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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한국불교

雲靜, 仰天 2012. 5. 28. 21:06

기로에 선 한국불교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30대 초반 유학시절을 전후 해서 각기 다른 두 스님으로부터 출가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 법기가 아닐 뿐만 아니라 계율도 잘 지키지 못할 텐데 겉으로 잘 지키는 척 행세한다면 그건 위선이고,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굴레이자 속박이라는 이유들 들어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때의 결정이 옳았는지는 선뜻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대로 된 승려가 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이뤄낸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 출가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하려는 발원이 선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출가수행은 엄격히 계(Sila)와 율(Vinaya)을 지켜 욕망을 끊는데서 출발한다. 욕망은 스스로 자신을 보존하려는 생명체를 지탱해주는 근본이자 삶의 동력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욕망을 낳는 고통의 뿌리다. 부처가 욕망을 멀리할 것을 가르친 이유다. 신구의(身口意) 악행을 쌓지 말고, ‘마음챙김’(sati, 念)과 올바른 앎(sampajana, 正知)을 가지고 욕망을 멀리 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설한 것이다. 그래서 근기에 따라선 계율이 득도와 해탈을 얻기 위한 형식과 방편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다.

  

승려 도박사건으로 불교계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출가자가 본분을 망각하고, 수행을 게을리 한 필연적 과보다. 종교의 세속화와 종단의 부실한 감찰에서 비롯된 공업(共業)이기도 하다. 도박은 인간의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가장 전투적인 행위다. 눈으로 포커에 집중하고, 상대의 배팅소리를 귀로 듣고, 동물적 후각으로 상대패를 읽어야 하며, 세치 혀로 상대를 미혹하여 몸으로 판돈을 끌어오면 마음은 짜릿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담배를 입에 물고, 목탁 대신 화투를 손에 든 승려들. 위 사진은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사진의 장면 자체는 사실이다.

 

이 업(karma)을 지은 오온이 허공에 흩어져도 업력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 업력의 에너지 덩어리인 아뢰야식은 남는 것이다. 도박 외에도 승려들의 음주, 육식, 축첩 혹은 은처 등의 일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수 일탈승들이 승려의 본면목이거나 불교의 상은 아니다. 도박에 손댄 승려는 일부다. 종단에서 소수 파계승들을 제어하지 못한 업보로 불교전체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일 뿐 지금도 산사나 토굴에서 면벽 정진하고 있는 승려가 훨씬 더 많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항간에는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은 왜 보느냐는 말이 회자되듯이 많은 신자들과 국민들은 승려의 상을 통해 불교를 바라보는 게 현실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한국불교가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사라진 한국불교의 전통인 사부대중의 공동체를 회복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 종단이 출가자 위주가 된지 오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려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오만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판사판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승려는 수행에 힘써 깨달음을 세간에 회향시키는 이판에 몰입하고, 재가불자들은 종단과 사찰운영을 담당하는 사판을 맡아야 한다.

 

그 전에 쌍방이 무차별 폭로전으로 치닫고 있는 문중간의 감정대립을 내려놓고, 관련 승려들을 발본색원해 일벌백계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종정스님의 대리 참회와 총무원 간부 승려의 물러남만으론 미봉책이다. 1600여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지금 최대 위기이자 새로운 모습으로 나툴 좋은 기회의 순간에 서 있다.

 

위 글은『경북일보』, 2012년 5월 25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