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하찌부(村八分)와 왕따 : 일본사회의 집단적 배제와 그 현대적 변형
서상문(역사학자)
일본 사회에서 수백 년간 지속돼온 촌락공동체의 생활양식은 개인보다 집단의 질서와 생존을 앞세우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구성원 사이의 협동과 상호부조를 가능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관습을 위반한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배타적 행동양식도 만들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무라하찌부(村八分)라는 것이다.
현재도 일본어에서는 ‘무라하찌부니 스루’(村八分にする), 곧 어떤 사람을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배제한다는 표현과 ‘무라하찌부니 사레루’(村八分にされる), 곧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표현이 사용된다. 다만 일상어로는 단순한 ‘왕따’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널리 쓰이므로, 전통적 촌락제재로서의 무라하찌부와 현대의 집단따돌림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무라하찌부란 농촌이나 어촌과 같은 지역공동체에서 마을의 규약과 관습을 위반하거나 유력자의 의사에 거슬린 사람을 대상으로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교제와 협력을 끊는 사적 제재를 말한다. 단순히 말을 걸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공동노동·경제활동·의례·친족관계와 일상생활 전반에서 대상자와 그 가족을 고립시키는 ‘공동절교’였다. 일본의 연구와 판례에서도 무라하찌부는 특정인을 지속적으로 집단이나 생활공동체로부터 배제해 사회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설명된다.
‘여덟 분야의 절교’라는 명칭
‘村八分’이라는 명칭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열 가지 중요한 일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서만 협조하고, 나머지 여덟 가지에서는 관계를 끊는다는 설명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열 가지 일로 성인식, 결혼, 출산, 질병, 주택의 신축과 개축, 수해, 여행, 제사나 불교 법회, 장례, 화재 진압 등이 거론된다.
이 가운데 장례와 화재 진압만은 배제하지 않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시신을 방치하면 부패와 위생 문제가 발생하고, 화재를 외면하면 불이 마을 전체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생전의 잘못을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장례를 예외로 삼은 배경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다만, 열 가지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랐으므로, 이를 전국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제도였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열 가지 가운데 여덟 가지를 끊는다’는 설명 자체가 후대에 만들어진 민간어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본어의 ‘하지꾸’(弾く), 곧 ‘튕겨내다·배척하다’라는 말이 변형되어 ‘하찌부’가 되었다는 설과 ‘村八部’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제기되었지만, 어느 하나가 확정된 정설은 아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 생활행사 가운데 두 가지만 남겼다는 설명은 무라하찌부의 성격을 이해하게 해주는 대표적 통설로 소개하되, 확정적인 어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
역사적 연원―중세의 소우손에서 에도시대의 촌락으로
무라하찌부는 에도(江戶)시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사회적 연원은 적어도 가마꾸라(鎌倉)시대 말기부터 무로마찌(室町)시대에 걸쳐 형성된 자치적 촌락공동체인 소우손(惣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이후 농민들이 관개수로와 산림, 초지와 입회지(入会地)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영주에게 납부할 연공(年貢)을 마을 단위로 부담하는 자치적 촌락조직을 발달시켰다. 특히 무로마치시대의 소우손에서는 주민회의인 요리아이(寄合)를 열어 마을의 규약인 소우오끼떼(惣掟)를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게 벌금·재산압류·추방·교제단절 등의 제재를 가했다. 중세 소우손의 규율과 자치적 제재가 후대 무라하찌부의 중요한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촌에서는 관개수로의 관리, 모내기와 수확, 산림과 초지의 공동 이용, 제방 보수, 제례와 장례 등을 개별 가구가 독립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주민들은 공동노동과 상호부조에 의존해야 했고,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단순히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생업과 생활의 기반을 잃는 것을 뜻했다. 특히 공동 산림이나 초지, 하천, 입회지의 이용이 금지되면 땔감과 사료를 구하기 어려워졌고, 농사일에 필요한 노동력도 얻을 수 없었다. 무라하찌부는 바로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이용해 개인과 가족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다만 중세부터 ‘村八分’이라는 명칭이 지금과 똑같은 의미로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집단절교와 추방, 공동재산 이용금지라는 제재방식은 중세 촌락에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村八分’라는 명칭이 널리 정착하고 오늘날 알려진 형태로 제도화된 것은 에도시대의 촌락사회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비교적 안전하다.
