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지구환경 생태계 문제

가우디를 팔고 자연을 버리는 사람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의 이름으로 벌이는 상업주의와 그린워싱

雲靜, 仰天 2026. 8. 14. 13:53

  가우디를 팔고 자연을 버리는 사람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의 이름으로 벌이는 상업주의와 그린워싱

                               서상문(역사학자/시인/화가)

올여름, 우리는 지독한 더위를 몸으로 겪었다. 금년만이 아니다. 해마다 겪는 일이다. 폭우가 퍼붓고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폭염이 찾아오는 일이 되풀이됐다. 이제 기후변화는 과학자들의 논문 속에 존재하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과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우리가 흘리는 땀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자연을 파괴해서 돈을 벌다가 이제는 ‘자연’이라는 말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또 어리석은 돈을 챙긴다. 환경을 이야기하고 생태를 이야기하면서 그 환경과 생태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

최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 전시 기사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가우디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몇 년 전, 「140년째 짓고 있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라는 글에서 나는 가우디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소개하면서 그의 건축적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특히 가우디가 자연의 외형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적으로 관찰하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구조와 질서와 통일성을 찾아 그것을 건축에 옮겼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식물 같은 기둥과 환상적인 곡선, 곡면에는 그러한 자연관이 스며 있다.
https://suhbeing.tistory.com/m/1435

가우디에게 자연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스승이었다. 그것도 거역할 수 없는 큰 스승이었다. 그가 실제 건축에서도 주변 지형을 무조건 깎아내기보다 그것과 조화를 이루려 했고, 현장에서 나온 돌과 자연의 형태를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철학 있는 예술가가 죽은 지 100년이 되는 해에 그의 이름을 내걸고 대규모 전시를 열면서 정작 그 행사를 위해 자연에 얼마만큼의 부담을 떠넘기는지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역설이 있을까? 어쩌면 모욕일 수도 있겠다.

자연의 건축가를 팔면서 자연에는 청구서를 떠넘기다니!

이번 서울 전시는 건물 여러 층을 사용하는 대규모 몰입형 전시로 기획됐으며, 건축·자연·구조·상징 등을 가우디의 핵심 세계관으로 내세우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가장 먼저 한 가지를 묻고 싶다. 이 전시를 만들기 위해 자연은 얼마의 값을 치렀는가?

나도 화가로서 전시회를 여러 번 열어 봐서 잘 아는데 대규모 전시장에는 가벽이 필요하고 바닥재가 필요하다. 조명과 대형 영상장치, 전자장비, 각종 구조물과 장식물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만들고 설치하고 철거하고 운반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전시가 끝나면 상당한 양의 폐기물도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이것들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전시를 연다. 아예 큰 전시장은 초대해주지 않는 한 찾지를 않는다.

그런데 자연을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삼았던 가우디의 이름을 내건 전시라면 일반 전시보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얼마의 전기를 썼는가?
얼마의 물을 썼는가?
얼마의 탄소를 배출했는가?
어떤 자재를 사용했는가?
전시가 끝난 뒤 가벽과 구조물은 어디로 가는가?
재활용률은 얼마인가?
전시를 유치하고 돈을 벌 생각을 하기 전에 이런 문제부터 계산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그런 준비도 없이 가우디라는 세계적인 이름이 있으니 일단 전시를 유치하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표를 팔고, 각종 상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앞섰다면 그것은 문화사업 이전에 상업적 장사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자연’을 전시의 핵심 테마로 내세우면서 전시 자체가 자연에 미치는 환경적 비용을 관객에게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의 문제와도 맞닿는다. 그린워싱은 실제 환경적 성과보다 친환경 이미지를 부풀려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전시장 벽에 숲을 비추고 나뭇잎을 흔들리게 한다고 친환경이 아니다. 새소리를 들려주고 꽃과 나무와 곡선을 영상으로 보여준다고 자연친화적인 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 자연은 스크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스크린을 밝히기 위해 발전소에서 생산해야 하는 전기 뒤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이미 2020년에 「대량소비가 자연재해의 주범임을 더 늦기 전에 교육해야 한다!」라는 글에서 오늘날 생태위기의 근본 원인을 인간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서 찾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썼다.

“소비는 탐욕의 다른 행위다.”
https://suhbeing.tistory.com/m/936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남용이 결국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 결과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내 글의 요지였다. 그래서 개인들 역시 기후·환경·생태계와 자원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주장을 해왔었다.

지금도 나는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제 우리는 자연자원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이미지까지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우디 진품을 보러 갔는가? 가우디라는 브랜드를 소비하러 갔는가?

