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보수주의의 원점, ‘동경재판’을 다시 생각한다
서상문(사단법인 독도찾기운동본부 홍보국장)
한 국가의 극우세력은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라는 토양에서 자라난다. 일본의 극우파 역사왜곡 범죄자들이 자행한 일본의 과거사왜곡 사태는 전후 일본이 대외 팽창적 제국주의 의식에 대한 자정력을 상실하고, 우경화로 나아간 결과 생겨난 필연적 현상이다. 일본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는 근본적으로는 만세일계의 황국이라는 민족우월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임나설’의 날조, 임진왜란의 도발, 근대이래 아시아 인국에 대해 감행한 수많은 침략전쟁은 모두 근세 일본국수주의자들이 날조한 근거 없는 민족우월 의식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의 비극적 화근으로 작용한 이 민족우월 의식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치유되지 못한 채 황국주의자들의 혈관 속에 그대로 흘렀다. 전후 미국의 주도하에 추진된 연합국의 이른바 극동국제군사재판(1946.5.3~1948.11.12), 즉 일명 ‘동경재판’이 그 직접적 원인이었다. 전승국인 미국이 전범재판을 포함한 전후 처리를 올바르게 행하여 일본우경화의 싹이랄 수 있는 민족우월감을 제도적으로, 타율적으로 제거하거나 혹은 정화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편의적으로 행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본을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었던 호기를 방기한 셈이었다.
동경재판은 A급 전범인 이른바 ‘천황’을 전범의 혐의를 벗겨 그대로 국가 권력의 구심점으로 존치시켰다. 이점은 이 재판의 성격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핵심코드이다. 히로히또(裕仁)천황은 전전 국가권력의 수반이자 근대계급제도의 유산인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A급 전범인 도조 히데끼(東條英機)가 제기했듯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도발을 용인한 최고 결정권자였음에도 연합국판사단(사실상 미국)은 전범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2년 반에 걸친 재판과정에서 A급 전범으로 체포 구금된 용의자 가운데 피소된 28명만 유죄판결을 받았다.(교수형 도조 히데끼 등 7명, 종신금고 16명, 20년 금고 1명, 7년 금고 1명, 기타 3명) 여기서 네 가지 사실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천황의 전쟁책임론이 폐기되어 전범에서 제외된 것은 곧 전쟁책임에 대한 진정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A급 전범을 포함한 유죄판결을 받은 자 전원은 전범의 괴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들 권력의 원천인 천황을 단죄하지 않고 어떻게 여타 전범에 대한 단죄가 가능할 것이며, 또 전쟁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말하자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은 단지 형식논리에 따라 천황과 모든 전범을 대신하여 본보기로 처해진 것일 뿐이다. 일본정치학의 대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일본은 “정치적 책임을 질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국가”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문제 의식에서였다.
둘째, 전쟁기간 동안 전쟁수행에 대한 권력행사의 주체와 실상에 눈이 가려져 있었던 보편 일본인들은 당연히 전쟁도발과 패전의 죄과를 A급 전범인 이들 천황의 하수인들에게 물었고, 그 외에 같은 천황의 하수인 B급, C급 전범―일본군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남경, 상해, 마닐라, 사이공, 랭군, 괌 등지에서 판결, 집행된 자들―에 대해선 오히려 용서와 동정을 보냈다. 그리고 ‘천황’의 치죄에 대해선 보수우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반대하였다.
1945년 12월, 연합국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지와 패전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때 천황은 살아있는 신 즉, ‘아라히토카미(現人神)’로서 일본민족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패전에 대해선 후회, 비탄, 낙담 또는 유감 등의 다소 복합적 정서가 나타났지만, 하루 빨리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공통되었다. 바로 이점이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훗날 정당화, 미화할 수 있었던 극우세력의 온존을 가능케 한 토양이었다.
과거에 대한 준엄한 자기반성이 결핍되어 있는 민족에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전쟁에 관해 보여주는 집단적 의식은 대체로 극과 극의 모습을 띄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귀결점은 합치된다. 자신들의 국가가 부강해졌을 때 다시 한 번 과거 승전시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하는 향수가 되살아나고, 만약 경제발전이나 국가의 위상이 일정한 수준에서 머물러 장기침체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역시 좋았던 과거를 그리게 된다.
일본 NHK가 행한 ‘일본인 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본이 일류대국이라고 의식한 사람이 1973년에 41%였고, 1983년에는 57%로 증가했다. 고도성장을 이룬 1980년대에 그들은 그것이 냉전시기 미국의 핵우산 속에서 안보의 무임승차로, 또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의 특수 덕분이었음을 망각하고 전국민의 과반수가 물질적 성과를 스스로 대견해 한 것이다. 또한 1986~87년간 아사히신문이 시행한 독자투고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내용 중 85%가 자신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가해자라고 응답한 자는 겨우 5%에 불과했다.
