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보이지 않는 술의 용병술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해군발전자문위원)
술은 성서에 나와 있듯이 인류와 시원을 거의 같이 한다.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었다. 그가 신 중의 신 제우스의 배우자 헤라가 강제로 주입한 광기(狂氣)와 저주를 받아 미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식으로 설정돼 있는 것은 술의 기능과 사회적 함의를 암시한다. 즉 술이란 잘 마시면 약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독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 평소 술은 적당하게 마시면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고,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 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중추신경과 말초신경을 흥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여러 가지 효험이 많은 술은 한의학에서도 약 중에 으뜸, 즉 ‘百藥之長’으로 친다. 반면 음주가 지나치면 판단력에 장애가 생기고, 말초신경이 둔해져 순발력이 떨어지며 행동도 둔해진다.
물 수(水)자에 닭 유(酉)자가 결합된 한자의 술 주(酒)자는 닭이 물을 먹을 때 한 모금 먹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한 모금씩 마시는 모습을 상형화 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는데, 모두 과음을 경계한 것이다. 즉 닭이 물을 마시듯이 술은 천천히 마셔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또한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의 유시를 가리키는 유(酉)자가 들어가 있는 것도 술을 마시려면 이 시간에 마셔야 한다는 권고로서 늦게까지 과음하지 말라는 훈계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한자의 어원을 밝힌『說文解字』에서도 酒를 인간의 예악과 길흉을 부르는 것으로 해석했다. 법화경에 부처님이 음주의 해악을 경계하는 의미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경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에서도 잘 활용하면 승리의 에너지로 분출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패배로 직결될 수 있는 게 음주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술이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쳐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게 만든 예는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술이 승전 요인이 된 사례는 여럿 있다.
먼저 우리 역사의 예로, 고려에 쳐들어온 여진족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승리를 거둔 경우를 들 수 있다. 17만 대군을 이끈 고려군의 상원수 윤관과 그의 휘하 장수들은 여진족 추장에게 사신을 보내 선왕 때 붙잡아둔 사신을 돌려보내 줄테니 직접 와서 데려가라는 유인책을 썼다. 이 전갈을 곧이들은 여진족 추장이 400명의 병력을 고려군의 진중에 보내자 윤관은 그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취하게 해 패하게 만든 것이다.
외국의 사례로는 1934년 말 중국 국공내전 시 국민당군의 추격에 쫓겨 구이저우(貴州)로 들어간 중공군 병사들이 극도로 피로하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이 지방 전통술 마오타이(茅台)주를 마시고 사기를 회복해 적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또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 시 러시아인들이 “생명의 물”이라고 부르는 보드카를 마시며 추위를 견뎌낸 러시아군이, 꼬냑이 떨어져 추위를 이기지 못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명 ‘스티코프 전술’도 이에 속한다.
음주가 패배의 원인이 된 예로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군에게 참패한 트로이군이 대표적이다. 10여년 간 계속된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리스군은 복병을 안에다 숨겨 놓은 거대한 목마(the Trojan Horse)를 해안가에 세워두고 전 병력이 본국으로 복귀하는 체 했다.
이 계략에 속은 헥토르 등의 트로이군은 목마를 노획물로 여기고 성안에 들여놓은 채 승리의 잔치를 벌였다. 트로이병사들이 술에 취해 잠이 든 새벽녘에 오디세우스 등 목마 속의 그리스복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횃불을 치켜들고 트로이의 도시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트로이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해있던 그리스병사들이 해안으로 상륙해 트로이를 덮쳤고, 이로 인해 결국 트로이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1870년에 하인리히 슐리만이 주도한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및 발굴, 그리고 1930년대 미국의 블레겐이 행한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 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신화는 기원전 12세기 경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다.