에도시대 촌락과 고닌구미
에도시대의 촌락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연공을 납부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막부와 번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단위이기도 했다. 촌락 내부에서는 촌법(村法), 촌규약, 공동재산의 이용 규칙 등이 작동했고, 이를 위반한 사람에게 벌금, 공동노동 배제, 입회지 이용금지, 교제 단절 등의 제재가 가해졌다.
특히 연대책임을 강조한 고닌구미(五人組)는 대체로 다섯 가구 안팎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조세납부, 범죄방지, 기독교 신앙의 단속, 주민의 이동과 신원보증 등을 서로 감시하게 한 제도였다. 한 사람의 범죄나 도주, 연공 체납이 이웃의 책임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규율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라하찌부는 국가의 공식 형벌은 아니었지만, 촌락질서를 지탱하는 강력한 비공식 제재로 기능했다. 때로는 번의 관리가 촌락 내부의 배제를 지시하거나 묵인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촌락의 지도층과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집행했다. 법률상 형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재판절차도, 피징계자의 방어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고닌구미는 오늘날 일본에 존속하는 제도가 아니다. 막부(幕府)체제가 붕괴한 뒤 메이지정부가 근대적 호적·경찰·조세제도를 정비하면서 제도적으로 폐지되었다. 현대 일본의 쬬우나이까이(町内会)나 자치회, 이웃조직을 고닌구미의 직접적인 존속형태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소수 가구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상호부조와 감시를 동시에 수행하게 한다는 구조적 측면에서는, 과거 북한에 존재했던 ‘5호담당제’나 다른 권위주의 국가의 주민감시조직과 비교해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비교에서도 차이를 유념해야 한다. 고닌구미는 에도시대의 신분제와 연공수취를 뒷받침한 제도였고, 북한의 5호담당제는 현대 당·국가체제가 주민의 사상과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운용한 정치적 통제제도였다. 양자는 소규모 주민단위의 연대책임과 상호감시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시대적 배경과 목적, 통제주체가 동일하지는 않았다.
무라하찌부와 사무라이 지배
그렇다면 무라하찌부는 최상부의 지배계급 사무라이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에도시대의 일본 사회는 사농공상으로 흔히 설명되는 신분질서 아래 무사와 농민이 원칙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죠우까마찌(城下町)와 행정거점에 거주했고, 농촌의 일상적인 운영은 촌장에 해당하는 나누시(名主) 또는 쇼우야(庄屋), 쿠미가시라(組頭), 햐꾸쇼다이(百姓代) 등 촌락 지도층이 담당했다.
따라서 무라하찌부를 사무라이들이 매일 농촌에 들어가 직접 집행한 형벌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 집행자는 주로 촌락 내부의 유력농민과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촌락이 막부와 번(藩)의 행정단위였고, 촌락 지도층이 영주의 명령을 전달하며 연공을 징수했다는 점에서 무사 지배와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었다.
막부와 번은 촌락의 자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대신, 정해진 연공납부와 치안유지를 요구했다. 촌락 내부의 통제와 징계를 주민들에게 맡기면 지배자는 적은 행정비용으로 농촌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른바 ‘촌락을 통한 지배’였다. 따라서 무라하찌부는 촌락의 자치적 규율인 동시에, 막부와 번의 간접지배를 보완하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했다.
또한 촌락 지도층이 영주의 권력과 연결되면서 무라하찌부가 공정한 공동체 규율이 아니라 유력자의 사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연공이나 공동노동을 거부한 사람뿐 아니라, 촌장의 부정과 특권을 비판한 사람, 종교적 관행에 따르지 않은 사람, 공동체의 다수의견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까지 배제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무라하찌부를 단순히 농민공동체의 자율적 질서유지라고 미화할 수 없다.
그러나 무라하찌부를 일본인의 타고난 민족성이나 선천적인 악의 결과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두 생득적인 악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리시설과 공동노동에 의존한 농촌경제, 막부와 번의 연대책임제, 지역유력자의 권력, 국가의 제한적인 지방행정력, 좁은 생활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전근대적 조건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이었다.
