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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위 관료 출신 정치인의 기억력

雲靜, 仰天 2012. 5. 10. 00:34

어느 고위 관료 출신 정치인의 기억력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전통시대 중국과 조선에서 국가인재를 선발하는 공식적인 등용문은 과거였다. 유교적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과거시험을 통해 국가관료로 선발되던 이 시대엔 관료가 곧 정치인이었다. 그를 흔히 사대부(士大夫)라고 한다. 사는 선비, 대부는 출사한 관료를 가리켰다. 유교가 가진 사회통합의 종교적 기능과 국가통치의 정치권력에다 국가의 녹을 받아 부까지 보장받던 ‘미분화된 사회’(fused society)에서 과거에 급제하면 이 세 권능이 한 몸에 주어졌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이 입시지옥이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역사적 배경이다.

  

과거급제는 당사자의 입신양명에 그치지 않고 전체 ‘가문의 영광’인데다 진사 경쟁률이 3천 대 1정도(명청대)였던 만큼 하늘의 별 따기였다. 조선도 경쟁률이 꽤 높았다. 충효사상을 요체로 한 유교적 소양과 목민능력을 인정받은 과거급제자는 단박에 기득권층으로 수직 상승해 왕조와 국가를 떠받치는 역할을 맡았다.

 

또 국가가 녹을 지급하는 만큼 충절과 청렴이 크게 요구됐다. 폭 넓은 지식과 비상한 기억력이 바탕이 돼야 통과 가능한 현재의‘고시’합격자도 경쟁률이 높은 만큼 권한이 막강하다. 그러나 정작 검증이 필요한 국가관과 정직, 청렴성 등의 인성은 당락 결정요소가 아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도덕성과 기억력이 의심되는 고위 공직자가 심심찮게 출몰했다. 최근에도 구속된 현 정부 실세라는 고위관료들이 하나 같이 자신이 저지른 부정행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주 행한 발언도 망각의 소치인지 거짓말인지 진위가 의문이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건에 관한 과거 자신의 발언을 확인하는 기자에게 “4년 전 일이라서 기억을 못한다”고 하면서 “농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부에 물어보라”며 발뺌했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과거 행한 발언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건과 관련된 일, 그것도 공무원이라면 당시 자신이 서서 일하고 발언하던 입장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맥락을 돌이켜 보면 문제의 발언을 했을지 하지 않았을지는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잘라 말하는 건 국회의원의 자세로선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을까? 불과 4년 전의 일을, 그것도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된 긴장 속에서 국가중대사의 실무 총괄자로서 자신이 행한 발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망각한 게 사실이면 그런 기억력으로 그동안 공무는 어떻게 집행했을까? 또 향후 의정생활 4년 차엔 국회의원 당선 전의 언행은 깡그리 잊어버릴 것이다. 광우병소보다 이처럼 ‘기억력 없는 관료나 정치인’이 더 위험하다. 반대로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건 더 큰 문제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선량에게 국사를 맡긴 꼴이기 때문이다.

  

이솝우화의 양치기소년 얘기처럼 거짓말은 불신감을 쌓아 종국에는 아예 말 자체를 귀담아 듣지 않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공직자와 정치인이 거짓말을 해선 안 되는 이유다. 딱히 김종훈 의원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직자라면 망각이든 거짓말이든 국민적 의문에 모르쇠가 돼선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능청떨며 상황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교묘하게 둘러대는 능갈치는 사람은 공무원과 정치인이 돼선 안 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거짓말이 오히려 출세의 수단이나 능력이 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요즘은 고위 관료로 출세하거나 정치인이 되려면 나쁜 기억력과 오리발은 필수인 모양이다. 4년 전에 본 기억력 증진약은 물론 40여년 전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나는 뭔가, 쯧쯧!

 

위 글은 2012년 5월 10일 자『경북일보』에 칼럼으로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