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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 박태준의 無私 死生觀 : 생성 ․ 실천 ․ 의의

雲靜, 仰天 2014. 6. 5. 11:41

靑巖 박태준의 無私 死生觀 : 생성 ․ 실천 ․ 의의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목 차
 
들어가는 말
Ⅰ. 無私 死生觀의 생성과 지향
   1. 無私 死生觀의 개념
   2. 청암의 無私 死生觀 생성
   3. 무엇을 위한 無私 死生觀인가? :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Ⅱ. 無私 死生觀의 실제 전개
   1. 爲國獻身, 先公後私 정신의 실천
   2. 二價的(ambivalent) 가치 : 군인윤리 실천 vs 군의 정치개입
   3. 자주국방 실천의 한계와 군 재직시 체득한 무형의 자산 
Ⅲ. 無私 死生觀의 완성과 그 의의
   1. ‘製鐵報國’과 ‘敎育報國’ 추진의 원동력
   2. 군 리더십의 표상 : 無私的 군인정신의 21세기적 廻向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작가 조정래는 靑巖 박태준(1927∼2011) 포항종합제철(이하 ‘포스코’로 통일) 명예회장 재세시에 이미 그를 한국의 역사위인들인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김구, 세종대왕과 이순신과 함께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 있다. 그는 청암과 각별한 사이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싶겠다. 그러나 그가 청암을 위인으로 평가한 이유를 보면 청암에 대한 개인의 호오에서 그렇게 평가한 게 아니라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박태준은 1970년대 10배 이상으로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1980년대 1인당 GNP를 2,000~3,000달러로 성장시킨데 결정적인 사회 인프라 역할을 한 경부고속도로, 포스코, 울산의 현대조선소 가운데 포스코를 건설함으로써 우리의 경제성장에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작년 12월 청암이 향년 84세로 타계하자 동지섣달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추모행렬이 줄을 이었고, 각계각층의 조문객이 8만 7,000여 명에 달했던 사실을 보면 조정래의 이 같은 평가와 이유는 동시대인들이 느끼는 상식적 판단일 수도 있다.
   조정래가 일찍이 포스코건설의 효과와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면, 본 연구는 포스코를 일궈낸 청암의 정신과 사상에 주목한다. 청암은 생존시에 이미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통해 드러난 龜鑑的 정신과 사상이 한국현대사의 한 지층으로 켜켜이 쌓여 역사가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사상 공전절후일 수 있는 청암의 역사적 업적을 가능하게 만든 각고의 노력과 지도력이라는 동력의 근저에 존재하는 남 다른 청암의 정신은 뭇 범인의 그것과 변별된다. 그것은 개인의 영달을 도외시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소아적 욕망에서 철저하게 배제, 소외시켜온 無私정신이었다. “無私정신”이란 字意的으로 질박하게 정의하면, 사적 욕망과 욕심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국가의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자세로 삶을 사는 태도를 말한다. 즉 “無私의 死生觀”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가치 혹은 정신과 사상을 평생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無私 死生觀을 중심으로 보면 청암의 삶은 한 마디로 起承轉結의 전형이다.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일본거주 및 교육과 귀국 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無私정신을 체득한 것은 起에 해당된다. 군인시절의 무인적 실천이 承이었다면, 군인의 신분으로는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을 실현할 수 없어 산업역군이자 박정희 사단내 근대화의 야전사령관으로 변신한 것은 轉이었다. 마지막으로 포스코 건설과 함께 그가 제창한 製鐵報國과 敎育報國의 실천, 그리고 사재 기부를 통해 無私 死生觀을 완성한 것은 청암의 인생에서 畵龍點睛이자 結이다.
   군인, 산업역군, 경영인과 정치인의 길을 순차적으로 걸었던 청암의 생애는 매 시기 마다 추구한 영역과 목표가 달랐다. 예컨대 先公後私, 위국헌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부국강병, 자주국방을 위해 매진한 시기는 국가방위에 선봉에 섰던 군인의 길을 걸었을 때였다. 또 포스코건설과 운영에 매진했던 산업역군이자 경영인 시기에는 제철보국과 보국안민사상으로, 그리고 제철교육재단과 포항공대 등 교육인프라를 구축할 때는 교육보국 사상으로, 정치에 입문했을 때는 ‘포스코 수성’과 동서화합, 남북통일의 국민적,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로 나타났다.
   정직, 청렴, 爲國獻身, 선공후사, 輔國安民, 부국강병, 자주국방은 청암의 삶을 관통한 정신 혹은 목표였다. 그것들은 가치이기도 하고, 국가와 민족의 비전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광휘로운 부분인 포스코건설을 통해 세계적 철강인으로 웅비할 수 있었던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 목적의식을 본령으로 한 無私的 군인정신이 추동력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청암의 삶과 사상을 온전하게 조명하기 위해선 삶의 전반기에 형성된 無私 死生觀과 이로부터 배태된 그의 군인정신과 자주국방관의 전개, 실체, 내용, 성격과 의미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작업은 무엇보다 선결돼야 될 의미 있는 과제다. 경제 및 경영사상이든, ‘제철보국’사상이든, 아니면 ‘교육보국’사상이든 청암의 정신에 내장돼 있는 삶의 온축과 사상의 온전한 모습은 이러한 엄밀한 학술적 검증작업을 거쳐야만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기 취지에서 본고는 두 가지 연구목적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를 건설한 청암의 정신적 원동력과 사상적 토대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 그리고 그러한 정신과 사상이 현재 우리사회와 군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규명하려는 점이다. 청암을 논하려는 문제의식이다.
   첫째, 청암이 포스코건설과 경영, 교육 분야에서 어떻게 공전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지 사상적, 정신적 근원을 파악 내지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먼저 청암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無私 死生觀이 어떤 환경, 어떤 시대적 조건 아래에서 생성됐으며, 또 그것이 주로 발현된 삶의 전반기에 어떻게, 어떤 형태로 전개됐는지를 추적한다. 예컨대 그가 광복을 맞은 시기에 군인의 길을 택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군인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6․25전쟁의 참전과 고급 참모생활을 통해 얻은 무형의 자산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힌다.
   둘째, 청년기와 중년기를 통해 형성되고 발현된 그의 군인정신과 부국강병, 자주국방관과의 상호관련성을 가늠한다. 즉 청암이 추구했던 바람직한 군인상, 귀감이 된 당위론적 부국강병과 자주국방관은 어떤 내용이었으며, 그가 왜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는지 동기와 목적을 추적할 것이다. 이것은 곧 청암이 왜 당시 한국사회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던 삶의 조건과 시대적 상황을 뛰어 넘어 유달리 群鷄一鶴처럼 청렴한 군대생활을 영위하면서 군인의 윤리와 본분을 제대로 지킨, 정직하고 청렴한 공직자가 될 수 있었는지 배경과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동시에 이 점은 군인신분이면서도 ‘5·16군사정변’을 긍정한 사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과도 맞물려 있다. 또한 그의 無私 死生觀의 무인적 전개, 즉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실천과 목적 달성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그 배경과 원인을 짚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암의 행적을 축으로 이순신(1545∼1598), 안중근, 중국 宋代의 정치가 范仲淹(989~1052),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등의 사상과 비교해 그의 無私정신과 군인정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가늠하고자 한다. 즉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음으로써 인류의 보편가치를 지닌 군인 혹은 정치가들과 같은 역사적 인물을 기준으로 청암 사상과의 상호 유사점을 찾아냄으로써 그에 대한 평가의 객관화를 시도할 것이다. 평가의 기준이 될 인류 보편가치에는 조국애와 위민사상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보편사적 의미를 지닌 역사가의 역사의식, 조선의 선비정신, 무사도 등이 있을 수 있다.
   본고는 연구방법론에서 역사학적 문헌고찰과 지식사회학적 해석방법 외에 청암을 직접 인터뷰하여 사료비판과 검증을 거치는 구술역사(oral history) 방법을 활용하겠다. 이 방법은 청암이 군 재직시절에 남긴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본 연구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그의 군인정신과 부국강병, 자주국방 사상을 가늠할 직접적인 1차 사료의 부족을 보충할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다. 이 뿐만 아니라 사료들 간의 틈과 나아가 청암과 시간적으로 격절돼 있는 역사공간과의 공백을 메우는데 필요하기도 한 과정이기도 하다.
 
Ⅰ. 無私 死生觀의 생성과 지향
 
1. 無私 死生觀의 개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국가를 영토와 그 내부 구성원들의 행위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물리력의 강압을 행사하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군사력을 독점한 정치공동체로 정의했다. 정치공동체인 국가를 지탱해주는 것은 무력행사권이 합법적으로 주어진 군인이다. 따라서 군인의 궁극적인 역할과 책임은 국가의 방위에 있다. 국가가 군대에 막대한 인력과 예산과 물자를 제공하는 이유도 외부의 침략이나 간섭 또는 강제나 강압으로부터 군이 영토, 국민의 재산과 기본적 가치 그리고 고유한 생활방식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이와 같은 개념으로부터 군인과 군인의 직업적 책임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의 정의가 도출되며, 군대와 군인들의 역할, 책임, 특성, 고유성, 임무, 의무, 가치 및 규범이 생겨난다. 군대의 존재이유, 군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 특별한 신뢰 등을 바탕으로 강력하고도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으며, 합당한 목표를 지향하고 도덕적인 동기를 갖고 있는 군대라는 전문 직업은 정치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이다.
   군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국가방위는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이다. 국민의 생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군인이기에 먼저 자신의 삶, 목숨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이른바 사생관이 전제돼 있다. 즉 다양한 직종 가운데 군인은 현역으로 근무하는 한에 있어선 私的 이익이나 영역을 최소화 하고, 公的 이익이나 영역을 최대화 하는 삶을 살도록 유도되고 제도화 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생관은 무엇이고, 또 無私란 무엇인가?
   먼저 사생관은 말 그대로 죽음과 삶을 인식하는 인간관의 핵심이다.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을 성찰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마디로 “죽음과 삶에 대한 사고 방법”이라고 포괄적으로 얘기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우리와 엇비슷하게 “죽음 혹은 생사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그것에 기초한 인생관”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그 유형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가? 둘째, 사후나 죽음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셋째, 삶에 대한 인간들의 사고방식 혹은 이해방식이다. 넷째,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죽음을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경험과학의 영역에서는 다루지 않고, 종교나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는 주제들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적 입장에 따라, 또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도 인생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생관의 내용이 다양해질 수 있다. 사생관은 불교,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등의 보편종교에서 각기 도달해야 할 구극처의 하나라는 가르침의 형태로 논의되고 있다. 각 종교와 종파에 따라 수단과 그 실체의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소멸하기 때문에 그에 대신할 불멸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공통적이다. 이 교의를 자신의 믿음으로 내면화하는 개인은 현실의 삶에 충실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체득하여 사멸할 생명 속에서 불멸의 생명을 찾으려는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죽음을 말할 때 삶의 문제를 제외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현재 자신의 삶과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나 일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따져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즉 죽음의 의미를 이해함에 따라 곧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無私의 개념과 관련해서 私와 公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한자의 어원을 밝혀놓은『說文解字』에 따르면, ‘私’는 이 글자의 부수인 ‘禾’, 즉 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원과 달리 용법상으로는 주로 ‘나’, ‘자신’이라는 의미를 일차적 어원으로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 것으로 삼는다”,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와 “몰래”라는 의미로까지 의미가 확장돼 사용돼 왔다. 즉 “無私”란 말 그대로 ‘私’가 없다는 의미로서 “몰래” “내 것”이나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을 하지 않는 정신 내지 태도를 말한다. 無私란 사적 영역에서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고 사유화를 경계하는 의미이다. 이는 ‘公’과 ‘私’에 해당되는 서양 주요 언어들의 어원이 각기 라틴어의 ‘공적인 임무를 맡은’과 ‘국가로부터 분리된’이라는 의미였다는 점에서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설명을 종합하면, ‘無私 死生觀’이란 곧 사적 욕망과 욕심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국가의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자세로 삶을 사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無私 死生觀의 가치는 왜 필요한가?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無私를 추구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게 인간생활이지만 국가공직자들이 취급하는 영역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과 사회공유의 재산이나 업무와 관련된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국가공직자의 理想態로서 私를 최소화 하거나 혹은 나아가 私의 배제 상태인 이른바 無私의 심적 자세, 태도와 행위는 고금을 통해 중요시돼 온 가치로서 중국, 한국, 일본의 정치담론에서 거론돼 왔다. 중국의 경우, 그것은 陽明學이 지향하는 경지에 포섭돼 있다. 즉 陽明學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사사로운 욕심에 가려진 게 없는 상태가 곧 天理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개인의 욕심을 버린 순일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면 그것이 곧 효도이며, 순일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면 그것이 곧 충성이며, 또한 순일한 마음으로 벗을 사귀고 백성들을 다스리면 그것이 곧 믿음과 어짊인 것이다. 모든 사람의 행동은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기본이 되는 理는 바로 마음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은 무엇 보다 순일한 사욕 없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직 사람의 욕망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만이 공부가 되는 것”(只要去人欲存天理, 方是功夫)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천리는 곧 民이고, 공부는 格物致知다. 그것은 일체의 사적 물욕을 초탈한 종교적 경지의 어느 한 경계에 맞닿아 있기에 무한한 영속적 가치를 지닌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고려의 정치권력이 사유화 된 결과 나타난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나타난 폐정을 반면교사로 삼는 의미에서 선왕들은 “천하 국가를 公的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님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위정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군주에게는 至公無私한 마음을 가질 것이며, 재상에게는 私心을 버리고 公을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과거 일본의 정치사상가들에게도 국가의 화는 人君의 私慾에서 비롯되거나 혹은 대신들의 私心이나 붕당을 결성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인식됐다. 따라서 무릇 국가의 정치는 公儀라는 것을 세워야 하는데, 공의란 私에 대한 公이며, 부분에 대한 전체의 입장이라고 봤다. 公이 私가 되고 안 되고는 결국 그 局에 처해 있는 인물에 달려 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公이고, 어디까지가 私인지 잘 모를 수 있다. 私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公을 남용하거나 휘두르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公私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면 국가에 화가 되며, 公私구별 없이는 천하국가를 외쳐도 민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선 公私구별이 확실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청암의 無私 死生觀 생성
 
