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제주여행⑤ 4.3사건 기념관 견학 : 모든 역사는 새로 쓰는 현재사다!

雲靜, 仰天 2021. 2. 26. 07:03

제주여행⑤ 4.3사건 기념관 견학 : 모든 역사는 새로 쓰는 현재사다!

 

이번 여행 중에 늦었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을 찾아가서 전시내용을 봤다. 수많은 전시물을 일일이 다 사진을 찍고 해설을 할 수가 없어 극히 일부만 찍어 소개하기로 하고 주요 사진들을 올려놨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19473.1절 경찰의 발포로 개시된 1948년의 제주4.3사건을 꼽을 수 있다. 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사건들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제대로 갈 곳을 못 찾아가서 아직도 삼천리강토 상공의 구천을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4.3사건도 한국전쟁, 4.19의거, 광주 민주화운동, 천안함침몰사건, 연평도포격사건, 세월호침몰사건 등과 함께 사건의 진상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법령제정 등으로 고혼들의 원한과 응어리를 풀어주고 편히 쉬도록 달래줘야 하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 가운데 그런대로 비교적 온전한 법령이 만들어진 것은 4.3사건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건을 두고 진실공방과 평가가 엇갈려왔다. 한쪽은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반정부 무장투쟁이라고 규정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국가의 무자비한 토벌과 진압에 희생된 사건이라고 했다.

 

사건의 실상을 밝혀내고 정당한 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그때 마다 번번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시키려는 반민족, 반민주세력들의 반대와 공작에 의해 무산되거나 축소돼왔다. 4.3사건에 대한 진상과 함께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였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4.3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졌고, 진상규명을 위해 4.3위원회도 설립함에 따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라는 사실을 국가가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도 군경이 4.3사건을 진압한 것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친히 위령제에 참석해 제주도민들과 국민들 앞에 서서 정식으로 사과한 바 있다.

 

이로써 지금은 4.3사건 발발의 배경, 전개과정, 결과 및 영향 등에 관한 진실, 제주도민의 저항 및 희생의 정도, 국가폭력의 정도, 영향 등등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해원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뒤늦게 만나서 존경하게 된 제주 출신의 3선 의원 변정일 국회의원도 특별법안의 제정 통과 등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또 그 가운데는 제주출신으로서 제주4.3연구소 소장을 맡은 내 친구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나 보다 나이가 조금 많고 학번도 조금 빨랐지만 대학 시절 얼마간 나와 하숙방을 같이 쓴 룸메이트였고, 그 뒤 각기 일본과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것이었지만 만남을 지속해온 사이였다.

 

제주4.3사건을 두고 그와 내가 관련된 에피소드 한 토막! 내가 국방부 직할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본 연구소에서 2004년에 발간한6.25전쟁사, 1권에 4.3사건에 대해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서 그 친구가 깊이 관여하던 4.3연구소 측에서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까지 연일 책임여부가 거론되고 있었고, 국방부 연구소에선 연일 대책회의를 열곤 했다.

 

나는 위 책의 집필자가 아니어서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나는 당시 국방부의 온당하지 못한 4.3사건에 대한 평가가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국방부가 아니라 정부의 그 어떤 부처도 잘못이 있으면 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원칙이다.

 

나는 내가 소속된 국방부 연구소의 입장에 관해 알려주기 위해 제주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 친구가 내게 대뜸 한다는 첫마디가 전화통화를 녹음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도우기 위해 전화한 것인데도 내가 국방부 편이 돼 친구를 염탐하려고 전화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봤기에 내가 그런 염탐이나 하는 하찮은 인간으로 봤을까 하는 섭섭함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좋게 해석하면 워낙 긴장된 상황이었으니 친구 보다 4.3사건 관련 정당한 평가를 하게 하는 일을 우선시해서 그렇게 반응한 것으로 봐도 된다. 언젠가는 그 친구와 만나 그 때의 일을 얘기할 생각이다. 이번 여행에선 그 친구뿐만 아니라 여타 제주출신 친구들은 1명만 빼고 모두 만나지 않고 왔다.

 

아무튼, 4.3사건에 관한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료발굴과 진상규명,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해 밝혀져야 되거나 보강 내지 실현돼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4.3사건은 왜 하필 제주에서 발생했는가? 발포를 지시한 자가 이승만 대통령이었던 사실은 밝혀냈지만, 그 세력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피해자나 그 유가족들은 왜 오랫동안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는지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규명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거시사와 미시사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한 실상의 재구성, 일제 대신 미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재편된 미국의 세계질서 속으로 편입된 제주의 상황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개인과 가족의 질곡과 수난이 민족사라는 서사 속에 용해된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히 개인의 서사로 만들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시 한국현대사의 역사인식으로 자리매김 돼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본 제주 4.3평화기념관을 대략적으로 소개한다. 이 기념관의 건물은 4.3 사건의 역사를 담는 그릇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 안에는 4.3사건의 시간추이에 따라 구성된 총 일곱 개의 전시실과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주제로 연중 전시가 개최되는 기획전시실, 개가자료실과 아카이브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별 전시내용의 주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전시실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4.3 당시 피신처로 활용되었던 천연동굴을 모티브로 조성된 입구를 지나면 4.3에 대한 正名을 기다리며 비문을 쓰지 못한 白碑가 누워 있다.