동시에 모든 일본의 촌락이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주민을 억압한 것도 아니다. 촌락공동체는 재난 구호와 빈민 보호, 농사와 토목의 공동노동, 장례와 제례, 고아와 노약자의 보호라는 긍정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동일한 공동체가 구성원에게는 보호망이면서, 이견을 제기한 사람에게는 억압기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倭’는 우두머리를 뒤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내가 약 40년 전에 읽은 책 가운데 일본인들은 힘이 센 자나 유력자를 따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양태가 ‘왜국’ 또는 ‘왜인’의 ‘倭’라는 글자에 나타나 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이어령의 저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서는 진나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간 진수(陳壽, 233~297)가 일본 도처에서 일반인들이 무리를 지어 한 사람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광경을 보고 이를 일본의 특징으로 기록했다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내용은 몇 가지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를 편찬한 진수는 일본열도에 파견된 진나라 사신이 아니었다. 그는 촉한과 서진에서 활동한 역사가로서, 위나라 때 왜국에 다녀온 사신들의 보고와 당시 남아 있던 지리서·역사서 등의 자료를 종합해 『삼국지』를 편찬했다. 따라서 진수가 직접 일본에 가서 왜인의 집단행동을 관찰했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둘째, ‘倭’라는 글자가 곧 ‘우두머리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는 설명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문자학적 정설은 아니다. 고대 한자사전 『설문해자』는 ‘倭’를 ‘순한 모양’ 또는 ‘유순한 모습’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왜인의 인심이 순종적이어서 倭라 불렀다’는 후대의 해석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倭’가 일본열도의 사람들을 지칭하게 된 정확한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어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일본인의 집단적 복종성을 묘사하기 위해 중국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글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하다.
셋째, 『위지왜인전』에는 왜인들이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길가에서 물러나거나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집단적 질서와 위계를 중시했다는 기록 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대사회의 신분질서와 의례를 곧바로 현대 일본인의 단체행동이나 조직문화와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 연속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유력자의 뒤를 쫓는 고대 왜국의 모습이 오늘날 여행지에서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인솔자의 깃발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하는 논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무라하찌부의 직접적인 잔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체여행의 효율성, 시간엄수, 서비스산업의 운영방식, 여행자의 연령과 언어문제 등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질서의식과 집단행동에는 긍정적인 면도 많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줄을 서고 배급질서를 지키며 공동체의 규칙을 준수하는 태도는 사회적 신뢰와 협동을 높인다. 문제는 질서와 협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이견과 내부고발을 봉쇄하고 개인에게 침묵을 강요할 때다.
촌락의 순응문화와 근대 일본군
그럼에도 일본의 전근대적 촌락질서가 근대의 군대와 기업, 학교와 관료조직의 집단문화에 일정한 사회적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은 검토할 만하다. 메이지(明治)시대 이후 일본군의 사병들은 농촌 출신자가 많았으며, 군대는 이들을 천황과 상관에게 절대복종하는 존재로 재교육했다.
메이지정부가 징병제를 시행했을 때 농촌 청년들은 가족과 촌락을 떠나 군대라는 새로운 국가조직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도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고, 동료의 잘못을 집단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며, 상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방식이 반복되었다. 병사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분대나 내무반 전체가 기합과 체벌을 당하는 연대책임의 관행은 촌락공동체의 상호감시와 유사한 효과를 냈다.
다만 농촌의 무라하찌부 문화가 곧바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발생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군국주의 교육, 천황제 이데올로기, 상명하복의 군대제도, 가혹한 내무반 폭력, 적군과 점령지 주민에 대한 비인간화, 국가가 부여한 면책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촌락공동체에서 학습한 다수에 대한 순응과 배제의 공포는 그 가운데 하나의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집단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개인이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잘못임을 알면서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따르고 있다면 침묵하거나 가담한다. 행동의 책임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일’이라는 집단 속으로 분산된다.
이때 개인의 죄의식은 약화되고 집단의 규범이 양심을 대신하게 된다. 무라하찌부가 보여주는 가장 위험한 점은 폭력을 직접 명령하지 않고도 배제의 공포만으로 사람들을 순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 사법부의 판단
메이지시대에 일본이 근대적 법률과 재판제도를 도입한 뒤에는 무라하찌부도 무제한적인 촌락자치나 전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게 되었다.