   그러면 박태준의 無私정신은 어떠했을까? 無私정신은 먼저 정직이 전제된다. 청암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유년시절부터 노년시절까지 수미일관하게 견지된 심성적 특성은 정직이었다. 그의 정직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과 교육방침, 가정의 문화적 환경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박태준의 부친 박봉관은 기사자격증은 없었지만 일류 토목기술자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 됨됨이도 정직하고 성실했다. 박태준은 선친이 “유난히 경위가 발랐다”고 기억했다. 이로 인해 박봉관은 자신과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한 일본인 사장의 신임을 크게 받았음에도, 다른 한국인들처럼 일본인과 결탁해 동포를 괴롭힌 일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선량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일을 처리했다. 청암은 자신이 호주가인 사실을 두고, ‘호주가’로 통할 만큼 술을 좋아 했던 선친을 닮은 “부전자전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듯이 그의 정직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정직의 인자는 박태준이 일본에서의 소년시절 지폐가 수북이 꽂힌 남의 지갑을 주워 파출소에 맡긴 결과 분실물 습득 신고자에게 포상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에 따라 응분의 보상을 받게 됨에 따라 문화적, 교육적으로 훈습되고 체화된다. 이 일은 그에게 정직과 규칙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눈뜨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청암의 삶의 자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인 청결의식과 책임의식도 일본생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청암이 스스로 판단컨대 자신은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그의 책임의식은 몸에 밴 청결의식과 함께 일본에서의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公的 영역에 대한 私的 츰입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수반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방종에 불과하다. 청암의 책임의식은 삶의 전 분야에 걸쳐 발휘됐다.
   정직, 청렴 등의 특성들은 박태준이 평소 강직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청암은 “청렴과 강직은 부패와 타협하지 않고 사심을 가지지 않는, 말 그대로 無私 死生觀이 확고히 정립돼야만 가능하고, 또 그래야만 흔들리지 않는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無私 死生觀이 존재하고 있다고 긍정했다. 그가 無私정신을 어슴프레 인식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일본패망 직전 일본 陽明學의 대가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1898~1983)의 강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스오카는 東京제국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독학으로 연구하여 陽明學의 일가를 이룬 저명한 학자로서 일제의 大東亞省 고문을 맡았고, 패전 시에는 천황의 항복 선언인 “玉音방송”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었다. 박태준은 1945년 5월 경 東京의 히비야 공원에서 그의 강연을 듣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박태준은 야스오카가 전후 일본보수정치의 사상적 지주로서 일본의 전통과 부흥을 부르짖는 입장에서 (일본) 국가지도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의 첫째 덕목으로 “私慾을 비우는 것”이며, “私慾을 비우는 것이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하고, “私慾을 비우지 못한 지도자는 자신의 지식과 비전을 자신의 행동과 일치시킬 수 없다”고 한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이 강연은 박태준의 인생관 혹은 세계관의 형성에 결정적 계기는 되지 못했고, 수많은 영향과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을 수는 있다. 자신이 밝혔듯이 인생관과 세계관이란 긴 시간 속에서 수많은 사건, 경험과 독서를 자기 내면에 소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無私 死生觀을 생성시킨 또 다른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청암이 광복 후 귀국하여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굳히게 되는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사명의식이었다. 이 사명의식은 청년기와 청년장교 시절을 거치면서, 박태준 자신이 회고한대로 특히 6․25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심화된 형태, 즉 無私 死生觀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런데 박태준은 처음부터 군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정미소 주인이 되겠다던 유소년시절의 꿈과 달리, 또 법관이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었던 주위의 기대를 물리치고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진정한 민족의 힘을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와세다(早稻田)대학 이공 분야로 진학했던 그였다. 그리고 학업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광복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청암은 자신의 꿈과 포부를 이룰 직업을 찾아 한 동안 새로운 삶을 모색했었다. 이 시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신생 조국과 “겨레의 번영”을 위해 신명나게 쏟아 붓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청암은 전공인 기계공학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좌절 끝에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중도에 공부를 그만둬야 했던 공학도였다. 그러니 그 길로 나가서 개인적으로 대성하고, 그럼으로써 신생 조국에 이바지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한반도에, 특히 남한에 공학적 지식과 소질을 발휘할 만한 산업현장이 없었다. 그러면 그 지점에서 생각이 많았던 청년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건 당연했다.”
   청암은 자신에게 인생진로 변경의 계기가 된 것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광복된 조국의 산하에서 내 나라 내 겨레의 번영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쳐 일해 보겠다”는 꿈이 좌절되는 와중에 공산주의자들의 발호를 제압하기 위한 창군의 필요성에 부응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하루 빨리 강력한 국군을 육성하는 것이 시대의 급선무라고 인식했다. 당시는 진정 창군의 필요성이 대두된 상황이었다. 일본의 압력을 받아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8월 1일부로 해산되어 국군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전통도 단절됐다. 이 상황에서 “건국에는 반드시 건군이 있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군대가 없는 국가는 성립될 수 없다. 주권, 영토, 국민, 헌법 등 국가의 기본요소들이 다 갖추어졌다 해도 군대가 형편없는 국가는 자기를 지킬 힘도 없고, 그래서 주권, 영토, 국민을 사수하고 보호할 힘도 없어지는 것 아니냐? 그러니 건국에서 건군이 얼마나 중요하냐? 또 우리가 맥없이 당했던 수많은 역사적 외침을 보더라도 강한 군대는 국가 존립의 기반이란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지 않느냐?”
   다른 하나의 계기는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귀국 후 조국의 암담한 현실과 극도로 혼란했던 정치상황은 자신으로 하여금 30대가 되기까지 식민지, 분단, 전쟁, 폐허, 절대빈곤의 시대를 살아나온 젊은이로서 국가, 그것도 “제대로 된 국가다운 국가”에서 살고 싶고, 그런 국가를 세우는데 일조하고 싶고, 또 그런 일류국가를 후세에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상기 두 계기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사후 합리화의 성격이 짙은 설명이다. 청암은 자신이 군문에 들어서게 된 이유로 “일본에서 징병면제를 받아 살아난 보답으로 우리나라에 충성하는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들었는데, 이 말은 시간상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면 처음부터 귀국 후 좌고우면 하지 않고 바로 군에 입대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동안 다른 길, 즉 공학 관련 직업을 찾았다. 따라서 청암은 처음부터 군인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군인이 된 게 아니라 군문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후 군인이 된 뒤에 생겨난 충성의지를 두고 건군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선비의 입지 정신처럼 자신이 왜 군인이 돼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하기 위해 군인이 돼야 하는지 뜻이 분명하고 확고했다는 식의 언급도 결국 군인이 된 뒤에 그렇게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과 미래를 스스로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강력한 운명통제 욕구가 있다. 그렇듯이 청암이 군인이 되려고 결심한 것은 운명적 계기라고 보기 보다는 그의 능동적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능동성과 관련해 에리히 프롬(Erich Rromm, 1900∼1980)은 “인간은 절대적인 수동성을 묵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인간은 “스스로 변형되고 변화될 뿐 아니라 세상에 그의 흔적을 남기려 하고, 세상을 변형시키고 변화시키려 한다”고도 했다. 이것은 곧 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비정신과도 맥이 통한다. 선비정신은 먼저 입지, 즉 뜻을 세우는데서 비롯된다. 뜻을 세우지 못하면 인생의 올바른 지표와 방향감각을 잃게 된다. 박태준도 군인이 되겠다는 입지는 확실했다. 선비는 입지가 확고하면 정의를 위해 두려울 것이 없고, 공론을 그르칠 염려가 없다. 또 孔子(BC552~BC479)가 위급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며, 득을 보면 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士見危致命, 見得思義)이 선비정신이라고 했듯이 박태준도 당시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을 위기상황으로 인식했고, 목숨을 국가에 바치려고 했던 것이다.
   광복 직후 해외 귀국유학생은 대부분 교사나 정치계로 향했는데, 박태준처럼 공학도가 군인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다른 길을 모색하다가 선택한 군문이었지만 동적인 영역에 속하는 군인이라는 직업은 靜的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 박태준의 성격에 적합한 분야였다. 그 선택도 당시 시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신생 독립국가에서 군은 국가건설(state building)의 수단이자 주역인 이상, 당시의 시대상황과 인과적으로 계합됨과 동시에 청암이 시대사적 사명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군인이 되는 첫째 관문으로서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에 받은 교육도 그의 無私 死生觀의 형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짧은 재학기간이었지만 육군사관학교의 교육내용이 박태준의 군인정신과 국가관 형성에 어느 정도 학습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창립 초기 육사의 교훈은 정해진 게 없었다. 교장들이 부임해오면 각기 자신의 교육방침을 제시했다. 초대 교장 이형근(1920∼2002)은 “명예, 신의, 책임”, 제3대 교장 정일권(1917∼1994)은 “용맹, 결단, 순정”, 제5대 교장 김백일(1917∼1951)은 “용기, 신사도” 등을 교육방침으로 내세웠다. 또 제7대 교장으로 부임한 김홍일(1898∼1980)은 “충국, 애국”이라는 교육방침과 “군기확립으로 사상통일”, “국방훈련으로 국토통일”, “청렴결백으로 사병제일” 등과 같은 교육방침도 교훈 역할을 했다.
   교육방침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바로 생도들에게 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암이 회고한 내용을 보면 최소한 책임, 용기, 신사도, 청렴결백 등 육사생도 시절의 여러 교육방침들이 교훈 내지 좌우명으로 그의 가슴에 새겨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우리 동기들(6기)은 임관의 기념선물을 받는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장에 초대받은 장교들이었다. 그때 그 자리, 그 시간에서 느낀 자부심은 짧은 육사교육 기간에 못지않게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고 회상하면서, “그야말로 건국의 건군 장교가 됐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됐다고 회고했다.
   無私 死生觀이란 게 죽음을 목도하거나 자신이 직접 그 문턱에까지 서본 극한의 체험을 한 경우에 형성되기 쉽듯이 박태준의 無私 死生觀도 생사를 넘나든 전쟁경험을 통해 완전히 ‘자기’를 버리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가 전쟁에 맞닥뜨리거나 동원되기를 죽음만큼이나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직업군인 중에도 흔쾌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는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생명의 안위와 직접 관계되고,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가 “전쟁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며, “전쟁에서의 행동을 좌우하는 사태의 4분의 3은 크든 작든 간에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 가리어져 있다”고 했듯이 한 마디로 인간의 생명과 지위와 운명에 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곳이 전쟁이 아닌가!
   그는 죽음이 예약된 거나 마찬가지인 死地로 뛰어들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숱한 부하, 동료, 선배 전우들의 죽음을 목도했다. 이는 분명 자신의 말대로 전쟁을 통해 無私정신을 체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는 6․25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 27일 중대 병력으로 미아리의 서라벌 중학교 방어전투 수행시, 그리고 전쟁 막바지 1953년의 삼각봉고지 전투와 화천 수력발전소 사수 임무를 맡아 생사를 넘나든 949고지 전투에서 전우들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했다.
   박태준이 전쟁을 헤쳐 나가는 청년장교가 되자 그의 부친은 그를 두고 “맏이의 몸은 이미 국가의 몸이다”라고 했다. 부친의 이 얘기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엄숙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매개”로 작용했다고 한다.
 
