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원칙과 우리의 무원칙
서상문/ 독도찾기운동본부 홍보국장
뒤늦게 나선 한국 정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중국 정부의 체계적 대응 자세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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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 모임)이 마련해, 제출한 2002년도 일본 중학교용 역사교과서 신청본 8종이 우려대로 지난 4월3일 문부과학성의 최종 검정을 통과했다. 이대로라면 이 교과서는 오는 8월께 일선 학교에서 채택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주변국의 항의를 의식하여 130여 군데 이상 수정을 지시했다지만, ‘새 모임’쪽의 애초 취지가 그대로 반영되어, 아시아를 유린한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정당화, 미화한 황국사관의 얼개는 고스란히 존치되었다.
일본과 수교시 능동과 피동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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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중 두 나라의 대응이 주목되는 시점에서, 양국의 대응 수위와 양태는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재수정작업 착수’와 같은 구체적 조처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외교적 항의 표현의 강도에서 두 나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정부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는 대응책의 강도나 수위를 보면, 한국 정부는 통과되기 전에도 미온적, 소극적 자세를 보였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통과 뒤에는 뒤늦게 관계부처 긴급대책회의를 여는 등 나름대로 대응을 논의하고 있지만 그 방안은 △재수정 요구 △일본문화개방에 대한 일정 연기 재검토 △주일대사 소환 등 수준이다.
반면, 문제의 교과서가 알려진 뒤 연일 강력한 경고를 발해왔던 중국 정부는 예상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자 주일 중국대사가 주재국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갖는 등, 외교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이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정부가 고려하고 있는 방안들은 모두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대응책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문화개방에 대한 재검토방안의 경우, 왜곡된 과거사를 그린 일본의 대중만화가 이미 국내에까지 들어와 유통되고 있는 마당에 그야말로 이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겠다”는 발상일 뿐이다.
반면 주방짜오(朱邦造) 중국외교부 대변인과 주일 중국대사 천지앤(陳健)의 성명은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중-일 공동성명과 근린제국조항 등의 정신에 기초해 문제를 잘 풀어나가겠다고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강경한 비난과 함께 교과서의 재검정을 요구했다. 한·중 두 나라의 대응이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렇게 다른가?
한·중 양국은 다같이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지배에 대한 되풀이되는 역사왜곡을 조기에 방지할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전후, 냉전시기 두 나라는 각기 일본과의 국교수교가 국가생존의 필수적 조건으로 대두되었을 때 똑같이 일본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능동과 피동이 달랐을 뿐이다. 다시 말해 1965년의 한-일 수교가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주변 담지자로서 어찌할 수 없이 내몰린 결과였기에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마땅히 요구해야할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문제마저 피동적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비해 중국의 건국은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파 일소로부터 시작되었고, 1972년의 중-일 복교는 소련을 견제할 요량으로 미국과 화해를 겨냥한 포석의 일환이었다. 이때 중국은 능동적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요구를 포기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중국지도자들은 중-일 외교관계를 재수립해야할 필요성에서 일본의 과거를 용서하고 물질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적 사정과 맥락은 다소 달랐지만 대만 국민정부의 장제스도 1952년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시 ‘이덕보은’(以德報怨)의 관점에서 역시 일본 정부에 전쟁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임기응변적 우려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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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는 말과 입이 따로 놀았고, 반복되는 역사왜곡으로 대만해협 양안의 중국인 모두에게 모욕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이악보은’(以惡報恩)인 셈이다. 어쨌든 한·중 양국의 이같은 편의적, 인도적 대응은 분명 지금과 같은 심각한 과거사 왜곡 사태를 초래하게 한 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들은 중-일 복교 때 실기한 역사청산의 경험을 만시지탄의 감이 없진 않지만 반면교사로 여기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재무장과 함께 대외 팽창적 신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 우려의 수준을 넘어 인근국가들로 하여금 경계해야할 정도인데도 일본을 방문하여 그리 서두를 것도 없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면죄부를 자진하여 선사했다. 게다가 그는 일본 문화유입에 대한 빗장마저 풀어줌으로써 스스로 대일 운신의 입지를 좁혀버렸다.
지금까지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통령 자신과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원칙과 동떨어진 유화적, 임기응변적 대응은 이런 한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이다. 정부의 공식적 대응이란 게 한-일 수교 교섭과정에서 일본의 과거침략에 대해 사과 한번 요구해보지 못한 김종필씨를 정부특사로 보내는 등, 외교경로를 통한 대통령과 외교통상부의 우려표명을 전달하면서 일본 정부의 ‘적절한’ 조처를 촉구하는 것이 고작이지 않았던가?
우리 정부의 대일외교가 정말 이런 식으로 부적절한 인물의 특사파견을 통한 임기응변적 우려전달에 그치고 마는 수준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오히려 사태해결을 문제 제공자에게 부탁하는 수동적 처지로 입장이 전도되는 꼴이 되고, 그것은 외교적 흥정카드로 역이용될 소지마저 있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다. 한국 정부는 애초 문제의 교과서에 대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최종 검정 통과여부 발표 이전과 발표 이후로 나누어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일본 정부가 채택을 강행할 경우에 대비해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한 바 있지만, 통과된 이후인 현재도 정부 관련 당국자들은 여전히 마땅한 대응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일본대중문화 개방은 한국쪽이 성급하게 선심을 쓴 사안인데, 현재로선 이를 역사왜곡 문제와 연계시켜야 하는 고육지책임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먹혀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마디로 정부의 방침이란 게 문제의 교과서 통과방침을 철회해주면 대신 약속을 지켜주겠다는 소리다. 일본이 응해줄 리도 만무하지만, 설사 들어준다 한들 우리는 ‘본전치기’이다. 역사왜곡 교과서는 통과시켜선 안 될 당연지사에 해당되지만 일본문화개방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닌가? 반면 중국 정부는 1972년 중-일 복교시 대일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한 대신 일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중국인민에 끼친 중대한 손해에 대한 책임” 통감과 “깊은 반성의 표시”를 명문화할 것을 관계정상화의 한 조건으로 내걸어 관철시켰다.
