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代 중국 아편 密輸貿易의 한 단면 : 1842~1887년간 홍콩의 대중국 아편 밀수를 둘러싼 中ㆍ英交涉과 그 영향을 중심으로
徐相文(臺灣 國立政治大學 博士班)
목 차
Ⅰ. 머리말
Ⅱ. 홍콩의 對 중국 아편 밀수에 따른 中英의 이해 상충
Ⅲ. 밀수방지책에 관한 中英의 입장
Ⅳ. 단속 조치의 사후 영향과 그 적절성 검토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아편(鴉片, 阿片, opium)은 근대 중국의 질곡의 역사를 상징한다. 중국인들이 피워댔던 아편은 그들의 심신을 피폐케 했고, 그들의 血淚로 이루어진 국부가 한갓 沒我의 환각 속에 연기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편 흡입자의 초점 잃은 동공에 아편을 공급한 제국주의 상인들의 반인륜적 이기심이 간취될 리 없었고, 쇠잔한 육신으로는 아편 밀수를 방조한 서양 열강의 침략적 간계와 군사 도발에 맞설 수가 없었다.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중국이 제 땅, 제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半植民地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자업자득이었고, 그 표증으로서의 홍콩과 마카오는 최근 1세기 이상이나 외세의 통치에 내맡겨졌다.
이제 이들 두 곳이 중국으로 환속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갔다. 이념대립의 혼돈과 제국주의 침략의 광기로 채워진 20세기를 막 마감한 시점에서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매개체로서의 아편밀수의 한 측면을 본고에 담아 보았다.
아편은 단지 과거사의 박물이 아니다. 현재도 그것이 히로뽕, 헤로인 등으로 그 질과 흡식 양상만 바뀌었을 뿐 중국에서는 여전히 각종 마약이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고 현 중국정부가 퇴치에 고심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정치사회 문제다. 이 같은 작금의 중국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작업을 통해 분명 되새겨 보아야 할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은 通商開港地의 보충항구로 편입됨과 동시에 자유무역항 정책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홍콩은 중국연안 간에 횡행해 온 밀수의 근거지로 이용되었으며 특히 아편의 밀수가 극심하였다. 아편밀수의 성행이란 다름 아닌 淸朝의 稅收 감소를 의미했다. 淸朝의 재정은 거의 모두 각종 관세수입에 젖줄을 대고 있었고 이는 전제왕조를 지탱하는 중요한 재원이었으므로 조정으로서는 탈세방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淸朝의 廣東省 당국은 아편밀수 방지책의 일환으로 1866년을 기점으로 홍콩 인근의 주요지점에 아편 세무국을 설치하는 한편 홍콩 해상에도 ‘海關’ 순찰선을 띄워 밀수업자들을 엄격하게 색출하였다. 이 조치는 홍콩 식민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홍콩 전역을 관세망으로 봉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對중국 무역량을 극대화하려는 영국 정부로서는 홍콩봉쇄를 홍콩 무역 발전의 걸림돌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서로 이해를 달리하게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中英 양국의 공동 현안, 즉 홍콩을 중심으로 한 對중국 아편 밀수무역의 근절 및 그에 따른 淸朝의 홍콩봉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쌍방은 일련의 교섭 끝에 아편밀수 공동방지법을 체결하였다. 이는 제3자인 포르투갈에게 마카오 통치권을 합법화해 주는 이외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본문은 이에 대한 시론적인 대답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 같은 각도에서 본고는 우선 홍콩과 중국 연안 간의 아편밀수가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가 하는 지형도를 그려 보겠다. 다음으로 아편밀수단속을 둘러싼 中英 교섭의 진행 과정을 描出하면서 부대적으로 교섭의 결과와 그 事後 영향을 평가해 보겠다. 이것이 본고의 얼개를 이루는 제재들이다.
논의의 시기는 아편전쟁 이후부터를 상한으로 하여 아편밀수단속의 시행이 그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한 1887년을 하한선으로 삼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일련의 교섭을 진행해온 중ㆍ영ㆍ포르투갈 등 각국 대표들의 개인적인 동기 및 자국 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아편밀수 감수와 세수증대가 의미하는 사회경제적 의미에 관해서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고찰과 엄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광범위한 주제이므로 논급하지 않기로 한다.
Ⅱ. 홍콩의 對 중국 아편 밀수에 따른 中英의 이해 상충
영국 정부는 홍콩섬을 취득한 이후(1841년 홍콩섬 점령, 이듬해 8월 南京條約으로 정식 획득)부터홍콩을 경유하는 수출입품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 자유무역항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7,000여 홍콩섬 거주민의 소비용으로 수입되는 술, 아편 및 담배는 예외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아편 등의 품목에 예외적으로 과세한 이러한 과세정책은 그간 이 같은 제도상의 틈새에서 밀수무역에 종사해 온 상인들로 하여금 홍콩섬과 중국연안 사이의 아편밀수를 더욱 성행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가히 猖獗이라고 형용할 수준에 이르렀다.
거래량 면에서 볼 때 창궐의 수준에 이르게 한 주역은 홍콩 거주 중국인과 외국상인들이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 중 특히 영국 상인은 영국정부와 홍콩 식민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중국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방대한 양의 아편을 밀수하고 있었다. 탈세하기만 하면 증가되는 이윤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는 점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인들의 생래적 물욕 이외에 그들을 밀수의 길로 유인한 제도상의 문제도 한몫 했다. 아편전쟁 이전, 각국 상선이 광주에 도착하면 모든 수출입품목에 대한 세금은 모두 淸朝로부터 전매권을 부여받은 한정된 수의 ‘行商’에게 건네주어 그들로 하여금 대납케 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外商들은 자유로이 그 대리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세금 대납자를 행상에서 ‘買辦’으로 바꾸었고 개항장 항구에 영주한 외국 영사는 그 보증인이 되어 줌으로써(‘領事報關制’) 그들의 비호 하에 납세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편전쟁의 패전자인 淸朝는 패전의 대가로 거액의 배상금 지불과 함께 廈門, 廣州, 寧波, 上海, 福州 다섯 항구를 대외에 개방하도록 반강제되었는데, 이들 항구의 개방이 몰고 올 아편밀수와 그 탈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중국인(홍콩섬 거주의 중국인 포함)이든 외국인이든 중국과 교역하려는 자는 예외 없이 이 다섯 항구를 통해서만 무역활동을 하도록 제한한 바 있다. 그것도 소정의 관세를 납부한 자에게만 항구의 통관을 허락하였던 바, 이는 영국과 홍콩 식민당국에게 對중국 아편무역 확대의 장애로 작용했다.
이런 연유에서 영국 정부는 淸 조정에 정식 통관을 보장받도록 아편무역을 합법화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입장과 달리 淸朝는 홍콩이 공급지가 된 아편밀수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예를 들면 영국이 홍콩을 포함하여 5개 항 이외의 모든 비 조약 항구마저 대외에 개방하라고 요구하자 당시 淸朝의 廣東 欽差大臣 耆英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즉 그는 홍콩이 외국 영토라는 점을 내세워 홍콩과 교역하려는 중국인들은 반드시 5개 항에 각각 설치된 海關에 관세를 납부한 자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 후 1843년 中英 간에 체결된 「虎門條約」에서 中英 양국은 홍콩과의 통상문제와 관련하여 행정상의 상호협조를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거래절차를 합의한 것으로서 요지는 아래와 같다.