1909년, 곧 메이지 42년의 대심원 판례를 비롯한 근대 일본의 판례에서는 특정인에게 공동절교를 통고하거나 이를 이용해 행동을 강요한 행위가 협박죄 또는 명예훼손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민사재판에서도 무라하찌부로 피해자의 명예와 평온하게 생활할 권리, 인격적 이익을 침해한 경우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무라하찌부라는 행위 전체가 독립된 하나의 범죄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공동절교를 통고하는 과정에서 협박을 했는지, 거짓 사실이나 모욕적 내용을 퍼뜨렸는지, 공동시설의 사용을 위법하게 방해했는지, 피해자의 인격권과 생활이익을 침해했는지에 따라 형사책임 또는 민사책임이 개별적으로 판단된다.
전후의 대표적 사건―1952년 우에노촌 사건
전후 일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1952년 시즈오까현 후지군 우에노촌(静岡県富士郡上野村), 현재의 후지노미야(富士宮)시에서 발생한 ‘우에노촌 무라하찌부 사건’이다. 1952년 5월 6일 실시된 참의원 보궐선거에서 마을 관계자들이 기권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본인 대신 투표하는 대리투표, 이른바 대리·대신투표를 조직적으로 자행했다. 당시 17세의 여고생 이시까와 사쯔끼( 石川皐月)가 이를 목격하고 아사히(朝日)신문에 제보하면서 부정선거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의 분노는 부정선거를 자행한 사람들보다 이를 외부에 고발한 이시카와와 그 가족에게 향했다. 주민들은 이시카와 가족과 말을 하지 않고, 물건을 팔지 않거나 농사와 일상생활에서 협조를 끊는 등 집단적으로 배제했다. 사건은 1952년 6월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인권문제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은 무라하찌부가 단순히 전근대의 낡은 풍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선거제도가 도입된 전후 일본에서도 내부고발자를 응징하는 방식으로 존속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잘못을 저지른 집단이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기보다, 공동체의 체면과 평온을 깨뜨린 고발자를 배신자로 몰아세웠다는 점에서 특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소재로 1953년에는 영화 「村八分」도 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결속과 민주주의, 내부고발자의 보호, 지방사회의 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2004년 니이가따현 세끼까와촌 사건
전통적 형태의 무라하찌부가 21세기에도 실제로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도 있다. 2004년 니이가따현 이와후네군 세끼까와촌 누마(新潟県 岩船郡 関川村 沼)취락에서 마을행사의 준비와 뒷정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주민들이 집단적인 불이익을 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오봉(お盆) 기간에 열리던 곤들매기 잡기 행사였다. 오봉은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본의 불교계 명절로, 대체로 8월 13일~16일 무렵에 지낸다. 일부 주민이 오봉을 편히 보내고 싶다며 행사 준비와 정리를 거부하자, 취락의 유력자들은 이에 따르지 않으면 무라하찌부를 하겠다고 통고했다.
이후 주민 11가구에 대해 산나물 채취와 쓰레기 수거함 사용 등을 금지하거나 각종 공동체 활동에서 배제했다. 피해 주민들은 무라하찌부 행위의 중지와 손해배상을 요구해 소송을 제기했다. 니이가따지방법원 시바따(新発田)지원은 이러한 조치가 불법행위라고 판단해 행위의 금지와 합계 220만 엔의 손해배상을 명했고, 2007년 10월 10일 토우꾜우(東京) 고등재판소도 원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이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마을행사 참여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단순한 인간관계의 불화가 아니라, 쓰레기 처리와 공동자원 이용 등 주민의 기본적인 생활조건을 제한할 경우 법적으로 위법한 인격권 침해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에서의 변형
현대 일본에서 전통적인 농촌형 무라하찌부는 과거보다 크게 약화되었다. 도시화와 인구이동, 농업인구 감소, 행정서비스와 소방·장례산업의 발달로 주민들이 촌락공동체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리는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첫째, 학교의 ‘이지메’
첫 번째 변형은 학교에서의 이지메(いじめ)다. 한 학생을 따돌리고 말을 걸지 않으며, 단체대화방에서 제외하고, 급식·청소·체육활동에서 고립시키는 행위는 전통적인 무라하찌부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특정한 지도자가 명시적으로 명령하지 않아도 다수의 학생이 암묵적으로 참여하고, 가담하지 않는 학생까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을 두려워해 침묵한다. 피해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까지 배척하겠다는 위협은 무라하찌부가 작동하던 방식과 거의 같다.