3. 무엇을 위한 無私 死生觀인가? :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박태준은 왜 無私的 삶을 살고자 했을까? 또 청년시절 청암은 어떤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을 주장하고 실천했을까? 이 양자의 상관관계는 어떠했을까? 그가 생각하는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내용, 그리고 그 목적 달성의 주체, 수단과 실천은 어떠했을까? 먼저 위국헌신의 대상이자 귀결처인 국가에 대한 청암의 인식부터 파악해보자.
   청암의 국가관에서 우선 국민의 의지와 지도자의 영도에 따라 국가가 패망하거나 성장이 결정된다고 본 점이 주목된다. “국가가 성장하는 것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에서 노년기까지의 각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다만 국가의 경우 성장 사이클이 더 길고 국민적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를 지속 발전시킬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신경 쓸 문제점은 계속 증가하게 된다. 청년기에 도달하기까지에는 모든 것을 지도자의 의지와 경륜에 의해 밀고 나가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시기에 지도자가 사심을 버리고 국가이익의 수호와 증진을 위하여 국가를 이끌어 나가게 됨으로써 나라가 발전의 궤도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지도자의 굳건한 의지와 사심을 버린 국가경영이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관건이라는 주장이다.
   박태준의 원래 포부는 부국강병의 실현이었다. 그것은 군인이 되기 이전부터 내면에 생성돼온 꿈이었다. 부국강병을 이루려고 한 이유는 “국제사회에선 힘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뭐라 하든 힘과 실력을 갖추면 당당히 대접받고, 그렇지 않으면 불쌍해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국강병은 역사 이래 洋의 동서와 時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위정자와 경세가들이 지향해온 가치다. 이 점은 중국의 역사가 司馬遷(BC 145?∼BC86?)의 입을 통해 실증된다. 예컨대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 이전의 중국역사를 섭렵한 뒤 “군대가 아니면 국가는 강대해질 수 없다”(非兵不强)는 결론을 내렸다. 청암도 이러한 역사성을 공유한 셈이다.
   청암의 부국강병론은 조국이 유약해 일제식민지가 된 사실에 대한 준엄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뿌리가 있어야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이 국가라는 토대를 지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와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자주독립 상태를 유지했던 것은 부국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처럼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해 문약하고 貧國弱兵이었을 때는 외침을 당했다. 조선은 임진전쟁으로 일본에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임진전쟁을 정치적으로 통괄한 유성룡(1542~1607)은 조선이 일본에게 패한 원인으로 군정의 근본, 장수선발의 준거, 군사훈련 방법 등에서 백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던 점을 꼽고 있다. 즉 평시 유사시에 대비한 군사준비가 부실했다는 것이다. 유성룡은『懲毖錄』에서 “장수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이라는 경구를 인용해 장수의 군사운용 능력을 강조했다.
   통탄스럽게도 임진전쟁으로 일본에게 참혹하고 호되게 당하고도 우리의 선조들은 武와 무인을 천시했고, 군사력을 보강하거나 국방을 튼실하게 하지 못했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의 풍속이 “온유하고 점잖아서 무예의 기술을 즐기지 않고, 익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활쏘기뿐”이라고 했다. 정약용이 살았던 조선후기는 활쏘기마저 제대로 익히려 하지 않았으니 “무예를 권장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했다. 또 사대부 계층의 위정자들은 위정자들대로 붕당을 만들어 반대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무자비한 당쟁을 일삼았다. 사회 지도층인 선비들은 생산에 종사하는 계급을 철저히 천시했다. 국가경제의 저변형성이 저해된 배경이었다. 결국 조선은 중국에게 무시당했고, 급기야 스스로 야만시 해오던 일본에게 통째로 나라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를 경험한 박태준의 역사 진단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도 과거의 행동 패턴에 대한 반성 없이 오직 자기만 살겠다는 맹목적 생존본능으로 무작정 일본인의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개탄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청암은 부국강병 및 자주국방의 교훈과 그 필요성을 절감했다. 즉 역사는 오직 힘만이 국토를 보전하고 민족을 지킨다는 교훈을 웅변으로 가르쳐 주고 있으며, 또한 경제적 자립과 이에 입각한 자생적 국방력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광복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실증해주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사실상 개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운명까지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한국이라는 사회집단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면, 개개의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있었겠는가?
   박태준이 국가를 살찌게 하고, 강병에 방점을 찍은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또 신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한 의지와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충정이 자신의 영리를 위한 사사로움을 앞섰던 것이다. 그는 군사력 이외에 국방력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지리적인 조건, 천연자원, 생산력, 인구, 국가의 성격(national character), 국민의 사기(national morale), 외교, 정부구조 등의 여러 요인들 가운데 경제력, 즉 국부가 최우선이라고 인식했다. 자주국방은 말이나 관념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국부가 뒷받침돼야 한다고도 했다. “국부가 국방의 근본이 된다. 국부는 경제, 과학기술, 국민의식, 사회제도, 민주주의, 문화 등 국가를 이루는 복합적인 구성 요소들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동시에 부국강병은 자주국방을 필요로 하고, 양자는 왕왕 상호 표리 혹은 상승의 관계에 있다. 부국강병이 이뤄지면 자주국방은 가능해지고, 자주국방이 이뤄질 정도가 되면 부국강병이 돼 있다는 증거다.
   청암이 도달하고자 한 자주국방의 수준은 경제에서 ‘강소국’이란 말을 쓰듯이 “덩치가 작은 나라지만 최정예 병력이 최첨단 군사장비로 무장한” ‘강소군’의 능력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었다. 정신면에서는 지휘관들의 솔선수범과 사심 없는 사명의식이 바탕이 돼 그것이 자연스레 병사들의 가슴과 머리에 스며들어가 恒在戰場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사기가 충천한 군대였다. 자주국방의 궁극적인 효용은 평화를 지키고자 함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무력을 쓰지 않아야 평화가 유지되지만, 유감스럽게도 평화의 상당 부분은 무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법칙”이라고 인식했다.
   자주국방의 주체에 대해선 청암은 “나라에 현명한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다는 것은 백성의 사표”(國有賢相良將, 民之師表也)라고 한 司馬遷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올곧은 정치인과 군 지도자에다 장병들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Ⅱ. 無私 死生觀의 실제 전개
 
1. 爲國獻身, 先公後私 정신의 실천
 
   역사는 애국심이 위대한 민족을 만든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또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의무감을 지닌 시민이 다수가 되는 강대국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몰락한데에는 애국심의 저하만큼 더 확실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영웅적 행동들과 위대한 애국행위들을 이끌어내는 것은 애국심의 감정이었다. 예들 들어 서양의 경우 프랑스 필립2세(PhillipeⅡ, 1165~1223)의 무적 군대를 전투경험이 전무했던 민병대로 쫓아낸 네덜란드인들, 그리고 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들, 프랑스혁명을 무력화하려는 14개국의 군대를 발아래에 꿇게 한 프랑스인들의 행위는 모두 조국애가 원동력이었다. 동양에서 중국의 수나라 113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인, 일본의 임진전쟁을 실패로 만든 조선인들, 프랑스 식민통치에 저항한 베트남민족, 독립투쟁에 모든 것을 희생한 한국의 독립투사들, 이념을 초월해 거국적인 항일전쟁을 위해 제2차 國共合作을 성사시킨 중국인들의 행위들도 구국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역사상 위대한 역사를 전개한 인물들의 애국심은 대체로 無私정신에서 발양된 위국헌신, 선공후사, 보국안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개념이 중첩되는 위국헌신과 선공후사는 공히 목적론적으로는 보국안민을 지향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역사인물 중에는 이순신 제독, 안중근 의사를 꼽을 수 있고, 국외에는 중국 송대의 范仲淹이 이에 해당된다. 이순신과 안중근이 새삼스레 우리민족의 영웅임을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다. 范仲淹은 주자학의 창시자 朱子(1130~1200)로부터 “유사 이래 하늘과 땅 사이에 제일류 인물”(有史以來天地間第一流人物)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대의 毛澤東(1893∼1976)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도 范仲淹의 “先憂後樂”정신을 사표로 삼아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치고자 했을 정도로 역사적 귀감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박태준은 이 반열에 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면 먼저 청암에게 위국헌신과 선공후사 정신이 있었는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정도와 성격, 즉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늠해보는 게 맞는 순서다.
   그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선행 논의에서 확인한대로 귀국 후 박태준이 당시로선 선진학문이었던 기계공학이라는 자신의 전문성을 조국을 위해 발휘하겠다고 한 사실이다. 광복 후 해외유학생 대부분이 그랬듯이 정치계나 교육계로 투신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청암이 자신의 영달과 개인의 명예만을 생각했더라면 그는 구태여 목숨을 담보로 하는 군인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6·25전쟁을 계기로 국가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각오하고 결심한 사실이다. 청암에게 6·25전쟁은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이 수사적 차원의 이론이나 개인의 각오로 끝나고 만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1950년 6월, 북한은 한국군보다 약 2배 많은 19만여 명의 병력에다 압도적인 우위의 무기 및 장비로 불시의 기습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가 이 전쟁에 참전한 동기는 “침략의 저지”(response to aggression)만이 전쟁을 일으키는 정당한 원인으로 인정된 20세기 국제법적 환경을 완전히 거스른 북한의 불법 남침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박태준은 중대장으로서 서울점령을 목적으로 전차를 앞세워 미아리로 들어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방어전을 치렀다. 또 그 후 남쪽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동해안을 따라 북상 진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청암이 국가에 몸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처럼 청년 장교 시절 숱한 전장을 거치면서였다. 일제 시기 일본 육군대학 교장과 일본군 동부방위군 사령관을 지낸 이이무라 유즈루(飯村穰, 1888∼1976)는 兵의 정신이자 본질은 사랑이라고 했다. 몸을 던져 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준이 군인이 되고, 참전하여 사투를 벌인 것은 국가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조국이 침략을 당해 적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한 박태준의 호국의지는 정도와 진정성에서 이순신 제독이나 안중근 의사만큼 그러했었는지 정확하게 계량할 순 없어도 성격은 동일하다. 이순신 제독의 위국충정과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사상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맹세한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는 구절은 그의 위국충정이 어떠했는지 알게 해주는 말이다. 죽기로 각오하고 국가를 지키려고 한 그의 충정은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9월 15일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에 임할 것을 당부한 “必死則生 必生則死”(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경구는 병법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무인이 갖춰야 할 자세를 가리킨다.
   이순신 제독은 또 의사결정에서도 두 가지 원칙, 즉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과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반드시 적용하고, 공명정대(fairness)라는 원칙을 모든 의사결정의 기본으로 삼았다. 예컨대 그는 휴가 중에 지급된 양곡을 반납하기도 했으며,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하여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같은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인사를 가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고 했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그는 평소 군인의 임무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대저 군인이란 국가의 중임을 맡은 자다. 충의의 마음을 길러 외적을 무찌르고, 강토를 지켜 인민을 보호하는 것이 당당한 군인의 직분”이라고 했다. 그가 “安而死義”, 즉 민족과 국가정의를 위해서는 기꺼이 한 몸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이유였다. 또한 그는 1904년 조선침략을 획책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저격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동은 의를 위함이지 절대로 사적 명예를 탐해서 나온 것이 아니오. 나는 의로 나라에 보답하고, 의를 위해 내 생명 기꺼이 바칠 것이오. 따라서 명예는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소.”
   이순신과 안중근이 위인의 반열에 드는 까닭은 두 사람의 ‘위인 됨’이 공통적으로 충효, 위국헌신, 선공후사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박태준도 이순신 제독과 안중근 의사처럼 위국충정 정신이 투철했고, 공사구분, 선공후사가 분명했다. 개인의 사사로움 보다 국가를 우선시한 박태준의 충정과 자세는 尙武主義와 민족의 단결을 바탕으로 한 독립자강이라는 국가관에 투철했던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도 맥이 통한다. 청암은 6·25전쟁 동안 후방근무는 단 한 번도 못해보고 일선으로만 뛰어다니느라 몇 년 동안 가족도 만나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가도 늦게 들었다. 이 시기 박태준은 갓 시집온 새색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나라에 바친 몸이니 집안 살림은 알아서 하시오.”
   혹자는 박태준이 전쟁에서 조국수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것에 대해 군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군인들 중에도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이 없지 않다. 전쟁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병역의무를 기피하는 이들도 있지 않는가! 이 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참전한 박태준의 위국헌신을 위한 투혼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청암의 정신과 사상은 중국 송대의 정치가이자 학자, 군사전략가, 교육자인 范仲淹의 국가관을 상징하는 “先憂後樂”사상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가 “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그는 “사회가 안정돼야만 안정된 국가가 있을 수 있다”(唯有社會安定了, 才有安定的國家)는 생각을 가지고 위로 임금에게 충성했고, 아래로 목민에 충실했다. 그는 오로지 나랏일을 우선시하는 ‘公’을 앞세웠고, 사사로운 정은 뒤로 했던 인물이다. 范仲淹이 고래로 중국 정치지도자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이유가 이런 이유이라면, 군인, 경세가, 정치가, 교육자이기도 했던 청암의 사상과 업적도 그들과 같은 수준의 평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주장은 그가 오랜 세월 그러한 정신을 실천한 다음과 같은 행적에서 입증된다.
   청암의 공사구분, 선공후사 정신은 군 재직시 인사의 공정성을 유지한 점과 특히 일선부대 차원의 부정부패를 끊기 위해 군수보급분야에서도 업무를 공정하게 수행한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청암은 영내 부식과 물건의 반출행위를 국가에 대한 도둑질로 규정해 엄한 규율을 세워놓고 늘 보급품이나 부식 확인까지도 단순한 서면보고로 끝내지 않고 일일이 물품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1954년 포천의 육군 제25사단 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하여 예하 부대를 순시하면서 양념 보급사항을 점검하면서 고춧가루 보급상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톱밥으로 물들인 가짜 고춧가루를 납품한 업자를 교체해 고질적인 군납비리를 발본색원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문제의 납품업자가 몰래 자신을 찾아와 봉투를 내밀면서 “뒤를 봐 주겠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튿날 여기저기 높은 데서 그 업자의 뒤를 봐주고 있던 상관들로부터 모두 “조용히 덮고 각서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라”는 압력이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청암은 장교들이 자기 가족의 부식을 부대군수품에서 몰래 가져가 먹는 경우가 많았던 당시 부식의 영외 반출도 일체 금지했다. 그는 제25사단 연대장 시절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만 부대약품을 사용하게 한 “딱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이 원칙을 “비교적” 철저히 지켰다. 예컨대 RCT훈련 당시 당번병까지 부대원 전원을 훈련에 참가시켰기 때문에 임시로 파견돼온 당번병이 부대 부식품 중 생선 네 마리를 박태준 대령의 사택으로 가져왔는데, 식사 중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밥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당번병을 그 자리에서 원대 복귀시켜 버렸다.
   공익을 우선시한 박태준의 원칙은 이 시기 아이가 감기에 걸려 부인이 몇 번이나 외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도 군의관은 의사가 아니냐고 힐문하면서 병원에 가는 것을 거절한데서 극치를 이뤘다. 아이의 감기가 심해져 폐렴으로 번진 상황에 이르러서도 그는 군 지프를 부르지 않고 외부지인의 차로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게 했다. 왜냐하면 당시 박태준은 비품을 사적으로 쓰는 것은 나라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라며, 사택용 관용차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절 그는 관사에 따로 배치되는 군 지프까지 거절했기 때문에 ‘호랑이 연대장’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논의를 종합하면, 박태준은 조선의 정도전, 이순신, 안중근과 중국의 范仲淹처럼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가늠할 수 있는 저서나 연설들을 문헌으로 많이 남기지 못했지만―장교시절 그는 그럴만한 상황과 위치에 있지 않았다―공사를 철저히 구분하고자 한 위국헌신, 선공후사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실제 삶의 행적에서도 분명 이순신, 안중근, 范仲淹 사상과 유사한 삶을 살았다. 청암의 이러한 정신은 군 재직 시절은 물론, 포스코건설시기와 경영시절에도 일관되게 지켜진 원칙이었다. 일관된 실천은 사상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앞서 예시한 청암의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의 실천이 이 정도였다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엄격하게 구분한 이순신 제독, 范仲淹 못지않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청암은 위인의 특성으로서의 일반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청암은 그만이 가진 사상적 특수성도 있었는데, 그것은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에 뿌리를 둔 그의 리더십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선 이하 여러 절에 걸쳐 규명하겠다.
 