술은 이처럼 길흉 양면의 상반된 두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술을 군 지휘통솔과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적절하게 잘 활용한 경우에 해당된다. 충무공께서 임진전쟁의 전란상황을 손수 기록한『난중일기』에는 술과 관련된 공의 행적이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공은 술을 마셨을까? 마셨다면 어떤 경우에 술을 마셨으며, 음주에 대한 자세는 어떠했을까? 관련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일관성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충무공은 술 자체를 즐기는 취향이 아니었던 듯하다. 술을 마시기 위해 술을 마시지도 않았으며, 객수를 달래거나 기호로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느 장수라면 경각지추의 전란 중 촛불 아래 홀로 나랏일을 걱정하고, 팔순의 병든 노모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때 한 잔의 술로 시름을 달래기도 하련만 공은 결코 술에 의지하지 않았다. 예컨대『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였다.”
효심과 충심이 절절이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였”고, 밤이 이슥해도 잠자리에 들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심란한 정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을 정도로 너무나 진중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께서는 시인묵객들이 작시 할 때 대부분 술로 취흥을 돋우는 것과 달리 시를 지을 적에도 술을 그다지 입에 대지 않은 듯 했다.
둘째, 전투 중에는 휘하 장병들에게 일체 음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과음은 정신적으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으로는 말초신경이 둔해져 순발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행동마저 둔해져 종국에는 전투력을 상실케 만든다. 심지어 병사든, 지휘관이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취기가 심하면 절제력이 떨어져 이성과 몸을 허물어지게 만드는 게 술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전투 중의 전장에서 음주를 허락할 장수는 없다. 충무공께서도 출전에 임할 때는 엄격한 금주로 병사는 물론, 지휘관의 상황판단과 행동 부자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전투지휘 및 전투수행 시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병사들의 음주는 전투의 휴지기에만 허여했다.
셋째, 술을 마셔야 할 때는 대체로 세 경우에 한했다.
1. 도원수, 체찰사 등 자신 보다 직위가 높은 상관들, 그리고 진중을 방문한 陳璘 등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한 경우였다. 임진전쟁 당시는 공무 중에 술을 접대한 것이 일반화된 관행이었던 모양이다. 이 때 충무공은 반드시 휘하의 업무 관련자들을 불러 같이 술을 마셨는데, 그것도 공적 업무수행의 일환이었다.
2. 부하 장수들을 위한 연회시와 주변 인사들의 청에 응할 때였다. 예를 들면 전라우수사, 경상수사 등의 고위 장수들이 진영을 방문하거나 휘하의 목사, 부사, 첨사, 만호, 군수, 현감, 방답, 군관 등이 공무상 찾아오거나 그들이 음식과 술을 장만해올 때, 혹은 부하들과 작별하거나 공무 차 다른 기관을 방문했을 경우였다.
3. 먼 길을 떠나는 부하에게 전별식을 열어줄 때나 혹은 공을 세운 병사들을 포상하고 그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단체 회식시였다. 예를 들어 8명의 왜군을 잡아온 김탁 등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술을 하사한 경우가 있다.
또 공은 진중에서 회식을 자주 베풀어 병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회식 회수는 1592년 6회, 93년 13회, 94년 27회, 95년 20회, 96년 47회, 97년 6회, 98년 4회로 전쟁 전 기간 동안 최소 123회 이상이나 됐다. 회식의 규모는 작은 회식에서부터 부대 전체, 나아가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병사들에게까지 회식을 베풀기도 했다.
1594년 1월 21일 공이 좌수영 본영의 노 젓는 격군 742명에게 술을 마시게 했고, 4월 3일에는 3도의 군사들에게 1,080동이의 술과 안주를 베푼 것이 좋은 예다. 훈련이나 출전으로 심신이 피로해진 장병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고, 심리적 안정을 취하게 하며 전우애와 단결력을 높여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단, 전투 중의 음주는 용서하지 않았다.
넷째, 술 주사도 없었지만 이를 용납하지도 않았다. 앞서 밝혔듯이 술은 잘 마시면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생활에도 득이 된다. 하지만 음주가 지나치면 여러 가지로 해가 되는데, 그것은 주로 주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술을 끊거나 절제하지 못하고 마시기만 하면 주사가 습관처럼 나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충무공은 공무상 하루에 여러 차례 술을 마셔 크게 취한 경우에도 취중 실언이나 장수로서의 권위, 위엄과 신의가 손상될 수 있는 언행을 일체 하지 않았다. 취기가 심해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고 늘 수범을 보였다.