그러나 현대의 이지메를 전근대 무라하찌부가 그대로 학교로 이전한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학교 내 경쟁, 또래집단의 위계, 가정환경, 차별의식, 교사의 방관, 사회관계망서비스의 확산 등 현대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양자는 역사적으로 동일한 제도가 아니라, 집단이 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복종을 강요한다는 구조에서 유사하다.
둘째, 직장과 조직에서의 배제
두 번째는 직장과 조직에서의 배제다. 특정 직원을 회의와 정보 공유에서 제외하고, 업무를 주지 않거나 반대로 과도한 업무만 부여하며, 회식과 비공식 모임에서 고립시키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조직에서 밀려나 창가 자리에서 별다른 업무 없이 정년이나 퇴직을 기다리는 직원을 ‘마도기와조꾸’(窓際族), 곧 ‘창가족’이라고 불렀다. 마도기와족은 반드시 동료들이 공동절교한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이 해고 대신 업무와 권한을 박탈해 자발적인 퇴직을 유도하는 일본식 인사관행을 상징한다.
최근의 판례에서도 ‘무라하찌부 상태’라는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다. 2024년 10월 3일 나고야고등재판소는 미에(三重)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에서 근무하던 여성 연구자가 교수들에 의해 연구·교육조직에서 사실상 배제된 사건에서, 당사자가 구조계 연구집단에서 고립되어 ‘말하자면 무라하찌부 상태’에 놓였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러한 배제와 부당한 처우 가운데 일부가 괴롭힘이자 국가배상법상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이 판례는 현대의 무라하찌부가 물리적인 마을이 아니라 대학의 전공분야와 연구조직, 정보와 인적 관계망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자는 형식상 대학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연구발표회, 대학원생 지도, 연구실 배정, 공동연구와 정보교환에서 배제되면 사실상 연구자로서 활동하기 어렵다.
셋째, 자치회와 지역공동체에서의 배제
세 번째는 자치회와 지역공동체에서의 배제다. 쓰레기 수거장 이용, 공동도로와 농업용수 사용, 축제 참가, 회람판 전달, 재난정보 제공 등에서 특정 가구를 제외하는 방식이다.
특히 귀농·귀촌자, 외지인, 지역사업에 반대하는 주민, 원자력발전소나 폐기물시설 등 지역 현안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집단적 압력이 가해지는 사례가 계속 문제로 제기되어왔다.
법무성의 인권침해 사건 통계에서도 ‘村八分’는 사적 제재와 관련된 독립적인 인권침해 유형으로 분류되어 집계되어왔다. 예를 들어 법무성 통계에는 연도별로 많지는 않지만 무라하찌부를 이유로 인권구제절차가 개시된 사례가 나타난다. 피해자는 법무국의 창구, 전화, 인터넷을 통해 인권상담과 피해신고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치회장이나 자치위원에게 행정정보 전달, 재난업무, 주민조사 등의 공적 업무를 맡기면서 사실상 행정의 말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자치회가 특정 주민을 배제하면 단순한 사적 인간관계의 단절을 넘어 행정서비스와 생활정보의 차별적 제공이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인터넷의 ‘디지털 무라하찌부’
네 번째는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나타나는 ‘디지털 무라하찌부’다. 단체대화방에서 추방하거나 팔로우를 집단적으로 끊고, 특정인을 차단하며, 익명으로 비방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전통적인 무라하찌부는 일정한 마을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디지털 배제는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다. 게시물과 비방이 복제되고 검색되며, 피해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도 공격이 계속될 수 있다.
더구나 과거에는 화재와 장례라는 최소한의 두 가지 협력이라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상의 집단공격은 그러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없다는 점에서 ‘村八分’가 아니라 ‘村十分’, 곧 열 부분 모두를 끊는 완전한 배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다만 단체대화방에서 누군가를 한 차례 제외하거나 팔로우를 끊은 모든 행위가 법적으로 무라하찌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법원도 지속성과 집단성, 피해자의 사회생활에 미친 영향, 비방과 협박의 유무 등을 종합해 위법성을 판단한다.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온라인 대화방 퇴장은 사회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 무라하찌부와 동일하게 볼 수 없다고 판단한 판례도 있다.