2. 二價的(ambivalent) 가치 : 군인윤리 실천 vs 군의 정치개입
 
   위국헌신과 선공후사 사상을 지닌 청암은 어떤 군인정신으로 부국강병, 자주국방을 이루려고 했을까? 그의 군인됨은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군인정신(military mind)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흔히 군의 특유한 모습이나 기능적인 양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군인정신의 일반 개념을 이 분야의 고전적인 연구 성과를 낸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이 제시한 군인 정신의 특성과 직업군인 윤리라는 관점에서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사무엘 헌팅턴에 따르면, 군인정신은 보통 능력 혹은 자질, 속성 또는 특성, 태도 또는 본질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군인정신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첫 번째 관점인 능력 혹은 자질은 군인정신의 두드러진 한 면을 다루고 있지만, 군인정신 특유의 “군사적”인 제 면모를 정의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자나 치과의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듯이 지적 능력의 높고 낮음이 다른 직업과 명백히 구분되는 군인정신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군인정신의 특성이 군인의 인성을 구성하는 정신적 속성 또는 자질에 있다고 생각하는 두 번째 접근방법에 의하면, 군인정신은 규율이 바르고, 엄격하며,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서 융통성이 없고, 관용적, 직관적, 정서적이지 않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군인 이외의 직업인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들의 성격, 가치, 행동에 관한 지식이 더 많이 축적되기 전에는 군인정신의 특성으로 규정하기에는 불완전 하다고 한다. 세 번째 접근방법인 군인의 태도 또는 본질, 가치 및 견해 등 군인정신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이 갖는 역할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수행함에 따라 어떤 특정한 선호나 기대가 포함돼 있는, 직업군인 윤리의 일부일 뿐이다.
   직업윤리에서 보면, 여타 직업인과 직업군인들만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군인의 기본 가치와 시각인데, 군인은 국가 군사안보의 증진을 위한 책무 이행시 그 수단의 하나로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둘째, 국가의 군사정책에 대한 태도와 반응인데, 전문직으로서의 군이 져야 할 책임이 군인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다섯 항목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즉 (1) 국가를 정치조직의 기본적 단위로 생각하게 한다. (2) 국가 군사안보에 대한 위협의 지속성과 그에 따른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3) 군사안보 위협의 중대성과 긴급성을 강조한다. (4) 임전태세를 갖춘 강력하고 다각적인 군사력의 유지를 지지하고, 옹호한다. (5) 승리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가 전쟁에 관여하거나 연루되는 것을 반대하며, 참전을 부추기는 언론과 전쟁개입을 반대한다. 셋째, 군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 또는 사상, 실체라는 점인데, 군은 국가에 충성하고 상관에게 복종하되 명백한 문민통제 하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태준은 군 재직시 대체적으로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고, 국가안보와 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등, 상기 첫째, 둘째, 셋째 내용에 모두 해당되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게다가 박태준은 군의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상황에서도 청렴, 공사 구분, 부정부패의 예방 및 단속과 척결에 앞장섰다는 점에선 모범적 군인의 표상으로서 돋보이는 길을 걸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둘째의 (3), (4)항 내용을 실천하는 인식과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후술할 5·16군사정변을 지지한 사실에 대한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셋째의 군의 문민통제 문제와 관련해선 여타 일반적인 직업군인과 달랐다. 즉 그는 군이 명백한 문민통제 하에 있게 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문민통제를 벗어난 군의 정치개입을 찬성한 것이다. 청암이 군인으로서 지켰던 군인윤리 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광복 후 한국사회는 부정부패가 창궐했다. 그것은 6·25전쟁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박태준이 몸담은 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군의 부정부패 정도는 여타 국가기관이나 조직 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낫지는 않았다. 한국군의 문제는 군 수뇌부의 부정부패, 군 기강의 전반적인 해이, 군에 대한 감사와 견제 기구의 전무라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군 수뇌부부터가 부패했기 때문에 비롯된 총체적 난맥상이었다. 만약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군 운영은 물론 국가체제도 위협 받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초기 군의 부정부패 상황을 실증하는 사례들은 부지기수다. 여기에는 대략 다섯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 ‘이익이 개재된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인사 불공정’이다. 둘째, 주어진 계급이나 직위의 권한을 악용해 재산을 갈취하는 ‘권한을 오․남용한 개인 착복형’이다. 셋째, 군의 각종 연예비, 회식비와 판공비를 오․남용하는 ‘군 예산의 私用化型’이다. 넷째, 군이 형무소 죄수들과 공병단을 동원해서 골프장을 조성해 군대의 재산으로 만드는 ‘군 조직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국가재산의 군대사유화형’이다. 다섯째, ‘각종 외압에 눌려 군 재산을 영향력 있는 자에게 제공하는 형’ 등이다.
   만약 고위 장교들에게 도덕심이나 애국심이 넘쳐흘렀다면 그들의 저질과 무능력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겠지만 당시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대부분이 사복을 채우고 보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장사를 하러,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도둑질을 하러, 군대에 들어온 자들이 수두룩했다. 만약 군의 조직이, 특히 경리면의 감찰기구가 잘 짜여져 효과적으로 운영됐다면 부정은 쉽게 적발되고 시정됐을 것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 마디로 당시는 전쟁의 주역인 군에 비리가 통하기 쉬웠고, 공무원도 돈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으며, 권력, 금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군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면 그에 대한 척결은 군 기강 확립과 정의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당위다. 정의가 사라지면 군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결국 전투력의 약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군의 부정부패는 이른바 ‘공정한 사회’를 실현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의 정의사회 구현에도 배치된다. ‘공정한 사회’란 법철학적으로 말하면 정의의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다. 법철학이라는 관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정의에 대해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cuique suum) 주는 것이라고 명쾌하고 간명하게 정의한 바 있다. 사회 구성원의 노력과 노동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각자에게 그에 걸맞은 제몫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 원칙이 관철되지 않으면 마땅히 인정돼야 하는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 사람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저항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운영은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동양사회에서도 자고로 부정부패를 경계하기 위해 청렴과 정직이 국가 관료나 지식인의 역할을 행하는 선비가 지켜야 할 덕목에 포함돼 있다.
   박태준도 군 재직시절 군의 부정부패를 크게 우려했다. 직업군인이면 다 그렇듯이 자신이 속해 있는 부대의 전투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일선 전투부대 수준이긴 해도 군 지휘관뿐만 아니라 간부들 대다수가 부정부패를 일삼은 부정부패 척결을 몸소 실천한 흔치 않은 청년장교였다. 그는 부정부패가 움트는 최대의 근원인 인사와 군수 분야에서 엄격하게 공정을 기했다. 나아가 그는 전군의 만연한 부정부패에 좌절하거나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손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부정부패에 정면으로 부딪쳐 혁파하거나 근절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선 부대 차원의 부정부패를 끊기 위해 군수보급 분야에서 업무를 공정하게 수행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앞 절의 공사구분 부분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한 바 있다. 여기선 인사 분야에서의 예를 들어보겠는데, 박태준은 인사를 엄정하고 공정하게 집행함으로써 일선부대의 안정과 군 기강확립에 일조했다. 군의 안정은 군 수뇌부의 ‘後見意識’과 직업주의 정신에 달려 있다. 그 핵심은 직업군인들에 대한 인사관리를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문제에 직결돼 있었다.
   박태준의 인사관리가 어느 정도 공정했는지는 그의 업무처리에 상관이 크게 만족한 사실에서 입증된다. 김웅수 장군은 6·25전쟁 중 제1군단 인사참모로 있을 때 청주에서 수하의 인사과장이었던 박태준을 처음 만나게 됐다. 그는 당시 소령이던 박태준의 근면성과 성실성이 돋보였다고 하면서 “인사처에 박 소령 하나만 있으면 안심이 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웅수 장군의 이러한 평가는 본인이 인사의 공정성을 추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박태준은 전반적인 군인윤리 실천면에서 돋보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 중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면에서는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청암이 박정희의 정치개입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강력한 지지자로 자처했으며, 군인의 정치개입에 대해선 조건부로 긍정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개입’이란 바로 5·16군사정변을 가리킨다. 그는 이 거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훗날 이 ‘혁명’을 처음부터 긍정했고, ‘혁명본부’로 달려가 박정희가 이 거사에 자신을 불러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까지 토로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5·16혁명은 민주당 정부의 무기력함과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를 위기라고 판단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박태준이 군의 정치개입, 즉 군사정변을 긍정한 것은 단순한 상황논리가 아니라 청년장교 시절부터 견지한 일관된 군인의 역할에 대한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와 군의 관계, 국가와 군인의 관계, 민주주의발전과 군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군은 국가의 최후 보루다. 군인은 국가의 몸이다. 군은 국민과 국가를 지켜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우리 현대사의 한 시절에 민주주의와 군이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비판, 오해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을 보라. 민주주의, 경제, 문화, 교육, 과학기술 등 국가의 그 모든 것은 국민이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어야만 추구하고 발전할 수 있다. 국민의 평화와 안녕을 사수하고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 조직이 뭐냐? 군이다. 그 위에 공권력이 있다. 국가의 기틀이 잡힌 국가에서는 민주주의와 군, 국가와 군, 국민과 군은 이런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장기집권, 시민사회의 성장과 자율성 제고를 저해한 5·16군사정변의 부작용에 대해선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일면적,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전반부 동안 세계적 차원에서 군 내부의 변화를 반영하는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당시 군 내부에서 정치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상급 부대로 올라갈수록 대표적인 경향이 됐으며, 다수의 장교들은 점차 그들 스스로 보수주의라고 규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었다. 또 군부 내부의 정치적 믿음들은 점점 분명해지고, 정교화 되며 교조화 되어가고 있었다. 군인들도 점점 이념화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청암이 군의 정치개입을 긍정한 동기는 권력 쟁취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른바 권력형 인간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치죄할 수 없다는 박태준의 정치개입 논리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부정, 즉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선 군의 정치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군인들에게 1980년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처럼 정치적 기틀이 잡히지 않은 국가의 틀을 잡는 것이라면 그러한 명분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해도 된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게 만들 여지를 남겼다.
 