홍콩에 물건을 판매하려는 중국인은 먼저 5개 항구 중의 어느 한 海關에서 관세를 납부하고 (對홍콩) 영업 허가증을 발급받는다. 홍콩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고자 하는 중국인 또한 마찬가지로 5개 항구 중 어느 한 항구의 海關에 허가서를 신창하여 출입하고 물건 반입 시 세금을 납부한다. 홍콩 당국은 영국 관리 한 명을 (홍콩에) 대기시켜 거래를 목적으로 입항하는 모든 정크선(Chinese junk)을 대상으로 영업허가증을 검사한다.
요컨대 영국이 탈세방지에 관한 협조를 요청한 중국 당국에 허가증 검사라는 제한적인 협조만 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런데 이는 거래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국인 아편상을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협조하겠다고 한 것이고, 영국 아편상의 밀수행위와 관련해서 그 후 영국이 보여 준 태도는 비협조적이었다. 이 점은 淸朝에도 이미 감지되었던 바, 虎門條約이 정식으로 체결되기 전 조약의 초안이 북경에 전해졌을 때 당시 軍機大臣이었던 穆彰阿가 내보인 아래와 같은 인식에서 읽을 수 있다.
"각 항구(5개 개항장의 海關)가 對홍콩 선박 내왕 무역을 허락하면 홍콩은 물품 판매와 집산지가 될 터인즉 과세가 잘 걷히고 못 걷히고는 전적으로 이에 달려 있다. 현재 수출입 선박은 오직 허가증 소지 여부에 따라 (출입항이) 결정되는데 허가증 검사는 영국 관리에게만 하게 되어 있으니 이미 내 권한이 아니다. 더구나 어디로든 통하는 것이 뱃길이라 선박들도 굳이 다섯 개 항구만을 통해야 할 필요도 없고 화물의 내왕도 구태여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할 까닭도 없다. 만일 악덕 상인이 무역을 하고 있고, 또 영국 관리가 영업허가증을 검사한다 한들 그들이 어찌 우리를 위해 제대로 검사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여기 이 일 처리는 건성으로 하는 바가 있어 다섯 항구의 海關은 아마도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위 인용문에는 외국 아편상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영국 관리(세무사)가 밀수를 단속하고 있는 한 영국 아편상 및 외국 아편상이 비호를 받을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 아니겠냐는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런데 虎門條約 중 영문이 아닌 중국어로 작성된 조약서에는 모든 중국인이 각 省의 비 조약 항구를 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5개 개항통상 항구를 통하지 않는 자에 대해 홍콩출입허가증을 신청하지 못하도록 별도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사태 전개가 보여주듯이 사실상 中英 관세 행정상의 상호협조를 언약한 虎門條約은 아편밀수를 근절하려는 淸朝에게는 유명무실한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인도산 아편의 최대소비지가 되어온 중국에 그 수출량을 늘리고자 한 영국 상인들의 압력에서 자유롭지가 못했던 영국 정부가 세수증대를 위한 중국의 단속에 제대로 성의껏 협조해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 對중국 아편밀수의 해외 거점은 몇 차례 바뀐 적이 있다. 초기에는 마카오가 유일한 집산지였으나 영국의 아편선이 처음으로 黃埔로 입항하게 된 1794년 후부터 점차 黃埔로 옮겨 갔다. 道光朝에 이르러 淸 조정이 黃埔와 마카오를 동시에 봉쇄해 버리자 인동에서 운송해 오는 외국적 아편 밀수선은 廣州 인근 바다인 零丁洋 해상에 정박해 놓은 躉船을 해상의 아편 저장소로 이용하면서 이를 매개로 중국 아편선에 아편을 공급해 주었다.
주지하다시피 아편전쟁으로 인해 조인된 中英 간의 조약은 아편무역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명시되지 않았다. 淸朝는 이에 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래서 아편무역은 여전히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상술한 밀수아편의 중국 유입통로는 계속 유지되었다.
중국 시장의 전방위적인 진출이 봉쇄당하고 있는 현 상태를 타파하여 아편무역량의 극대화, 시장의 전국화를 모색코자 당시 영국의 초대 홍콩총독으로 부임한 헨리 포틴저(Henry Pottinger)는 영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淸조정에 아편무역을 합법화해 줄 것을 누차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들은 번번이 묵살되었다. 그러자 그는 홍콩수역 내에서 상기 유통루트로 거래되는 아편선상의 매매행위를 단속해 온 淸朝에 대해 단속 중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아편무역 합법화의 노력은 포틴저의 후임자인 프란시스 데이비스(John Francis Davis)에게도 이어졌다. 데이비스 역시 여러 차례 아편무역의 합법화를 요구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 선박의 아편반입을 금지하면 오히려 다른 나라 선박이 들어와서 이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 수량은 무제한 증가될 터이므로 영국은 아편의 중국 밀반입을 막을 역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영국측 주장은 중ㆍ영 양국이 아편무역을 어차피 합법화하지 못할 바에는 淸朝가 적어도 아편단속만은 중지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후 영국 정부는 아편의 중국내 밀반입에 대해서는 적당히 눈감아 준, 이른바 방임 정책을 취하였고 이 같은 배경 하에 아편은 공공연히 홍콩으로 반입되어 육상의 창고와 선실 안에 저장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 이후부터 홍콩은 對中 아편 밀수무역의 거점이 된 것이다.
홍콩에 반입된 아편은 홍콩섬과 마카오 거주의 중국인이 일부를 소비하고 기타는 거의 모두 중국으로 밀수입되어졌다. 이 같은 상황은 185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 즉 1842~1858년 간은 요컨대 아편무역의 비합법화, 그리고 영국의 비협조로 인해 홍콩이 아편밀수의 근거지로 전락한 점을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비합법적인 아편무역은 1858년 이후부터 합법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수는 근절되지 않고 淸朝의 세수는 증가되지 않는다. 왜인가? 그 전후 사정과 중국측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논급해 보자.
1858년 天津條約 후 淸朝는 열강 각국과 通商稅 문제를 포함한 通商조약(『通商章程善後條約』)을 조인함으로써 아편을 ‘洋藥’이라는 미명하에 관세를 내고 정식으로 통관할 수 있는 합법적인 상품으로 인정하였다. 즉 중국 관내의 수입은 매 100근 마다 銀 30兩을 ‘洋藥稅’ 명의로 납부하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식 절차만 밟기만 하면 통관이 허용된 후에도 아편밀수가 여전히 횡행했다는 데 있었다. 물론 납세를 피하기 위함에서였는데, 특히 영국 상인은 더 많은 아편을 반입하고자 일부분만 신고하고는 전체를 합법적인 수입품인 양 눈가림하는 편법도 동원하였다.