코로나19와 새로운 배제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시기에는 감염자와 의료인, 대도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코로나 무라하찌부’도 사회문제가 되었다. 감염된 사람의 집이나 직장에 비난문을 붙이고, 의료기관 종사자의 자녀를 학교와 보육시설에서 기피하며, 외지 차량을 감시하거나 귀향자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무라하찌부의 핵심이 단순한 전통풍습이 아니라, 집단이 위험과 불안을 특정 개인에게 전가하고 배제함으로써 내부의 결속을 확인하는 사회심리적 구조에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체가 감염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신상과 이동경로를 폭로하고 가족까지 비난한다면, 방역은 쉽게 사적 제재와 인권침해로 변질될 수 있다.
현대 일본인들의 인식
현대 일본인들의 무라하찌부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 말은 오늘날 공동체 질서를 지키는 정당한 제재라는 의미보다 폐쇄적 지방사회, 집단 따돌림, 다수의 횡포,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복,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일본인들 스스로도 ‘무라사회’(ムラ社会)라는 말을 농촌에만 한정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기업·관료조직·대학·정당·업계단체를 비판할 때 사용한다. 겉으로는 현대적인 조직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외부의 비판을 차단하고, 선후배와 파벌관계를 중시하며, 조직의 잘못을 고발한 사람을 배신자로 취급할 때 ‘무라사회적이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다만 지방의 인구감소와 고령화, 공동체 붕괴가 심화되면서 지역의 상호부조 자체는 필요하다는 인식도 존재한다. 독거노인의 안부 확인, 재난 대피, 제설작업, 산림과 농업용수 관리, 전통문화와 축제의 유지에는 주민협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공동체의 연대가 아니라, 연대가 개인의 자유와 이견을 억압하는 강제수단으로 변할 때 발생한다.
민속학계 내부에서도 무라하찌부를 단순히 과거의 기이한 민속이나 문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권문제로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일본 정부의 대응
현재 일본 정부도 무라하찌부를 전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법무성은 관련 피해를 인권상담과 인권침해 사건의 대상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법무국의 인권상담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법무국은 당사자의 신고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필요한 경우 관계자에게 개선을 권고하거나 조정을 시도한다. 다만 법무국의 인권구제조치는 법원의 판결과 같은 강제집행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학교에서의 집단따돌림에 대해서는 2013년에 제정된 「이지메방지대책추진법」(いじめ防止対策推進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학교와 교육위원회가 예방조치와 조기발견, 상담체제 정비, 사실조사를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학생의 생명·심신·재산에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의심이 있거나, 이지메 때문에 상당한 기간 학교에 결석하게 된 의심이 있는 경우에는 ‘중대사태’로 규정해 학교 또는 학교설치자가 조사조직을 구성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 등은 필요에 따라 재조사를 실시할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지메에 대한 대책도 법률이 정한 기본시책에 포함된다.
직장 내 집단배제는 노동법상 파워해러스먼트(power harassment, 일본어로는 パワーハラスメント, 줄여서 パワハラ라고 함), 사용자의 안전배려의무 위반, 민법상 불법행위로 다루어질 수 있다. power harassment는 일본에서 만들어져 널리 쓰이는 일본식 영어 표현이다. 자연스러운 영어로는 상황에 따라 workplace bullying, abuse of authority, workplace harassment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다. 사용자가 배제와 괴롭힘을 알면서도 방치하거나 오히려 조장한 경우에는 가해자 개인뿐 아니라 법인과 사용자도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
법과 제도의 한계
그러나 법과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집단배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라하찌부는 명시적인 명령서나 규약 없이도 주민들이 말을 걸지 않고 협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해 사실과 책임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가해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주민들이 각자 판단한 일이다”, “자치회 활동에 협조하지 않아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피해자는 개별 행위들이 서로 연계되어 자신을 공동체에서 몰아내기 위한 집단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만 따로 떼어놓으면 회람판을 한 차례 전달하지 않은 일, 인사를 하지 않은 일, 회의일정을 알리지 않은 일처럼 사소하게 보일 수 있다.
바로 이처럼 책임은 분산되지만 피해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무라하찌부형 폭력의 특징이다. 누구도 자신이 주도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피해자는 일자리와 생업, 정보, 인간관계, 명예와 정신건강을 동시에 잃을 수 있다.