3. 자주국방 실천의 한계와 군 재직시 체득한 무형의 자산
 
   청암은 박정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연인의 삶과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광복 후 새 삶의 모색, 군문 투신, 6·25전쟁 참전, 군 인사 및 군수업무의 정확성을 기함으로써 당시 만연된 군내 부정부패를 개선했다. 또한 교육훈련을 통한 전투력 유지와 제고 등 자신이 맡은 바를 열정적으로 소화해냈다.
   그러나 군문 투신 이후 계속된 그의 노력과 헌신, 리더십 발휘 등은 군 전체를 개혁하거나 발전시키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군 일각의 일선부대 차원에 머물렀다. 따라서 자신의 비전인 자주국방 달성은 요원했다. 물론 하부 수준에서도 개혁의 외연이 넓어지면 그것이 추동력이 돼 상부로도 확산될 수 있다. 옳고,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태준의 노력이란 게 군 전체로 봤을 때 소수자에 불과했고, 개혁의 외연을 넓혀 상부 수준의 개혁을 기대할 만큼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비전은 반드시 실행력과 경험이 뒤따라야 했지만, 광복 후 한국사회는 이를 위한 물적, 인적 토대가 전혀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다 무엇보다 그는 자주국방을 실현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지 못했다. 물적, 인적 토대의 미비에다 총체적인 부정부패, 정치불안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을 그 자신이 헤쳐 나가기엔 자신의 지위나 영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청암은 훗날 만약 자신이 중도에 예편하지 않고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더라면, 한국군의 굵직한 문제들에 손을 댔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주장은 군문에 남았을 경우 자신이 군 수뇌부 지위에 올랐을 것임을 전제한 가정법이다. 그는 1959년에서 1960년에 걸친 두 차례의 미국연수를 통해 세계 최강의 미군을 살피고 온 경험을 토대로 한국군의 현대화 문제, 인사관리나 물자관리 같은 제도개선 문제, 당시 군에 만연했던 부패청산 문제 등 선 굵은 구조적 개혁을 기획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만약 그랬었더라면 군의 제도개선, 부패척결은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경제, 과학기술, 의식 등 국부를 이루는 각 분야별 수준을 돌이켜보아 우리 군의 현대화라는 기획에서는 별 진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왜냐하면 “맨 주먹으로, 구호로, 관념으로 그걸 실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청암이 재직했던 15여 년간의 군 생활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는 왕왕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듯이 이 시간은 그에게 포스코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준비기였다. 군 재직 기간 동안 그가 얻은 무형의 자산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군에서 길러진 불굴의 정신력 및 교훈에 대한 자각과 청암 특유의 리더십 체득, 둘째, 당시로선 선진적인 지식과 업무능력, 셋째, 박정희와의 만남이었다.
   박태준이 6·25전쟁 중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고, 뜨거운 역사의 현장 속 전쟁터라는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헤쳐 나오면서 체득한 것은 ‘절대적 절망은 없다’는 불굴의 정신이었다. 그것은 20대의 청년기에 상아탑에서 얻기 어려운 교훈으로서 그의 인생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정신으로부터 단련된 청암의 무인적 자세는 고스란히 포스코건설 시에 발휘된다. 그런 점에서 청암은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내하며 원칙을 지키고, 야망을 잃지 않으면서 험난함 삶에서 일관된 길을 걸음으로써 역사적 인물로 부상한 조지 워싱턴 장군에 비견된다.
   군 재직 시절 청암의 리더십이 어떠했는지 현재로선 실체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고 있다. 당시 그 자신이 직접 리더십에 관해 언급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전쟁시 받은 적지 않은 무공훈장으로 추론할 수 있고, 또 그것을 훗날 청암이 생각한 리더십의 요체와 대조해봄으로써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6·25전쟁 초기에 이미 화랑무공훈장을 2개나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된 시점엔 더 많은 무공훈장이 그의 가슴에 달렸다.
   주지하다시피 훈장이란 전투, 전쟁과 같은 예측 불허의 증대된 위험 상황에서 여타 동료 보다 전과 면에서 두드러진 행동을 하고 침착성을 보여준 군인들에게 수여되는 보상이다. 군사작전의 성공은 군 리더십의 결과인 동시에 리더십의 유효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무공훈장은 군사작전의 성공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자 지휘관으로서의 리더십에 대한 결과다. 전쟁은 장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하들이 지휘관을 따라주지 않으면 전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흔히 하는 말로 독불장군은 없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준의 무공훈장은 일정 부분 부하들의 공로이기도 함과 동시에 그가 부하들로 하여금 전혼을 불태우도록 지휘한 용병술의 결과이기도 하다.
   청암의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됐을까? 바꿔 말해 그는 어떻게 부하들을 지휘했을까? 프랑스의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이 언급했듯이 군 지휘관은 업무수행에서 집단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개인들의 공통된 행복을 끊임없이 기원하는 집단의 도약대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지휘관은 목표를 더 높이 잡고, 더 크게 보며, 더 넓게 판단해야 한다. 부하들의 정당한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위험에 처하더라도 부하들을 끌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약한 임무가 그에게 떨어진다 하더라도 기꺼이 ‘하인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 훌륭한 군인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장교는 전력을 조직, 장비, 훈련, 지휘하며 계획하는 기술자다. 장교의 전문성은 무력 그 자체라기보다 무력의 운용에서 비롯된다. 박태준이 자신의 개성적인 리더십을 체득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암은 근년 서면 인터뷰에서 리더십의 요체에 대해 “솔선수범, 청렴과 강직, 신뢰감 형성”이라고 했다. 자신은 이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부하들을 사람들이 맺는 관계 중에서 가장 놓은 단계에 있는 공익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동지 사이의 관계로 엮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군인들의 전우애라는 것이 공익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동지의 범주에 들어 있기 때문에 놀라운 희생정신과 고상한 동지애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암 스스로 “극한의 위기 속에서 우리 중대원을 전우애로 뭉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 근거다.
   용병술 중 근본적인 계책이자 가장 수승한 것은 바로 부하나 신하, 민중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이에 대해 孫子(BC?∼BC?)는 자신의 병법서 손자병법의 時計篇에서 “백성(병사)들로 하여금 윗사람들과 뜻을 함께 하여 그와 더불어 죽고 살기를 같이함을 두려워하거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수단으로선 부하와 전우에 대한 사랑(愛)이 가장 강력한 힘이며, 義, 勇 등도 유용하다. 이이무라 유즈루는 군대 통솔의 요체는 만물의 생존에 절대적인 에너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자신의 개인적 利를 떠난 “無私의 사랑”임에 반해 무정함은 최대의 적이라고 강조했다.
   呂不韋(BC?∼BC235)의 呂氏春秋에 따르면, 강력한 군대가 되는 요건은 병사의 수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마음을 하나로 일치단결시키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음이 일치단결되면 명령이 위에서 아래로 막힘없이 통하게 되며, 천하에 적이 없게 된다고 했다. 장군과 병사들을 일치단결 시키는 것은 정의의 전쟁을 치른다는 義로움이다. 즉 전쟁의 승패는 실제로 싸우는 그 날, 그 장소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군대가 평소 명령이 잘 시행될 수 있도록 훈련, 명분, 사기를 갖추고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이이무라 유즈루는 부하 장수의 죄를 엄격하게 묻지 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의 私心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같은 私心을 버려야 한다고 하고, 泣斬馬謖을 예를 들면서 私心을 버리기 위한 장수의 덕목으로서 “勇”이 필요하다고 했다.
   청년장교 박태준이 구사한 용병술이 전사에 남을 만큼 출중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전쟁수행 능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었으며, 그의 훈장이 전쟁수행 중 공을 세운 결과였다는 점이다. 위에서 드골, 呂不韋, 이이무라의 언설을 통해 예증했듯이 그의 立功은 부하들에 대해 장악력, 통솔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私心을 버리고 부하들을 일치단결시켰기에 가능했다. 또 私心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슴에 걸린 무공훈장들을 살아남은 자의 채무보증서 같이 느꼈다. 그리하여 먼저 간 전우들에게 대한 죄스러움임과 동시에 그들이 목숨 바쳐 지킨 조국을 위해, 또 전사한 전우들의 몫까지 의미 있게 살겠다는 각오가 용솟음쳤다. 그는 생사를 넘나든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숱한 부하, 동료, 선배 전우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가슴에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새겼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선진 지식에 바탕을 둔 청암의 업무능력은 군 재직 시절 세 번에 걸친 해외 연수나 시찰을 통해 발전한 것이다. 그는 ‘도미 시찰단장’ 자격으로 1959년 8월에서 9월 한 달 동안 미국을 방문해 미군을 시찰했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한 미국 군사연수였다. 1년 뒤 1960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4개월 간 이번에는 미 육군부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961년 12월에는 ‘구라파 통상시찰단장’으로서 유럽의 산업현장도 살펴봤다. 6·25전쟁 직후 많은 군인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군사 전술과 관리에 대해 교육을 받았는데, 박태준도 기회를 얻어 미국식 관리 시스템을 접한 것이다.
   청암에게 미국연수는 준비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이었다. 미국은 신지식의 제공처였다. 그는 두 번째 방미 때 미 육군부관학교 연수에서 미군의 최신 공정관리 기법을 인상적으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이 때 배운 최신 공정관리 기법은 포스코 건설 초창기에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 자산이 된다. 이것은 제철소의 복잡한 공정과 인력, 물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토대가 됐다. 이 점에서 보면 해외연수는 박태준에게 신지식을 전수했고, 그의 업무능력을 높여준 것이 틀림없다.
   청암이 미국연수의 기회를 얻었지만 만일 자신이 신지식을 소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었더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해외 연구 전부터 이미 상당한 학습능력(learning capacity)을 갖추고 있었다. 국방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성적이 출중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군의 각급 지휘관은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교육관이자 관리를 위한 행정관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전쟁을 위해 민간 분야의 발전 속도를 앞지르는 군사원조의 결과이며, 장교들로 하여금 군의 행정 능력이 당시의 민간 능력을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유였다.
   박태준이 군문에서 획득한, 시대와 인물을 만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세 가지 가운데 대미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만난 것이었다. 역사는 시대와 인물이 상호 교감적으로 만나야 이뤄진다. 박태준이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육사생도 시절 탄도학 과목 첫 시간에서였다. 교관 박정희 대위가 제시한 까다로운 미분방정식 문제를 박태준이 풀어낸 것을 계기로 서로가 상대를 뚜렷하게 기억함에 따라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40여년이 지난 뒤 박태준은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 박정희를 만나게 하려는 운명의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두 사람은 그 후 20여 년간 정치, 외교, 경제면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는 운명적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요소와 능동적 의지가 존재했다. 운명적 요소로는 박정희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남로당에 포섭되어 군대 내의 활동책으로 암약하다 검거되어 생명을 잃게 된 여타 젊은 장교들처럼 만약 박정희 소령도 그들과 같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청암의 포스코건설 신화는 이뤄지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는 검거돼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군내 암약하던 공산프락치 색출에 협조하는 대가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장교가 턱없이 부족했던 관계로 전과가 있는 장교들까지 다시 등용되는 기회를 얻어 군 복무도 허용됐다.
   능동적 요인으로는 박정희가 박태준을 발탁하고, 그를 경제건설 분야에 중용하면서 전폭적으로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포스코건설에 필요한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점이다. 5·16군정 막바지였던 1963년 초가을 도미 유학을 준비하던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군으로 돌아가든가, 정치에 참여하든가 양자택일하라는 지시를 받게 됐다. 정치는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여겨왔던 청암에게 정치출마란 외도였다. 운명의 기로에 선 그는 동료, 후배가 열심히 사단이나 연대를 지휘하고 있는 군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정치를 한다는 것도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군으로 복귀도 못하고, 정치참여도 거절한 상태에서 청암은 결국 1963년 12월 12일 육군 소장계급을 끝으로 예편했다. 그는 군문을 떠남과 동시에 ‘군사혁명정부’의 상공위원도 사직했다. 청암이 박정희와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게 되는 출발선이었다.
   박정희는 청암을 정치적 동지로서가 아니라 외교와 경제 조력자로 중용했다. 그는 외교와 경제개발의 조력자로서 박정희의 지시를 깔끔하게 수행하면서 능력을 발휘했다. 군 퇴역 다음해인 1964년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거나 한일회담 성사를 위한 일본측과의 협상을 성공시켰으며, 동년 10월부터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대한중석 사장으로 부임해 1967년 8월까지 약 3년 사이에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이 회사를 흑자 회사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대한중석을 흑자 기업으로 변화시킨 능력은 박정희가 그를 종합제철소 건설이라는 민족의 大役事를 맡기게 된 인선의 근거가 됐다. 당시 국내에는 공학 전공자가 전무하다시피 한 가운데 안보상 중요한 제철소건설의 중임을 맡아 소신 있게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그런 사람이 박태준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일을 맡겼다. 후쿠다 전 수상의 평가대로 박태준은 군대의 경험을 사회에 활용하여 대국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박정희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청암은 박정희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치로 ‘혁명정부’를 지원하라는 압박에는 단호히 거절했던 그가 왜 경제를 건설하라는 부름에는 호응했을까? 두 사람을 매개한 것은 ‘조국근대화’라는 민족사적 비전이었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청암의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염원은 5,000년 가난을 물리치자는 지점에서 정확하게 포개진다.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국방을 통치의 2대 지주로 설정했다. 그는 자조정신을 바탕으로 먼저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자주국방 태세를 갖추며,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려 진정한 독립국가를 이룩한 뒤 남북통일로 가겠다는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했다. 당시 정부가 공업화와 국방산업의 발전을 위해선 양질의 철강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현대적인 철강업을 일으키는데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부국강병, 자주국방을 강조한 박태준의 국가발전 비전은 박정희의 그것과 부합했다. 박정희의 원대한 비전과 박태준의 결단력, 업무추진 능력이 내외의 짝을 이뤘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포스코 신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상보적, 상승적 관계였다. 박정희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믿을만한 ‘야전사령관’을 만난 셈이었다. 박태준으로선 박정희에게 발탁됨으로써 자신의 시대사적 꿈을 이룰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司馬遷의 史記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라고 했다. 즉 자신을 알아주면 몸을 바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국가는 개인에 우선하고, 개인은 국가의 구성원으로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은 국가를 위해, 혹은 정당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추구한 무사도와도 통하는 논리다. 자기를 알아준다는 함의는 곧 자신의 인물됨은 물론, 사상, 신념과 비전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자란 반드시 군주나 왕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선비의 局量이 협소해지게 된다. 그것은 무형의 가치나 신념일 수도 있다. 박태준에게 자신을 알아주는 자는 자신의 강직함, 천부적 정직과 탁월한 업무능력에다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라는 비전을 눈여겨 봐준 박정희이자 근대화, 중공업화의 첩경인 포스코건설이라는 시대적 사명이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같은 국가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는 청암을 중용한 이상 그가 추진하는 포스코건설에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했다. 심지어 청암이 ‘3선 개헌’을 반대해도 그를 경질하지 않고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1969년 7월 하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성공을 위해 서울에서 그의 측근 고위 인사가 예비역 장성들의 ‘3선 개헌’ 지지서명을 받으면서 육군 소장 출신인 박태준에게도 지지서명을 받으러 포스코건설 현장에 왔을 때 청암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 바 있다. “제철소 일만 해도 바빠요. 정치에선 빠지겠소.” 박정희는 ‘3선 개헌’에 동조하지 않은 청암을 징치하자는 건의가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청암으로 하여금 포스코 건설에 매진하게 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작게는 사나이와 사나이로서의 약속”이자 “크게는 가난한 조국을 한번 허리 펴고 살게 만들어보자는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청암은 수 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이렇게 되뇌었다. “각하, 저에게 내린 필생의 소임을 이제야 마쳤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제단에 저를 불러주신 그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떠올리면서 다만 머리 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Ⅲ. 無私 死生觀의 완성과 그 의의
 