당시 淸朝에 고용되어 廣東海關의 副稅務司로 있었던 영국인 로버트 하트(Robert Hart, 중국명 赫德 : 1961년 대리 총세무사를 거쳐 1863년 청조로부터 海關 총세무사로 승격 임명된다. 중국명 赫德)에 따르면, 각 항구의 탈세 상황은 동부 廣東이 가장 심하였고 廈門과 福州가 그 다음이었다. 동부 廣東은 뱃길이 여러 갈래여서 크고 작은 선박의 입항이 모두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에서 광동성 경계 지역 이외의 기타 항구로 운반되는 양태는 조금 달랐다. 이를테면 상해로 들어가는 아편은 홍콩에서 기선으로 운반하였고, 寧波로 반입되는 아편은 먼저 기선을 이용하여 홍콩에서 직항으로 상해로 들어와서 상해에서 다시 소형 돛단배를 이용하여 실어나르기도 하였다. 福州의 경우에는 기선이나 외국적 및 內地의 돛단배를 이영하여 홍콩에서 실어왔고, 廈門이나 潮洲도 이와 동일하였는데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內地의 선박이 왕래하기가 특히 편리하였다.
홍콩에서 廣東省으로 반입되는 아편은 모두 외국 선박이 아닌 각 어촌의 나룻배나 고기잡이배 또는 개인 監商 선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밀수가 용이하였다. 감시와 단속의 손길이 제대로 미칠 수 없는 성격의 선박들이었기 때문이다. 하트는 이와 관련하여 밀수량과 유통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당시 아편 밀매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좀 길기는 하나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해마다 약 9만여 상자의 아편이 홍콩으로 들어오는데, 그 중 4만 5천 상자가 寧波ㆍ上海ㆍ長江 및 北三口(菅口ㆍ煙台ㆍ天津) 등지의 북쪽으로 보내지고 있다. 이 4만 5천 상자는 상인이 자발적으로 정식 수입하지 않으면 수입세를 거두어들이기가 곤란한 것이다. 福建의 네 개 港(福州ㆍ廈門ㆍ臺灣ㆍ淡水)을 통해 거래되는 아편은 매년 약 2만 상자에 달하고, 이 洋藥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책을 강구하여 탈세를 막아야 한다. …… 이상의 수량을 제외하고 홍콩 내수용 및 외국으로 나가는 洋藥은 매년 약 5,000 상자다. 원래의 9만여 상자에서 추가된 2만여 상자는 모두 廣東 연안의 각처를 통해 반입된 것이다. 그 중 작년(1885년)에는 8,300상자가 廣州海關, 潮州海關, 瓊州海關, 北海關에서 납세되었고, 약 7,000상자가 홍콩ㆍ마카오 부근의 廣州해관 소속의 여섯 해관에서 납세되었다. 또 8,000상자가 홍콩에서 기선으로 마카오에 반입된 뒤 마카오에서 다시 분산되어 나갔다고 들었다. 이것이 곧 廣東으로 수입된 2만여 상자인데 밀수가 심히 용이하다."
또한 하트는, “洋藥이 중국에 반입될 때 …… 통상항구를 통하지 않고 먼저 홍콩으로 들어간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로부터 운송되어 온 아편이 먼저 홍콩 내로 반입된 다음 다시 중국 연안 각지로 밀반입되었음을 뜻한다. 모두 아편의 對중국 밀수 배분처로 자리 잡은 홍콩의 위상을 가늠하게 만드는 대목들이다. 밀수 상인들이 납세 의무를 저버림으로써 야기되는 淸朝의 세수 감소는 아편 흡식에 기인한 사회기강의 황폐화 문제와 함께 당시 중국당국이 시급하게 막아야 할 급선무였다.
홍콩으로부터의 아편밀수입이 이처럼 노골화되자 淸朝의 몇 가지 대응조치가 뒤따랐다. 즉 1866년 兩廣總督 瑞麟은 정크선을 이용한 東莞, 三水, 順德, 開平(모두 광동성 소재) 이외 지역으로의 밀수에 대하여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즉 단속과 과세징수를 용이하게 할 요량으로 아편이 광동성 관내로만 유입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래도 밀수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재차 1868년 홍콩의 동서쪽 양측 입구에 가까운 九龍 변경과 마카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長州, 佛頭州에 關卡을 설치하고 아편에 대하여 내지 통과세[釐金]를 징수함과 동시에 홍콩을 離港하는 모든 정크선을 검사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들 지역은 중국 내지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당시 통상항구를 통하지 않는 밀수상인들이 빈번하게 이용한 통로였다. 이 요로들에 關卡을 설치한 것은 요컨대 홍콩에서 중국으로 빠져 들어가는 육상, 해상 통로를 세관으로 봉쇄한 셈이었다. 關卡이란 각지 海關에 소속된 하급세관을 이르는 총칭이다.
밀수 단속에 불가결한 영국의 협조가 전제되지 않고는 소기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한 瑞麟은 상기 선포 내용을 廣州 주재 영국 영사 브룩 로버스톤(Brook Roberston)에게 통보하고 해상 단속을 위해 밀수감시용 소형 砲艦을 대리 구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영국 영사는 중국이 이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였고 이러한 關卡이 내지통과세 이외의 여타 세금은 별도로 징수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응낙하였다. 그 결과 그 해 말 兩廣總督은 모두 7척의 소형 포함으로 홍콩 근해상의 밀수업자 단속에 나섰지만 그다지 흡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듯했다.
영국의 협조를 이끌어 낸 兩廣總督을 본보기로 廣州海關 세무사 역시 영국 영사에게 동일한 해상지점에 關卡을 설치하여 對중국 수출 및 홍콩에서 중국으로 운송되는 화물에 일반관세를 징수할 수 있는지 또 홍콩 당국이 세금납부증명서를 발급해 줄 수 있는지 그 여부를 문의하였다.
영국 영사는 이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고 廣州海關이 보유한 증기 순찰선을 홍콩을 출입하는 모든 정크선에 대한 검사에 투입시켰다. 아울러 그는 같은 해상의 卡水門지점에 세 번째 關卡을 설립하였다. 이 해상루트는 홍콩섬으로부터 운송 밀수입되어 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부분만 신고된 아편의 통과량이 최대치를 기록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선상을 배치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중요시한 양광총독 瑞麟은 광주해관의 외국인 세무사와 함께 연명으로 홍콩과 중국 사이를 왕래하는 모든 정크선은 반드시 상술한 해상 關卡에 화물세를 납부해야 한다는 요지의 규정을 공포하였다. 홍콩의 對중국 아편 밀수출은 모두 정크선으로 운송되었기 때문에 廣東당국은 정크선만을 검사대상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합동단속이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해상통관시 납세품목에 속하는 것인데도 離港時 발급받게 되는 납세증서가 없는 물건이 배 안에서 발견될 경우 배와 화물은 모두 몰수토록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은 배에 탄 승객의 수화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육상봉쇄에 이어 밀수아편의 해상루트마저 차단하자 광동당국의 이 같은 조치는 영국 아편상에게는 물론 홍콩 華商에게도 자유무역에 대한 봉쇄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광주해관 순찰선이 왕왕 합법무역의 정크선마저 불법으로 나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홍콩의 무역발전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 1841년 찰스 엘리어트(Charles Elliot)가 홍콩으로 건너가 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도 홍콩 당국의 완전한 보호를 받을 것이며 중국 당국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성명을 근거로 들어 홍콩 식민당국에 자유무역보장을 요구하였다. 屬地主義라는 측면에서 영국 정부는 식민을 보호해야 한다(물론 식민을 진정한 의미에서 자국민으로 여기는지는 별도의 문제가 되겠지만).
