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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메달색 차이의 사회학

雲靜, 仰天 2012. 7. 27. 00:39

올림픽 메달색 차이의 사회학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손기정과 남승룡. 2시간 29분 19.2초의 세계신기록과 2시간 31분 42초로 각기 1위와 3위 입상자로 시상대에 선 이들은 악랄한 일제에 저항하듯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승리의 월계관을 머리에 썼지만 입상자답지 않은 두 사람의 침울한 모습은 지금 봐도 비감을 자아낸다. 손기정은 우승자에게 준 작은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고 남승룡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둘 다 민족의 울분을 한 방에 날려버린 대한의 철각들이었다.
 
 

27번이 우승한 손기정 선수, 26번이 3위에 입상한 남승룡 선수. 둘 다 자랑스런 대한의 건각이었다. 3위도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그런데 개인사적으론 두 사람은 1위와 3위로 골인한 순간부터 인생에서 시상대 높낮이 보다 더 한 명암이 갈리기 시작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게 되는 출발선이었다. 광복 후 손기정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한국마라톤의 대명사로 재력 있는 독지가의 후원을 받았다.
 
남승룡에겐 관심은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옹은 손옹의 영광 뒤에 가려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극심한 패배감을 체감하면서 우울증을 겪기 시작했다. 대학교수직에서 퇴임한 후부터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2000년 겨울 서울 경찰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떴다.
 
반면 손옹은 2002년 전국민의 관심 속에 타계했다. 우승 월계수가 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고, 그의 업적과 애국심을 기리는 공원도 조성되는 등 불멸의 역사로 각인됐다.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에 위치한 손기정 기념관. 서울 서부역 에서 나와 약간 높은 야산의 손기정공원으로 올라가면 있다. (나는 한 때 그곳 인근에서 산 적이 있어 자주 올라가서 기념관 내부를 관람하기도 해서 전시 내용도 잘 알고 있다.)

  
무엇이 두 사람의 삶을 이토록 대비되게 만들었을까? 이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찰나, 즉 등수 차이였다. 하지만 동갑나기인 두 사람은 기량이 엇비슷했다. 오히려 평소 경기운영 면에선 남승룡이 손기정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1934년 도쿄의 미국, 일본 국가대항 육상경기대회 5천m 종목에선 남승룡이 15분 04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또 베를린 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도 손기정을 제치고 1위를 했다. 그래서 일본육상계는 남승룡을 올림픽 우승후보로 점 찍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날의 경기결과 불가역적 운명으로 급전직하했다.
 
 

평소 두 사람은 1912년 생의 같은 나이로 같이 연습하고 같이 생활한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한 마디로, 사람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사진 출처 : 포토뉴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사진 출처 : 포토뉴스)
당시 남승룡 선수의 모습 (사진 출처 : 포토뉴스)
당시 손기정 선수의 모습 (사진 출처 : 포토뉴스)

  
스포츠경기에서 승부가 뒤바뀌는 건 비일비재하다. 어제의 우승자가 오늘은 질 수 있고, 오늘의 패배자가 내일엔 우승할 수 있는 게 스포츠세계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시적인 결과에 불과한 1등만 선호하고 1등에게만 환호한다. 2등과 3등은 패배자도 아니건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1등병이다. 무의식중의 집단 행위가 안겨준 미필적 고의의 왕따나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금메달 선호는 존재조차 몰랐던 극빈 후진국 시절 희망의 출구로서 스스로 위안 받기 위한 민족주의적 자존감이 필요했을 땐 통용됐다. 그러나 이제는 올림픽뿐만 아니라 어떤 경기에서든 승부와 관계없이, 국적이 어디든 투혼을 불사르며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 갈채를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자본과 결합된 엘리트체육정책에 부화뇌동해 우승자만 스타로 만들 때는 지났다. 각 종목이 지닌 고유한 기술, 박진감 넘치는 승부와 인체동작의 오묘함에 찬사를 보내고 즐기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오늘 지구촌 축제인 제30회 런던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참가에 의의를 뒀던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정신을 되기면서 메달색깔을 차별대우함으로써 가슴이 멍드는 또 다른 인생의 ‘루저’를 만들어선 안 된다.
 

위 글은 2012년 7월 27일자『경북일보』아침시론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