1. ‘製鐵報國’, ‘敎育報國’ 추진의 원동력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웠던 청암이 품은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꿈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라는 이념과 조우하고서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청암의 꿈이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을 이루려는 것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논구한 대로다. 그는 자신의 꿈을 제철보국, 교육보국으로 이루려고 했다. 제철보국, 교육보국은 無私 死生觀과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 바쳐서” 살려고 노력해온 위국헌신, 선공후사, 보국안민 사상이 적절히 혼재된 정신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유력한 수단으로 상정된 목표였다. 그것은 ‘조국근대화’의 필수조건이었다. 따라서 청암에게 일관제철소 건설은 단순한 경제건설, 중공업의 육성이 아니라 부국강병, 자주국방론의 우회적 실행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제철기술도 없었지만 수송수단 등의 인프라 구조(infra structure)도 없었다. 제철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선진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에게 무모하게 보였던 시대였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가 미쓰비시를 동원해 세운 제철소는 분단 이후 모두 북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남쪽에 있던 것도 동란 중 대부분 파괴됐다. 1966년 현재 한국의 철강생산량은 겨우 18만 5,000톤에 불과했다. 그 공정은 조잡했으며, 규모도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제강로는 소형의 낡은 평로였다. 압연 밀(mill)은 대부분 수입 반제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문 인력, 기술, 자본, 경험, 외국의 지원 등 모든 여건이 황무지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1968년 4월 1일, 고작 39명의 건설요원만으로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이때부터 그는 국가에 몸을 맡겼다고 결심한 군인시절의 결연한 정신과 비장한 각오로 포스코 건설에 “죽음까지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청암은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치면서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종합제철소 건설이라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켰다. 분단국가인데다 자본과 기술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것도 짧은 기간에 연산 1,200만 톤의 생산라인을 갖춘 일관제철소를 완공한 것이다. 이 생산량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당시 일본의 제철 생산능력(연간 500만 톤)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청암의 건설계획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전 일본 수상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1905∼1995)가 놀랄 정도였다.
   청암이 무에서 출발하여 포스코건설이라는 대사를 완수할 수 있었던 힘은 한 마디로 정신이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고도의 정신성을 지닌 존재다. 문명이든, 국가든 국가구성원들과 리더의 정신이 살아 있으면 흥하고, 그것이 죽으면 허물어진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위대한 문명을 이룩한 바탕에는 언제나 싱싱한 정신이 살아 있었다. 정신이 죽었을 때 그 문명도 멸망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속적인 교훈이다. 기업도 문명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다. 최고경영자의 자질과 역할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어떤 정신과 사상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청암이 오늘날의 포스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근본도 역시 정신이었는데, 그것은 군 생활을 통해 증식된 無私 死生觀과 절대불가능은 없다는 군인정신의 결합이었다.
   포스코를 건설함과 동시에 이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투철한 국가관, 소명의식, 통찰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그가 추구한 제철보국, 교육보국이라는 비전은 일체의 私를 배제한 상태의 無私정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無私 死生觀이 있었기에 그는 포스코 착공을 위해 포항으로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의 처에게 “이제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해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암이 군대에서 단련된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죽음까지 각오하고” 제철소건설을 밀어붙인 것은 군인정신의 전형이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위 ‘우향우 정신’도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의지, 위국헌신, 선공후사, 도전과 책임의식, 임전무퇴 정신들이 혼재된 군인정신의 결정이었다. 포스코 시공 초기 그는 전체 사원들에게 비장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요.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오.”
   그렇다고 포스코건설의 신화를 모두 청암의 공으로만 돌릴 순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몰역사적 평가다. 청암의 비전에 뜻을 같이 하고, 영일만에 몸을 던질 각오로 자신을 믿고 따라준 참모, 부하 동료들에게도 일정 부분 공이 돌아가야 한다. 실제로 청암은 포스코건설 ‘신화’의 공을 건설현장에서 호된 질책을 감내하면서 포스코건설에 함께 한 부하이자 동료들에게 돌린 바 있다. 그들은 대개 1950년대 군대 생활을 거치면서 자동차, 기계, 예산, 회계, 건설, 통신 기술, 관리 기술, 통솔 기술, 지도력, 기획력 등의 군대 실무 경험을 통해 행정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또 신무기를 사용해봄으로써 근대적 장비를 조작하는 기술을 획득한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청암의 혹독한 ‘견인’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계층제의 군대 생활을 통하여 조직력, 기동력, 결단성 및 진취성을 체득했을 뿐만 아니라 의무감, 명예심과 애국심을 체화한 세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받쳐줬기에 청암의 지도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청암의 無私 死生觀과 국가관은 자신의 경영철학에도 반영됐고, 그만의 독특한 리더십으로 표출됐다. 그가 임원들에게 말한 다음 내용이 이 점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인입니다. 여타 사기업의 종업원이 우리와 크게 다른 점은 우리는 공인이라는 점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짓기 위해 영일만에 모였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기술도, 자본도, 부존자원도 없는 무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핵심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모든 조소와 부정적인 논리를 뒤로 하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국가 경제를 우리 손으로 일으켜보려는 철저한 공인정신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포스코건설 후 제강능력 확장 및 포스코의 守成 과정에서도 최고 책임자로서 청암은 公私구분정신과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포스코의 공기업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시켰다. 사원들에게 포스코는 대일 배상청구권자금을 활용하여 설립된 회사임을 잊지 말 것을 강조했다. 분명한 공사구분 자세는 삼성창업주 이병철(1910∼1987)에게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창업하고 발전시켜 온 삼성이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개인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병철은 패기만만한 젊은 그를 각별히 총애했고, 삼성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그 성쇠는 국가사회의 성쇠와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16세가량 연령이 차이가 났지만 일본 와세다대학 선후배 사이로 자주 만나 대화했다. 청암 역시 이병철을 인생의 대선배로 존경하면서 적지 않은 교훈을 새겼는데, 그도 이병철처럼 포스코의 창업과 경영을 동일한 공개념으로 본 것이다.
   청암의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은 투철한 역사의식의 발로이자 선비정신의 구현에 다름 아니었다. 司馬遷은 史記에서 역사적 고찰을 통해 거만하고 포악한 군주는 利를 밝히고, 패망한 나라의 신하들은 재물을 탐한다는 사실을 들어 후세에 경계하고 있다. 또 조선의 허균은 “선비가 벼슬을 구하는 것은 그 道를 행하고자 함이요, 道를 행하지 않고 한갓 영리만을 탐내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했다. 청암이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으로 철강산업을 일으키려고 한 의지도 개인의 사사로운 영리를 탐해서가 아니라 부국강병, 자주국방이라는 시대적 사명감에서 발원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시대의 “道”를 행하고자 한 셈이다.
   청암이 크게는 부국강병과 자주국방, 작게는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을 달성할 자세로서 솔선수범을 보인 정직과 청렴은 사욕을 버린 無私 死生觀의 顯現이다. 일반적으로 정직과 청렴은 금전 혹은 인사와 관련된 검증을 거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이에 관해 결벽하리만치 깨끗하게 처신한듯한 발언을 남겼다. 사원들에게 “경영자는 로마 교황보다도 더 금전과 인사에 결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엄청난 자금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지도자는 깨끗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정을 해서는 안 된다. 부정을 하면 서로가 불신을 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어려워진다. 우리는 12년 만에 960만ton 규모의 포항제철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고위 경영자들이 정직했던 것도 한 요인이다”라고 회고했다.
   청암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사원들에게 사심 없는 정직과 청렴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 자신도 사심 없고, 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는지는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정직과 청렴을 실천한 것으로 판단되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남겼다는 점이다.
   첫째, 그는 당시 관행화 돼 있던 리베이트나 비자금조성과 거리가 먼 듯했다. 예를 들어 박태준이 ‘롬멜 장군’, ‘효자동 주지’로 불리던 시절인 1974년 가을 그가 포스코 건설자금을 해외 모 은행에 도피시켰다는 “중상모략”이 돌아 자신의 서울 북아현동 자택이 수색당한 일이 있다. 포스코 일을 맡으면서 그에게 안 좋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무고한 것이었다. 비싼 밀수품과 돈뭉치를 기대하고 들이닥친 기관원들이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해외 자금통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의 검소함만 드러나게 됐다. 박태준에 의하면, 금고 안은 초라했는데, 집문서와 해외 출장에서 남은 외화 몇 푼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가 만약 부정한 돈과 비자금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해외에, 특히 그가 사업차 제 집처럼 드나든 일본에 일본정재계의 로비나 교제비로 쓸 돈쯤은 숨겨뒀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정적이나 호사가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사법기관이 그의 일본내 행적을 샅샅이 뒤졌지만 단 한 건도 내밀한 검은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일본 굴지의 미쓰비시가 과거 20년 동안 가장 많은 설비를 포스코에 팔았다는 명분으로 청암 개인에게 미쓰비시은행이 장기 저리로 대출해 화물선을 만들고, 화물 알선까지 책임지는 해운회사를 세워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청암은 개인적으로 이 해운회사를 수령하는 것은 사절했다. 대신 그는 포항공과대학의 안정적인 발전기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포항공대재단을 지배주주로 한 ‘거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포스코도 자금을 출자하게 해 이 회사에 ‘돈과 화물선’을 넣도록 만들었다.
   셋째, 청암은 마음먹기에 따라선 자신이 개인적으로 쓸 수도 있었던 거대한 ‘공돈’마저도 착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70년 가을 저절로 굴러온 보험회사 리베이트 6,000만 원이었다. 포스코 제1기 건설 때 들여온 고가 설비들은 규정상 팔고 사는 양측이 의무적으로 보험에 들어야 했는데, 그게 “뜻밖에도 리베이트라는 떡고물로 돌아온 것이었다.” 청암은 이 ‘공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쓰라고 주었지만 박 대통령은 그에게 쓰라고 되돌려줬다. 그는 이 돈을 私用하지 않고 포스코교육재단을 설립하는 종자돈으로 삼아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를 모태로 1971년 포항 효자동 주택단지 안에 유치원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초중고교와 포항공대를 차례로 세웠다.
   넷째, 1988년 6월, 포스코 주식을 공개하면서 그는 종업원들에게 총 주식의 10%에 해당하는 920만 주를 배당하면서도 그 자신과 임원들은 공모주에 한 주도 손대지 않았다.
   위 네 가지 예들은 모두 박태준과 친한 지인이나 박태준 본인의 기억에 따른 것이라서 엄격한 사실검증이 필요하다. 환언하면, 본인이 긍정적인 면만 밝히고 그렇지 못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을 수가 있다는 얘기다. 반면 이 모든 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청암은 그 시절 흔하디흔한 리베이트 한 건 챙기지 않은 인물이라는 사필귀정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상기 내용 중 둘째와 넷째 예는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사실이 아니라는 반증 자료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현재로선 청암이 2000년에 36년간 살아온 자신의 북아현동 자택을 매각한 대금 14억 중 10억을 ‘아름다운 재단’(참여재단)에 기부했으며, 타계 직전까지도 자택이 없어 자식들의 집에서 기거했다는 점에서 첫째와 셋째 예도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 그는 가히 금과 은을 얻거나 모으는 것을 실로 더러운 이익이라고 경멸한 무사도와 재물에 초연한 삶을 살고자 한 조선의 선비정신을 현대적으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선비는 모름지기 “몸을 닦아 행실을 깨끗이 하고, 구차한 이득을 바라서는 안 되며, 情을 다하고 실을 다하여 남을 속이는 일을 해선 못쓰고 의롭지 못한 일을 마음으로 헤아리지 아니하며, 사리에 어긋나는 이득을 집에 들여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외에 청암이 제철보국을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다른 한 요소는 제철소건설 외에 어떤 유혹에도 일체 눈을 돌리지 않았던 초지일관의 원칙과 집념이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선공후사 無私정신의 실천,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을 이루려는 일념이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의 안중에는 불철주야 제철소건설 밖에 없었다. 앞서 밝혔듯이, 그는 국가중대사에 대한 책임을 맡은 이상 관련 분야 이외에는 일체 기웃거리지 않고 제철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심지어 군의 스승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포스코건설의 외부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최대 후견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하려고 한 ‘3선 개헌’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것인가 하는 데만 몰두했다. 이병철 회장이 자신에게 삼성중공업을 막대한 지원금과 함께 제공해줄테니 가져가라는 파격적 제의에 대해서도 박태준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광양제철 건설을 시작한 이상 “광양까지 완수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사양의 변이었다.
   청암이 자신을 발탁하려는 외부의 호의나 제의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 또한 군인정신이 가져다 준 국가에 대한 무한 책임감, 사욕 버리기 등과 같은 동일한 동기에서 비롯됐다. 그가 제철소건설 외에 눈을 돌린 경우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자신이 외도라고 생각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뿐이었다. 이것은 포스코건설의 절대적인 지원역할을 해준 박정희 대통령 사후 포스코가 정치적 바람막이가 없는 광야에 놓이게 된 상황에서 포스코를 정치권의 부당한 요구나 외압으로부터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는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오로지 포스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철을 지키기 위해 곡절 많은 정치에도 발을 담갔다. 그리고 상처도 받았다.”
   작심한 그의 의도적 외도는 선비의 직분개념으로 합리화 될 수 있을까? 조선조의 대표적인 학자 송시열(1607∼1699)은 선비란 “身命을 바쳐 道를 행해 사람의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이지, 은거하면서 홀로 선을 추구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또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자신의 저서『星湖僿說』에서 “선비는 대의를 위해서는 그 뜻을 굽혀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殺身成仁의 길을 택한다. 그러므로 선비가 옳다고 주장하면 죽음을 택할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선비가 도를 구함은 그 뜻을 구하는 것으로서 선비의 의지가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 율곡 이이의 사상과도 통한다. 포스코를 지킬 수 있다면 체질에 맞지 않은 정치였지만 참여해야 한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에게 “사람의 바른 도리”, “대의”란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하는 포스코를 공정하게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코에 대한 부당한 외압을 막고자 한 것은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시대에 절실했던 시대적 ‘道’를 행한 것이었고, 殺身成仁정신의 사회적 실천이었다.
 