그러나 이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중국과의 이해 상충이 불가피하였고 淸朝 또한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상 그 후 10여 년 이상 미해결 상태로 설왕설래되기만 하였다. 예를 들면 1876년 中英 양국은 煙台條約을 체결하는 가운데 관련 문제에 관한 해결 방안을 규정하긴 했지만 결과는 매 한가지였다. 본 조약 제6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홍콩해상의 광주해관이 순찰선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홍콩의 영국 관헌이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순찰선이 華民 商船을 괴롭히고 있다는 점도 언급된 바 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영사관 한 사람을 파견하고 중국 역시 동급의 관리 한 사람을 파견하여 홍콩 식민당국이 파견한 영국 관리 한 사람과 함께 3인 공동으로 조사한 후 처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모쪼록 중국의 세금 징수에 이득이 되고 홍콩 지역에도 손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규정은 영국이 煙台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中英 담판을 수년간 미루게 됨으로써 문제해결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영국이 이처럼 비협조적으로 나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조약이 규정대로 이루어지게 되면 자칫 아편수출을 극대화하려는 영국에게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煙台조약을 8년이 경과한 1884년에 가서야 비로소 비준하였다. 그나마 조항이 규정대로 지켜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때문에 아편밀수 탈세방지와 영국의 홍콩 거주민의 자유무역보호라는 상기 현안에 관련해서 그 이듬해인 1885년에 특별조항까지 두어 신속하게 관원을 파견하여 그 이듬해인 1885년에 특별조항까지 두어 신속하게 관원을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886년 홍콩에서 개최된 中英 ‘洋藥委員會’는 위와 같은 진통 끝에 얻게 된 결실이었는데 그 결과 쌍방은 밀수방지대책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내게 된다. 다음 절에서는 그 합의과정과 각각의 입장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Ⅲ. 밀수방지책에 관한 中英의 입장
煙台條約의 특별조항은 아편 한 상자마다 銀 110兩의 세금을 징수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조약에 규정한 대로 세금이 제대로 걷혀 세수가 증가될 지에 대해서 총세무사 하트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홍콩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밀수범색출을 계속적으로 시행해 나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세금 징수는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세수증대를 위한 밀수단속은 홍콩 당국의 협조가 전제되어야만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의미다. 그 시기 광주해관이 거두어들인 洋藥稅 총액을 연도별로 비교한 통계가 보여주듯이 그의 판단은 어느 정도 적실성을 지녔다.
영국의 협조로 홍콩 부근에 關卡을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앞 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설치 직후인 1870년부터 1880년까지 세수가 계속 증가해왔으나 1881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전해의 70~80% 수준인 261,557庫平에 그쳤다가 익년에는 다시 이의 50% 수준인 136,573庫平兩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해마다 전 해의 세수액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트는 洋藥委員會를 소집하기 전에 미리 홍콩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홍콩 정부 당국에 이른바 躉船 방안을 제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해관은 躉船을 제공하여 홍콩에 정박시킨다. 홍콩 정부는 법령을 제정하여 인도 등지에서 운송해 온 모든 배가 적재한 아편을 모두 이 돈선에 옮겨 싣도록 한다.
둘째, 돈선에 하역한 아편을 다시 기선에 옮겨 실어 마카오로 보내거나 혹은 국기를 달지 않은 소형 선박(신고 등록하지 않은 선박이라는 의미)으로 중국 항구까지 실어 나를 경우 출발 전에 미리 (돈선에 상주하는) 광주해관원에 세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아편을 躉船에서 벗어나 홍콩의 非 중국 세관의 기타 창고에 저장할 경우 역시 운송 전에 세금을 완납해야 한다. 반면에 국기를 건 선박(선박등록이 된)으로 중국 항구에 반입된 아편의 경우 躉船에서 명세서를 발급하고 각 배가 조약 항구에 도착한 후 세금을 납부토록 한다.
셋째, 영국은 자국 선박 및 특별조항에서 규정한 洋藥 대책을 받아들인 국가의 선박만이 인도에서 혹은 중간 항구, 예를 들어 페낭, 싱가포르 및 홍콩에서 아편을 싣고 중국에 들어오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요컨대 아편이 홍콩항을 벗어나기 전에 세금을 거두어 원천 징수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런데 하트가 제시한 상기 방안은 영국 및 홍콩 당국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논쟁의 초점은 주로 다음 두 가지에 맞춰졌다. 즉 해상에 정박되어 있는 돈선에서 옮겨 실어 홍콩으로 싣고 들어온 아편에 대해서는 돈선을 떠나기 전에 먼저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둘째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홍콩 거주민이 흡식하는 아편마저 중국 정부에 세금을 납부해야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당연히 홍콩 당국이 거두어야 할 아편세수의 중국 유입을 막아 홍콩 정부의 재정을 증대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매년 홍콩 정부의 세수 손실이 약 20만에 달하는데 이 액수는 아편 가공을 독점하는 아편상인이 홍콩 정부에 지불하는 금액에 상당한다. 이들 독점 아편상은 원래 면세로 돈선으로부터 생아편을 취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트의 건의대로 돈선으로부터 홍콩에 반입되는 아편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기존의 독점판매가 이윤이 전혀 없는 사업으로 전락할 것이고 더군다나 홍콩의 세수는 중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아편이 인도로부터건, 중간 기착지인 싱가포르, 페낭, 홍콩 등지로부터 일단 중국으로 운송되어 올 경우 영국과 洋藥에 관한 새 규정을 받아들인 국가 소속의 배만이 운송할 수 있도록 영국 정부가 입법화하라는 사안이었다. 영국과 홍콩 정부는 이 안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그들의 판단으로 이 건은 입법화된다 해도 실행될지 의문인데 더욱이 운송선을 제한해 버리면 아편 매출이 떨어질 것을 모를 리 없는 인도의 영국 식민정부가 그 집행에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886년 6월 洋藥委員會가 정식으로 소집되었다. 중국은 蘇松太道 邵友濂과 하트를, 영국은 天津 주재 연사 바이런 브레넌(Byron Brenan)을, 홍콩은 러셀(J. Russell)을 각기 대표로 내보냈다. 煙台條約 특별조항 제7조에 따르면, 홍콩은 순찰선상의 關卡의 밀수 단속행위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만약 중국이 이러한 해상關卡을 철수시킨다면 홍콩은 당연히 하트가 제안한 躉船 방안을 비준할 것이다.
그러나 會議 개시 벽두부터 하트의 이 같은 견해에 대해 러셀은 반박하고 나섰다. 즉, 煙台條約 제7항을 추가한 것은 홍콩이 중국의 밀수단속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이미 달라져 있고 이 關卡이 홍콩을 견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煙台條約에서 제시된 조항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트는 이 말에 자신의 제안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어려우리라고 감지했지만 중국측 입장을 일정 부분 대변해야 하는 그로서는 여전히 중국이 바라는 돈선 방안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煙台조약의 규약대로 홍콩을 벗어나는 아편에 대해서는 매상자마다 세금으로 銀 110兩을 징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중국이 영국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비용도 들고 영국의 비협조로 인해 시행상 적지 않은 곤란이 예상되나 매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둘째, 영국이 중국을 대신하여 인도에서 아편 운송시 세금을 원천징수하는 안인데 그는 이 방안이 가장 적절하리라고 여겼다.
셋째, 마지막으로 中英 양국이 합작하여 홍콩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방안이다.