집단배제는 직접적인 폭행보다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멍이나 상처가 남지 않고, 노골적인 욕설과 협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계속되는 무시와 정보차단, 공동시설 이용방해는 피해자에게 자신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각을 심어준다. 이런 점에서 무라하찌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하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하찌부와 왕따는 같은가?
무라하찌부와 현대의 왕따·이지메는 동일한 현상은 아니다. 무라하찌부는 생업과 의례를 공동으로 수행하던 촌락에서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가해진 집단제재였고, 현대의 왕따는 학교·직장·인터넷 등 훨씬 다양한 공간에서 개인적 감정, 경쟁, 차별, 질투, 권력관계 등에 의해 발생한다.
무라하찌부의 대상은 개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인 경우가 많았고, 입회지와 농업용수, 쓰레기 처리, 장례와 노동교환 등 생활의 물질적 기반까지 제한되었다. 현대의 이지메는 주로 또래집단의 심리적·사회적 배제를 중심으로 하지만, 온라인 비방과 폭행, 금품갈취, 교육기회의 침해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는 다수가 한 사람과의 관계를 집단적으로 끊고, 배제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까지 압박하며, 피해자의 고립을 통해 복종을 얻어낸다는 공통된 구조를 지닌다.
집단 안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를 주도하는 사람,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사람, 잘못임을 알지만 침묵하는 사람, 피해자를 돕고 싶지만 자신도 배척당할까 두려워 물러서는 사람이 있다. 무라하찌부가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악한 지도자 때문만이 아니라, 다수의 방관과 침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만 있었던 현상인가?
결국 무라하찌부는 일본에만 존재하는 기이한 풍습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왕따와 향촌사회의 출향·문중 배제, 중국 농촌의 종족·향촌사회에서 이루어진 배제, 서구사회의 오스트라시즘(ostracism)과 보이콧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아테네의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는 특정 시민을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추방하는 공식적인 정치제도였고, 영어의 ostracism은 오늘날 사회적 배척을 뜻한다. 보이콧도 특정인이나 기업과의 거래와 교제를 집단적으로 끊어 압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무라하찌부와 유사하다.
그러나 모든 집단적 불매와 절교를 부당한 무라하찌부라고 볼 수는 없다. 노동자나 소비자가 불법과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시민적 의사표현이 될 수 있다. 반면 폐쇄된 공동체가 개인에게 반론과 방어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생업과 기본생활을 파괴하려 한다면 사적 제재와 인권침해가 된다.
다만 일본의 경우 촌락공동체의 강한 상호의존성, 중세 소우손의 자치와 징계, 에도시대의 연대책임과 신분질서, 근대 이후의 군대·기업·학교·관료조직 문화가 결합하면서 무라하찌부라는 독특한 명칭과 역사적 기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공동체의 연대와 개인의 양심
공동체는 인간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억압할 수도 있다. 공동체의 연대가 약자를 돕고 재난에 대응할 때는 미덕이 되지만, 개인의 양심과 비판을 억누르고 내부고발자를 처벌할 때는 폭력이 된다.
무라하찌부의 역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사람은 단순히 공동체의 관습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부정과 잘못을 외부에 알린 사람이다. 앞서 봤듯이 1952년 우에노촌 사건에서 배척당한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라 부정선거를 고발한 여고생과 가족이었다. 집단의 입장에서는 부정선거보다 ‘마을의 일을 외부에 알린 행위’가 더 큰 죄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대의 기업과 군대, 학교와 관료조직에서도 반복된다. 조직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보다 그것을 고발한 사람을 ‘조직의 명예를 더럽힌 배신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내부고발자에게 업무를 주지 않고,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며, 동료들이 말을 걸지 않게 만드는 행위는 현대판 무라하찌부라고 부를 만하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조직의 잘못을 숨기는 데 있지 않다.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조직이 더 큰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높은 차원의 충성일 수 있다. 반대로 부정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조직의 평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 전체를 부패시킨다.
무라하찌부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집단의 화합은 개인의 권리와 양심을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당하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개인을 매장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정당한 이견과 고발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다.
공동체의 진정한 힘은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까지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비판을 이유로 생업과 인간관계를 박탈하지 않으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을 때 공동체는 비로소 성숙해진다.
2025. 6. 24. 05:5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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