이제 완전히 나라가 멸망하게 됐다. 그래서 그들 유민들에겐 쿠다라(백제 혹은 큰나라)가 없어져서 '희망이 없다', '낙이 없다', '꿈이 없다'라는 뜻이 된 이래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시시하다', '하찮다', '가치 없다', '별 볼일 없다' 라는 말로 의미가 전화된 것이다.
시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쁜 분이거나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관심이 있어도 글이 재미없다 싶은 분은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고대 한일 관계사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심화학습'이라 생각하고 아래에 계속되는 글을 읽으면 백해무익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조금 자세하게 소개하겠다.
일본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百濟(百済)를 “쿠다라”(くだら)라고 부른다. 이 쿠다라는 어원적으로 한국어의 '큰 나라'라는 말을 고대 일본인들이 음차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즉 일본어 발음체계상의 특성상 '큰 나라'의 큰이 '큰'으로 발음이 되지 않으니 '쿠다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유음화가 이뤄진 언어의 유포니(euphony) 현상인 셈이다. 실제로 고대 한일 관계에서 일본이 중국에서 문물을 직수입하기 시작한 중기와 달리 대략 A.D. 3~4세기 이전의 초기에는 많은 문물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게 많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천자문과 불교뿐만 아니라 맷돌, 먹과 벼루, 한지, 철광석의 제련기술, 도기 등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일본의 국조가 된 꿩과 무궁화나무처럼 동식물들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게 있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가 앞선 백제를 “큰 나라”라고 봤던 것이다.
위 주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고대 일본의 야마또(大和) 정권을 세운 이가 백제계 인물이었고 '쿠다라나이'는 이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 대학시절 내가 읽은 역사서적들 중엔 한반도에는 백제가 두 개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한 설이 있었다. 즉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 현 인천시)에 세운 비류 백제와 온조(溫祚)가 하남 위례성(慰禮城, 오늘날 서울시)에 도읍한 온조 백제가 그것이다. 모두 B.C.18년 전후였다. 당시 강단 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은 한국사학계에서 부정된지 제법 됐지만 1980년대 초 일부 재야사학자가 제기한 학설이다. (김성호,『沸流백제와 日本의 國家起源』, 知文社, 1982년). 당연히 우리나라 정규 역사교육에선 그렇게 가르친 바 없어서 일반인들에겐 비류백제가 있었다는 소리는 아마 금시초문으로 들릴 것이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과 졸본부여(卒本扶餘) 왕의 세 딸 중 한 명 사이에 난 형제였다. 그런데 동명성왕이 왕위를 장남인 비류와 온조에게 주지 않고 배다른 아들 유리왕에게 물려주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아버지 곁을 떠나 남하해서 각기 미추홀과 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일설엔 동명성왕으로부터 왕위 계승권을 탈취한 유리왕이 정적이었던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를 남쪽으로 내쫓은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 뒤 비류가 자신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살기 어려운 미추홀에 자리 잡은 것을 후회하다가 타계하자 그의 백성들이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 백제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성호는 비류백제가 이 때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 유민들이 지금의 공주시인 웅진(熊津, 고마나루)에 도읍하고 리잔국(利殘國)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존재하다가 396년 호태왕(광개토대왕)의 백잔 정벌 때 멸망당해 비류백제에서 진정(眞淨)이 일본열도로 들어가 야마토왜를 세워 훗날 제15대 천황이 되는 応神(おうじん)왕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고대사학계에서 여러 가지로 반박된 바 있다. 우선 비류백제가 따로 존재했던 게 아니고 백제 내부에서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뉘어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는 주장이 있다. (홍원탁,『고대 한일관계―백제와 대화(大和·야마토) 倭』, 1988년 영문판,『백제와 大和 일본의 기원』, 1994년 국·영문판). 예컨대 온조계 근초고왕이 비류계의 계왕을 죽이고 왕이 되자 계왕의 후손들이 일본 열도로 진출해 야마또(大和) 왜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만약 김성호의 말대로 비류백제가 400년 가까이 존재했었다면 웅진 지역 일대에 어떤 형태로든 뭔가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텐데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호태왕에게 정벌당한 리잔성을 백잔국과 같은 돌림자를 쓰는 비류백제로 본 것은 잘못된 상상이었다는 반론도 제기된 바 있다. 또 홍원탁 교수(서울대 경제학과)의 설 역시 일부가 반박된 바 있다. 즉 그의 비류계 백제왕 주장 역시『삼국사기』의 기록 오류에서 비롯된 추론이었는데 그 뒤 백제사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있는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고구리사 초략』이 출간(2008년)되고 기존 학설의 오류들이 밝혀지면서 홍원탁의 가설도 설득력을 잃게 됐다.