마지막 방안은 곧 자신의 돈선 방안과 맥락을 같이 하나, 세부적인 면까지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홍콩에서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이 홍콩에서 소비되는 아편에까지 세금을 납부해야 함을 의미하는지 또 홍콩에서 마카오로 송출되는 아편에 대한 중국의 세금징수에 홍콩 당국이 반드시 협조해야 하는 지 모호하였다.
영국과 홍콩 당국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공감 하에서, 러셀은 이 점의 함의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영국 정부로부터 홍콩 소비용 및 중국 이외 지역의 소비용 아편에 대한 세금징수에 동의할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그는 하트의 방안대로 홍콩에서 마카오로 반출되어 가는 아편에 세금을 물리게 될 경우 타지에서 아편을 싣고 오는 기선이 마카오로 직접 들어가 그 곳에서 아편을 하역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아편이 홍콩으로는 들어오지 않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영국 대표인 브레넌도 역시 邵友濂에게 하트 방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아편무역의 중심지가 마카오로 이동되어 갈까 우려해서였다.
부레넌의 반대 표명에 이어 러셀은 종합적으로 돈선 방안을 不可하는 세 가지 이유를 밝혔다. 즉 돈선 내 보관은 홍콩 세관의 창고 보관을 필요 없게 만들기 때문에 홍콩 당국의 세금 징수가 불가능하다는 점, 또 홍콩 거주민의 소비용 아편과 외국 상인이 홍콩에서 구매하는 아편에 대한 세금은 중국이 징수할 수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협상에서 중국이 홍콩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말라는 훈령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결론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회의가 끝난 뒤 하트는 전보로 홍콩 당국에 돈선 방안을 거부하였음을 총리아문에 보고하였다. 그러면 홍콩 대표의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하트의 전보는 홍콩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데 보여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홍콩이 수입하는 모든 洋藥은 빠짐없이 (홍콩세관에) 신고하여야 한다.
② 양륙, 이동 및 선적하는 모든 洋藥은 모두 허가증을 신청해야 한다.
③ 홍콩에서 (중국의) 외지로 운송하는 모든 洋藥은 중국 海關에 신고해야 한다.
④ 수입이나 수출을 하는 洋藥은 최소 만 상자 이상이어야 하고 또한 상호와 번호를 신고해야 한다.
⑤ 근수가 한 상자에 미달하는 소량 포장이 발견될 시, 또 洋藥취급허가증이나 중국 해관 납세증서가 없는 아편이 관내로 들어오려면 미리 허가증 발급 신청을 해야 한다.
⑥ 중국 선박의 홍콩항 출항은 주간에 해야 하고, 무기를 밀수하는 무리는 추방한다.
⑦ 중국은 九龍司 지역에 세관을 설치한다.
⑧ 중국과 마카오는 홍콩과 동일한 章程을 협정한다.
러셀은 자신들이 이 안이 홍콩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될 뿐 아니라 홍콩아편상 보호는 물론, 아편이 홍콩에서 중국으로 밀수되어 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홍콩 정부는 아편을 적재한 선박 및 홍콩으로 입항하는 모든 선박에 대하여 九龍 반도의 중국 영토에 위치한 중국 해관에 통보할 계획이었는데 이처럼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 통보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중국 측은 홍콩의 구상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가? 먼저 하트는 이 방안이 주로 홍콩의 洋藥 독점상을 위한 것으로 홍콩 당국이 洋藥 독점회사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긴 하나 실행된다면 중국에도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邵友濂 역시 總理各國事務衙門에 “홍콩이 상호협조적인 검열을 논의하는 것은 모두 홍콩의 생아편회사의 사업을 위할 생각에서였으며 성의껏 (검열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상기 홍콩 대표의 방안 중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세 번째 항목, 곧 홍콩반출의 중국 진입 아편에 대해서 중국 해관에 신고토록 한 점과 그 이하 밀수단속에 관한 방안인데, 대체로 중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준 절충안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항목, 즉 중국은 홍콩과 맺을 규정을 마카오와도 동일하게 맺어야 한다고 상정한 점은 중영교섭 성사의 관건이어서 약간의 설명을 요한다. 교섭 과정 중 러셀이 마카오는 홍콩과 동일한 방안을 채택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배경을 보면 당시 淸朝는 마카오로 왕래하는 중국 정크선의 화물에 대해서는 국내 화물과 같이 세금을 징수하였으나 홍콩을 왕래하는 동일한 종류의 선박에 대해서 외국무역관세를 적용하는 외국 화물로 취급했다. 이는 무역에 있어서 마카오가 홍콩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만드는 한 요인이었다.
따라서 홍콩 당국은 장차 홍콩지역에 한해서만 밀수를 단속할 경우 그간 홍콩이 누려 온 무역의 구심점이 마카오로 轉移될 것으로 보고 마카오도 동일한 아편밀수대책을 적용해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홍콩 정부가 洋藥委員會 소집 전 러셀에게 전술한 지시를 하달한 것도 이 배경에서였다.
하트는 홍콩 측의 요구사항인 마카오 건을 성사시킬 심산으로 총리각국사무아문에 그 시행허가를 요청하였다. 마카오 당국의 입장과 반응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마카오를 설득할 카드로 두 가지 복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첫째, 중국은 기타 국가와 맺은 동일한 조약을 마카오를 비정식으로 조차한 포르투갈과도 맺는다. 둘째, 중국은 마카오를 포르투갈에 무상으로 영구적으로 租借해 주도록 한다. 아울러 直隸總督 李鴻章에게 포르투갈과 마카오 조약을 체결하고 홍콩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안을 북경 조정의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전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총리각국사무아문은 하트의 구상을 추인하여 그의 계획대로 시행할 것을 허락하여 그를 마카오로 보내 협상케 하였다. 1886년 7월 하트가 마카오로 건너가 마카오 총독 토마스 데 로자(Thomas de Roza)와 담판을 진행하는 동안 邵友濂은 러셀에게 상기 홍콩 대표의 방안을 집행할 것을 문서화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셀로부터 되돌아온 것은 현재 하트가 추진 중인 마카오와의 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서화도 곤란할 뿐 아니라 홍콩 총독에게도 자신들의 구상을 보고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트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洋藥委員會를 재차 소집하기로 합의하였다.
하트가 로자와의 담판에서 아무런 합의도 이끌어 내지 못한 채 귀환한 후인 1886년 8월 양약위원회는 재소집 되었다. 이 회동에서 러셀은 밀수근절대책과 관련하여 몇 가지 홍콩 상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자신들의 구상에 없었던 새로운 요구들이었다.
첫째, 문제가 되고 있는 홍콩 주위의 모든 關卡(해상 순찰선상의 關卡도 포함)은 外籍 세무사가 관리하게 하고 關卡 소속의 중국인 관원들이 홍콩의 정크선을 고소했을 경우 그 조사 또한 외적 세무사가 맡도록 할 것.
둘째, 러셀 자신이 제안한 바 있는 방안은 부분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데, 홍콩의 양약상에게 소매독점권을 부여할 것(그렇게 함으로써 기타 상인의 소매권을 박탈하고 또한 동시에 낱개 아편상자도 선적할 수 없도록 규정해 버리면 밀수는 더욱 불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셋째, 중국 세관원의 비리와 汚職에 대해 못미더워하는 러셀은 중국 측의 요구대로 매상자당 銀 110냥을 세금으로 납부한 양약에 대해서는 중국 세관이 더 이상 다른 명목의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해줄 것.