2. 군 리더십의 표상 : 無私的 군인정신의 21세기적 廻向
 
   청암이 보여준 無私정신은 오늘날 국가, 사회와 우리 군의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는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신과 사상 면에서 국가와 군을 막론하고 현재 우리사회에 가장 절실한 도덕성 회복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을 실증하기 위해 정부와 군의 실상을 파악한 후 박태준의 無私정신과 대비시켜 보기로 하겠다.
   국가공직자는 정직해야 하고 청렴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의 국가공무원, 정치인과 군내의 각종 부정과 비리는 빈번하게 언론을 장식한다. 공무원, 정치인의 비리는 한국이 34개 OECD국가 중 부패지수가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5.5를 받아 26위라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 예증적 논급이 필요 없을 정도다. 특히 현 정부 들어 도덕성은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업무능력과 통치권자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시 하는 인사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이명박 정부의 인사문제는 고질적 병폐다. “도덕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일을 잘하면 쓴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원인이 있는 듯하다.
   인사문제의 난맥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기는 군도 대동소이하다. 진급청탁, 지역과 출신의 편중인사, 특정 군 위주의 등용 문제가 자주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2010년 12월 16일 군 장성 진급인사를 단행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부대지휘나 인사, 상벌을 다루는데 있어서 정말 군대다운 군대를 만든다는 원칙을 갖고 해주기 바란다”고 주문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말은 곧 군 최고통수권자가 현재 군이 군 답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창군 이래 계속된 군의 각종 사고도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2010년 한해만 하더라도 4월의 잇따른 링스헬기 추락사고와 불시착, 불량 전투화 사건, 7월의 ‘K21 장갑차 침몰사고’ 등 적지 않은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의 이면에는 과학기술 수준, 운영조작능력, 정비수준 등의 원인과 함께 고질적인 군수비리가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액의 물품을 소액으로 나눠 분할 수의계약을 해주는 대가로 수억 원 상당의 현금과 상품권을 받아 챙기거나 혹은 납품업체로부터 명절 떡 값 명목으로 거금을 받고 그 대가로 업체가 요구하는 대로 계약을 체결해줘 적지 않은 국고손실을 초래하는 군수비리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군내 일각에 존재하는 도덕성 실추 내지 불감증이 당장 군 전투력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링스헬기 추락 사고와 K21 장갑차 침몰사고로 조종사 등 5명의 군인이 숨졌다. 또 육군 근무지원단 납품비리 사건으로 현역 영관급 장교들과 경리담당 군무원 등 최소 31명 이상이 사법 처리됐다. 각종 사고와 군수비리는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신뢰도와 이미지 저하로 끝나고 마는 게 아니라 엄청난 국민의 혈세가 낭비될 뿐만 아니라 아까운 생명까지 희생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정부와 군 스스로 한국군의 전투력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고, 한 마디로 “현재의 한국군으로는 전쟁이 어렵다”고 평가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처럼 군대윤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원인 중 쉽게 꼽을 수 있는 近因으로 우선 2010년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가 지적한 “전쟁기획 능력 부족, 전략적 발상 부족, 정보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동 위원회는 우리 군이
6·25전쟁이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전쟁을 수행했고, 그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우리 실정에 맞는 기획 능력과 전략적 발상을 하지 못한다는 기능적, 업무능력이 저하된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原因으로는 군의 관료주의적 타성, 그리고 도덕성과 정신력 저하에 따른 기강해이, 매너리즘, 개인보신주의, 엄정한 군 직업윤리의 결여에 있다.
   군 직업윤리의 실천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간명한 비유로 알 수 있다. 비윤리적인 법관은 최악의 경우 소수 사람들의 생명에 영향을 끼칠지 모르고, 비윤리적 의사는 최악의 경우 소수의 생명을 해칠지 모른다. 그러나 비윤리적인 군인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고, 심지어 인류문명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와 병력을 가진 미군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패인이 군 직업윤리의 타락과 비도덕적인 군인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실 또는 정직이 직업군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군 직업윤리의 부재, 정치권과 공무원의 부정부패, 국민의 안보의식 박약 등은 그 근저에 無私정신의 결여와 그리고 無私정신에서 비롯된 정직과 청렴, 위국헌신, 선공후사, 보국안민, 책임의식이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나 군대의 부정부패란 공과 사를 혼동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는 결국 도덕교육의 부재에서 연유한다. 정부든, 군이든 상하 시스템의 모든 단계에서 도덕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군의 임무 수행에서 하위 제대의 작전 수행의 중요성으로 인해 도덕교육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현 상황에서 군대윤리의 도덕성은 진실성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완전하고 정확하게 드러내고 밝혀야 하는 진실성은 군무수행의 초석이자 가장 중요한 지휘 책임에 속한다.
   국가 최고기관이 취하는 군사적 결정은 주로 개개의 실무자들이 상위 여러 단계의 책임자를 거쳐 각급 사령관, 참모총장, 장관으로부터 정확하게 보고된 내용에 의존한다. 하위의 지휘관들도 그들이 결정을 내릴 때 마다 자신들에게 보고하는 사람들의 진실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때 지휘관이 부하의 진실성을 믿지 못하면 그는 자기 부대를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직과 진실성은 타협하거나 절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과 타협하거나 절충시키려는 어떤 명령도 합법적이고 정당한 명령이 되지 못한다. 진실성은 명령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고무와 솔선수범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원칙에 대한 교육은 전반적으로 군 수뇌부나 각급 부대의 지휘관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도덕교육은 그들로 하여금 부하들이 자신과 같은 정신 상태에서 명령을 수행할 것이라는 일체감과 확신을 준다. 병사들은 자기 행위의 한도를 가늠하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능력으로 인해 용기를 얻는다. 또 국가가 지켜온 원칙들을 존중함에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無私정신과 위국헌신, 선공후사 등이 기저가 된 청암의 군인정신이 상기 문제들을 타개하는 방향타가 될 수 있다. 청암의 無私정신을 단적으로 압축하면 ‘국가존재와 국가이익’의 우선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을 위해서만 살 수 없고, 조국의 밝은 미래와 다음 세대를 위해 땀과 눈물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생각으로 군 윤리를 제대로 지켜왔다.
   청암의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도 문제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임무중심 리더십은 다양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리더가 발휘하는 리더십이다. 인간중심 리더십은 부하를 포함하여 다양한 대상 인물들을 서로 협력하도록 이끌기 위해 리더가 발휘하는 리더십이다. 리더의 스타일과 성격에 따라서 업무중심의 리더십에 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중심의 리더십 발휘에 유능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청암에게는 상기 두 가지 리더십이 한 몸에 조화돼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절도 있고, 합리적이며, 능률적인 것을 좋아했다. 슬로건이 정해지면 행동과 실천으로 뒷받침하는 추진력, 난관 돌파력도 갖추었다. 이러한 특성은 임무중심리더십에 해당된다. 또한 청암은 어느 조직이나 ‘조직원이 리더의 말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공의 제1조건이라고 믿었고, ‘말 따로 행동 따로’를 가장 싫어했다. 최근 리더십 특성에 대한 연구는 정직, 선견지명(forward-looking), 역량(competent)과 사기함양(inspiring)의 자질은 물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신뢰받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신뢰성(credibility)이 리더십의 기반인데, 조직마다 리더를 필요로 하는 오늘날 리더의 말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리더의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지향하는 일에 열의와 열정이 넘쳐야 하고, 모두를 이끌어 나갈만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암이 보여준 솔선수범은 동료, 부하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
   오스트리아 국립은행 총재 헬무트 하세크(Helmut Haschek)가 청암의 리더십을 조국 근대화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한 바 있듯이 청암의 사상과 행위는 조국근대화의 사명감에서 발현된 임무중심 리더십이자 동시에 인간을 중시하는 인간중심 리더십으로 나타났다. 국제철강협회 브라이언 로톤(Brian T. Loton) 회장도 박태준 회장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매우 인간적이며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또한 강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하며, 무엇보다도 조국을 아끼는 애국자로서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적 어려움도 마다 않고 타개하는 사람”이다. 즉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의 소유자란 얘기다. 환경보호는 물론 사원주택과 각 급 학교들을 건설해 사원들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거주와 교육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인간중심, 인간중시 사상에 기원을 둔 성과였다.
   청암의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은 리더가 갖춰야 할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덕목들을 갖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역량은 리더십 현상에서 한 쪽이 많아지면 다른 한 쪽이 줄어드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의 개념이 아니라 유효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 함께 강화되고 융섭돼야 할 고성과(high-performance), 고관계(high-relation)의 리더십 요소다. 포스코신화의 창출을 설명하기엔 임무중심 리더십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는 임무중심 리더십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을 중시하는 청암의 인간중심 리더십도 크게 한몫했다.
   물론 상기 無私정신, 군인정신 및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이 청암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청암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정부와 군내에서 그러한 정신과 리더십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정치지도자들과 군내 장교들이 대다수인가 하는 점에선 다분히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훌륭한 정신이나 사상은 인류역사 이래 사라진 적도 없고, 늘 현양과 실천이 강조돼 왔다. 하지만 그것이 잘 지켜졌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듯이 청암의 無私정신, 군인정신과 그만의 독특한 리더십은 부패와 개인적 탐욕이 앞선 작금의 우리 사회에 실천의 표상으로 널리 현창하고 강조될 필요가 있다.
 