 

2전시실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해방 전 국제정세와 제주도, 해방 이후 제주도민들의 자치 열망, 4.3의 도화선이 된 19473.1발포사건, 3.10총파업과 군경의 탄압사건들이 그 이듬해 19484.3봉기로 이어지는 과정 등이 표현되어 있다.

 

3전시실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194843일 새벽 일부 제주도민들이 일으킨 무장봉기의 발생배경 및 과정, 그 뒤 군경이 벌인 초토화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5.10 단선 및 단정 반대 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4전시실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초토화작전과 그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민을 상대로 군경이 자행한 여러 가지 학살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희생자들의 죽음이 다양한 형상의 아트워크로 표현돼 있다.

 

5전시실 흐르는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4.3사건의 후유증, 민간에서 시작된 4.3진상규명 운동, 20001‘4.3특별법제정, 진상조사보고서의 확정, 대통령 사과, 4.3사건으로 사망한 자들의 유해발굴 등 4.3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다.

 

6전시실 평화의 섬(에필로그)

좌우 벽면과 천장에 수많은 4.3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4.3사건에 대한 기억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전시실(다랑쉬굴)

1948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게 질식사 당한 동굴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당시 긴박했던 피난 생활과 학살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解冤의 퐁낭

제주의 퐁낭은 공동체적 만남과 회원의 신목을 동시에 상징한다. 해원의 퐁낭을 통해 4.3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생각하고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대강당에서는 4.3 관련 실내 행사들이 개최되며, 각종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설비 되어 있는데 규모는 2 좌석 200석이 마련돼 있는 크기다 

 

이제 지금부터는 주요 전시내용을 볼 차례다. 아래의 사진들은 모두 기념관에 전시된 것이다. 여타 사진자료들을 구해 보충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본 소개 글의 목적이 4.3사건 자체의 재구성에 있는 게 아니라 제주 4.3기념관의 전시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 아래에 덧붙여진 설명은 기념관측의 설명이 아니라 필자가 평소 알고 있는 내용을 보탠 것이다.

 

 