그러나 비록 김성호, 홍원탁 두 학자가 언급한 비류백제가 존재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현재 일본의 국가 기원이 된 야마토 왜를 세운 応神왕은 진인(眞人)으로 백제계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일본 사학계에도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천황은 족보가 없어서, 혹은 족보가 있어도 깊숙히 밀장해놓고 내놓지 않아서 천황 기원의 전말이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일본의 많은 지배층 인물들 중 백제, 가야, 신라인이 자신의 조상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역대 일본 수상들 중에도 자신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른바 “渡来人”이었던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자신의 조상은 백제인이었다고 하면서 부여를 방문한 정치인(제93대 내각 총리대신을 지낸 하또야마 유끼오 鳩山 由紀夫 수상)도 있었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김성호의 학설이 부정됐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밝힌 수많은 사실들을 모두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비류백제의 존재는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여타 백제지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적지 않은 증거들과 흔적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민족은 곰 토템 사상을 갖고 있었고 그기에서 비롯된 웅진(고마 나루의 한자어 지명이고 고마는 일본어 쿠마(熊)의 한 형태)처럼 지명 이름에 곰이 들어간 곳이 많았는데 이 시기에 일본의 큐우슈우 지역에도 곰 웅 자가 들어간 지역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쿠마모또(熊本)가 그런 예들 중의 하나다.
또 골상학적 관점에서 큐우슈우 지역과 칸사이(関西) 지역 사이의 많은 고대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골의 신장을 재어보니 키가 백제인과 거의 같은 160cm 전후가 많았다고 한다. 김성호는 이런 사실들을 당시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증거로 삼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예증은 이 글에선 생략한다.
김성호는 비류백제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남진 공격에 밀려서 큐우슈우 지역으로 건너가 일종의 망명 정부와 같은 도래인 집단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고구려군이 큐우슈우까지 쳐들어 오지 않겠나 우려해서 석성을 견고하게 쌓고 방어준비를 했다. 이 성은 일본의 성과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한반도의 축성 방식이고 이 기구를 다자이후(太宰府)라고 부른다. 비류백제계 유민들이 훗날 663년까지 계속 형제국가인 백제에 성원을 보낸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이 과정에서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귀족 등의 지배층이었고, 그 뒤로도 계속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피지배층이 주된 무리였다. 그 흔적이 일본어 언어에도 남아 있다고 본다. 예컨대 일본어의 '今來'는 '곤라이(こんらい)'로 읽지 않고 '케라이(けらい)'라고 읽고 부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백제 유민들 중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땅에 도착하면서 지금 도착했다는 의미로 “今來”라고 외쳤는데 큐우슈우에 먼저가 있던 귀족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今來가 부하들이 왔다는, 부하의 뜻이 된 것이다.
또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말이지만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축제인 마쯔리(祭り)에서 미꼬시(御輿)를 둘러멘 사람들이 흥을 돋구고 힘을 내기 위해 함께 큰 소리로 “왓쇼이!”!”(わっしょい!), “왓쇼이!”(わっしょい!)라고 외치는 わっしょい도 “왔소”라는 한국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어로 조금 의역하면 “왓쇼이!”, “왓쇼이!”는 “영차!”, “영차!” 정도가 되는 후렴구인데 이 말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큐우슈우 땅을 밟으면서 "우리도 왔소!"라고 외치면 그것은 먼저 와서 살고 있는 백제인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힘내자”, “힘이 된다”라는 의미가 됐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 땅으로 들어간 도래인들은 몇 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백제가 비류와 온조의 형제국이라는 인식은 망각되지 않고 지속됐고, 그래서 고구려의 침략에 계속 살아남아 나라가 존속되기를 기원하면서 자자손손 끊임 없이 성원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63년에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와서 터를 잡은 백제인 후손들은 이젠 “백제가 없다(百済がない)”, “백제가 없어졌다(百済が亡くなった)”고 한탄한 것이다. 그래서 '희망이 없다'. '꿈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 百済ない가 '시시하다', '하찮다', '가치 없다', '별 볼일 없다'는 의미로 전화된 것이다.
이외에도 소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이 졸고는 어디까지나 일본어 단어에 얽힌 역사 이야기가 주제이기 때문에 역사 이야기를 계속하다간 일본어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이야기로 전도되고 말 것 같아서 여기서 이만 멈춘다.
그 대신 아주 오래 전 내가 일본에 잠시 체류하던 시절 '쿠다라나이'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여담으로 소개하겠다.
くだらない는 필자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쯤인 30대 후반 일본에서 "노가다"(일본어 도까따とかた의 잘못된 한국식 발음임) 생활을 했을 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일어난 단어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토우꾜우(東京)에서 낮에는 노가다를 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홀 서빙을 맡은 아르바이트를 한 바 있다. 하루는 내가 알바하던 식당을 자주 찾던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의 야꾸자 중간 보스급으로 보인 야꾸자가 식당 주인의 허락을 받아서 서빙하던 나를 옆자리에 앉아라 해서 얘기를 주고받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한일 간의 인적 내왕이 지금처럼 성하던 때가 아니어서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면서 한일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깊다고 하면서 정치, 경제, 역사 얘기에 이어 언어문제로까지 늘어지게 됐다. 얘기가 진행되면서 くだらない에 관해 위에서 소개한 내용을 얘기해줬더니 그들은 크게 감동했다면서 나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한 일이 있었다. 본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대략 그는 재일교포 출신이었던 거 같았다.
아무튼 くだらない에 얽힌 숨은 역사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니 이 단어의 어원을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시간 여유가 나면 일본어 이야기를 계속 할 것이다.
2025. 7. 1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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