나오는 말
 
   청암이 80여 개 성상 동안 보여준 삶은 無私 死生觀의 전형이었다. 삶의 전 궤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자신의 인생행적을 절대적으로 규정한 그의 無私 死生觀은 개인의 영일과 사욕을 버리는 삶을 충일하게 살아감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체득하여 사멸할 생명 속에 불멸의 생명을 찾으려는 종교적 경지에까지 다다른 수준이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래적 DNA인자에다 인생의 전반기인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훈습된 후천적 경험이 더해져 형성됐다.
   후천적 경험 중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인지하게 되는 민족적 정체성 및 신지식의 획득과정이었던 일본생활과 그곳에서 받은 교육이 인생관, 국가관 형성의 맹아였다면, 광복정국에서 목도하게 된 조국의 현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발화의 열매였다. 즉 소년기에 돋보였던 정직과 성실성이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특히 군문에 들어간 이후 나타난 군인, 공직자로서의 청렴과 선공후사 정신으로 발전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들에 근거하면, 청암의 정직과 청렴성은 가히 재물에 초연한 무사도와 선비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청암이 몸소 실천한 無私 死生觀은 부국강병을 구극 목표로 한 국가관에서 연유한 ‘국가존립 우선’ 및 ‘국가이익 우선’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無私 死生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부국강병, 자주국방, 보국안민의 달성이 궁극적 목적이었고, 삶의 중반부부터 제철보국, 교육보국 사상으로 전개됐다. 여기에 정직, 청렴, 위국헌신, 선공후사 정신이 실천수단이 돼 제철보국, 교육보국을 표상하는 다양한 공적으로 발현됐다. 따라서 無私 死生觀은 곧 자신이 걸었던 전체 인생의 방향과 삶의 형태 및 성격을 鑄造하게 만듦으로써 격동의 6·25전쟁, 4·19의거, 5·16군사정변, 포스코건설에 매진한 뒤 장년에 접어들어 정치라는 탁류에 자의 반, 타의 반 개입하게 된 시기에도 그의 삶에 깊이 내재된 원형적 인성이자 사상적 토양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삶의 구비 마다 청암이 처한 시대상황과 삶의 영역은 달랐지만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이 無私 死生觀으로 수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無私정신이 體라면 매 시기별 목표와 사상은 用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체와 용의 관계였다. 즉 청암은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국가가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는 장교가 됐고, 국가가 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는 기업인이 됐으며,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는 정치인이 됐다”고 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는 정치인이 됐다”는 자평은 앞서 지적했다시피 포스코를 지키기 위해서 정계에 투신했다는 주장과 괴리가 있다. 다만 박태준에 대한 선행평가대로 각 시기마다 동기가 어떠했든, 또 어느 신분에 있었든 변함없이 “국가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박태준의 삶 가운데 끊임없는 지상명령”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판단된다.
   청암은 군 재직 시절 군인다운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면서 군 간부에게 요구되는 고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군인다운 군인이란 국가,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치에 부응했다는 의미와 통하고, 그것은 곧 올바른 군인의 표상이다. 군인으로서 그가 도달하고자 한 귀결점은 조국의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었다. 청암은 국가대권을 거머쥔 권력의 실세에 발탁됨으로써 육군소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군의 주요 지휘관인 연대장 이외 육군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단장 보직은 맡지 못해 사단 이상의 대부대를 지휘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굳이 사단 급 전술경험을 꼽는다면 후방에서 사단 이동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한 것이 전부였다. 그의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꿈이 군내에서는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청암은 군 재직시절 새 시대를 예비하고 잉태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세 가지를 얻었다. 천부적 자질들을 발휘하면서 자신만의 특유한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을 체득하고 심화시킨 것이 하나라면, 당시로선 군이 아니면 학습할 수 없었던 선진적인 지식과 문물을 해외연수를 통해 배운 것이 둘이다. 셋째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만난 일이다. 훗날 최고 권력자가 된 박정희의 전폭적 지지를 받게 됨으로써 청암이 군 시절 좌절된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의 뜻을 새로이 펼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이는 운명적 요소가 짙다. 이 세 가지는 그의 꿈이 박정희를 만나게 됨으로써 무인에서 경제인으로 신분전환이 있었고,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의 轉置(displacement)가 이루어졌으며, 포스코건설이라는 대역사에 절대적으로 요구됐던 선진지식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이기도 하다. 이 점은 포스코 건설 과정에서 그가 포스코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된 요인들 중 수행능력 및 선진지식, 관철의지, 리더십 등 범인이 해결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사실에서 실증된다. 그 근저에는 無私사상, 위국헌신과 불가능은 없다는 군인정신, 선공후사, 민족과 역사 앞에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있었다. 청암이 포스코 경영이든, 교육사업이든 일체의 정실을 배제한 용기도 사실상 無私의 정신세계에서 용솟음친 것이었다.
   이처럼 시기, 분야와 목표는 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발전, 부국강병, 자주국방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달성하기 위해 그가 이뤄낸 모든 업적들의 이면에는 하나 같이 개인은 국가건설을 위해 무한대로 헌신해야 한다는 無私의 군인정신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사상은 애초부터 그로 하여금 공인으로서 결벽스럽다고 할 정도의 수범을 보였으며, 나아가 일국의 공인 차원을 넘어 세계적, 범지구적 지도자로 일취월장하게 만든 근원적 힘으로 작용했다. 절망은 없다는 불굴의 의지는 포스코 건설과정에서 ‘우향우 정신’으로 나타났고, 청렴과 인간애가 바닥에 깔린 신뢰와 솔선수범의 통솔력과 선진 지식은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으로 발전했다.
   청암의 無私 死生觀, 군인정신과 선공후사 정신은 오늘날 한국이 처해 있는 정치, 사회, 군사 및 외교안보 상황에 비춰볼 때 긍정적 가치를 지닌 귀감이 될 것이다. 세계 유수의 부패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고, 잦은 군수비리로 발생한 무기 장비의 오작동 사고, 인사비리, 천안함 피침, 연평도 피폭 등으로 불거져 나온 한국군의 전투태세 미비와 기강 해이, 국민들의 안보의식 둔감 등 현 상황하에서 청암이 지닌 부패척결, 정직, 청렴, 불퇴전의 의지, 無私의 군인정신은 이후 다른 역사가가 연구를 해도 변함없이 포착될 역사적 가치로 언급될 수 있다.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비전, 위국헌신,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그의 인식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현재로선 청암이 군인이 되고자 했던 동기,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깨달은 시점, 6·25전쟁시의 임무수행 및 전투과정, 무공훈장 수상 이유, 정치참여 동기 등은 향후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다. 특히 청암은 또 5·16군사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 신분이었음에도 처음부터 ‘거사’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또 후에 사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일소하기 위한 명분으로 5·16군사정변을 통한 군의 정치참여를 긍정, 찬성, 지지함으로써 군인의 정치적 중립 준수여부라는 고전적 논쟁을 재연시킬 수 있는 소지를 남겼다. 이는 그가 군사적 관점에서 군을 인식하기보다 이 보다 더 상위 개념의 정치적, 역사적 관점에서 군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군인윤리, 즉 군인의 본분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사실과 군의 정치개입을 찬성한, 일견 상충돼 보이는 이 사실에 대해선 사가들이 박정희의 군사정변과 한국의 경제개발과의 상관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평가를 유보하도록 하겠다.
   현 시점에서 단언 가능한 것은 청암의 군인정신과 자주국방 사상이 역사적으로 위인의 반열에 있는 이순신, 안중근, 范仲淹과 조지 워싱턴 등의 역사적 인물들과 간접적으로 비교해본 결과 세계적 수준의 보편성, 역사성을 갖추고 있음과 동시에 청암만이 가진 독특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조국근대화’가 민족적 화두였던 시대에 박정희라는 인물을 만난 특성이 존재하고, 여기에다 개인의 이익을 철저하게 배제한 無私정신이라는 특수성과 그것의 발현체인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이 동시에 혼재돼 있었다.
   “군을 위한, 군의 군대”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군대”가 되기 위해 군의 존재 가치에 대한 군 자체의 인식전환이 요구되고, 군인윤리에 관한 도덕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금, 군과 공직자는 일생동안 쉼 없이 실천해온 청암의 無私사상을 사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청암의 임무중심+인간중심 리더십도 현재 우리 정치지도자들이나 군 지휘층의 지휘통솔에 새롭게 인식되고 활용되면 좋겠다.
 
열쇠 말
 
박태준, 무사사생관, 포스코, 부국강병, 위국헌신, 선공후사, 임무중심+인간중심리더십
 
위 논문은 포스코 청암재단의 요청으로  출간된 공저,『朴泰俊의 정신세계』(서울 : 아시아, 2012년 4월 25일)에 수록돼 있습니다. 블로그에서는 각주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만 저서에서는 모두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