두 번째 문제는 더욱 노골적인 상업주의다. 가우디라는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내세우면 일반 관객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가우디의 작품이 한국에 왔구나’라거나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의 진품을 직접 볼 수 있겠구나’라고! 그 기대 자체가 입장권을 사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상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원본은 원본이고, 복제품은 복제품이다. 레플리카(replica)는 아무리 정교하고 공인을 받았더라도 가우디가 직접 손을 대어 만든 원본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3D 복원물 역시 현대 기술로 재현한 것이며, 미디어아트는 오늘날 제작자들이 가우디의 작품을 해석해 만든 새로운 영상 콘텐츠다.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적으로 얼마든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실제 건축물을 한국까지 가져올 수 없는 만큼 3D와 미디어 기술로 공간을 재현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차이를 얼마나 정직하게 관객에게 알리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이 진품인지, 무엇이 복제품인지, 무엇이 현대에 만들어진 재현물인지 전시 홍보단계에서부터 누구라도 즉시 구별할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우디’, ‘공식’, ‘100주년’, ‘월드투어’, ‘특별전’ 같은 언어를 앞세워 진품의 아우라를 최대한 끌어올린 뒤 실제 전시장에서는 상당 부분을 복제품과 디지털 재현물로 채운다면, 그것은 ‘진품의 아우라를 이용한 상업적 눈속임’이나 다를 바 없다.

진품이 30점이면 30점이라고 하면 된다. 복제품이 40점이면 40점이라고 하면 된다. 영상물이면 영상물이라고 하면 된다.

왜 그것을 명료하게 구별해서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먼저 ‘가우디’라는 거대한 이름부터 팔려고 하는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가우디라는 이름에 값이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건축은 상품이 되고, 그의 곡선은 디자인 상품이 되고, 그의 이름은 굿즈(goods)에 붙는다. 관객은 가우디를 보러 왔다가 가우디라는 이름이 붙은 또 다른 상품을 들고 전시장을 나간다.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시를 만드는 데 돈이 들고, 기획자와 근로자가 있기 때문에 적정한 입장료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화를 통해 돈을 버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 문화를 이용하는 것은 다르다. 더구나 자연을 평생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을 이용해 자연의 이미지를 팔고, 진품과 복제품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 상품가치를 극대화하고, 다시 굿즈까지 팔아 수익을 극대화한다면 그것은 가우디를 기리는 행위인가? 가우디를 이용하는 상행위인가?

나는 후자에 더 가까워질 위험이 있다고 본다. 가우디가 상품이 되고 자연마저 상품이 된다. 한쪽에서는 가우디를 팔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연을 판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결합해 돈을 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멈추면 되살아난다”

나는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에 또 하나의 글을 썼다. 제목이 「코로나 위기를 지구생태계 회복의 기회로! 멈추면 되살아난다!」였다.
https://suhbeing.tistory.com/m/1004

코로나 균들의 내습 덕분(?)에 인간들의 이동과 생산, 소비가 갑자기 멈추자 곳곳에서 자연이 놀랍게 회복되는 모습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멈추면 되살아난다.”

그리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려놔야 한다”고 썼다. 끝없이 이동하고 개발하고 확대하고 소비하는 것이 곧 발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구는 한번 임계점을 넘어 망가지면 멸종된 생명처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나는 2021년에 쓴 시 「인류 共業의 과보」에서도 다시 표현했다.
https://suhbeing.tistory.com/m/1319

“덜 쓰고 안 잡으니 새살 돋듯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더 편해지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지 마라.”

발전이 능사가 아니고 인간이 자연을 헤집고 부수고 없애면서 만들어낸 결과는 결국 인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것을 불교적 용어를 빌려 ‘공업(共業)의 과보’라고 불렀다. 한 사람의 탐욕만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수십억 인간의 욕망과 소비가 모여 만들어낸 집단적 업(業)이기 때문이다.

2023년 「우리 모두의 共業 : 집단 과보」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https://suhbeing.tistory.com/m/1601

“우린 얼마나 더 共業의 과보를 치러야 하나.”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에서 물었다.

“우리가 사는 집 정녕, 이대로 좋은가?”

그 질문을 지금 가우디 전시장 앞에서 다시 던지고 싶다. 우리가 사는 집은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아니고 카사 밀라도 아니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다! 가우디가 아무리 위대한 건축가였어도 이 집은 짓지 못했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은 허물어지면 다시 지을 수 있다. 그러나 45억 년 동안 수많은 생명이 서로 의존하며 만들어온 이 지구 생태계는 한번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무너지면 돈으로도, 3D 프린터로도, 인공지능으로도 다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유일한 집을 헐어가면서 가우디의 집을 구경한다. 이것이야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주최 측만 탓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전시 주최 측만 비판하고 끝낼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장 중요한 책임 하나가 빠지기 때문이다. 관객의 책임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이다.

‘세계 최초’라고 하면 몰려가고, ‘한국 최초’라고 하면 줄을 서고, ‘100주년 특별전’이라고 하면 입장권을 사고, ‘한정판’이라고 하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산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필요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소비하지 않는 것이 생태적 삶의 첫걸음이다.