제주4.3에 대해 학계에서 오랫동안 사건의 명칭과 정의를 두고 논란이 있어왔지만 현재로선 위와 같이 정의되고 있다.
일제 패망 직전 일본군 수뇌부는 제주도를 대중국 공격의 전진기지 겸 미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진지로 구축하기 위해 도내 한라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섬의 주요 전략지에 많은 동굴과 참호를 파놓았다. 나는 약 10년 전 쯤에 그곳을 둘러본 바 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위 소개문에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한 것으로 소개돼 있지만 당시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한 건 아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2017년 8월 15일자『오마이뉴스』에 실린 나의 졸고「일왕은 결코 "무조건 항복"을 말하지 않았다 :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오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아베가 일본은 반드시 다시 조선에 올 것이라는 각오를 피력한 글도 가짜다. 그는 그런 글을 쓴 바 없다. 여기에 대해선 내가 2~3년 전 자세하게 진상을 밝혀놓은 기사(<거를 건 거르자 아베를 둘 러싼 이상한 '가짜' 뉴스들>, 2019.08.16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날조된 이 가짜 글은 아직도 인터넷상에 떠돌아 다니면서 일본인에 대한 악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평양으로 들어오고 있는 소련군. 일제 패망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가르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와 항복한 일본군의 접수, 치안유지 등의 명목으로 진주해왔다. 미국은 중국에서 항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김일성을 항일세력으로 인정하고 그를 북한의 지도자로 육성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은커녕 분단의 시발이었고, 분단에는 미국과 소련이 다 같이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남한으로 진주한 미군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음에도 미국은 일제 항복과 함께 미군을 한반도에 진주시켜서 일본군은 미군이 올 때까지 무장해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함으로써 한국인 스스로 일제에 대해 독자적이고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 36년간 수탈과 억압의 대명사 조선총독부 건물 국기 게양대에 여전히 일장기가 걸려 있게 하고, 미군 진주 후 조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9일에 가서야 일장기를 내리게 한 것이 상징한다. 그것도 일장기 대신 게양된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군을 해방군이라고 환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을 뿐이다. 이 내용은 맥아더 포고문 제1호(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서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戰捷軍은 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에 분명히 명시돼 있다.
주한 미군 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 오키나와 주둔 미 육군 제24군단 사령관이었던 그는 한국사정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이 진주해왔을 뿐만 아니라 왜곡된 인식까지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미 군정청의 최고 책임자가 된 하지는 "조선인들은 일본놈들과 마찬가지로 교활한 종자"(The Koreans are the same breed of cats as the Japs)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아시아 정세는 물론, 한국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이런 자가 미 군정청의 책임자를 맡았으니 해방된 한국인이 아니라 침략자인 일제와 협력하는 군정을 편 것이다. 그가 중국에서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더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로 기용해 그저 군정을 유지시키는데 급급해 했을 뿐이다. 미군정 통치기간 중에 그가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임시정부와 국내 정치세력을 악의적으로 배제한 것은 우리가 친일파를 청산할 기회를 놓치게 된 주요 배경이 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지는 친일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는데 멍석을 깔아 준 것이다.
북한으로 진주해온 소련 극동군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당시 소련군은 삼성이 우리의 대장에 해당됐다.) 그는 김일성의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김일성이 북한 정권내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외에 김일성의 후견인으로는 또 한 사람, 쉬티코프라는 소련군사고문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김일성의 남침준비를 도왔으며, 6.25전쟁 시에도 스탈린의 지시를 수행하면서 배후에서 김일성을 움직인 인물이었다. 나중에 지나치게 김일성을 비호한다는 죄명으로 스탈린에게 철직당했지만, 북한의 현대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총독부는 항복 선언 전에 패전 후 국내 일본인의 안전과 정치범 석방 등을 협상하기 위해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등과 접촉했지만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 중 여운형과 안재홍이 중심이 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일제 패망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이었다. 제주도에는 건준이 1945년 9월 10일에 결성됐다. 그러나 제주도 건준은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22일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던 날 해체됐다.
미국은 늘 현지의 입장이나 처지를 보고 정책을 펴는 게 아니라 세계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자국의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 이익의 최대치만 고려할 뿐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당시는 특히 그랬었다.
4.3사건 진압은 군대와 경찰이 합동으로, 혹은 단독으로 맡았다. 그래서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자 국방부와 경찰청도 2019년 4월 3일 4.3사건시 희생된 제주도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애도했다. 사건 발생 후 무려 71년만이었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서나 각종 기록에 거의 명기되지 않았다. 즉 환언하면 4.3사건의 진압 세력의 최고 책임자가 규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4.3사건에서 오랫동안 최대의 쟁점이 돼온 문제가 바로 누가 이 사건을 일으켰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기에는 좌익세력인 남노당, 남노당의 사주를 받은 일부 제주도민들과 공무원들, 순수한 제주도민의 민간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 때문에 좌익들로만 일으킨 사건도 아니었고, 민간들로만 일으킨 사건도 아니었던 데다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군경의 토벌대도 깊이 관여돼 있었던 점이 그동안 이 사건을 정의하고 명명하기가 가장 곤란했던 이유였다.
4.3사건은 제주도민들이 5.10선거도 치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압을 위해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순천 지역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파견을 거부한 이른바 여순사건이 일어나게 된 영향까지 미쳤다.
제주4.3사건의 교훈을 통해 외세가 얼마나 큰 해악을 미치고 역사발전에 장애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특히,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도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지 음지와 양지를 동시에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을 피해 한라산 산중의 근거지로 들어간 저항 세력들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까지도 저항했다.
6.25전쟁과 제주4.3의 관련성에 대해선 앞으로 더 많이 연구가 돼야 할 것이다.
1985년 7월 내가 최초로 떠난 해외여행 중 일본 오사카에서 가슴 뭉클하게 본 것이 바로 이쿠노쿠(生野區)의 쯔루하시(鶴橋) 시장에 장사를 하면서 살고 있던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이었다. 그때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문제의식이 없어 그들이 왜 그렇게 많이 집단적으로 그곳에 살고 있었는지 자세하게는 몰랐었다. 훗날 그 배경을 알고 나니 그들의 애환이 새삼 가슴 짠하게 다가왔었다.
비슷한 시기 대만에서도 4.3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47년 2월 28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대만인들은 이를 '2.28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사건은 자주 비교돼오고 있다. 2.28사건 역시 제주도민들처럼 오랫 동안 장개석의 독재 정부 시절 대만인들의 응어리가 맺혀 있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대만의 야당인 민진당이 국가권력을 잡고 민주화가 되면서 해원이 된 사건이다. 나는 과거 10년 이상의 긴 대만 체류 시절 2.28사건기념관을 관람하기도 하고, 이 사건 관련 자료들을 많이 수집해놓았다. 나중에 내가 수집해놓은 많은 사진자료들과 여타 문헌자료들을 정리하게 되면 2.28사건에 대해선 심층적으로 소개할 일이 있을 것이다.
사진에서 비행접시 같이 생긴 푸른 색 조형물이 제주도 말로 공동체적 만남과 회원의 신목을 동시에 상징한다는 퐁낭
기념관 앞에 멀대 같이 선 필자

 

전시내용들 중 대만 2.28사건의 발발 원인, 일제의 "무조건항복" 여부 등등 몇몇 잘못 설명된 내용과 사실오류들이 몇 가지 눈에 띄기에 전시장을 다 둘러본 뒤 기념관의 담당 직원에게 오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수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직원은 수정하겠다고 했다. 그것들은 옥에 티였을 뿐, 4.3기념관이 이룬 성취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선 참고용으로 본인의 기사를 아래에 첨부해놨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350977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 중의 하나인 제주4.3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사망자들을 애도함과 동시에 사건의 진상과 국가의 인정 및 평가와 보상까지 이끌어낸 제주도민들의 각고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2021. 2. 26. 05:1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