이에 대해 하트는 이 점은 이미 지난 번 회의에서 보장한 바 있지만 다시금 이를 보장하겠노라고 답변하였다. 9월 10일, 또 한 번의 회동에서 러셀은 상기 제안을 토대로 수정한 방안의 완성본을 제출하였다. 이를 일람한 하트는 먼저 전술한 첫째 안건, 즉 외국인 세무사의 중재권한에 관해서 두 가지를 거론하였다. 즉 홍콩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 정크선이 주위 關卡에 대하여 불만을 가짐으로써 야기된 분쟁은 당연히 九龍 부근에 상주하면서 洋藥 세수를 감독하는 외국인 세무사가 중재할 것이고, 그 대신 중재 중 그들의 결정에 이의가 있을 시 홍콩 정부는 廣東이 아닌 북경에 직접 상소할 수 있도록 하는 사황을 原稿에 추가할 것을 제의하였다. 또한 또 다른 관건적 사안, 죽 중국이 마카오 당국과 합의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도 홍콩은 이 방안을 승인하여 효력을 발생하게 할지, 그 여부에 대해 온건한 어조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셀은 자신이 이와 관련한 문제를 협의할 권한 밖에 있다고 응답함으로써 즉답을 회피하였다. 회담 결렬을 우려한 하트는 향후 영국, 홍콩 측 대표들이 양약위원회의 회담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것인지 그 내심을 파악할 요량으로 마카오가 합의를 거절할 경우 홍콩 식민정부의 의향은 어떠한지 알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브레넌은 중국이 마카오와의 담판을 성사시킬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마카오와의 교섭이 실패하면 홍콩은 그 때 가서 대응책을 강구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점을 서로 인식한 상태에서 다음 날 中英은 章程을 교환하지 않을 것(그러면 효력은 발생하지 않는다)을 전제로 일단 지금까지 논의한 사안들을『홍콩양약관리법』으로 확정지었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한 상자에 미치지 못하는 洋藥은 반입ㆍ반출을 허가하지 않는다.
② 홍콩이 특별히 양약 독점을 허락한 회사 이외에는 누구도 개인적으로 양약을 저장할 수 없으며 한 상자 미만의 양약을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법이다.
③ 홍콩 항구로 반입되는 모든 양약은 빠짐없이 선박관리청에 신고하여야 한다. 선박관리청이 발급하는 허가증 없이 다른 배에 양약을 옮겨 실어 양륙한 후 다시 다른 배로 옮겨 실어 (홍콩에서) 내보내서는 안된다. 혹 그럴 경우 이 사실을 반드시 독점회사에 알려야 한다.
④ 수출ㆍ수입ㆍ창고 보관을 막론하고 모든 양약은 홍콩 督憲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검사를 위한 명부에 등록하여야 한다.
⑤ 모든 양약은 저장량과 부족량을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를 만들어 독점회사가 철저한 점검을 할 수 있도록 이 조사 리스트만 보아도 선박관리청이 해안에 얼마 정도의 수량이 저장되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한다.
⑥ 정크선의 야간 출항을 체크하는 관리조항을 새로이 개정한다.
또 그들은 같은 홍콩양약관리법의 말미에 이상의 각 조항들이 中英 정부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시행될지 그 여부는 전적으로 러셀이 내건 요구 조건인 후속항목의 실행에 있다고 附記해 놓고 있다. 그 후속조차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① 중국은 마땅히 마카오 측과 대등한 방안을 협정하여야 한다.
② 금후 이 조항이 홍콩의 과세 및 무역에 대한 걸림돌로 판명될 시 …… 홍콩 관헌은 이를 폐기할 수 있다.
③ 총세무사는 양약세금증서를 발매해 주기 위해 중국 九龍지역의 어느 편리한 곳에 關卡을 신설한다. 누구든지간에, 또 운반하겠다고 신고한 (양약) 수량이 얼마가 되든 모두 발매해 준다.
④ 양약세와 내지통과세를 완납하여 세금증서를 발급받으면 양약은 (중국) 각지로 송출되는데 이 양약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목의 세금도 더 이상 징수하지 않는다. …… 새 조항에 따라 상인이 양약을 크고 작은 포장으로 나누어 갖고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한다.
⑤ 홍콩과 거래하는 정크선이 (중국 해관에) 납부하는 관세와 내지통과세는 마카오와 거래하는 정크선의 그것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홍콩, 또는 홍콩에서 중국으로 왕래하는 정크선은 규정된 출입세 이외에 다른 세금을 별도로 징수해서는 안 된다.
⑥ 九龍의 신설 세무사의 책임은 중국 상인이 關卡 또는 순찰선으로부터 곤란을 당했다고 보고해 오는 건에 대해 조사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다. 홍콩 督憲 역시 수시로 업무요원을 파견하여 함께 동행 처리할 수 있다. 만약 쌍방 간의 의견이 다를 때에는 京憲에 이첩하여 査正토록 한다.
위 조항들이 예증하듯이 대부분 홍콩과 영국측 의사가 관철되었는데 특히 후속항목 제①항과 관련하여 마카오 당국과의 합의를 성사시키지 못할 경우 홍콩은 언제든지 홍콩양약관리법안을 취소할 수 있는 조건부적인 비토 장치를 마련해 놓은 셈이다. 또한 제②항의 규정 역시 판단의 객관성이 문제될 수 있는 애매한 내용이다. 同草案이 홍콩 당국의 주관적인 판단 혹은 거부할 심산으로 홍콩의 과세와 무역에 장애가 된다고 통고하였을 때 중국은 영국의 폐기결정을 어떻게 막겠는가?
청조에 불리한 이 같은 홍콩양약관리법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구해 보겠다.
Ⅳ. 단속 조치의 사후 영향과 그 적절성 검토
홍콩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아편밀수방지책에 관한 중영의 교섭에서 도출된 이상과 같은 잠정적인 합의는 크게 세 가지 含意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근대 중국의 대외관계처리의 한 패턴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첫째, 포르투갈의 마카오 통치권을 인정해 주는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부연하면 영국 측이 협상조건으로 청조가 마카오로 하여금 홍콩에 적용시킨 동일한 방안을 채택하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한 결과, 중국 측이 총세무사 하트를 마카오로 파견하여 마카오 총독과 협상에 임하게 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하트는 포르투갈 측에 중국의 아편세금징수문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중국은 마카오에 대한 통치권한을 영구적으로 인정해주겠다는 방안을 제시할 생각이었다. 하트의 이 구상을 보고 받은 淸朝는 이를 동의하였고 그는 청조의 승인 하에 자신의 측근인 캄펠(K. Campell)을 리스본에 파견하여 포르투갈 외교대신 헨리케 데 바로스 고메즈(Henriqae de Barros Gomes)와 교섭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쌍방은 이에 근거하여 이후 리스본 협상의 근거가 된 초안을 작성하였다.
1887년 3월 중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이른바 ‘리스본 초안’이 협정된 것도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참고로 이 초안은 네 가지 문제를 규약하고 있다.
-. (중포) 양국은 최혜국 조항을 포함하는 조약을 체결할 것.
-.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영구 거주와 마카오 및 그 부속지역에 대한 통치 보장.
-. 포르투갈은 중국의 동의 없이 마카오를 다른 국가에 양도할 수 없음.