전시장에서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잘 묻지 않는다. 이것은 진품인가? 복제품인가? 이 거대한 영상을 하루 종일 돌리려면 전기를 얼마나 쓸까? 전시장을 만들면서 나온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가? 내가 사서 집으로 가져가는 이 기념품은 정말 필요한가?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여름이 되면 말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더워졌어?” 더워서 살 수 없다고 소리친다. 누구 때문인가? 자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 때문이다! 기업만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기업이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을 사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자가 ‘가우디’를 상품으로 만드는 것도 그것을 소비해줄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문제를 기업과 정부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나는 2020년의 글에서 개인들의 무분별하고 과도한 소비생활도 전폭적으로 개선돼야 하며, 이러한 문제를 유소년기부터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대량생산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대량소비가 있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공범이다. 그래서 ‘공업(共業)’이라고 했다.

이번 여름 그렇게도 지독한 혹서에 땀을 콩죽 끓듯 흘리면서(내가 그랬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연 생태계의 파괴에 무관심하다면 도대체 인간은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시뻘겋게 달군 쇠가 몸에 닿는 것처럼 뜨거운 40도가 부족한가? 살과 뻬가 녹아 내릴 45도가 돼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도시가 몇 번 더 물에 잠겨야 하는가?
산불로 산이 얼마나 더 타야 하는가?
동식물이 몇 종이나 더 사라져야 하는가?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의 세대가 물과 식량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을 직접 보고서야 깨달을 것인가?

자연은 인간을 협박하지 않는다. 복수하지도 않는다. 자연에는 그런 의지가 없다. 인간이 자연의 순환과 평형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 물리적인 결과가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자연재해’라고 부르지만 상당 부분은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천재(天災)라고만 부를 수 없다. 인재(人災)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류의 공업이 만들어낸 과보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2년 「버린 것과 버려진 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이 버린 것들이
되돌아와 인간을 버린다.”
https://suhbeing.tistory.com/m/1372

나는 지금도 이 두 줄보다 오늘의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을 찾기 어렵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버린 플라스틱이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우리 몸속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내뿜은 온실가스가 폭염과 폭우로 돌아온다. 우리가 없앤 숲은 산사태와 홍수로 돌아온다. 우리가 파괴한 생태계는 언젠가 식량과 물의 위기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한 수많은 물건들은 결국 쓰레기가 되어 다시 인간의 삶을 포위한다.

버린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온다. 가우디라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물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번 가우디 전시 기사를 보면서 정작 가우디 자신에게 묻고 싶어진다.

가우디가 지금 살아 있어서 서울에 와 자기 이름을 내건 이 거대한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까라고!

자연의 나뭇가지에서 기둥을 배우고, 식물의 곡선에서 건축을 배우고, 주변 지형을 거스르기보다 그것과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했던 그라면 거대한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자기 건축물을 보면서 감탄부터 했을까? 아니면 먼저 물었을까? “이것을 만드는 데 자연을 얼마나 썼습니까?”

나는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작품의 진품과 복제품과 영상물이 뒤섞인 전시장과 자기 이름을 붙인 상품들이 팔리는 공간을 둘러본 뒤에는 또 하나를 물었을 것 같다.

“당신들은 내 건축에서 자연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돈을 보았습니까?”

이 질문은 주최 측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관람권을 사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가우디의 건축을 정말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건축물을 닮은 기념품 하나를 더 사는 것보다, 그가 평생 바라본 자연을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스승으로 보는 것! 무엇인가를 더 만드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존중하는 것!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을 풍요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멈출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우디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짜 유산이 아닐까?

나는 다시 말한다. 멈추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멈출 줄 모른다고! 멈추기는커녕 이제는 자연을 사랑했던 가우디의 이름까지 팔아서 더 소비하고, 더 이동하고, 더 만들고, 더 버린다. 그러면서 매년 여름이면 하늘을 쳐다보며 왜 이렇게 더운지 묻는다.

하늘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은 이미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생활의 습 속에 있다. 내가 쓴 시의 마지막 질문을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던진다.

“우리가 사는 집 정녕, 이대로 좋은가?”

이번 여름 그렇게 혹독한 더위를 겪고도 이 질문 앞에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인간은 아직도 자연이 보내는 경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알아듣지 못한다면 다음에 날아올 자연의 청구서는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 청구서에는 가우디 전시의 입장권처럼 몇 만 원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는다. 폭염, 폭우, 산불, 가뭄, 식량난, 생물종의 멸종, 그리고 마침내 인간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자연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 인간을 먼저 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자연을 버렸다. 그리고 인간이 버린 것들이 결국 되돌아와 인간을 버릴 것이다.

2026. 8. 14. 13:53.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제8회 서상문 화가 개인전(2024. 9. 21~10. 20) 출품작(현재 작가 본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