A급 전범으로 처형된 7인의 위패가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된 것도 1979년이었고,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나까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등, 총리대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교과서왜곡의 시도와 함께 우경화의 신호탄 격인 나까소네의 전후 50년 일본정치의 총결산이라는 정치이념이 받아들여진 것도 바로 1980년대 이 시기였다.
셋째, 천황을 단죄함으로써 일본가의 상징으로서 그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선 한 때 ‘천황’ 폐기론 까지 주장했던 좌익까지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좌익이 누군가? 그들은 전후 ‘평화헌법’과 반핵3원칙 고수, ‘미-일 안보동맹’반대라는 정치이념을 표방함으로써 일본의 우경화를 견제하는 저울의 추로 자처한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일본이 전쟁발동에 대해서 전세계에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천황의 권위는 인정하고자 했다. 좌익은 훗날 1990년대에 들어와 우익에 영합하여 일본의 대외진출 관련 법안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일본의 대외팽창주의 노선에 합류했다. 좌․우익이 국가주의라는 일본호의 한배에 탄 것이다.
넷째, 제소된 전범의 숫자나 형량이 타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관대했다는 점이다. 1945년 2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즉, 일본전범을 처리한 같은 기간동안 미국, 호주, 영국, 네덜란드,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정부, 필리핀, 중국(국민당 정부) 등, 7개 국가들이 B, C급 전범을 사형에 처한 971명(984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에 비하면 A급 전범을 사형 7명으로 매듭 지은 것은 모두 미국의 자국 편의주의에 따른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전쟁범죄인, 직업군인 외에 극단적인 국가주의 단체 지도자, 식민지 행정장관, 언론 활동으로 침략전쟁에 협력한 일본 각계의 골수 파시스트 약 20만 명을 ‘숙정’했다고 하지만,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미군 점령구 전체 인구 1,318만 3,000명 가운데 344만 1,800명이 기소되어 정식 판결을 받은 자가 전체 인구의 7.2%에 달하는 94만 5,000명이나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의 경우 전범으로 지목, 기소된 자들 가운데는 이런 저런 이유로 풀려나 정치권력에 복귀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초대 자민당 당수가 된 하토야마 이찌로우(鳩山一郞), 내각수상으로 등극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대표적 케이스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미-소 냉전의 심화에 따라 일본을 공산세력의 확대를 막을 방파제로 삼기 위해 미국이 일본과 결탁한 야합이었다. ‘마루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일본관동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결과를 입수하기 위해 미국이 관련 연구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지 않기로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은 사실은 이를 입증하는 한 예다.
비밀협정이 벌여놓은 틈을 비집고 일본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의 호전에 발맞춰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중국도, 대만도, 한국도, 그리고 필리핀을 포함한 아시아 제국이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할 일본정부의 침략에 대한 배상을 자의, 타의(일본을 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막아낼 방파제, 즉 미국의 방위 부담을 들어줄 역할을 수행할 ‘쥬니어’로 육성시키고자 획책한 미국이 개입됨으로써)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일본우익은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으로 곡해하고 선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움트기 시작했다.
즉, 그들은 침략전쟁에 대한 배상과 사과 요구가 제대로 관철되지 않은 점을 뒤집어서, 침략전쟁이 정당했다고 하는 정당화를 시도한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하야시 후사오(林房雄)의 ‘대동아전쟁 긍정론’은 이 조류를 대변한 신호탄이었고, 그 후의 역사왜곡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였다.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미의 힘겨루기 시대가 도래하자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패권장악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왜곡은 일본이 지난 걸프전에서 달러를 기부하고도 정치, 군사대국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점에 심하게 자극 받은 극우세력의 초조함을 드러낸 현상으로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상전이었던 미국에 대해서도 도전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일본국민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 태평양전쟁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전쟁이라고 호도한다. 그들의 논리로는 미국이 가해자이고 일본은 피해자였다.
미국의 원폭투하를 상징하는 히로시마의 철골만 앙상하게 남은 돔 양식의 건물은 남겨놓고, A급 전범을 심리한 일본군사학교, 그리고 7명의 전범을 교수대에 올려놓았던 스가모(巢鴨)감옥은 모두 깡그리 밀어 버리고 지금은 각기 東京市政廳과 동경최고의 빌딩으로 탈바꿈시켜놓은 것은 무얼 말해주는가? 그들이 말한 대로 정녕 동경재판은 전승국에 의한 ‘징벌적’ 재판이었을까? 징벌적 재판이었다고? 그래, 그네들 논리대로 ‘징벌적’ 재판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징벌치고는 너무나 관대하지 않았는가!
위 글은 내용을 줄여「역사왜곡 ‘배후’는 실패한 과거 청산」이라는 제목으로『시사저널』, 2001년 4월 10일자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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