-. 마카오는 아편 처리 부분에 관해서 홍콩의 방안대로 협력할 것.
요컨대 위 초안은 포르투갈에 마카오 영구 거주에 관한 정식 조약을 요구하게 만든 근거를 제공한 셈이었다.
둘째, 淸朝는 포르투갈에 최혜국조항을 맺게 해 주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저간의 사정을 좀 더 상술해 보자. 본래 마카오 거주 華人들은 신분상으로나 무역활동에 있어서나 모두 홍콩 거류민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즉 淸朝는 그들을 자국 내 백성으로 대우하여 마카오를 홍콩과 달리 중국내 한 항구로 취급함으로써 국내 일반관세법을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세율 또한 대외무역을 관장하는 海關보다 가볍게 매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홍콩 측 대표가 홍콩도 마카오와 동일하게 대우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 홍콩양약관리법에 “홍콩과 거래하는 정크선이 납부하는 관세와 내지통과세는 마카오와 거래하는 정크선의 그것보다 더 많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삽입한 배경이다.
또한 중영 간의 현안이었던 關卡 철폐 문제에 관해서는 만일 하트가 과거 廣東 당국이 홍콩 주위에 설치한 (따라서 광동 당국이 관리하는) 이들을 관장하고 또 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왕래하는 중국인 정크선을 동등하게 대우해 준다면 영국은 關卡 철폐를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그런데 중국ㆍ포르투갈의 교섭에서 포르투갈은 협조해 주는 대신 교환 조건으로 오히려 마카오 주변의 關卡을 철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지금은 홍콩 및 마카오 내왕 정크선에 대한 대우가 이미 대등해져 있으므로 마카오가 과거 점유했던 무역적 우위를 상실한 상태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서 이른바 마카오 주변의 關卡이란 이들 지역의 정크선이 운송하는 일반 화물에 대한 관세징수나 아편밀수단속을 목적으로 설치되어 광동 단국의 관할에 있는 이른바 ‘常關’을 가리킨다.
포르투갈의 이 같은 요구에 직면하여 하트는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절충안을 제시하고 홍콩ㆍ마카오ㆍ중국 3자 사이에 타협하도록 시도한다. 포르투갈의 요구대로 關卡이 모두 철거될 경우, 중국은 내지통관세 수입마저 상실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이 안은 두말 할 것도 없이 淸朝로부터 거부될 터이다.
게다가 淸朝의 홍콩ㆍ마카오와의 협상 목적이 아편밀수문제 해결에 있었지 결코 일반 화물에 관한 규정을 협의하자는 취지가 아니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하트는 關卡 철폐를 막기 위해 리스본 회담 진행 중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영국측 제안, 즉 關卡을 총세무사 곧 자신의 관할 아래 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의 판단으로는 關卡을 자신의 관할 아래 두면 고전된 細則을 정확하게 적용시킬 수 있어 對호콩 무역에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중국인 세관원의 무원칙적인 자세로 인해 마카오에 미치는 불리한 점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요컨대 關卡을 그대로 존치해 두고서도 포르투갈의 요구를 충족시켜 불 수 있다는 것이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은 하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포르투갈 역시 마카오의 영구 거주 보장을 포함한 최혜국조약을 체결한다는 전제 하에 외적 세무사가 관장하는 해관의 양약세 징수에 협조를 약소한 이상 하트의 안대로 關卡 철폐를 하지 않기로 동의한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즉 자신의 구상대로 타협을 이끌어 낸 총세무사 하트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고, 하트가 중국의 국부를 제국주의에 팔아넘긴 중개인이었다는 지금까지의 평가와 관련해서, 과연 그가 이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어떤 막후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점은 차후 좀더 세밀하게 추적해야 할 과저로 남는다. 다만 현 단계에서 분명히 드러난 점은 청조가 본래 광동 당국의 관리하에 있던 關卡(常關)을 통상하의 해관에 귀속시킴으로써 외국적 세무사의 영향이 비통상항구지역까지 미치게 만든 사실이다. 하트가 캄펠에게 보낸 서한의 한 대목은 이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이미 본래 兩廣총독 및 광주해관 감독의 수중에 있던 홍콩ㆍ마카오 주변 關卡 관리 업무를 내 손 안에 넣었고…… 이것은 적지 않은 권력의 확대다. 총세무사가 조만간 통상항구 이외의 일을 관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九龍지역에 신설 세무사의 추가주재를 규정한 후속조치 항목에 근거하여, 1887년 3월 17일 총리각국사무아문은 홍콩의 九龍灣과 마카오 남방의 南拱北灣에 세관을 신설토록 하여 각기 九龍關과 拱北關으로 불렀다. 양자 모두 광주해관 감독으로 하여금 관할하게 한 분관으로서 그 해 4월부터 광동, 홍콩 및 마카오 사이를 드나드는 모든 정크선의 수출입품에 대해 업무검사를 실시하였다. 신설된 이 두 해관(전자)은 중국 여타 지역의 기존 해관(후자)과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면에서 상이하다.
① 후자는 모두 외국식 선박의 무역을 관리하나 전자는 중국식 범선무역을 관리한다.
② 후자는 조약상의 세칙을 적용하였지만 전자는 국내법상의 세칙을 적용하고 광동성 내로 반입되는 내지통과세를 징수한다.
③ 후자는 모두 대외무역 및 통상지간의 국내무역을 관리하는 데 반해 전자는 홍콩, 마카오와 비통상지 간의 대외무역 및 비통상지와 비통상지 간의 국내무역을 관장한다.
④ 후자는 반입 반출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모두 ‘子口稅’의 특권이 주어졌으나 전자는 이를 부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결과는 모두 아편밀수를 근절시키고자 한 淸朝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된 산물이었다. 하지만 과연 아편밀수 근절과 세수증대라는 애초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세심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홍콩과 마카오 주변의 關卡을 존속시키고 또한 상기 九龍關과 拱北關을 신설한 후 홍콩을 근거지로 한 밀수아편의 물동량 증감 폭과, 그리고 그에 따른 세수 변화를 추적해 보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필자가 입수한 제한적인 자료로는 단지 1865년부터 1888년까지 홍콩의 아편 출입량과 廣州해관의 세수액에 관한 통계만을 통해 밀수단속의 유효성 여부를 잠정적으로 판단할 수 잇을 뿐이다. 먼저 홍콩의 대중국 아편거래량을 가름하기 위해 전자의 통계를 보자.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있듯이 당시 중국으로 유입되는 인도산 아편은 먼저 홍콩에 집결된 후 대륙의 각처로 빠져나간다. 아래 통계는 홍콩에서 중국 각 항구로 송출되는 아편이 해마다 증가일로에 있었고, 그 양은 전체 홍콩반입량의 최소 70% 이상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70%의 아편 가운데 밀수로 반입되는 양이 얼마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이 수량을 제외한 나머지 잔여분 30% 정도는 홍콩 거주민이 소비하거나 아니면 가공되어 미국, 동남아와 중국의 각지로 밀수출된다. 30% 중 홍콩 소비량과 중국 밀수출량의 비율이 각각 어느 정도가 되는지 이 역시 계산해 낼 수 없다. 다만 해마다 수만 擔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 거래되는 점으로 보아 밀수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표1> 단위 : 擔(약 50kg)
연도 | 홍콩 반입량 | 홍콩에서 중국 각 항구로의 송출량 | 홍콩 잔류량 |
1865 1866 1867 1868 1869 1870 1871 1872 1873 1874 1875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
76523 81350 86530 99537 86065 95045 89744 86385 83082 91082 84619 96985 94200 94899 107970 96839 98556 85565 94036 86163 90329 96164 89369 88830 |
56133 64516 60948 53615 53413 58817 59670 61193 65797 67468 66461 68042 69297 71490 82929 75308 74005 66908 68168 68819 65259 67811 73877 82612 |
28309 16384 25582 15922 32652 36228 37014 25192 22585 23614 18158 28943 24903 23407 25041 21531 24551 18657 25868 17344 25070 28363 15492 6218 |
※ 출전 : 湯象龍 編著,『中國近代海關稅收和分配統計 1861∼1910』(北京 : 中華書局, 1992年) 참조.