공은 부하들과 혹은 내방객들과 밤중까지 술을 마신 경우가 가끔씩 있었는데, 그럴 때도 새벽녘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문서를 훑거나 전술 공부를 하는, 범인이 따를 수 없는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 보다 고위직 상관 혹은 원균처럼 직위가 엇비슷한 장수의 취중 작태에 대해선 말없이 속으로만 언짢게 생각했지 이에 대해 간언을 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공은 자신이 탄 배에 경상도 수사 원평중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는 것에 대해 배 안의 수군들이 모두 분개하는 광경을 난중일기에 적었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정말로 말할 길이 없었다”고 하거나 “영산령 禮胤이 취해 넘어져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공이 스스로 타인의 술주정을 반면교사로 삼았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반면에 이와 달리 언제, 어디서나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충무공께서는 부하 장수가 주정을 부릴 경우엔 용납하지 않았다. 1594년 1월 25일자 난중일기에는 허산이라는 종이 술병을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평소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는 적절한 상을 내렸지만 군기를 흩트리거나 과오를 범한 자들에 대해선 곤장을 쳤을 뿐만 아니라 죄가 중할 땐 효수, 처형, 참수까지 행해 일벌백계 했던 것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러기에 공 휘하의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군율이 엄정해 정신력과 사기가 대단히 높았다. 이 점이 충무공의 지휘에 따른 수군이 해전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이렇듯 충무공에게 술은 평소 엄한 신상필벌로 조성된 부하들의 긴장을 녹여주는 윤활유로 활용됐다. 이 윤활유는 진중 최고 사령관이 최하위의 수군들과 소통하고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한 셈이다. 반면 부하 병사들에겐 윤활유 역할을 했지만 술을 즐기지 않았던 충무공 자신에겐 술은 독이 되기도 했다.
공무상 필요에 따라, 또 용병술의 일환으로 부하 장수들과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부득이 자주 술을 마시다 보니 공 자신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충무공은 상황에 따라 음주가 불가피 한 경우엔 때로 공복에 식사도 하지 않고 술을 마셨을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술은 불면증, 공무로 인한 과로, 불규칙한 생활 등과 함께 병고의 주된 원인이 됐으며, 전란 전 기간 동안 몹시 불편한 몸 상태에서 공무에 임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었다. 심지어 낮에도 통증이 심해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일과처럼 해오던 활쏘기까지 멈출 때도 있었다. 또 밤에는 취침 중에 신음을 하거나 땀을 비 오듯 흘려 옷과 이불을 흥건하게 적신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공은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볼 틈도 없이 공무를 수행하고, 전쟁을 지휘했던 것이다.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이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결의를 다진 조선수군의 사기가 충천한 진중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충무공 이순신 제독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처럼, 제 일처럼 진지하게 걱정하는 정치지도자들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정쟁, 당쟁과 사욕 채우기로 온 나라가 난장판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근년엔 특히 심화된 소득의 양극화, 비정규직 양산, 청년실업, 기성세대의 실직, 각종 ‘묻지마 형’범죄와 자살 등으로 인해 기존 사회공동체가 무너져 내리고, 사회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이 부쩍 눈에 띈다. 정치권의 비상식적인 정치행위, 그리고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들, 또 그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력 정당들의 정권을 잡고 보자는 식의 과열된 대권경쟁이 주된 원인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나라가 패망할 수 있는 풍전등화의 최대 위기상황에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방위와 공무에 최선을 다한 충무공의 위국헌신, 진충보국 정신을 어느 때 보다 가치 있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충무공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줄 알아도 나라를 구하고, 군을 지휘 통솔하기 위한 용병을 위해서라면 즐기지 않은 음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에는 독이었던 술을 겨레를 위한 약으로 승화시켜 군을 이끌었던 충무공, 당신의 충정에 저절로 머리 숙여지고, 저 자신이 한 없이 왜소해질 따름입니다!
위 글은『국민안보FOCUS』, 2012. 12/2013. 1, Vol. 28에 전반부 내용이 대폭 생략되고 제목도「임진년에 다시 보는 이순신 제독의 술과 용병술」로 바뀌어 게재된 것의 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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