정권 바뀌면 우왕좌왕하는 대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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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본은 여전히 입 따로 몸 따로였다. 손해에 대한 책임과 깊이 반성하겠다는 말만큼 실천이 뒤따르지 않았다. 초심을 알면 만절을 안다고 하지 않는가? 전후 일본이 미국의 방조 아래 제국주의의 허황된 꿈에 향수를 품고 있는 구시대 인물들을 국가권력에 재기용한 이상 그들은 애당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할 마음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훗날 20여년이 지나 주룽지 총리가 일본 정부는 지금껏 국가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국제적 기준에 따른 사과를 한번도 하지 않았음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 거의 같은 기간에 방일한 장쩌민 국가주석도 일본 왕 앞에 항일의 상징인 인민복 차림으로 나타나 일본의 극우화를 경고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처리를 촉구했다.
예컨대 한국이 일본의 과거사 처리수준에 대한 평가를 대통령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맡겼다고 한다면, 중국은 일본의 역사문제 처리가 국제적 상식수준으로까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담보해주는 족쇄를 풀어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 한국은 정치지도자가 바뀜에 따라 대일정책이 180도로 바뀌는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의 오만한 버릇을 고쳐놓겠다면서 한껏 오만을 부렸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반대로 일본 총리가 직접 나서서 과거사를 직시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보란 듯이 지키지도 않는 일본을 ‘21세기 새로운 파트너십’의 동반자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한 나라의 외교정책 방향이, 그것도 풀어야할 난제가 첩첩산중인 일본에 대해서, 지도자 개인의 호오(好惡)에 따라 원칙없이 뒤집어져도 되는가?
이 점은 국가 최고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대사의 원칙은 바꾸지 않고 차세대 지도자에게 미해결된 정치현안으로 승계시키고 있는 중국 정부와 극명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일례로 중국은 덩샤오핑 시대 이래 정확한 역사기술에 바탕한 올바른 역사교육 문제를 ‘중·일 양국관계의 정치적 기초’이자 출발점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삼았다. 중국지도부는 유고주재 중국대사관의 피폭으로 미국의 중국 흔들기가 개시된 이래 전략적 동반자에서 전략적 경쟁자로 내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유고주재 중국대사관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미국 내 반중(反中) 매파의 중국 두들기기 의도로 보고 있는 중국으로선 일본과 정치적, 경제적으로 협력을 확대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미군 정찰기를 둘러싼 중-미간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상황은 이 판단을 더욱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대만독립을 주창하고 있는 현 대만의 민진당 정치세력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미-일 상호밀착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일본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중국지도부는 ‘중-일 화평’을 깨뜨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과거사의 왜곡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한다. 한국 정부와 비교가 되는 대목은 교과서 왜곡 사건이 발생한 단계에서부터 그들은 이미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해놓고, 그 대응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들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민간교류를 확대해나가 일본 민중에게 일제침략의 역사적 실상을 알리는 것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일본으로부터 일거에 5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방문단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초청해다가 국가주석이 직접 나가 환영의 제스처를 내보여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중국 정부 포괄적 대응 준비
중국은 이처럼 역사왜곡과 같은 중차대한 사태가 발생하면 정부의 관련 부서뿐만 아니라 각종 연구기관도 정세분석을 포함한 대응책을 보고하도록 하고,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일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관행화해왔다. 중국 정부는 향후 모든 관련 학자들로 하여금 일본의 역사 왜곡을 실증적으로 논박하기 위해 이미 그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에 착수했다.
학자, 전문가들의 의견을 허투루 여기며, 이를 겸허하게 경청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지 않는 우리 정부가 이들 집단에 자문하도록 하는 시스템 정착은 요원하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중국처럼 장기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여 실증적인 논박을 가할 수 있도록 관련 학자들을 지원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은 초지일관 문제의 일본 역사교과서가 일본 정부의 최종검정에 합격판정을 받지 않도록 외교부, 주일대사뿐만 아니라 국가주석, 총리까지 나서서 수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공개적인 경고를 되풀이해왔다. 그들이 그렇게 대일 비판 수위를 낮추지 않았던 까닭은 어쩌면 신군국주의의 대두를 기정사실화한 일본의 현 정치상황을 볼 때, 일단 통과되고 나면 교과서 문제는 중국지도부의 외교영향권에서 벗어나고, 그것은 바로 평화헌법의 용도폐기로 직결될 것임을 통찰한 원려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이 간파하고 있듯이 한국인의 행동양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시들해지고 말, 그리고 대책이랍시고 내놓다는 게 모두 근시안적 미봉책뿐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 정부도 중국으로부터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위 글은『한겨레21』, 제354호(2001년 4월 19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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