그러면 광주해관의 아편 세수는 어떠했는가? 특히 九龍關과 拱北關의 신설 후 양약의 관세징수액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표 2> 광주해관의 양약 세수통계 단위 : 庫平量
연도 | 세수액 | 주요년도 전년대비 세수 증감률 |
1865 1866 1867 1868 1869 1870 1871 1872 1873 1874 1875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
209,949 251,013 230,546 183,547 161,355 168,909 226,147 254,246 285,218 316,841 335,319 373,665 376,922 331,030 379,950 367,203 261,557 136,573 155,801 239,907 259,926 283,306 440,626 838762 768461 763195 |
+32.1 +13.9 +12.1 +11.0 -28.8% -47.8% +14.0% +53.4% +8.9% +55.5% +90.3% -8.4% -0.7% |
※ 출전 : 湯象龍 編著,『中國近代海關稅收和分配統計 1861∼1910』(北京 : 中華書局, 1992年) 참조.
위 통계표는 상기 두 세관이 신설되기 전인 1887년 이전까지는 광동 전체의 양약세수 증가폭이 평균 20% 전후의 완만한 상태에 있었는데 1887년 이 해에는 갑자기 50% 이상의 큰 폭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세수의 절대량도 대폭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그 다음해인 1888년에도 90%를 상회하는 세수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표 1>과 <표2>의 지표가 나타내는 두 현상을 종합하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잠정적 결론은, 효율적인 아편밀수 단속을 위해 영국과 포르투갈에 주권의 일부를 양보한 대가로 영국과 포르투갈의 협조를 끌어냈고, 그리고 그 결과로서 기존 關卡을 존속시켰고 또한 새로이 關卡을 신설한 것은 淸朝가 의도한 아편밀수 단속에 어느 정도 유효하게 기능했음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영국에 할양되기 전 홍콩은 선박정박 및 화물보관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항구였으나 할양과 함께 곧 무역중심의 자유항으로 탈바꿈하였다. 홍콩이 인도산 아편의 중국밀수 유입을 조장하고 그 중심지가 된 데는 그 곳이 뱃길로 중국 연안의 어떤 곳으로든 연결이 용이했던 지리적 용인과 중국인의 촘촘한 상업 네트워크가 한몫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인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무엇보다 상인들의 아편밀수에 대하여 영국과 홍콩 당국이 취한 자유 방임정책이었다. 방임에 기인한 밀수아편의 내륙 진입량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淸朝의 세수는 감소되었기 때문에 아편밀수의 근절은 淸朝의 시급한 과제였다. 종래 밀수단속을 위해 행한 시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淸朝는 영국의 속지가 되어 버린 홍콩에 세관을 설치할 수 없었던 관계로 밀수단속은 전면적 효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따라서 밀수단속은 아편공급자인 영국과 홍콩 당국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의 요구대로 아편무역을 합법화해 준 1858년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급기야 淸朝는 홍콩과 그 인근 수역에 關卡을 설치하고 아편밀수 순찰선을 띄우는 등 좀 더 적극적인 대응으로 나섰지만, 이것은 되레 영국에게는 대중국 아편무역을 위해하는 봉쇄망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1860년 전후부터 시작된 중영교섭은 상기 문제에서 파생된 현안을 해결해야 할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교섭은 자국의 이익을 고려한 영국의 비협조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 지연되어 오다가 1886년 개최된 일련의 中英洋藥委員會에서 조건부이기는 했지만 홍콩양약관리법을 합의하여 결실을 보게 된다.
홍콩양약관리법 초안 제정의 일차적 의미는 영국 및 홍콩 측이 중국세관원의 부패, 적재적소에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함으로써, 아편 밀수 횡행과 그 단속 부실에 대한 문제의 소재는 오히려 淸朝에 있다고 명기한 데에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중국은 그 문서화에 동의함으로써 이 점을 그대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同 초안의 또 다른 의미는 영국이 마카오 측과의 대등한 협정 성사를 조건부로 대중국아편무역의 이익이 크게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중국의 아편밀수단속에 협조하도록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淸朝는 당연히 후자의 의미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에 마카오 영구거주권을 인정해 주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 점은 아편밀수 근절이 정치적, 사회적, 재정적으로 미치는 파급의 정도로 보아 시급하게 해야 할 만큼 절박했음을 의미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국의 영토와 거주민을 포함한 국가주권에 대해 근대중국이 편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케이스였다.
한편, 교섭 과정에서 중영 양국이 보여준 행태도 언급될 가치가 있다. 영국은 인도와 홍콩에서 활동하는 영국 상인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면서도 국제관계상의 위신 역시 도외시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에서 기득권이 크게 손상 받지 않는 선에서 중국 측의 요구를 최소한도 내에서 들어주었다.
중국은 영국 및 포르투갈과의 협상을 거의 로버트 하트 등 외국인에게 맡겨 버렸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淸朝가 夷務, 즉 대외 사정에 밝지 못한 내부적 고충에서 연유한 변통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라도 淸朝는 스스로의 주권을 자율적으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을 정당화 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당초 통상개항장의 海關을 출입하는 외국선박 및 그 화물과 外商에 관한 업무를 전담케 할 요량으로 고용한 외국세무사에게 非通商 항구까지 관할할 수 있도록 관세관할권을 넓혀 준 것은 洋商ㆍ洋貨의 중국 진출을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그것이 실제로 하트 등 외국적 세무사와 영국 등 서방 열강이 담합한 결과라면 그 담합과 묵계의 정도가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밝힐 엄밀하고도 실증적인 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본고의 미해결 과제 중 하나로 남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종합해 보자. 淸朝가 밀수근절을 위해 취한 마카오 주권이양을 비롯한 몇 가지 양보 조치는, 사후의 세수 증가가 예증하듯이 어느 정도 유효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마카오를 편의적으로 타국의 통치에 내맡겨 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그 후 후손들이 스스로 주권회복을 위해 백여 년 이상이나 신난한 길을 걸어가도록 만든 역사의 멍에였다. 타력에 의해 개관된 근대 중국의 海關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시장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맡게 되었고 종국에는 근대 중국을 반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정치ㆍ경제ㆍ군사 진출의 창구였다. 이러한 역사 진행의 근저에는 아편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려 온 배타적 제국주의의 아편 밀수행위가 직ㆍ간접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 논문은『鄭明鎬敎授정년퇴임기념논총』(서울 : 혜안출판사, 2000년 6월)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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